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66화 (66/188)

# 66

토요일.

어르신들이 따뜻하게 겨울을 날 수 있도록, 연탄 나르기랑 후원 물품 전달 등 상정회계법인에서 주최하는 봉사 활동이 있는 날이었다.

대외 이미지 때문에 매년 하는 행사이긴 했지만 영월식품 분식 회계로 실추된 이미지를 회복시키고자 하는 것도 있었다.

“무슨 회사가 주말인데도 일을 나가니?”

“아니, 일 가는 게 아니라 봉사 활동 하러 가는 거야.”

“그게 그거지. 어쨌든 힘쓰는 일 하러 가는 거 아니야?”

“그래도 좋은 마음으로 하는 거잖아.”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집 밖을 나서려는 태범의 모습을 보고는 어머니는 못마땅하고 있었다.

아무리 좋은 일을 한다 한들 아들의 건강이 최우선이었다.

주말에만큼은 쉬었으면 하지만 회사에서 하는 정기적인 행사라 태범에게는 선택 권한이 없었다.

게다가 대표님까지 직접 나서서 하는 일이기에 정말 바쁜 일이 아니고서야 대부분의 회계사들이 참가할 것으로 보였다.

“쩝, 어쩔 수 없지. 그럼 이왕 봉사하는 거니까 열심히 하고 와. 그래도 안 춥게 따뜻하게 하고 괜히 좋은 일 하러 갔다가 몸이 상하면 안 되잖아?”

“알았어. 갔다 올게.”

태범은 후줄근한 추리닝 차림에 잠바 하나를 걸치고 집을 나섰다.

* * *

회사 건물 앞 도로 옆에 오늘 봉사 활동에 나갈 회계사들이 나와 있었다.

과연 이 사람들 중에 진심으로 봉사하고 싶은 마음으로 봉사 활동에 참가하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솔직히 말하자면 대부분 어쩔 수 없이 끌려 나왔을 게 분명했다.

“태범아!”

“어, 형도 가는 거야?”

“그럼 가야지. 아버지도 가는데 내가 어떻게 빠지냐.”

봉사 활동 현장으로 가기 위해 회사에서 대절한 버스, 그곳에서 대표의 아들인 효준을 만났다.

효준은 태범의 얼굴을 보자 반갑게 미소를 띠며 옆자리에 앉았다.

“형은 안 갈 줄 알았는데.”

“야, 나도 너랑 똑같아. 자꾸 나는 뭔가 특별한 대접 받을 거라고 생각하지 마.”

“미안, 다음부터 그렇게 생각 안 할게.”

아무리 저렇게 말해도 대표이사의 아들인 효준은 보통 사람과 같을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게 편견일지 몰라도 태범의 머릿속에는 효준이 대표의 아들이라는 이미지를 지울 수는 없었다.

“너 재무 자문 본부로 옮겼다며?”

“아, 맞다. 나 대표님하고 만나서 이야기했어. 아마도 감사일은 힘들 거라면서 이쪽으로 본부를 옮겨주시더라.”

“어떻게 보면 너 운이 좋은 거야.”

“뭐가?”

“보통 신입 때는 감사 본부에서 2년 정도 힘들게 일하는데 너는 이번에 바로 자문 본부로 갔잖아.”

사실 가장 힘든 일이 감사 본부였는데, 감사는 회계사가 존재하는 이유이자 회계사의 꽃이라고 불리기 필수불가결한 업무였다.

하지만 과도한 업무로 다들 감사보다는 세무나 자문 본부 쪽에서 일을 원했으니 어쩌면 태범에게 좋은 일이 된 것일지도 몰랐다.

“아버지는 뭐라 안 하셨어?”

“나도 한 소리 듣겠구나 하고 올라갔는데 별말씀 없으시더라.”

“별 말은 안 했어도 아버지도 속으로 미친놈이 왔구나 생각했을 걸?”

“미친놈?”

면전에 대고 미친놈이라니 태범은 순간 어이가 없어 표정이 굳었다.

“아니, 안 좋은 의미는 아니고 요즘 회계사들 사이에서 태범이 너 미쳤다는 소리 듣잖아.”

“그럼 그게 좋은 의미야?”

