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68화 (68/188)

# 68

다음날 일요일.

태범은 아침 일찍부터 택시를 타고 어제 왔던 복지 회관에 홀로 오게 되었다.

누가 시킨 것도 강제한 것도 아닌 본인 스스로 선택한 일이었다.

분명 어제 벽화를 마무리 짓고 봉사활동이 끝났지만 태범의 생각은 그게 아니었다.

아직 완성되지 않은 벽화를 두고 등을 돌릴 수가 없었다.

“진짜 오셨네요?”

태범의 등장에 복지관 원장이 놀란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막상 날이 오면 바뀌는 것이 사람 마음인지라 설마 일요일인데 오늘 태범이 올까 생각을 하고 있던 모양이다.

하지만 태범은 해가 뜨자마자, 부리나케 달려온 사람이었다.

“안녕하세요, 원장님.”

“오늘 일요일인데 쉬워야 하는 거 아니에요? 주말 하루 종일 일만 하시네. 허허.”

원장은 미소를 지으며 태범의 인사를 반갑게 받아줬다.

본인 쉬는 날까지 반납하고 자의적으로 이렇게 또 와주니, 당연히 고마워했다.

“벽화 용품은 어제 그대로 있죠?”

“네, 한 곳에 모아놨어요.”

태범은 복지관에 들어가자마자 벽화가 그려진 벽으로 향했다.

1초라도 지체하고 싶지 않았다. 지금 당장 붓을 들고 머릿속에 남아있는 예술적 욕망을 다 털어내 버리고 싶었다.

“저는 이대로도 충분한 것 같은데…….”

나이 지긋한 원장이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벽화를 바라봤다.

벽에 그려진 시골의 자연 풍경은 어르신들로 하여금 따뜻한 봄과 고향의 향수를 느끼게 하는 데는 충분했다.

하지만 태범은 여기서 만족하고 싶지 않았다.

그림으로써 특별함이 느껴지지 않았다.

분명 잘 그린 벽화이긴 하나, 디테일 면에서 개성적으로 느껴지는 아름다움이 보이지 않았다.

그저 솜씨 좋은 화가가 사진을 보고 똑같이 그린 것 같은 느낌일 날 뿐이었다.

쉽게 말하자면 공장에서 찍어낸 그림말이다.

“아침 식사하셨어요? 같이 식사하실래요?”

“저는 집에서 먹고 왔어요.”

“아, 그래요? 식사 빨리 하셨네.”

“제가 평소에 좀 일찍 일어나거든요.”

사실 거짓말이었다.

아침 식사는 무슨 태범은 눈을 뜨자마자 허겁지겁 세안만 하고 이곳으로 온 것이었다.

마치 소풍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와 같이 한시라도 빨리 벽화 앞에 와서 붓을 잡고 싶었다.

“전 그러면 마무리 작업하고 있을 테니까, 원장님은 가서 식사하세요. 저는 신경 안 쓰셔도 돼요.”

“그래도 봉사하러 오셨는데 있다가 간식이라도 가져다드릴게요.”

“네, 감사합니다.”

태범은 구석에 놓인 벽화 용품들을 꺼내 바닥에 펼치기 시작했다.

물감과 페인트를 섞어 자신이 원하는 색을 만들고 아주 작은 붓을 집어 들어 섬세한 붓 터치 작업에 들어갔다.

보통 사람들이라면 그냥 넘길법한 부분이지만 태범의 눈에는 반드시 고쳐야 할 오점들이 보였다.

쓱. 쓱.

거의 벽과 키스를 나눌 것처럼 얼굴을 벽에 가까이 들이대며 작은 부분 하나도 놓치지 않고 붓질을 하고 있었다.

조금만 더 집중하면 벽과 물아일체가 될 것만 같았다.

“점심 드시고 하세요.”

다시, 원장이 다가오더니 태범에게 식사를 권했다.

분명 방금 전 아침을 먹으라고 하지 않았나 태범은 호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11:30]

정말 벽과 물아일체를 한 모양이다.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작업하다 보니 어느새 시간은 벌써 점심을 가리키고 있었다.

마치 시간 여행을 한 기분이었다.

“저 그냥 빵만 먹고 할게요. 입맛이 없어서.”

“네? 밥을 드셔야죠. 그러다 몸 상해요.”

아까 전 원장이 태범에게 가져다준 간식, 빵과 우유.

하지만 손도 안 댄 채 여전히 바닥에 놓여있었고 태범은 그제야 빵과 우유가 눈에 들어왔다.

“괜찮아요. 평소에도 자주 거르고 하는데요. 일 할 때는 배를 비워두고 하는 게 편해요.”

“아니, 그래도 이렇게 봉사하러 와서 몸 상하면 자기만 손해에요. 같이 가서 식사해요.”

“정말 괜찮습니다. 빵이면 충분합니다.”

