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3
영월식품 기말 감사.
긴장감이 맴도는 사무실 안에서 회계사들은 묵묵히 기업이 작성한 회계 자료를 검토하고 있었다.
가장 긴장하고 있는 건 영월식품 당사의 회계팀이었다.
혹시나 본인들이 작성한 회계 자료가 잘못되어 걸리기라도 한다면 회사에 끼치는 피해는 상당할 것이다.
하지만 이미 박철중 전무의 회계사들과 영월식품은 한통속이었고 이미 맞춰진 대로 일이 진행만 된다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이었다.
“기업 현금 흐름이 안 좋아서 그런지 은행 대출이 매해 증가하네요.”
태범과 회계팀 직원은 조그마한 원탁 테이블에 앉아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테이블 위에는 재무 자료들이 놓여있고 둘은 이를 보며 논의와 질문, 답변을 주고받았다.
이는 회계팀 직원과 인터뷰를 하며 현 재무 상황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기 위함이었다.
“음. 그게 대부분 매출이 외상이기 때문에 현금의 유동성을 위해서 대출이 필요했습니다.”
“근데 굳이 매출채권을 할인하면서까지 그런 필요는 있나요? 매년 매출이 이렇게나 증가하는데”
“그게…… 저희도 내부 사정이 있어서 어쩔 수 없었던 거로 알고 있습니다.”
“내부 사정이라는 게 뭐죠?”
“아. 그건 기업 재무를 총괄 담당하는 이사님이 직접 관리하는 업무라 저도 자세히는…….”
회계팀 직원이 답하기 힘든 것 질문은 상급 부서에 책임을 넘기고 있었다.
모르긴 개뿔, 그의 대답에 기가 찰뿐이었다.
“아…… 그래요?”
태범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만족스럽지 못한 표정을 지었다.
태범의 완벽한 기업 분석 능력에 의해 영월식품의 민낯을 완전히 보였기 때문이다.
영월식품은 매출을 부풀려 재무제표를 작성했고 이를 토대로 시중은행으로부터 대출을 받고 있었다. 이는 엄연히 대출사기였다.
“네! 잘 알겠습니다. 또 궁금한 게 있으면 연락하겠습니다.”
“아, 언제든 연락해주세요.”
“네”
회계팀 직원은 빛 좋은 개살구 같은 대답만 하고 자빠졌다.
더 이상 그들의 입에서 얻을 건 없었고 태범은 다시 사무실로 들어가 마음의 준비를 했다.
* * *
회계 감사의 의견에는 4가지가 있다.
적정 의견, 한정 의견, 부적정 의견, 의견 거절.
의견은 회계사가 기업을 감사하고 내린 결과의 일종으로 기업의 재무제표가 올바르게 작성됐다면 적정 의견 아니라면 부적정 의견을 내리게 되는 것이다.
이에 따라 이번 기말 감사에 ‘적정 의견’을 준다면 같이 감사를 맡은 태범이 역시 한패가 되는 셈이다.
태범은 박철중 전무와 한배를 탈 생각이 없었다.
곧 침몰할 것 같은 배에 탈 바에는 그 배를 부숴버리고 땔감이라도 얻자는 마음이었다.
태범은 슬슬 마음의 준비를 하며 본색을 드러내기로 했다.
“이대로 부적정 의견을 줄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종이 넘기는 소리와 마우스, 키보드의 기계 소리만이 공간을 지배하고 있던 사무실 안.
순간 태범의 입에서 나온 말은 이 정적을 깨버리며 회계사들을 주목시켰다..
회계사들은 자신들이 잘못 들은 건 아닌가 싶어 태범을 뚫어져라 바라보며 사실을 확인하려 하고 있다.
“태범 씨 뭐라고 하셨어요?”
가장 놀란 건 서수철 부장이었다.
그는 태범을 향해 얼굴을 길게 빼며 말했다.
“영월식품 재무제표에 문제가 많은 것 같습니다. 아마도 부적정 의견이 될 것 같습니다.”
“아니, 그게 무슨 소리입니까!”
“말씀드린 그대로입니다.”
서수철 부장은 하던 일을 모두 멈추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태범을 노려봤다.
태범의 말에 화가 났는지 눈썹을 잔뜩 세운 채 쳐다보는 것이 다시 한번 말했다가는 목숨이 날아 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태범은 모든 준비가 끝난 상황, 두려울 게 없었다.
“재무제표 많은 부분이 잘못되지 않았습니까? 이는 분명 분식회계고, 부적정 의견을 받아야 할 상황이라 생각합니다.”
“아…… 씨…….”
서수철 부장의 입에서 욕이 나올 뻔했다.
회계사들은 웬만해서는 품위 유지를 위해 말을 조심하곤 하는데 지금은 그럴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이들에게 있어서 어쩌면 모가지가 날아 갈 판이니 말이다.
