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1
“태범 씨 저 좀 잠깐 보죠.”
“네?”
태범의 보고가 있고 얼마 있지 않아 양현성 과장은 태범을 사무실 밖으로 불러냈다.
그의 부름에 태범은 잠시 암기를 멈추고 양현성 과장을 따라 사무실 밖으로 나갔다.
‘왠지 싸한데…….’
마치 군대에 있었을 때 선임에게 개인적으로 불려가는 느낌이었다.
굳은 표정이며 살벌함이 느껴지는 말투까지 태범은 본능적으로 그때 그 상황의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여기 앉아서 잠깐 이야기 좀 해요.”
“네.”
태범은 양현성 과장을 따라, 복도 중간에 있는 휴식용 의자에 같이 앉았다.
그러고는 조용히 속삭이듯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음…… 이런 말을 직접적으로 하긴 좀 그런데…….”
“편하게 말하세요.”
“태범 씨, 아직 신입이라 잘 모르는 것 같은데요. 아까 그런 건 눈치껏 감아주는 겁니다. 이 회사도 모를 것 같습니까? 여기 회계팀에서도 비용 처리 할 때 다 봤을 겁니다.”
양현성 과장은 태범이 비용 관련해 잘못된 점을 보고 한 것에 못마땅한 듯했다.
회계사로서 나오면 입 밖으로 나오면 안 되는 말이지만 그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뱉어냈다.
“근데 이걸 왜 회사에서 가만히 내버려 두는 거죠? 분명 문제로 삼아야 할 건데.”
“아니, 위에서 까라면 까야지. 밑에 사람들이 힘이 어딨습니까, 법인 카드로 그 지랄할 정도면 대부분 저기 꼭대기 높으신 분들이 사용한 거예요.”
“꼭대기요?”
“법인 카드로 명품백이요? 그거 누가 썼을 것 같습니까?”
“그야 과장님이 말씀하신 대로 윗대가리 아니, 높은 분들이 쓰신 것 아니겠습니까?”
테범은 양현성 과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결국 그가 말하고자 하는 건 기업의 윗사람들이 해먹는 거니, 눈치껏 넘어가라는 이야기였다.
태범의 말에 양현성 과장은 입술을 물며 고개를 끄덕였다.
“잘 알겠죠?”
“네.”
태범은 여기서 양현성의 말에 반박을 해봤자, 얻을 수 있는 게 없다는 걸 잘 알고 있었다.
힘없는 신입 회계사가 뭘 어쩌겠는가 태범은 일단 그의 말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양현성 과장의 충고를 들은 태범은 애써 씁쓸한 표정을 감추며 다시 사무실로 돌아와 업무를 시작했다.
‘이건 아닌데…… 이건 아니야…….’
자료를 보면 볼수록 양현성 과장의 말처럼 그냥 넘기기에는 문제가 너무 많았다.
자칫 잘못 엮였다가는 골로 갈 수 있는 문제들이었다.
* * *
“식사하러 가시죠.”
식사 시간인 11시 반쯤에 맞춰 영월식품의 회계팀 직원이 사무실로 올라왔다.
그리고 회계팀의 장정국 팀장은 같이 식사를 제안했고 회계사들은 자연스럽게 외투를 챙기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벌써 식사 시간인가?’
일을 너무 집중해서 그랬는지 태범은 이제야 시계를 보고 점심시간이라는 걸 알았다.
남들은 일을 하면 시간이 안 간다고 칭얼거리지만 태범에게는 적성이 맞는 지 시간이 빠르게 흘러갔다.
회계팀 직원의 안내에 도착한 식당은 강남에 위치한 고급 중국 요리점이었다.
중국 황실에 온 건가 싶을 정도로 주변이 온통 빨간색과 황금색으로 인테리어 되어있었다. 금방이라도 중국 요리로 유명한 이연북 요리사가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어서 오세요!”
“이쪽으로 가시죠.”
가게 종업원이 두 명이 되는 마냥, 식당 웨이터와 회계팀 팀장은 서로 회계사들은 안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의 친절은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심지어 회계팀 팀장이 서수철 부장의 의자를 빼주는데 부장은 이를 자연스럽게 생각하는지 아무렇지 않게 의자에 앉았다.
‘뭔가 약점이라도 잡힌 건가…….’
눈에 선명하게 보이는 갑(甲)과을(乙)의 관계, 태범은 분명 이유가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영월식품은 중견기업이긴 하나 거의 대기업에 가깝고, 그곳의 팀장 정도면 회계 법인의 부장에게 전혀 꿀릴 위치는 아니었다.
그리고 고객사는 회계법인에 일을 공급해주는 쪽이기에, 어떻게 보면 고객사가 갑(甲)인 경우가 많은데, 이 상황은 정반대였다.
“드시고 싶은 거 마음껏 드세요.”
