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64화 (64/188)

# 64

오늘 태범의 발은 상정회계법인이 아닌, 금융 감독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분식 회계를 입증할 만한 모든 자료가 완성되었고 이제 이를 가지고 금융감독원에 신고만 하면 되는 것이다.

충분히 할 만큼 했고 이제 마무리만 지으면 되는 일이었다.

태범은 항상 그래왔듯 택시를 타기 위해 집 앞 골목길을 걸으며 큰 대로변으로 향했다.

“강태범 회계사님.”

집에서 얼마나 이동했을까, 태범은 본인을 부르는 남성의 목소리를 들었다.

동네 아는 사람인가 누군가 싶어 태범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누구지…….’

태범의 눈에 들어온 건 정장을 곱게 차려입은 중년의 한 남성이었다.

낯선 얼굴이었다.

게다가 그 중년의 남성 옆에는 또 다른 젊은 남성이 정장을 차려입고 서 있었다.

“강태범 회계사님 아니십니까?”

머뭇거리는 태범의 모습을 보고는 남성이 다시 한 번 태범의 이름을 불렀다.

“누구 십니까?”

“반갑습니다. 저는 영월식품의 배길준 사장입니다.”

“사장이요?”

역시 예상한 대로 그들이 찾아왔다.

태범은 한 번쯤 영월식품에서 회유가 들어올 거라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친히 사장이라는 사람이 집 앞까지 찾아와 미소로 맞이해주다니, 급하긴 급했나 보다.

“혹시 시간이 되시면 저랑 대화 좀 할 수 있을까요?”

“무슨 말을 하시려는지…….”

“여기서 대화하기는 좀 그렇데, 조용한 데로 가시는 게 어떻습니까?”

“음…….”

태범은 눈을 위로 올리며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말이라도 들어 볼까 아니면 그냥 가던 길 갈까. 어차피 이들이 무슨 말을 할지 뻔했다.

그들이 할 수 있는 건 돈 봉투를 건네며 자신을 매수한다던가, 좋은 자리를 준다던가, 뭘 해서라도 회유를 할 게 뻔했다.

“죄송합니다. 지금 당장은 제가 일이 바빠서요. 나중에 미리 연락을 주시면 그때 자리 한번 하겠습니다.”

결국 태범은 사장의 대화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태범은 검은돈 따위는 전혀 받을 생각이 없었다.

이미 능력을 주는 스캐너로 그 어떤 것보다 훌륭하고 값어치 있는 물건을 가지고 있는 상태였다.

굳이 검은돈이 아니더라도 능력으로 충분히 깨끗한 돈을 얻고 만질 수 있었다. 태범은 합당하게 돈을 얻고자 했다.

“아니, 잠깐이라도…….”

“죄송합니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태범의 단호한 거절에 배길준 사장은 당황한 듯 허공에 손을 뻗어 보지만 등을 돌리는 태범을 붙잡을 수 없었다.

“뭐 원하시는 게 있으십니까? 말만 해주세요. 저희가 다 해드리겠습니다.”

돌아선 태범을 향해 배길준 사장은 달콤한 말을 꺼내며 회유를 시도했다.

하지만 태범은 사장의 말을 들은 채 만 채 발걸음은 계속 앞으로 나아갔다.

“저기요! 강태범 씨, 사람 말을 이렇게 무시해도 됩니까? 당신 무슨 자신감으로 그러는 거야? 분식 회계?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세요!”

배길준 사장은 기어코 구둣발로 뛰어와 태범의 어깨를 강하게 붙잡으며 말했다.

아무리 사장일지라도 길가는 사람 어깨를 붙잡고 발걸음을 강제로 멈추는 건 예의가 없는 짓이었다.

태범은 인상을 잔뜩 쓴 채 고개를 돌리며 배길준 사장을 바라봤다.

“하고 싶은 말이 없다는데 도대체 왜 그러십니까?”

“아니, 아무 죄도 없고 무고한 우리 회사를 이런 식으로 몰아가십니까? 당장 그만두세요.”

사장의 말도 안 되는 헛소리에 태범은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마음만큼은 크게 한바탕 웃고 싶지만 그에게 남은 최소한의 예의를 지키고자 입술을 다물며 웃음을 최대한 참았다.

“그러세요? 저도 영월식품이 올바르게 회계 기록을 했고 재무제표를 작성 했으면 좋겠네요.”

죄가 없다면 굳이 태범의 신고를 피할 이유가 있겠는가, 태범은 사장의 말을 자연스럽게 받아쳤다.

“그렇게 생각하시면, 하던 일 그만두세요.”

