# 70
방송국 작가의 간절한 부탁에 태범은 잠시 고민의 시간을 가졌다.
회계사라는 직업을 가지고 회계법인에 속해있기에 방송 출연은 본인뿐만 아니라 회사에까지 영향을 줄 수 있었다.
혹시나 방송이 잘 못 나가 욕을 먹었을 때 본인만 먹으면 상관없지만 회사에 악영향을 줄까 걱정된 것이다.
그렇게 태범은 방송 출연 제의에 대한 모든 이야기를 회사에 전했고, 다행이도 태범의 능력을 좋게 본 회사에서 방송 출연을 흔쾌히 허락했다.
대신 회사의 당부가 있었다.
TV에서 최대한 회계사로서 품위를 키라는 것과 회사 이미지를 높일 수 있는 모습을 보여주면 좋겠다는 것이다.
자칫하다가는 본업에 집중하지 않고 딴 짓 하는 걸로 보여 질 수 있으니 말이다.
태범은 아무 염려 말라며 회사에 전했고 ‘세상에 신기한 일이’에 방송 출연하기로 결정했다.
* * *
태범의 출근 시간에 맞춰 메인PD와 작가가 태범의 회사 앞에서 만남을 기다리고 있었다.
겨우 태범을 설득해 만들어낸 출연 기회였고 자존심을 내려놓든 한이 있어도 태범에게 맞춰 녹화를 진행할 계획이었다.
“여기입니다!”
태범이 회사에서 나오자 PD는 소리를 지르며 손을 흔들었다.
“안녕하세요. 이한욱 PD입니다. 그리고 이쪽은 하나윤 작가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강태범입니다.”
PD는 방끗 미소를 지으며 태범의 손을 쥐며 인사를 건넸다.
얼마나 기다렸는지, PD의 손은 차디찬 얼음장이 되어있었다.
“저기 앞에 커피숍에 가서 이야기할까요?”
겨울 칼바람은 옷을 뚫고 피부에 와닿았다. 태범은 손을 비비며 회사 앞에 있는 커피숍을 가리키며 말했다.
“네, 회계사님 편안대로 하시죠.”
태범과 PD, 작가는 추위를 피해 커피숍에 들어와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각자 마실 커피를 주문하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회계사님, 벽화 잘 봤습니다. 대단하시던데요.”
“직접 보셨어요?”
“네, 얼마 전에 복지관에 찾아가서 직접 보고 왔거든요. 확실히 직접 두 눈으로 보니 사진과 다르더라고요. 제가 더 감동받았다니까요.”
“맞아요. 전 무슨 미술관에 온 줄 알았어요.”
PD는 두 손을 공중에 휘저으며 놀란 감정을 표현했고 작가 역시 옆에서 PD의 말에 호응을 해주며 태범의 능력을 띄워주고 있었다.
이는 정말 벽화에 감동을 받아 그런 것도 있지만 태범을 꼭 방송에 출연시키기 위한 유혹의 몸짓이기도 했다.
“근데 그게 저 혼자서 그린 게 아니에요. 봉사 활동 하시는 분들하고 같이 그린 거죠.”
제작진의 과한 칭찬에 태범은 손사래를 치며 말했다.
“네, 저도 그렇게 알고 있는데, 대부분 회계사님의 손에서 나왔다고 들었습니다. 다들 그렇게 인정하시던데요?”
“꼭 제가 다 했다고는 할 수 없죠. 다들 열심히 그렸거든요.”
“역시 예술에 뛰어난 분이 겸손하시고 예의까지 바르시네요.”
PD의 말에 태범은 아무런 대답 없이 커피 한 모금을 홀짝 마셨다.
“그럼 제가 방송에서 뭘 보여드리면 되는 거죠? 이미 벽화는 그려져 있는데…….”
“저희가 일단 SNS에서 사람들이 관심 있어 하는 벽화를 위주로 촬영에 들어갈 거예요. 그게 어떻게 그려졌고 뭐 이런저런 스토리를 넣으면서 그럴싸하게 만들어야죠.”