“미쳐야 성공한다고 뭔가 남이 함부로 못 할 것을 했잖아. 그런 의미지. 너무 안 좋게 받아들이지 마. 솔직히 나도 한편으로 널 보면 미친놈이 아닌가 싶었어. 흐흐.”

“생각해보니 형, 말이 맞긴 하네. 가끔 나도 내가 미친 게 아닌가 싶어.”

그렇게 태범과 효준이 잡담을 나누는 사이 어느새 버스는 도착 지점에 멈춰 섰다.

버스가 멈춘 곳은 서울에 있는 달동네였다.

“서울에 아직도 이런 곳이 있네.”

버스에서 내린 태범은 주위를 둘러보고는 낯선 풍경에 놀라워했다.

마치 타임머신을 타고 70~80년대 과거로 온 듯한 기분이었다.

건물이 낡아서 곧이라도 무너질 것만 같았고 가게의 간판은 투박하게 옛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같은 서울인데도 이렇게 다르다니 서울의 두 가지 얼굴을 보는 것만 같았다.

“와…… 저걸 언제 다 하냐.”

옆에 있던 효준이 뭔가를 보고는 말했다.

효준의 시선에 따라 태범도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눈앞에 보이는 건 검은색 벽을 이루고 있는 연탄이었다.

게다가 연탄만 있는 게 아니라 연탄 옆에는 쌀가마니가 쌓여있었다.

“왠지 월요일 날 출근할 때 뻗어 버릴 것 같은데.”

효준은 눈앞에 보이는 연탄 더미를 보고는 계속 투덜거렸다.

“많이들 바쁘실 텐데 이렇게 봉사활동에 참가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오늘은 어르신들 집에 연탄과 쌀을 지급해 드릴 텐데요. 길이 가파르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 천천히 해주시면 되겠습니다.”

구청에서 나온 직원이 봉사 활동에 대해 간단한 개요를 설명했다.

하필 오늘 날씨는 춥고 칼바람이 부는 바람에 잠깐 서 있는 것만으로도 고욕이었다.

차라리 빨리 몸을 움직이며 열을 내고 싶을 정도였다.

“자 다들 모이세요.”

봉사 활동에 오면 꼭 하는 게 있다.

증거 사진 남기기.

“하나, 둘, 셋 하면 찍겠습니다. 하나, 둘, 셋!”

찰칵.

미리 준비한 상정회계법인의 플랜카드를 펼치고 다들 모인 뒤 연탄 벽 앞에 서서 사진을 찍었다.

아마도 이 사진은 상정회계법인 연탄 나르기 봉사 활동이라는 제목과 기사에 올라올 게 분명했다.

단체 사진을 찍고 구청에서 나온 직원의 안내에 따라 일을 하기 시작했다.

리어카가 들어가기 힘든 골목 구석에는 연탄을 지게로 진 뒤 들어간다든가 사람이 길게 자리를 잡고 서로의 손으로 연탄을 넘기는 식으로 일이 진행됐다.

짬이 되는 회계사들은 연탄을 손으로 옮겼고 신입 회계사들은 리어카나 지게를 메고 언덕을 오르는 등 나름 경력에 따라 하는 일도 차등 되어있었다.

하지만 가장 바쁜 건 대표님이었다.

지게를 메고 한 컷, 리어카를 밀며 한 컷, 연탄을 얼굴에 묻히고 한 컷.

봉사 활동 보다는 사진 촬영에 가까운 활동이었고 그것도 쉽지만은 않아 보였다.

태범은 지게를 메고 연탄을 날랐다.

“더 담아도 되지?”

“네, 가득 채워주세요.”

동네 구경하던 할아버지가 일손을 거들며 태범의 지게에 연탄을 담아주었다.

“청년, 힘이 자주 좋네. 장사감이야 아주. 살만 좀 찌면 천하장사도 하겠는데?”

“하하. 감사합니다.”

연탄쯤이야, 옷과 얼굴에 연탄재가 묻어서 불편한 것뿐이지 태범에게 이를 옮기는 건 별로 힘들지 않았다.

굳이 헬스장 같은 곳에 돈 주고 운동할 필요 없이 이 또한 운동이라 생각하면 노동도 재미있게 할 수 있었다.

“으쌰!”