예의상 같이 식사를 하고 싶었지만 차마 벽화 앞에서 자리를 뜰 수만은 없었다.

예술적 욕망이었다.

시간은 한정되어있고 꼭 자신이 원하는 작품을 완성하고 싶은 예술적 욕망에 그 어느 것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알겠어요. 그러면 제가 드린 빵이라도 꼭 드세요.”

“네, 알겠습니다.”

태범은 원장이 놓고 간 크림빵을 한번 물고 우유를 벌컥벌컥 마셨다.

그리고 다시 붓을 손에 쥔 뒤 작업을 시작했다.

“오메, 젊은 총각이 그림을 거시기하게 잘 그리네.”

지나가던 할머니가 벽화를 보고는 손뼉을 치더니 감탄을 하고 있다.

그 누구도 이 벽화를 보자면 발걸음을 멈추게 만들었다.

미술을 따로 공부하지 않더라도 나이, 성별 상관없이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 할머니들도 벽화로 시선을 돌렸다.

“총각, 그림 선생님이야?”

“아뇨, 전 그냥 봉사 활동 하러 온 사람이에요.”

어느새 할머니는 자리를 잡고 태범의 작업 활동을 구경하고 있었다.

식사를 마치고 줄지어 오는 할머니, 할아버지들도 마찬가지로 어디서 의자를 가지고 오더니 삼삼오오 앉아 태범을 보고 있었다.

“그 뭐야. 피카소 저리가라구만! 대단해!”

한 백발의 할아버지가 태범에게 극찬을 했다.

소싯적 본인도 화가를 꿈꾸며 그림 좀 그렸다고 하면서 미술에 관한 자신의 지식을 늘어놓는데 태범은 말에 답하고, 그림을 그리느라 더욱 바빠졌다.

“우리 손자도 지금 인터넷으로 말이야. 왑툰인가? 옵툰인가 그리거든. 유명한 화가인데 혹시 ‘조덕’이라고 알아?”

“아뇨, 잘 모르겠는데요..”

“어쨌든 그거 하면 돈을 잘 번다고 하더라고 자네도 가서 돈 벌고 싶으면 옵툰 그려봐.”

“아…… 웹툰이요.”

“그래, 옵툰.”

태범의 등 뒤에서는 할아버지, 할머니들의 별의별 이야기가 쏟아져 나왔다.

복지관에 있는 노인들은 항상 같은 생활을 하기 때문에 새로운 걸 보고, 새로운 사람을 만나면 흥미롭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작품을 젊은 청년이 작업하고 있으니 지루한 일상 속에서 관심사기 딱 좋은 장면이었다.

“할아버지, 할머님들 봉사자분 집중하실 수 있게 다들 들어가 주세요. 오늘 혼자 시간 내서 와주신 분이라 이렇게 방해하시면 안 돼요.”

식사를 마치고 올라온 원장이 벽화 앞에서 자리를 잡고 있는 노인들을 보고는 말했다.

노인들이 태범에게 끊임없이 말을 거는데 혹시나 태범이 불편해할까 걱정한 것이다.

“전 괜찮으니까, 작업하는 거 구경하셔도 돼요.”

태범은 미소를 지으며 원장에게 아무렇지 않은 모습을 보여주었다.

오히려 자신의 작품을 보고 감탄과 칭찬을 건네주는 노인들에게 호응에 감사할 뿐이었다.

물론 말을 하면서 그림을 그리는 건 힘든 일이긴 하지만 그래도 긍정적인 호응이 있으니 작업을 하는데 있어 열의를 가져다주었다.

어르신들은 손자의 재롱잔치를 보는 듯 태범의 현란한 붓놀림에 즐거워하고 있었다.

시간이 흐르고 겨울의 해는 빠르게 져가고 있었다.

할머니, 할아버지들은 방과 작업 공간을 왔다 갔다 거리며 여전히 태범의 작업을 구경하고 있었다.

시간이 되고 태범도 슬슬 작업을 마무리하며 팔짱을 낀 채 마무리 점검에 나섰다.

혹시 아직 부족한 곳이 있을까 매의 눈으로 벽 끝에서 끝까지 하나하나 살펴봤다.

‘끝났다.’

이제야 태범의 마음이 안정되었다.

이 정도면 충분히 만족스러운 작품이다.

“와…… 확실히 다르긴 다르네…….”

태범이 작업을 마무리했다는 소식을 듣고는 원장이 1층으로 내려와 바뀐 벽화를 바라봤다.

시선은 벽에 고정된 채 입을 다물지 못하고 넋이 나간 사람처럼 벽화를 바라보고 있다.

“어때요? 확실히 괜찮아졌죠?”

“이런 게 여기에 있어도 되나요? 이거 미술관에 가야 할 것 같은데…….”

원장의 극찬과 함께 이를 구경하는 노인들마저 감탄을 이어가니 태범은 흐뭇했다.

