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7
태범이 쥐고 있는 붓은 전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벽 위를 움직이고 있다.
자칫 망설임 없는 붓놀림에 대충 그리는 것으로 오해할 수 있으나 태범의 자신감 있는 표정과 결점 없는 붓질을 보자니 그런 의심과 오해는 절대 있을 수가 없었다.
아직 몇 번의 붓질을 했을 뿐이었지만 이를 보던 여성은 입을 다문 채 고개를 끄덕였다.
“잘 하시네요. 그럼 지금처럼만 해주세요.”
태범의 손놀림을 보고는 어느 정도 한다 싶어 여성은 한마디만 한 채 다시 자기 자리로 돌아갔다.
하지만 태범에게는 이제 시작에 불과했다.
사실 효준이 칠한 해바라기 위에 살짝만 변화만 줘도 아름다운 벽화로서 기능을 하겠지만 막상 붓을 손에 쥐니 대충하고 싶지 않았다.
태범의 머릿속에는 이미 완벽한 벽화의 이미지가 떠올랐고 이대로 앞에 놓인 벽에 완성을 하고 싶었다.
“크크…… 고맙다. 태범아.”
효준은 실없이 웃으며 태범에게 고마워했다.
연탄 피하려다가 자칫 이곳에서 민폐만 끼치고 망신당할 뻔한 자신을 모습에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고, 본인이 망칠 뻔한 그림을 태범이 살려 줬으니 고맙기도 했다.
방금 전 까지만 해도 어린이 만화책에 나올 법한 해바라기였지만 지금은 명암이 생겨 실제 살아있는 해바라기처럼 느껴지고 있었다.
“형, 아직 시작도 안 했어.”
태범은 붓을 페인트 통 속에 톡톡 찍으며 말했다.
“뭐?”
“아직 완성 안 된 거야. 색을 좀 더 입혀야 해”
“다 된 것 같은데?”
“아니, 해바라기가 재미없어. 실제랑 너무 똑같아.”
효준은 태범이 무슨 헛소리를 하는가 싶었다.
당연히 실제와 똑같이 그리면 그게 잘 그린 그림인데 태범은 불만족스런 표정을 짓고 있으니 말이다.
“그게 무슨 소리야. 실제랑 똑같이 그리면 잘 그린 거 아니야?”
태범의 말에 어이없다는 표정으로 효준이 말했다.
“맞지. 잘 그린 거지.”
“근데 왜 그래? 다 완성된 거 아니야?”
“형, 생각해봐. 벽화에 실제랑 똑같이 그림을 그릴 바에는 사진을 걸어 놓는지 낫지 않겠어? 인터넷에서 ‘아름다운 자연 풍경’ 이라고 치면 이미지가 엄청나게 나올 텐데 똑같이 그릴 바에 사진을 걸어 놓는 게 낫지.”
실제 해바라기를 보고 싶으면 해바라기 사진을 걸어놓던가 벽 앞에 화분을 놓으면 될 일이지 굳이 그림을 그릴 필요는 없었다.
사진이 없던 시절 그림은 사진의 역할을 했지만 이제는 아니다.
이제 그림은 사진이 주는 그 이상을 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실제가 가져다주지 못하는 사람의 예술과 상상력이 더해지는 그런 것.
태범은 다빈치의 능력 탓에 예술 감각이 풍부해진 상황이었다.
태범의 말에 효준은 입이 뾰족 튀어나온 채 고민을 하는 듯 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뭐…… 여기서 예술 작품을 만들 것도 아닌데, 대충하지 그래?”
효준의 말이 틀린 것도 아니다.
어디 미술관에 전시할 그림을 그리는 것도 아니고 봉사 활동 나와서 그저 노인 복지관 한쪽 벽면에 벽화를 그리는 것뿐인데 그렇게 에너지를 쏟을 필요는 없었다.
과거의 태범 역시 효준과 비슷한 생각이었다.
돈 안 되는 예술을 붙잡으며 인생을 힘들게 살고 있는 예술인들을 TV에서 보면 사서 고생한다며 혀를 찬 적이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태범은 생각을 달리하고 있었다.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능력을 얻은 후 예술이라는 것이 무엇인지 깨닫게 된 것이다.
예술을 함에 있어 득과 실을 따지기보다는 그 자체가 좋았다.
머릿속에 있는 것을 눈앞으로 창조해내는 행위 자체가 즐거움이었다.
“형, 그래도 이왕 그리는 거 잘 그려줘야지.”
태범은 다시 붓을 잡고 부족한 부분을 칠하기 시작했다.
결국 태범의 예술적 욕망을 이기지 못한 효준도 ‘그래 네 마음대로 해라‘라는 생각과 함께 태범의 작업을 지켜봤다.
“와…….”
효준은 태범의 옆에서 그저 멍 때리며 작업을 지켜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아닌 것 같지만 보면 볼수록 묘하게 빠져들고 있었다.
“형, 나 아크릴 물감 좀 가져다줘.”
