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9
기사를 클릭하니 태범이 벽화를 그리는 사진이 대문짝만하게 나타났고 그 밑에는 상정회계법인 강태범 회계사라고 실명이 떠 있었다.
아마도 회사에서 기자에게 이름을 알려준 거로 보였다.
‘다 내 칭찬이잖아.’
댓글에는 손발이 오글거릴 정도로 태범을 칭찬하고 있었다.
회계사라는 타이틀과 더해져 예술가의 이미지까지 사람들은 태범을 만능인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었다.
지금까지 스캐너로 얻은 능력만 해도 사실상 인간이 모든 생애에 얻을 수 없을 정도의 다양한 능력이니 말이다.
평생을 거쳐 쌓아 올린 인물의 능력을 태범은 한순간에 얻고 있으니 사실상 만능인으로 불려도 이상할 것 없었다.
이제는 만능인으로서 본인에 대해 적응하고 있었다.
과거와는 다르게 갑자기 늘어난 칭찬과 관심에 처음에는 부끄럽고 쑥스러웠지만 이제는 자신감 있게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래, 태범 씨. 가만 보면 못 하는 게 없는 것 같아.”
아직 같이 일한 지 며칠밖에 안 됐지만 장혁 이사는 태범의 능력을 높이 보고 있었다.
신입 회계사가 혼자서 영월식품의 분식 회계를 발견, 신고한 것도 엄청난 일이었지만 지금까지 재무 자문 본부에 투입되어 일하는 걸 봐도 일 처리가 아주 깔끔했기 때문이다.
장혁 이사가 지금껏 사회 생활 하면서 이렇게 능력 있는 인물은 처음 봐왔고 분명히 남들과 다른 비범함이 태범에게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감사합니다.”
태범은 자연스럽게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아니, 감시하긴 뭘, 태범 씨 평소에도 이런 말 많이 들을 것 같은데 다 본인이 잘해서 그런 거지.”
“아니에요. 저도 아직 부족한 게 많아요.”
“태범 씨가 부족한 게 많으면 나머지는 다 죽게? 허허.”
태범은 장혁 이사의 말에 크게 반박할 수 없었다. 그저 최후의 수단인 미소를 지으며 웃어넘길 뿐이었다.
“태범 씨, 능력이면 이번 원대 그룹 프로젝트도 잘 소화시키겠지. 열심히 해 봐.”
장혁 이사는 격려와 함께 태범의 어깨를 토닥이며 본인의 자리로 돌아갔다.
* * *
TV프로그램 세상에 신기한 일이 회의실
“하. 새로운 이야기가 필요해. 새로운 이야기!”
SBO 방송국의 세상의 신기한 일이 회의실에서 PD와 작가는 소재 고민으로 머리를 감싸 매고 있었다.
특히 프로그램을 책임지는 PD 입장에서 매주 새로운 소재를 방송해야 한다는 중압감에 실렸고 오늘 역시 머리를 부여잡고 고민 중에 있었다.
“이쯤에서 뭔가 사람들의 눈길을 확 끌어당길 만 한 내용이 나와하는데…….”
PD는 회의실 테이블을 손으로 두들기며 작가들에게 무언의 압박을 보냈다.
세상에 신기한 일이라는 10년 이상 장수하고 있는 프로그램이었다.
하지만 기간이 길어질수록 소재는 점점 고갈되고 그러다가 비슷한 소재를 매번 돌리자니 시청자로 하여금 지겨워질 수 있었다.
게다가 시청률 하락으로 윗선의 눈치까지 봐야 할 지경까지 오게 되었다. 아무리 장수 프로그램이라 할지라도 시청률 앞에서는 얄짤없었다.
그렇기 때문에 가끔은 이슈를 위해 빵 하고 터트릴 만한 소재가 필요했다.
매일은 아니더라도 가끔은 시청자들에게 잊힐 때쯤 뭔가를 강하게 터트려서 프로그램에 다시 생명줄을 연장시킬 수 있다.
이제는 벼락 끝에 놓인 프로그램에 제작진들은 방도를 찾아야만 했다.
그리고 지금 PD는 프로그램을 살릴만한 소재를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다들 뭐 없어?”
“제보는 많이 들어오긴 하는데…… 딱히 쓸만한 게 없네요.”
PD의 질문에 메인 작가는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매주 회의실에서 보는 풍경이었다.
PD는 물어보고 작가들은 아쉬운 표정을 지으며 소재가 없는 걸 토로했다.
“막내야, 뭐 없어?”
결국 마지막 질문은 막내 작가에게 돌아왔다.
어쨌든 방송은 만들어야 하고, 죽이 됐든 밥이 됐든 소재는 무조건 필요했다.
결국 마지막 선택권과 책임은 막내에게 돌아갔다.