“저기 태범 씨, 그건 단지 심증이 아닙니까? 물증은 있는 거고?”
“중간 감사부터 재고 실사 그리고 기말 감사까지 해오면서 많은 분식회계를 목격했습니다. 처음에 분명 말씀드렸기도 했고요.”
“아니, 그러면 지금까지 가만히 있다가 갑자기 이러면 어떻게 합니까? 그때 수정을 요구하던가,”
“그때 제가 분명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내부 통제부터 시작해 재무제표에 많은 의문점이 있다고요.‘
“아니, 그때…… 하…….”
서수철 부장은 태범의 말에 할 말을 잃으며 말을 잇지 못했다.
태범의 말이 전혀 틀릴 것이 없었고, 이를 논리적으로 답할 수 있는 말은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서수철은 태범에게 배신을 당했다는 느낌만 가지고 있을 뿐이었다.
“부정적 의견을 내시고 분식 회계로 금감원에 보고하셔야 할 것 같습니다.”
“아니, 태범 씨. 갑자기 왜 그러십니까? 우리 다 같은 배 타기로 한 거 아닙니까?”
“같은 배요? 전 상정회계법인의 일원으로써 같이 일하자는 의미였을 뿐, 다른 의도는 없었습니다.”
“뭐…… 뭐라고요?! 지금 장난해요?”
서수철 부장은 한 대라도 칠 기세였다.
지금까지 순종적인 신입 회계사였던 태범이 저렇게 당당하게 본인을 맞서 행동하니, 이에 대한 분노는 보통이 아닌 듯 보였다.
“저는 회계사로서 원리 원칙을 그대로 지키겠습니다.”
* * *
“요즘 아침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어떡하니?”
“어차피 가다가 대충 먹으면 돼. 아침을 근사하게 먹을 것도 아닌데.”
어머니는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허겁지겁 세안만 하고 출근을 하려는 태범을 안타까워했다. 아침이라도 먹이고 싶었지만 태범이 입장에서는 차라리 그 시간에 한숨이라도 더 자는 게 더 편했다.
기말 감사 기간인 1월은 그 어느 때보다 바빴다.
회계사들에게 이 기간만큼은 지옥 기간이라고 할 만큼 쉴 틈이 없을 정도였고 1년 동안 쌓였던 모든 일이 쏟아지는 기간이기도 했다.
따르릉.
“아침부터 웬 전화야.”
구두를 신던 중 울리는 전화벨 소리에 태범은 짜증을 내며 스마트 폰에 찍힌 번호를 봤다.
[박철중 전무]
‘올 게 왔구나.’
어제 영월식품 감사 도중 깽판(?)을 친 것 때문에 언젠가 박철중 전무에게 연락이 올 거라고는 예상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다음날에 바로 올 줄은 상상도 못 했다. 어지간히 급한 모양이다.
“강태범 씨, 나 박철중 전무입니다.”
“네! 전무님 무슨 일로?”
일단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전화를 받았지만 대충 박철중 전무가 무슨 말을 할지 예상은 하고 있었다.
회유를 하던가, 협박 아니면 방해를 할 게 뻔했으니 말이다.
어쨌든 목적은 단 하나!
영월식품의 분식 회계가 드러나는 걸 막을 게 분명했다.
“오늘부터 영월식품의 감사는 그만 두시고 회사로 들어가세요. 강인후 차장이 새로운 필드 지정해 줄 겁니다.”
“갑자기요?”
“네, 내부 사정상 그렇게 됐으니 알아두세요.”
결국 이런 식으로 내치려 하고 있었다.
영월식품 감사에서 태범을 빼겠다는 것이었는데 이는 바보 같은 짓에 불과했다.
이미 태범은 영월식품에 대한 분식 회계에 관해 모든 걸 쥐고 있었고 이미 다른 곳으로 내친다 한듯 증거가 사라지는 것도 아니다.
태범의 머릿속에 저장된 영월식품의 자료들은 아마도 컴퓨터에 들어있는 자료만큼이나 가득 차 있으니 말이다.
원래대로라면 필드인 영월식품 본사로 출근을 해야지만 회사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 * *
역시 기말 감사 기간이라 감사 본부의 사무실은 텅텅 비어있었다.
대부분 필드(현장)에 나가 감사 업무를 보고 있기에 몇몇 감사일을 마치고 온 회계사들을 제외하고는 아무도 없었다.
‘겨우 한다는 짓이 이거야?’
조용한 사무실에 들어와 자리에 앉으니 태범은 어이가 없어 웃음이 나왔다.
이런 식으로 치사하게 굴 줄을 몰랐으니 말이다.