“아크릴 물감?”
“응, 저거.”
새로운 색이 더 필요할 것 같았다.
이미 만들어 놓은 색으로는 해바라기를 완성하기에 어려움이 있다.
자연과 가깝게 색채를 완성하기 위해서는 색의 다양성을 잘 알고 있어야만 했다.
같은 노란색이라 할지라도 옐로우 딥, 옐로우 라이트, 레몬 옐로우 등 다양한 색이 존재했다.
물론 다양한 색에는 이름들이 있긴 하지만 태범은 오직 감각적으로 색을 찾아냈다.
이론적으로 색에 대해 학습을 했다기보다는 그저 살면서 보고 느꼈던 색을 다빈치의 미술 감각을 이용해 재창조하는 것뿐이었다.
“여기.”
효준은 태범의 손을 대신에 아크릴 물감을 가져왔고, 어느새 태범의 보조가 되어있었다.
태범은 효준이 가져온 아크릴 물감과 기존의 노란색 페인트를 한 통에 붓고 섞기 시작했다.
“이게 무슨 차이야?”
분명 태범은 색을 만들어냈지만 효준의 눈에는 그대로 같은 노란색으로 보였다.
뭘 하긴 한 건가 싶어 태범에게 물었지만 태범은 이를 설명해줄 수 없었다.
마치 1은 왜 1이냐 라고 묻는 것과 같았다.
태범의 색은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 느껴지는 듯한 오묘한 예술적 영역이었다.
태범은 자신이 만들어낸 색으로 다시 해바라기의 채색을 하기 시작했다.
“태범아, 네가 그린 것 진짜 같다.”
그저 통 속에 만들어진 새로운 색을 봤을 때는 몰랐지만 벽에 칠해지니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예술에 ‘예’자도 모르더라도 효준 역시 사람의 눈과 마음을 가진지라 태범의 그림을 보고 감탄이 나올 수밖에 없었다.
“어때? 살아있는 것 같아?”
태범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자신이 완성한 해바라기 한 송이를 가리켰다.
“태범아, 내 입이 출출한데 여기서 해바라씨 좀 빼 먹어도 되냐?”
“응?”
“어? 아무것도 아니야.”
“풋.”
효준의 유머에 태범은 한 번 피식 미소를 짓고, 굽혔던 허리를 폈다.
“저기요. 거기 다 그렸어요?”
해바라기의 채색을 마친 태범이 허리를 펴고 잠시 기지개를 켜자 아까 그 여성이 다가왔다.
“네, 다했어요. 이제 어느 쪽 그릴까요?”
태범은 벽을 한번 쓱 살핀 뒤, 다시 여자를 보고는 말했다.
“허…….”
다가왔던 여성은 태범의 채색한 해바라기를 보자 시간이라도 멈춘 듯 잠시 벽화 앞에서 눈을 떼지 못한 채 말을 잇지 못하고 있었다.
그저 벽 모서리 하단에 있는 해바라기 한 송이였지만, 감탄을 일으킬 만큼 완벽한 그림이었다.
게다가 해바라기의 스케치는 여성 본인이 한 것이었지만 태범의 손길이 거친 뒤 기존의 해바라기와는 전혀 다른 모습의 꽃이 탄생해 있었다.
정녕 자신이 스케치한 해바라기가 맞는지 의심이 갈 정도로 말이다.
“미술 배우신 분이세요? 어쩜 이렇게 그리셨어요.”
“아니요. 어디서 배우지는 않았고 그냥 미술은 취미에요.”
“안 배우시고 이렇게 그렸다고요? 명암, 명도, 채도 모든 게 자연스러운데 미술 쪽에 재능이 뛰어 나신가 봐요.”
이 여성의 입에서 나오는 말들을 들어보니 아마도 전문적으로 미술을 배운 사람 같았다. 그리고 그런 사람에게서 미술을 배웠냐는 의심을 받다니 태범은 다시 한번 다빈치의 미술 능력에 감탄했다.
“무슨 기법으로 그리신 거예요?”
“기법이요?”
여성의 물음에 태범은 머뭇거리며 답을 쉽게 할 수가 없었다.
태범은 미술에 관한 이론적인 지식을 익힌 상태가 아니었고 그저 능력이 따르는 데로 했기 때문이다.
“기술적으로 따지며 그리기보다는 그저 생각나는 데로 그린 거예요.”
“아…….”
여성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범이 그린 그림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아무것도 모르는 것 같은 사람치고는 완벽한 그림이었기에 신기해하고 있는 것이다.
“저 그러면 이제 이쪽 그릴게요.”
“네! 그렇게 하세요.”
태범은 페인트와 붓을 가지고 벽 옆으로 이동했다.
이번에는 바닥에 자란 풀들을 그릴 차례. 태범은 녹색 계열의 색을 만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가장 작은 붓을 꺼내 풀들을 그려나갔다.
사람들의 시선은 한 번씩 자연스럽게 태범이 그린 그림으로 이동했다.