“주인은 기다리는 강아지 어때요? 제보가 들어왔는데 떠돌이 개가 매일 산책로에서 누군가를 기다 린데요. 아마도 주인일 거라고…….”
막내 작가는 자신 없는 목소리로 말했다.
막내 작가 본인도 별 확신이 드는 소재는 아니었고 메인 PD가 질문을 하니 어쩔 수 없이 눈치껏 대답한 것뿐이었다.
“하. 그런 것 옆집 동물 프로그램에 넘겨줘.”
역시 PD의 대답은 작가의 예상대로였다.
어디선가 본 듯한 소재들 아무리 신기한 일들이 있다고 한들 세상 돌아가는 건 비슷했고 소재도 비슷했다.
“다들 아무것도 없는 거지? 하…… 참 답답하다.”
PD의 한마디에 회의실의 분위기는 살얼음판을 걷는 느낌이 돼버렸다.
PD도 사람인지라 이런 분위기보다는 다들 웃으며 방송 제작에 임하고 싶지만 지금은 긴장을 가지고 있지 않으면 안 됐다.
죽기 아니면 살기, 프로그램을 위해서라면 PD도 어쩔 수 없었다.
“PD님, 이 사람 어때요?”
어색한 분위기에 눈치를 보고 있는 막내 작가가 다시 한번 용기를 냈다.
막내 작가는 스마트 폰으로 뭔가를 찾더니 화면을 돌려 PD에게 보여주었다.
“뭔데?”
“요즘 SNS에 뜨는 사람인데 복지회관에 봉사 활동 하러 갔다가 이걸 그렸데요.”
프로그램 특성상 신기한 일을 찾아야 하기 때문에 인터넷이나 SNS를 통해 정보를 접하고 소재를 구성하는 경우가 많기 때문에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게 뭐야? 정말 여기가 복지회관이라고?”
“신기하죠. 회계사라고 하는데. 이 정도 그림 솜씨면 엄청 대단한 거 아니에요?”
스마트 폰 화면에 나타난 건 기사에 나타난 여러 장의 사진이었다.
[상정회계법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일하고 있어요.]
다빈치라니 기사 제목 센스에 PD는 비웃으려 했지만 기사 내용을 보니 기사 제목이 이해가 갔다.
PD는 아예 막내 작가의 스마트 폰을 빼앗아 들더니, 얼굴을 가까이 대고 자세히 확인했다.
“와…… 이걸 어떻게 그랬대.”
PD는 작가가 보여준 그림을 확인하고는 놀라워했다.
노인 복지 회관에 그려진 벽화라고 말하기에는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이었다.
아름다운 나비가 똥 위에 앉아있는 느낌.
이 그림은 복지 회관이 아닌 루브르 박물관 쯤에나 있어야할 그림으로 보였다.
이한욱 PD는 입을 제대로 다물지 못할 정도로 충격을 받았다.
“정말 이걸 회계사가 그렸다고? 전문 화가가 아니라?”
“네, 어때요?”
“이 그림 말고 다른 것도 있어?”
“아니요. 인터넷에 올라온 건 이것밖에 없어요. 이것도 뜬 지 얼마 안 된 거라서, 아직 이 사람의 작품정보는 많이 없는 것 같아요.”
“강태범? 이게 이 회계사 이름이라는 거지?”
“네.”
사진 밑에 조그마한 글씨로 ‘상정회계법인 강태범 회계사’라고 적혀있었다.
“그럼 여태까지 아무도 몰랐던 사람이라는 거네? 다른 언론이나 매체에 나온 건 없고?”
“네, 여기 기사에 밖에 없어요.”
“그래?”
드디어 이한욱 PD의 얼굴에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아직 세상에 크게 공개되지 않은 인물이 나타났으니 말이다.
무조건 선점해서 프로그램에 출연시켜야 한다. 이한욱 PD의 마음은 강태범에게 단단히 꽂힌 상태였다.
“회계사의 그림이라…… 딱 인데?”
이 정도 그림 솜씨에 SNS의 화제성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면 흥행은 확실했다.
이 프로그램만 10년 이상을 해온 PD의 감은 속일 수가 없었다.
“우리 방송에 섭외할 수 있는 거야?”
PD는 흥미 가득 한 눈으로 작가에게 물었다.
“아직 안 해봐서 잘 모르겠는데, 쉽지는 않을 것 같아요. 직업 특성상…….”
전문직의 사람을 주인공으로 소개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 직업과 관련 없는 소재다 보니, 아무래도 방송 출현을 꺼려하는 면이 있었다.
이 전편에 종이 접기로 로봇을 만드는 의사가 있었는데 전문직인 의사를 종이접기 소재로 섭외한다는 건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 기억을 떠올리자면 이번에도 쉽지 않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꼭 섭외시켜라. 진짜 꼭 섭외시켜야 해.”