“별 스토리는 없을 텐데요. 그냥 봉사 활동 가서 벽에 그림을 그린 것밖에는 없어요.”
“괜찮아요. 저희는 평범한 이야기도 흥미롭게 바꿀 수 있는 사람들이거든요.”
PD는 본인의 능력에 자신감을 비쳤다.
분명한 건 이들은 스토리텔링의 달인들이었다.
사실 소재만 보면 대부분 시시하고 재미없는 것들이지만 그 안에 이야기를 집어넣고 감동과 재미를 넣음으로써 시청자들의 마음을 붙잡아 둘 수 있던 것이다.
‘스캐너 이야기를 해주면 완전 기절하겠지?’
태범은 속으로 피식 웃으며 재밌는 상상을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스토리가 없는 것도 아니다. 그림 실력의 원천은 스캐너에서 나왔기 때문에 스캐너를 얻었던 사연이 태범에게 최고의 스토리였다.
하지만 입 밖으로 절대 발설할 수 없는 태범만의 특급 비밀 스토리였다.
“회계사님 혹시 평소에 그려두신 그림 같은 거 없으세요?”
작가가 태범에게 물었다.
“그림이야 많죠. 근데 그게 벽화처럼 퀼리티가 뛰어나다고 할 수는 없는 그림이라, 방송에 내보낼 만한 게 아닐 거예요.”
“그래도 이 정도 벽화 그릴 실력이면 평소에 그린 그림들도 대단하실 것 같은데요?”
PD와 작가는 태범에게 또 다른 작품에 기대하고 있는 것 같았다.
물론 집에는 많은 작품들이 있었지만, 사실 눈에 띌만한 건 얼마 없었다.
태범이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술 능력을 얻은 지가 2달쯤 됐으니, 그 짧은 시간 동안 여러 작품을 만들어 낼 시간은 없었으니 말이다.
“그림을 어디서 배우신 건 아니시죠?”
PD가 질문을 건넸다.
“네, 그냥 취미로 독학한 거예요.”
“하하. 딱 좋아요. 오히려 어디서 배웠다기보다 독학해서 그리는 게 사람들에게 신비감을 주거든요. 사실 독학으로 이 정도까지 그린다는 게 쉬운 일이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죠.”
“그런 면에서 보면 회계사님은 저희 프로그램에 출연하는데 최적화 되신 분인 것 같아요. 사람들의 이목을 끌만한 직업을 가지셨고 직업과 어울리지 않는 의외의 능력에다가 독학으로 하셨다니 모든 게 이 프로그램하고 맞네요.”
“생각하신 대로만 잘 됐으면 좋겠네요.”
“그럼 시간 잡고 주말이나 해서 촬영에 들어가죠. 그 전에 복지회관에 있는 벽화는 저희가 따로 촬영해둘 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혹시 촬영하다 바로 불편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주시고 회계사님 편의에 맞춰 촬영을 진행하도록 하겠습니다.”
“알겠습니다.”
* * *
실제로 방송에서 볼 때는 자연스럽게 완전 리얼리티로 촬영되는 것 같지만 어느 정도의 짜인 대본과 설정이 존재했다.
카메라에 담기는 사람들은 애초에 갑작스럽게 출연될 일은 없는 것이고 출연 가능 여부와 함께 정해진 대본과 설정을 공유하고 나서야 카메라 앞에 설 수 있게 되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 촬영에서는 예고를 안 하고 불시에 찾아간 것처럼 PD는 복지관에 찾아가 그곳의 노인과 원장을 인터뷰했다.
“여기에 신기한 벽이 있다는데 정말인가요?”
“네, 아주 신기한 벽이 있습니다. 벽이 살아서 눈앞에 움직이는데 보시면 깜짝 놀라실 겁니다.”
인터뷰를 하는 노인은 과장된 표정과 말로 기대감을 주고 있다.
이 또한 시청자들의 기대감을 높이기 위한 짜인 대본이었다.
“살아 움직인다고요?”
“네, 따라와 보세요.”
카메라는 노인을 따라 움직이며 벽화가 그려진 곳으로 다가갔다.
“자 보세요. 벽화가 살아 있죠?”