같은 벽에 그려진 그림임에도 사람의 다른 부분에 확연히 눈에 띄는 부분이었고 태범의 그림은 정교하면서도 개성적으로 그려지고 있었다.
“점심 드시고 하세요.”
시계는 12시를 가리켰고 점심시간이 찾아왔다.
아침 일찍 나와 연탄을 나르고 이곳에 와 벽화를 그리고 있지만 아직 시간은 12시를 가리키고 있으니 오늘은 시간을 알차게 쓰는 것만 같았다.
그렇게 복지 회관에서 준비한 식사를 먹고 잠시 휴식을 취하고 다시 작업을 시작했다.
“제가 칠한 부분 좀 봐주세요.”
태범이 그린 부분을 그저 바라보기만 했던 사람들이 점심을 먹은 뒤 이제는 도움을 요청하고 있었다.
슬슬 태범의 미술 능력을 알아본 사람들이 도움의 손길을 원하는 것이었다.
“네, 제가 도와드릴게요.”
태범의 붓이 거쳐 간 곳은 그림이 새롭게 탄생하고 있었다.
마치 죽어가는 생명에 호흡기를 달아준 듯 기존의 그림에 몇 번 붓질을 했을 뿐인데 개성적이고 예술적인 작품이 나타났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고 벽에는 그림들로 가득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러 봉사자들의 손을 거친 결과 눈앞에는 멋진 자연 풍경이 펼쳐졌다.
다들 만족스러운 눈으로 벽화를 바라보고 있었다.
얼마나 뿌듯한 걸까 봉사자들은 본인이 그린 그림을 몇 번이나 확인하며 만족스런 표정을 지었다.
이는 오늘의 수고와 땀이 눈앞에 보이는 아름다운 벽화에 하나로써 모두 보상받는 기분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하…… 드디어 끝났다!”
오늘 하루 태범의 옆에서 고생한 효준도 기쁨을 만끽했다.
효준은 벽화에 대한 만족보다는 그저 오늘의 일과가 끝났다는 의미에서 기뻐하고 있던 것이다.
“태범아, 뭐 맘에 안 들어?”
다들 미소를 짓고 좋아하고 있는 와중에 단 한 사람의 표정이 굳어있었다.
바로 태범이었다.
태범은 팔짱을 끼고 뭔가 불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은 채 벽화를 뚫어져라 쳐다보고 있었다.
“하…….”
태범은 한숨을 크게 쉬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이 모습에 효준이 다가와 물었다.
“왜 그러는데?
“응? 아무 것도 아니야.”
혹시나 다른 사람에게 민폐가 될까, 태범은 아무 말도 못 하고 머리를 긁적이다 애써 태연한 척을 했다.
“다들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복지관 직원들과 봉사 단체의 사람들 그리고 상정회계법인 직원들까지 서로 마지막 인사를 나눴다.
인사 이후 다들 회사에서 준비된 미니버스를 타고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다.
“와. 드디어 집에 가네. 주말에 이게 뭐냐.”
태범의 옆자리에 앉은 효준은 집에 간다며 기뻐하며 주말에 고생하는 자신을 안타까워했다.
그림을 그릴 줄도 모르면서 이곳에 와서 눈치 보느라 고생을 하긴 했다.
이에 반해 태범은 굳은 표정을 한 채 창밖을 빤히 쳐다보고 있었다.
뭔가 고민을 하는 자세였고 효준은 태범에게 무슨 일이 있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슨 생각해?”
“형, 잠깐만.”
효준의 말에 태범이 갑자기 자리에서 벌 벌떡 일어나 버스 밖으로 나갔다. 그리고는 봉사단체에서 나온 여성에게 다가갔다.
“짜식, 역시 쟤도 남자였구먼.”
혹시 저 여성에게 번호라도 따려는 건가.
버스 창밖, 여성에게 다가가는 태범을 보고 있던 효준은 키득키득 웃음을 내뱉었다.
그 여성은 자신의 개인차에 벽화에 사용된 물품들을 싣고 있었다.
“저기요. 여기 있는 페인트랑 물감 내일까지 저 좀 빌려주실 수 있으세요?”
“네? 무슨 일이신데요?”
“이런 말씀 드리기 죄송한데 가능하다면 제가 조그만 수정을 해보고 싶거든요.”
태범은 조심스럽게 말했다.
모두가 고생해서 만든 하나의 작품에 또 다시 손을 댄다는 건 어쩌면 예의가 없어 보일 수 있기 때문이다.
“뭐 부족한 점이 있으세요?”
“아니요. 잘 됐어요. 근데 제가 정말 조금만 고쳐보고 싶은 부분이 있어서요.”
“저, 내일은 못 나오는데…….”
“제가 다 마치고 내일까지 직접 가져다드릴게요.”
도저히 벽화를 이대로 두고 떠날 수가 없었다.
태범의 머릿속의 예술적 욕망이 저 벽화를 이대로 둘 수 없다며 귀를 속삭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