이소룡의 힘과 스쿼트로 단련된 하체 근육을 이용해 연탄 지게를 어깨에 메고 단번에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치 책가방을 메는 것 마냥 가벼웠다.

분명 군대에서 행군할 때 메던 배낭 무게 그 이상이었지만 강한 힘 때문일까 느껴지는 무게감은 그저 책가방과 차이가 없었다.

“자네도 일어나봐.”

“저…… 좀만 빼주시면 안 돼요?”

다음은 효준의 차례였다.

하지만 웬걸 지게를 메고 있는 효준이는 여전히 엉덩이를 바닥에 댄 채 일어서지를 못하고 있었다.

“사내가 이것도 못 들어?”

“제가 공부를 많이 해서 허리가…….”

“옛날 나 때는 말이야. 이런 것  어린 꼬맹이들도 지고 다녔어.”

할아버지는 효준의 지게에서 연탄을 빼며 진위 여부를 알 수 없는 과거 이야기를 늘여놓았다.

“할아버지, 연탄 좀 빼주세요.”

“뭐? 더 빼달라고?”

“빼신 거 맞아요? 그대로 같은데.”

“이거 비실거려서 어떻게 해. 밤일은 제대로 할 수 있을까나 몰라.”

효준은 연탄을 빼는 대신에 할아버지의 꾸지람을 한 번 더 들어야만 했다. 그리고 한결 가벼워진 효준의 연탄 지게 덕에 그는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설 수 있었다.

“형, 빨리 가요! 저희 아직 한 개도 못 했어요.”

“너…… 너, 먼저 가.”

효준은 여전히 쫓아올 기력이 없어 보였다.

이대로 효준을 기다리다간 연탄 한 개도 배달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할 수 없이 태범은 먼저 앞장을 서며 빠르게 배달을 나섰다.

“후…… 후…….”

등산한다는 느낌으로다가 가파른 언덕길을 올랐다.

그렇게 손쉽게 지게 한 개 물량을 마무리 짓고 다시 내려왔다.

그리고 빈 지게를 가지고 내려오다가 연탄이 가득 실린 리어카를 가지고 실랑이를 벌이는 회계사들을 발견했다.

“으!!!”

다들 책상머리 앞에서 공부만 한 사람들이라 그런가 연탄이 담긴 리어카를 밀며 언덕 위를 오르는데 온갖 신음을 내뱉으며 힘겹게 오르고 있었다.

처음에는 2명이었다가 이제는 3명 그리고 4명까지 한 리어카에 붙어서 힘겹게 올랐다.

눈 뜨고는 봐줄 수 없었다.

“저기 제가 도와드릴까요?”

태범은 리어카 앞으로 다가가 같이 리어카를 끌어 주었다.

그러자 리어카에 속도가 붙더니 마치 엔진이라도 달린 듯 부드럽게 쓱 하고 언덕을 올라갔다.

그렇게 태범과 효준은 얼굴에 연탄재를 묻히면서까지 열심히 지게를 메고 연탄을 날랐다.

“여기 벽화 그릴 줄 아는 사람 있어요?”

연탄을 나르던 도중 남자 한 명이 사람들에게 오더니 말했다.

“왜요? 무슨 일 있나요?”

“하필 벽화 봉사 하시는 분이 몸이 안 좋다고 해서 빠졌거든요. 대단한 걸 원하는 건 아니고 본인이 어느 정도 그림 좀 그린다 하시는 분들 있으시면 도와주셨으면 하네요.”

“복지관 내부에 있는 벽에 그리는 거라 춥지 않고 여기보다 편안하게 하실 수 있을 거예요.”

남자의 말에 연탄을 나르던 사람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하지만 그림을 그릴 줄 아는 사람이 없는지 아무도 나서지 않았다.

“태범아 너 그림 좀 그리지 않아?”

“나?”

“응, 너 그림 잘 그리잖아. 저번에 네 책상 보니까 잘 그리던데.”

효준은 태범의 그림 솜씨를 얼추 알고 있었다.

심심해서 끄적거렸던 낙서들이 책상 위에 굴러다니곤 했었고 효준은 그걸 본 것이다.

“그럼 내가 가볼까?”

“가봐. 여기보다 따뜻하고 편하다잖아. 나랑 같이 가자.”