벽화를 바라보는 이들의 만족스러운 반응과 벽화가 주는 아름다움이 합쳐져 쾌감으로 다가오는 짜릿한 순간이었다.

* * *

주말이 지나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태범은 회사로 출근을 했다.

이제 재무 자문 본부에 자리를 잡았으니 따로 현장을 나가는 일은 별로 없을 거로 보였다.

‘하 변수가 너무 많네.’

원대 그룹의 신사업 프로젝트로 가상 화폐 거래소에 대한 인수를 추진 중에 있었다.

거래소를 신규로 만들던가 아니면 기존의 거래소를 매입해서 사업을 추진할까 기로에 놓여있었는데 아마도 매입하는 쪽으로 가닥이 잡힌 듯했다.

그리고 태범은 매입 대상인 거래소의 가치를 평가해야만 했다.

거래소 측에서 대놓은 평가액이 적절한가를 판단하고 제시한 금액을 최소한으로 낮출 수 있는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결론적으로 태범의 고객인 원대 그룹이 원하는 건 인수할 대상의 평가금액을 낮춰 최소한의 금액으로 인수를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어제 가상 화폐 거래소 폐지 관련 법무부의 소식이 들려왔다.

이에 대해 거래소의 가치를 평가하는데 엄청난 변수로 적용되었고 태범이 작성해 놓은 평가서가 모두 뒤집어질 판이었다.

아무리 워렌버핏의 기업 분석력과 시창 통찰력 있더라 할지라도, 변수가 크게 작용하는 시장에는 예측을 하는데 어려움이 따랐다.

게다가 가상 화폐에 관해 정부 부서 간 말이 맞춰지지 않은 듯 서로 다른 이야기가 나오고 있었다.

한동안은 꽤 혼란스러운 일이 될 것 같았다.

“으…….”

태범이 책상에 앉아 머리를 쥐어짜며 고민에 빠져있던 찰나, 재무 자문 본부의 장혁 이사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태범 씨, 일 잘 안 풀려?”

“아. 그게 아니라 원대 그룹 건과 관련돼서 생각할 게 많아서요.”

“하하. 골치 아프지. 그거. 그건 그렇게 태범 씨 이름 기사에 올라온 것 알아?”

“네? 제 이름이요?”

“상정회계법인 봉사 활동 검색해봐. 태범 씨 그림 아주 잘 그렸던데?”

장혁 이사의 말에 태범은 바로 포털 사이트에 검색을 하기 시작했다.

검색 결과 주말에 했던 봉사 활동 사진이 인터넷 기사를 통해 전해지고 있었다.

역시나 남이 알아주기를 원했다는 듯, ‘상정회계법인’ 이라는 이름과 함께 임직원들이 열심히 연탄을 나르는 모습이 담겨있었다.

가관인 건 대표님이었다.

얼굴에 연탄재를 잔뜩 묻히고는 이 세상에서 가장 힘든 표정을 지으며 연탄을 나르고 있었다.

마치 표심을 얻기 위해 정치쇼를 하듯 말이다.

또 다른 기사를 살펴봤다.

‘어, 내 사진이네.’

벽화 봉사를 했던 노인 복지 회관의 사진도 있었다.

작업에 몰두하느라 못 느꼈지만 주변에서 봉사 활동을 하는 장면들을 찍었던 것 같다.

가장 웃긴 건 효준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된 게 찍힌 사진마다, 태범의 옆을 찹쌀떡처럼 붙어 다니며 도구를 전달해주는 모습이었다.

보조로써 충분히 역할을 했다는 게 보였다.

‘오 댓글이 꽤 달렸네.’

사실 일반 사기업에서 봉사 활동 나간 기사 정도는 댓글이 거의 없는데 이상하게도 많은 댓글의 숫자가 나타나고 있었다.

태범은 댓글을 확인했다.

└ 아니, 저게 봉사하러 가서 그린 그림이야? 말도 안 돼.

└ 봉사하라고 했더니 예술 작품을 그려 놓고 있네.

└ 헐. 저기 어디인가요? 직접 눈으로 확인해보고 싶네요.

분명 상정회계법인 봉사 활동이라는 타이틀을 가지고 있지만 댓글의 내용은 온통 복지 회관에 있는 벽화 이야기였다.

지금 와서 드는 생각이지만 봉사 활동 하러 나가서 그린 그림치고는 과한 느낌이 없지 않아 있었다.

마치 유럽의 대성당에 있는 벽화와 같은 느낌을 가지고 있으니 말이다.

“태범 씨, 그 기사 말고 다른 기사 들어가 봐.”

“다른 기사요?”

“응, 저 밑에 있는 거.”

[상정회계법인에 레오나르도 다빈치가 일하고 있어요.]

장혁이 가리킨 기사는 희한한 제목을 가지고 있었다.

그리고 태범은 저 제목의 다빈치가 본인을 지칭하고 있다는 걸 예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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