맘에 안 드는 직원이 있으면 좌천되거나 부서 이동을 시키며 이리저리 괴롭히다가 내보내는 경우는 언론을 통해 많이 들어보긴 했다.
하지만 본인이 그 자리에 직접 와보니 어이가 없을 뿐이다.
화가 나거나 짜증이 난다기보다는 그저 지금 본인의 처지를 보니 괜히 웃음이 나왔다.
“태범아, 오늘부터 재무 자문 본부로 지원 나가야 할 것 같은데?”
태범이 회사로 출근해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마치 가디렸다는듯 강인후 차장이 다가와 말했다.
“네? 재무 자문 본부요?”
“응, 위에서 너 자문 본부로 보내라 하는데 혹시 뭐 잘못한 거 있어?”
“잘못한 건 없죠.”
“그래? 기말 감사 기간에 감사 본부로 지원 오는 건 있어도 거꾸로 가는 건 없거든? 희한하네.”
회계법인에서 가장 힘든 부서가 감사 본부였고 특히 기말 기간에는 사람이 부족해 지원이 필요한 지경이었다.
하지만 거꾸로 사람을 보낸다는 건 문제가 있다는 말이었고 강인후 차장도 대충 뭔가 일어났음을 직감하고 있었다.
“차장님, 분식 회계를 발견했으면 금감원에 신고하면 되는 거죠?”
“응? 분식 회계?”
“네, 이번에 제가 본 게 있어서요.”
태범의 입에서 ‘분식 회계’라는 말이 나오자 강인후 차장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지며 태범을 바라봤다
“설마……영월식품?”
“네.”
“하…… 결국 이렇게 된 거구나.”
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강인후 차장은 알 수 있었다.
왜 뜬금없이 강태범이 갑자기 다른 부서로 지원을 나가는지 말이다.
“너 정말 확실한 거야? 괜히 추측은 아니지?”
“아니요. 분식 회계 확실합니다.”
“결국 한바탕 소동이 일어나겠군…….”
“제 선택이 맞겠죠?”
“그래, 분식 회계를 발견했으면 신고를 해야지…….”
회계사가 분식 회계를 발견하고 눈을 감는 건 불법이다.
결국 분식 회계 작성에 같이 가담한 결과가 되는 것이고 이는 곧이곧대로 이해 관계자들의 피해로 이어지는 일이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분식 회계를 신고하는 건 당연했고 눈치껏 행동하라던 강인후 차장도 고개를 끄덕이며 태범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럼 저는 재무 자문 본부로 가면 되나요?”
“응, 가봐.”
* * *
“일찍 왔네? 요즘 많이 바쁠 거라면서?”
항상 밤늦게 퇴근하던 태범이 오늘은 일찍 퇴근에 집에 들어왔고, 어머니가 물었다.
“아니야. 이제 한동안은 정시에 퇴근할 것 같아.”
기말 감사 기간에 항상 야근을 했지만 오늘은 정시에 퇴근을 할 수 있었다.
재무 자문 본부는 감사 본부에 비하면 일이 여유가 있는 편이었다.
“나 저녁은 먹었어. 준비 안 해도 돼.”
“그래? 벌써?”
“응, 회사에서 먹고 왔어.”
태범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바로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사실 저녁은 먹지 않았으나 오늘 집에서 할 일이 많았기에 저녁은 거르기로 했다.
오늘은 무기를 완성하는 날이었다.
‘나를 다른 본부로 이동시킨다고 분식 회계가 사라지기라도 하나?’
방에 들어온 태범은 서류를 정리하며 박철중 전무의 바보 같은 짓을 떠올렸다.
이미 눈은 모든 걸 보고, 머릿속에는 모든 증거들이 담겨 있는데 겨우 본부를 옮긴다고 해서 모든 게 해결될 거라 생각했던 모양이다.
‘오히려 나한테 공격할 준비 시간을 준 꼴이지.’
일찍 퇴근한 태범은 집에 들어와 마무리 일격을 위해 작업을 하고 있었다.
머릿속에 있던 모든 분식 회계 증거들을 밖으로 꺼내고, 정리해서 금융 감독원에 신고할 자료를 만드는 것이다.
책상 위의 서류들은 머릿속을 대변하듯 태범이 암기를 통해 흡수시켰던 모든 정보들이 담겨져 있었다.
각종 회계 자료들이 각 항목에 맞는 서류철에 정리가 되며 드디어 책상 위를 가득 채울 만큼의 엄청난 증거들이 완성되었다.
영월식품의 분식 회계를 밝힐 무기가 완성된 셈이다.
이걸 내밀면 어떤 방법으로도 그들의 분식 회계를 막을 수 없을 것이다.
태범은 장담했다. 이 정도면 엄청난 파급력에 사람들에게 경제통으로서 본인의 이름 석 자를 알릴 수 있는 기회라고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