섭외에 관해 작가들이 확신을 갖지 못하니 PD는 주먹을 불끈 쥐며 말했다.
“아…… 일단 연락은 해볼게요. 근데 아마도 안 될 것 같은데..”
“안 된 다는 생각부터 하지 마. 해보긴 해봤어?”
자신감 없어 하는 작가에게 PD는 반드시 섭외하라며 열의를 갖도록 했다.
“당장 강태범, 이 사람한테 연락해봐.”
* * *
원대 그룹 신사업 추진에 관한 자문 관련하여 고민이 많을 때였다.
같이 자문을 맡고 있는 선임 회계사들도 이번 가상 화폐 거래소 인수건 땜에 바삐 움직이고 있었다.
태범은 일이 끝나고 퇴근을 해서도, 집에서까지 생각을 멈출 수 없었다.
비록 몸은 집에 있지만 생각과 아이디어는 어딜 가나 떠오를 수 있기 때문에 항상 업무에 대해 고민을 가져야만 했다.
‘보안성…….’
가상 화폐 거래소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건 보안이다.
수많은 돈이 움직이는 거래소에서 만약 고객의 지갑이 털린다면 그때야말로 모든 게 무너질 테니 말이다.
태범은 재무적 접근을 넘어 기술적 접근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이는 회계사의 영역은 아니지만, 이제는 전문가 수준의 프로그래밍 실력은 갖춘 태범에게 프로그램 보안과 관련해서 한 번 생각해 볼 만 했다.
혹시나 인수 대상의 가상 화폐 거래소에 보안적인 문제가 발견이라도 된다면 가치 평가액이 낮아질 수도 있는 것이고 인수 가격도 낮출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될 수도 있었다.
태범은 자문을 맡긴 원대 그룹을 위해서 남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곳까지 다방면으로 검토하고 있었다.
따르릉.
열심히 생각에 빠져있던 중 전화벨이 울렸다.
‘어디서 온 거지?’
스마트 폰에는 낯선 번호가 찍혀있지만, 070 스팸 번호만 아니면 웬만하면 다 받는 편이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SBO ‘세상에 신기한 일이’팀 최한영 작가입니다. 강태범 씨 전화 맞으신가요?”
“세상에 신기한 일이요?”
태범이 역시 국민 프로그램에 가까운 ‘세상에 신기한 일이’를 모를 일은 없었다. 하지만 뜬금없이 방송국에서 전화가 오니, 다시 한번 확인했다.
“네, SBO TV프로그램 ‘세상에 신기한 일이’ 맞습니다.”
“방송국에서 무슨 일이시죠?”
태범의 머릿속에 가장 먼저 떠오른 게 영월식품 관련 분식 회계 사건이었다.
나름 사회적으로 이슈가 됐던 사건이었으니 혹시나 방송국에서 취재를 위해 연락을 한 건 아닌가 싶었다.
“저희가 기사를 보고 연락을 드렸는데요.”
“기사요?”
“네, 얼마 전에 노인 복지 회관에서 벽화 그리기 봉사 활동을 하셨잖아요?”
“아, 네.”
“그게 요즘 SNS에서 이슈더라고요. 그래서 그런데 저희 프로그램에 한 번 나와 주실 수 있으신지 여쭤보고 싶어서 연락드렸어요.”
태범은 순간 당황스러웠다.
세상에 신기한 일이라니 어렸을 적부터 자주 봐왔던 프로그램이었고 국민적인 프로그램에서 섭외가 들어왔다니 말이다.
“음…….”
작가의 권유에 태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재미있긴 할 것 같은데…….’
태범 역시 방송 출현을 긍정적으로 생각했다. 능력이 세상에 알려질수록 인생에 기회가 많아진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사에 다니고, 해야 할 일이 있는 입장에서 선뜻 받아들일 수는 없는 입장이었다.
“제가 지금 회사를 다니고 있거든요. 여러 가지 생각할 게 많아서 나가기 힘들 것 같네요.”
고민 끝에 태범은 작가에게 말했다.
“저희가 개인적인 업무에 지장이 안 가도록 해드릴게요. 스케줄도 모두 회계사님한테 맞춰드리고 불편한 거 있으시면 다 맞춰드릴 수 있어요.”
“죄송한데 방송 출현은 저 혼자 선택할 수 있는 부분이 아니거든요.”
“정말 부탁드려요. 사실 저희가 소재 찾는데 힘들거든요. SNS에서 회계사님 그림을 봤는데 딱! 저희 프로그램이랑 어울릴 것 같은 거예요. 분명히 방송 출현 하시면 그 정도 퀼리티의 그림을 보여주시면 좋은 반응 얻으실 거예요.”
태범이 거절하려는 뉘앙스를 보이자 작가라는 사람은 감정에 호소하듯 간절함을 내비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