노인의 손짓에 카메라 렌즈는 복지 회관 내에 있는 벽화 쪽으로 초점을 맞췄다.
“와…… 이게 뭐에요?”
PD는 벽화를 처음 본 척 눈을 크게 뜨며 최대한 놀란 표정을 지었다.
물론 촬영을 위해 인위적으로 지은 표정이었지만 벽화를 본 PD의 마음속에 어느 정도는 진심이 담겨있었다.
“이야! 벽속에 자연이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습니까?”
노인은 벽화를 쓰다듬으며 감탄 섞인 목소리로 말했다.
* * *
[강태범 님의 소유 능력]
[레오나르도 다빈치 능력]-미술 감각(70%)-창의성(30%)
[워렌버핏 능력]-시장 통찰력(100%)-기업 분석력(100%)-도전 정신(100%)
[폰 노이만 능력]-수리 이해력(100%)-언어 이해력(100%)-암기력(100%)
[이소룡 능력]-힘(100%)-유연성(100%)
이번 촬영을 위해 태범은 다빈치의 미술 감각에 집중 투자하며 능력을 한껏 끌어올렸다.
그리고 이번 주말 세상에 신기한 일이의 촬영은 태범의 집안에서 이뤄졌다.
태범은 집안에서 본인의 그림 역사를 소개하며 어떻게 해서 지금의 그림 실력을 갖췄는지 보여주는 시간이었다.
그리고 직접 그림 그리는 모습을 보여줌으로써 마무리를 짓기로 했다.
“차 한 잔들 하고 하세요.”
어머니는 제작진들에게 따뜻한 홍차를 한잔 씩 건네줬다.
어머니는 평소 하지 않은 화장을 하고 있었다.
입술은 쥐 잡아 먹은 것처럼 빨갛고 얼굴은 하얗게 분칠이 되어있어 있었다.
아마도 촬영이 온다고 평소보다 화장에 한껏 힘을 준 것으로 보였다.
“가족 분들은 집에 다 계신 거예요?”
“집에 어머니밖에 없으세요. 아버지는 아직 퇴근을 안 하신 거 같고 제 동생은 방송에 나오고 싶지 않다고 하네요. 상관없죠?”
“아. 그래요. 가족이 잡히면 더 재밌는 장면이 나오긴 하는데 안 된다면 어쩔 수 없죠.”
동생 태인이는 TV에 나오는 게 쪽팔리다며 촬영을 거부했고 잠시 집을 떠나 친구 집에 가있었다.
태인이의 마음이 이해는 됐다. TV에 나오면 한동안 친구들 입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오르락내리락 할 테니 말이다.
그래도 평생 한번 TV에 나올까 말까 할 텐데 같이 나와 줬으면 하는 아쉬운 감도 있었다.
“먼저 회계사님이 그리신 작품부터 촬영에 들어갈게요. 그냥 평소에 그렸던 것들 소개해주시면 되요.”
“네, 알겠습니다.”
태범은 방 안에 있는 그림들을 소개하기 시작했다.
일을 마치고 심심하면 취미로 그렸던 작품들이었다. 캔버스 위에 그려진 그림도 있고 노트나 A4용지 위에 그려진 그림들도 있었다.
그림에는 다양한 수준을 가지고 있었다.
다빈치의 능력을 얻고 초반에 그린 허접한 그림부터 시작해, 최근에 그린 예술적인 그림까지 마치 태범의 미술 역사를 보는 듯 했다.
“이건 언제 그렸던 작품인가요?”
PD는 태범이 초창기에 그렸던 작품을 가리키며 말했다.
다빈치의 능력을 얻자마자 A4용지 위에 그렸던 사람의 모습이다.
“두 달 전쯤에 그렸습니다.”
“두 달 전이요?”
“네, 두 달 쯤 됐을 거예요.”
그림 좀 그린다는 어린아이가 그릴 법한 실력이었다.
PD는 당연히 태범이 어릴 적 그렸을 거라 생각했지만 두 달 전이라니 너무도 동떨어진 그림실력에 당황해 했다.
“장난으로 그리셨나 봐요?”