“같이 가자고? 형도 그림 그릴 줄 알아?”

“아니, 난 그냥 여기서 나가고 싶을 뿐이야. 힘쓰는 건 도저히 내 체질이 아니야.”

효준은 이때다 싶었는지 본인과 함께 이곳을 뜨자며 태범에게 재촉했다.

“알았어, 가자.”

“여기요! 저희가 갈게요!”

결국 태범과 효준은 손을 번쩍 들며 벽화 봉사에 지원을 했고 구청에서 나온 직원과 함께 차를 타고 근처 노인 복지관으로 이동했다.

“여기 봉사자 두 분, 더 데려왔어요.”

“이쪽으로 오세요.”

태범은 차에서 내리고, 직원의 안내에 노인 복지관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복지관 한쪽 하얀색 페인트칠이 돼 있는 벽면에는 이미 봉사자들이 벽화를 그리기 위해 페인트, 붓 등의 각종 물품들을 준비하고 있었다.

“벽화 그리는 건 해보셨어요?”

같은 상정회계법인의 직원으로 보이는 여자 한 명이 태범에게 물었다.

그녀의 손에는 이미 붓이 들려있었고, 바로 일을 시작할 것으로 보였다.

“벽화 그리는 건 처음인데 그냥 취미로 그림 그리는 정도에요.”

“아 그래요? 저희가 할머니, 할아버님들이 좋아하시는 자연 풍경을 그릴 거라 크게 어려운 건 없는데 그렇다고 애들 그림처럼 그리면 안 되거든요.”

“그냥 나무랑 꽃 이런 것 그리면 되는 거죠?”

“네, 초등학교 같은 곳에 그려진 만화 이미지보다는 좀 실사처럼 잘 그려주셨으면 해요. 큰 구도는 저희가 잡아 줄 테니 거기에 맞춰 그리시면 되고요.”

“네!”

태범은 자신이 있었다.

벽화는 처음이지만 유화에 비하면 이는 어려운 작업이 아니었다.

그저 벽을 도화지로 생각하며 여러 가지 색의 페인트를 이용해 그림을 그려 나가면 되는 것이었다.

“자 시작들 하시죠.”

다들 손에 붓이 쥐어졌고 벽화 그리기가 시작됐다.

“야, 나 뭐해야 해? 어떻게 그려?”

꼼수를 부리고 연탄봉사에서 이곳으로 옮긴 효준은 태범의 옆을 졸졸 따라다니며, 말을 걸어왔다.

“형, 형은 그림보다 색칠하는 게 나을 것 같은데? 저분들이 밑바탕 잡아준 거에 색이라도 넣어봐.”

“알았어.”

그렇게 각자 부여된 임무에 따라 벽화를 그리고 있었다.

복지관 내부에 그리는 그림이라서 그런가 다들 신경 쓰며 최대한 섬세하게 작업하려 애쓰고 있었다.

“어머, 그렇게 그리시면 안 돼요.”

작업 중 갑자기 큰 소리로 외치는 여성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놀란 소리에 작업하던 사람들의 시선은 모두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이동했다.

‘뭔 일이지?’

태범이 역시 소리가 나는 방향을 바라봤고 그곳에는 벽화 작업을 책임지고 있는 여성과 효준이 있었다.

뭔가를 보고는 소리를 지른 것 같은데 태범은 효준에게 다가갔다.

“형, 왜 그래? 헉!”

눈앞에 보이는 건 초등학생이 색칠한 듯한 해바라기 한 송이.

채색에 명암이라는 건 없었고 그저 단색으로 칠해져 누가 봐도 어린아이가 색칠 공부한 듯한 느낌을 주고 있었다.

“그림 그려 봤던 분 맞으세요?”

여성의 말에 효준은 당황한 듯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었다.

여우 피하려다 호랑이 만남 셈이 돼버렸다.

“제가 이렇게 하라고 했어요. 여기에 제가 덧붙여서 그릴 거예요.”

이 상황을 보다 못해 태범이 효준을 대신해서 붓을 쥐었다.

“그래요?”

“자 봐 봐요.”

태범의 붓이 효준이 칠한 해바라기 그림 위에서 쓱싹거리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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