“제가 무슨 일을 하든, 영월식품이 재대로만 했다면 문제 될 게 있습니까?”

더 이상 배길준 사장과 할 말은 없었다.

뭐가 됐든 그는 자신의 회사를 지키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이야기만 늘어놓을 테니 말이다.

태범의 확고한 태도에 배길준 사장도 더 이상 붙잡지 않았다. 그리고 태범은 택시를 타고 금융감독원으로 향했다.

* * *

태범이 탄 택시는 여의도에 있는 금융감독원 빌딩 앞에 도착했다.

대한민국의 금융을 감사와 감독 하는 기관으로 기업과는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지닌 기관이다.

높이 솟은 빌딩 앞에 금융감독원이라고 쓰여 있는 현판 앞에 서니 감회가 새로웠다.

“회계 조사국 몇 층으로 가면 되나요?

“12층으로 올라가시면 됩니다.”

태범은 건물 1층에 있는 안내원의 안내를 받아 기업의 회계를 조사하는 회계 조사국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상정회계법인의 회계사입니다. 기업의 분식 회계 좀 제보하려고 왔습니다.”

“아, 이쪽으로 오시죠!”

민원인을 위한 공간이 따로 마련돼 있었고 태범은 그곳에 있는 회계 조사국 직원에게 신분을 밝히며 말을 걸었다.

태범의 말을 들은 직원은 나지막한 소리로 태범을 조그마한 방으로 안내했다.

방으로 들어가면서 본 회계 조사국의 사무실의 모습은 태범이 일하는 회계법인의 사무실과 비슷한 분위기였다.

다들 숫자로 된 서류 속에 파묻혀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앉으세요.”

“네.”

“상정회계법인 회계사라고 하셨죠?”

“네, 맞습니다.”

“이번에 발견하신 분식 회계에 대해 설명해 주실 수 있습니까?”

“네, 잠시만요.”

태범은 자신이 가져온 커다란 서류가방에서 서류철을 꺼내기 시작했다.

“자. 이걸 보면서 설명해드리도록 하겠습니다.”

서류 중 가장 먼저 눈에 보이는 건 영월식품에 대한 분식 회계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정리해둔 항목이었다.

과대 매출, 재고 자산 조작, 개인적으로 사용한 비용, 허위 수출…….

한 가지가 아니라 정말 기업에서 할 수 있는 모든 분식 회계를 한 듯 수많은 항목이 존재했다.

“가장 중요한 것은 허위 매출을 통해 수익 과대하게 잡은 것 그리고 수출 채권으로 보험도 가입하고 은행에서 거액의 대출까지…….”

“어허. 이거 규모가 꽤 큰데…….”

태범에게 이야기를 들은 직원은 고개를 저으며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니라는 걸 온몸으로 표현했다.

“영월식품이라 하면 작년에 내부자 거래로 회계 감사를 크게 받은 적이 있었는데…….”

“저도 예상 밖의 일이었습니다. 한 번 큰일을 당했고, 정부로부터 크게 조사를 받았을 것 같았는데 분식 회계가 발견되다니 생각도 못 했습니다.”

이미 한 번 큰 사건을 일으킨 영월식품에 또 다른 문제 있을 줄은 누구도 상상 못 했다. 역시 뿌리 자체가 범죄, 그 자체였다.

“근데 이 자료는 어떻게 외부로 가져오신 거죠?”

직원은 자신 앞에 놓여있는 많은 서류를 한번 쓱 보더니 태범에게 물었다.

“머릿속에 집어넣고 가져 왔습니다.”

태범은 집게손가락으로 자신의 머리를 톡톡 치며 말했다.

“네?”

태범의 행동에 약간 당황한 눈치였다.

머릿속에 집어넣고 오다니 뭔 말 인가 싶었을 것이다.

“전 아직 회계사 된 지 1년도 채 되지 않는 신입 회계사입니다. 제가 거기서 할 수 있는 게 뭐가 있겠습니까? 자료를 직접적으로 가져오는 건 말도 안 되죠. 모두 제가 기억나는 데로 기록해서 만든 자료들입니다.”

“아. 직접 작성한 것 자료에요?”

“네.”

“아…….”

뭔가 아쉬워서 그러는 건가, 직원은 입을 벌리며 아! 하고 짧은소리를 내뱉었다.

“뭔가 문제라도 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닌데 이거 혹시 확실한 자료가 맞나요?”

직원은 태범의 자료를 의심하고 있었다. 머릿속에서 나왔다 하니 분명 주관적이고 잘못된 정보가 많이 개입돼있을 가능성이 높으니 말이다.