“이 당시에는 나름 열심히 그렸던 거예요. 하하”
“아…….”
태범의 답변에 PD는 말을 잇지 못했다.
한 눈에 봐도 허접해 보이는 그림을 열심히 그렸다니 말이다.
하지만 당황도 잠시 PD는 깨달음을 얻은 듯 눈을 번쩍 뜨며 말했다.
“아. 이게 요즘 유행하는 현대 예술의 기법을 따라 그리셨나 보네요. 자세히 보니까 인체의 아름다운 굴곡이 느껴지는 것 같네요.”
유명해지면 똥을 싸도 박수를 쳐준다는 말이 있듯이 태범이 그린 초창기 그림을 제작진들은 현대 예술의 한 부분으로 보고 있었다.
현대예술은 점 하나 찍어 놓고 수십억을 받기도 하니 의미만 부여한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그림이 될 수 있었다.
“직접 그림 그리는 것 보여주실 수 있으세요?”
“네, 보여드리겠습니다.”
태범은 미리 준비한 캔버스 앞에 앉아 붓을 잡았다.
그리고 잠깐 고민을 하는가 싶더니 손에 쥔 붓이 망설임 없이 캔버스 위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카메라맨과 작가, PD모두 오오! 거리며 태범의 예술 활동을 지켜봤다.
이번 작품의 이름은 ‘천사와 악마의 만찬’ 이었다.
항상 천사와 악마는 극과 극으로 대립할 거라는 편견을 버리고, 같이 식사를 하는 장면을 그리는 것이다.
하얀 날개를 가진 천사, 검고 뿔이 달린 악마. 태범은 그렇게 뻔한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천사는 항상 하얗고 빛을 나타내며 악마는 검고 어둠을 나타내곤 했다. 하지만 이는 사람들이 정해놓은 편견과 틀에 갇힌 이미지일 뿐이었다.
어둠 역시 우리에게 필요한 존재이며 우리는 인생의 대부분을 눈을 감고 어둠과 함께 살아간다.
태범에게 어둠은 악을 상징하는 색이 아니었다.
이렇게 태범의 창의성은 기존의 틀을 벗어나 새로운 캐릭터들의 모습을 그려내며, 선과 악의 오묘함을 한 장의 캔버스에 담고 있었다.
“PD님 어떠세요? 괜찮나요?”
시간이 지나고 감탄사를 연발하던 사람들은 입을 다문 채 조용히 태범의 그림을 바라봤다.
어느샌가 모두 태범의 그림에 빠져든 것이었다.
아무런 반응이 없는 제작진에게 혹시나 문제가 없는지 몇 번이나 물었다.
“PD님, 제가 이거 말고 더 신기한 것 보여드릴까요?“
“네?”
태범이 그림을 그리다 갑자기 붓을 놓더니, 카메라 뒤에 있던 PD에게 다가와 물었다.
그리고 뜬금없이 나온 태범의 말에 PD는 어리둥절한 표정을 짓고 있다.
“제가 사실 좋은 아이디어가 있거든요. 솔직히 아무리 그림을 잘 그린다고 해도 이정도로는 사람들의 눈길을 사기에는 충분치 않은 것 같은데요.”
“아니에요.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계세요. 방금 그린 그림 보고 깜짝 놀랐습니다. 분명 많은 사람들이 회계사님의 작품을 보고 놀라워할 겁니다.”
태범의 돌발적인 행동에 PD는 당황스러워하면서 혹시나 마음이 바뀐 건 아닐까 조마조마 하며 태범의 그림을 칭찬했다.
“이거만 보여주기에는 뭔가 아쉬워서요. 그림이야 잘 그리는 사람은 많이 있잖아요?”
“에이. 그래도 회계사님만큼 잘 그리는 사람은 얼마 없죠.”
“아니요. 사람들의 이목을 끌기에는 부족한 것 같아요. 제가 강한 거 하나 보여드릴게요.”
태범은 어느새 방송 제작진들에 동화되어 방송의 흥행을 신경 쓰고 있었다.
“어떤 거 말씀이신지…….”
“혹시 방송사 헬기 좀 빌릴 수 있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