하지만 태범은 당당하게 말했다.

“100% 확실합니다. 단 0.1%라도 틀린 게 없을 겁에요. 정말 장담해요.”

태범 스스로도 자신의 머릿속 기억을 확신하고 있었다.

물론 본인도 폰 노이만의 암기력을 얻었을 때 기억의 정확성에 대해 긴가민가한 면도 있었지만 능력을 오래 사용해보니 폰 노이만의 암기력은 생각보다 엄청난 능력이라는 걸 깨달은 상황이었다.

“아. 회계사님들 못 믿는겠다는 건 아니고요. 혹시나 잘못 수사에 들어가다가 저희가 안 좋은 소리를 들을 수 있거든요. 확실히 분식 회계라는 증거가 필요하기 때문에…….”

태범이 당당하게 말하자 직원도 금세 태범의 자료에 확신된 마음을 가졌다.

“걱정 마세요. 이 자료들 100%, 열월식품의 자료를 토대로 만들어진 것입니다. 제가 직접 그 기업을 감사하지 않았습니까?”

“물론요. 직접 감사를 하셨으니 잘 아시겠죠. 그럼 혹시 분식 회계가 누구에 의해 이뤄진 건지 짐작 가는 건 있으신가요?”

직원은 일을 벌인 주동자에 대해 물었다.

“하…… 그게…….”

주동자라…… 말하기도 벅찰 만큼 너무 많다. 일단 영월식품의 고위층은 대부분 아는 사실 일 테고, 회계팀 역시 자신들이 관리하는 이상 모를 수가 없다.

게다가 입 밖으로 꺼내기 힘든 사람들…… 태범의 직장 선배까지. 분식 회계에 개입된 사람들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어쩔 수 없었다. 이미 일은 벌어졌고 누구는 봐주고 누구는 잡고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태범은 본인이 추측하고 있는 인물들을 모두 털어놓았고 끊이지 않는 인물 거론에 앞에 있는 직원은 놀라고 있었다.

태범은 자신이 가진 모든 정보를 털어놓았다.

여전히 찝찝한 면이 있긴 하지만 그래도 마음은 한결 편안해졌다.

“이렇게 용기 내서 고발해주셔서 감사합니다. 회계사 되신지 얼마 되시지도 않았는데 큰일을 하신 겁니다.”

회계 조사국 직원은 아직 신입 회계사에 불과한 태범이 이 모든 걸 밝혀냈다는 것에 감탄을 했고, 이를 행동으로 옮긴 것에 또 다시 감탄하며 칭찬을 건넸다.

“감사합니다.”

이 순간 태범 본인 스스로도 대견스러웠다.

물론 스캐너의 준 능력을 이용한 것이지만, 어쨌든 많은 걸 해내고 있었다.

* * *

며칠 후, 영월식품과 상정회계법인은 분식 회계에 대한 여파가 휩쓸기 시작했다.

금융감독원에서 영월식품에 대한 대규모 조사팀이 꾸려져 이번 분식 회계에 대해 대대적으로 조사에 나섰다.

게다가 횡령, 배임 등 개인이 져야 할 법적 문제가 많이 존재했기에 검찰에서도 대대적으로 수사에 나서고 있었다.

그야말로 총체적 난국에 빠져 온 곳이 수사 대상이 되었고 아마도 영월식품은 파산의 길을 걸을 것으로 보였다.

태범은 여전히 감사 본부가 아닌 재무 자문 본부에 지원을 나와 업무를 하고 있었다.

기업이 사업을 확장하거나 투자를 하기 위한 평가와 자문을 해주는 일이었다.

이 또한 태범에게 있어서 딱 맞는 일이었다.

이미 워렌버핏의 능력을 가진 상황에서 투자를 결정하는 눈은 그 누구보다 뛰어 났고 아직 짧은 시간이지만 어느새 재무 자문 본부에서도 인정을 받고 있던 참이었다.

“태범 씨, 이거 확인 좀 해줘요.”

“네.”

재무 자문 본부의 장혁 이사가 태범의 책상 위에 서류 뭉텅이를 가져다 놨다.

서류는 비트 코인 관련 신규 사업을 원하는 대기업인 원대그룹의 사업 보고서였다.

서류를 받아든 태범은 여전히 빠르고 정확한 눈으로 서류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이제 태범은 감사 업무에서 벗어나 직간접적으로 돈을 움직일 수 있는 업무를 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는 태범의 목표한 곳까지 한 걸음 다가갈 수 있는 발판이 되고 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