“이 세트로 시키죠.”
서수철 부장은 마치 자기가 사는 듯 아무렇지 않게 메뉴를 골랐다.
정말 가격은 보지 않고 메뉴만 본 뒤 고르는 듯했다.
서수철 부장의 과감한 결정 때문일까 다른 회계사들도 메뉴를 원하는 마음껏 고르기 시작했다.
샥스핀 스프, 전가복, 베이징 송이 소고기, 깐풍기, 탕수육, 오룡해삼…….
‘이게 도대체 뭐야.’
중국 요리라면 짜장면, 짬뽕, 탕수육밖에 먹어보지 않았던 태범에게 테이블 위에 차려지는 중국 요리는 새롭게 느껴졌다.
고객사에서 제공하는 호화로운 음식이 입속으로 들어갈 때마다 찝찝함이 느껴졌다.
세상에는 공짜가 없다고 여기에 차려진 음식들은 뭔가를 요구하는 하나의 대가로 보였다.
“이분들 모두 박철중 전무님 밑에서 일하시는 분들인가요?”
장정국 팀장이 서수철 부장에게 이곳 회계사들과 박철중 전무와의 관계를 물었다.
“네, 맞습니다.”
“어우, 그럼 제가 이분들 더 잘 모셔야겠네요.”
“하하. 서로 가까이 지내면 좋죠. 앞으로 서로 많이 만나게 될 겁니다.”
장정국 팀장은 미소를 지으며 회계사들의 눈을 한 번씩 바라보더니 잘해보자는 무언의 사인을 보냈다.
하지만 그의 눈빛은 철저히 비즈니스였고 만들어진 눈빛이었다.
애초에 그렇게 밝은 분위기가 나올 상황은 아니었지만 장정국 팀장은 어떻게 해서든 서로 잘해보자는 의미로 인위적으로 감정을 소모시키고 있었다.
‘이게 해외 연수 때 영업 교육에서 그렇게 강조하던 내용이었구나.’
태범은 장정국 팀장을 보니 연수 때 영업 관련 교육이 떠올랐다.
책 속의 이론은 그저 딱딱한 글씨에 불과할 뿐 사람과 직접 부딪치는 실전은 다르다는 걸 말이다.
그리고 태범의 눈앞에서 이들이 몸소 보여주고 있었다.
얼굴에 가면을 쓰고 서로의 비위나 맞춰주며 이익을 위해서 뭐든 하려는 행동들은 책이 아닌 사회에나 배울 수 있는 것들이었다.
“자 약주 한 잔씩 어떠십니까.”
장정국 팀장은 언제 술을 시켰는지, 그의 손에는 빨간색 술병이 있었고 사람들에게 한잔씩 따라주며 술을 권했다.
대낮부터 웬 술이겠나 하겠지만 딱 한 잔은 약주라며 애써 술을 권하고 있었다.
“자…… 우리 회계사님들 모든 일 잘되시길 바랍니다.”
* * *
“주말에도 일하는 것 보니까 많이 바쁜가 봐?”
어머니는 태범의 책상 위에 사과가 담긴 접시를 올려놓으며 말했다.
주말임에도 불구하고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 일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원래 바쁠 땐 많이 바쁘고, 쉴 땐 많이 쉬어.”
“그래도 주말에는 쉬면 안 되는 거니?”
어머니는 태범의 연이은 일에 주말까지 집에서 일을 하니 혹시 이러다 과로로 쓰러지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있었다.
“어차피 언젠가 내가 해야 할 일인데 미리 하는 게 좋잖아.”
“그래도 좀 쉬엄쉬엄해야지. 사람이 다 먹고 자고 하는 건데.”
“알았어. 조금만 하고 쉴게. 원래 조금 있다가 낮잠 자려고 했었어…….”
“그래, 아들이 알아서 잘 하겠지. 쉬면서 해…….”
“응.”
어머니의 말에는 걱정과 우려가 섞여 있었지만 속으로는 아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에 뿌듯해하고 있었다.
그렇게 어머니는 과일 접시를 놓고 방을 나갔다.
그리고 어머니가 방을 나간 걸 확인한 태범은 다시 하던 일을 계속했다.
혹시 어머니가 볼까, 덮어놨던 노트를 폈다.
노트의 제목은 ‘영월식품 분식회계.’
태범은 그동안 영월식품에서 검토했던 자료들을 집에 돌아와 자신의 노트에 작성하고 있었다.
폰 노이만의 암기력을 통해 머릿속에 집어넣은 자료들을 하나씩 노트 위에 적어나갔다.
계정 과목, 금액, 계정에 대한 상세내역까지, 그 누구도 생각지 못한 곳에서 영월식품의 회계 장부가 작성되고 있었다.
그리고 워렌버핏의 기업 분석력으로 회계 기록에 대한 문제점을 정확히 밝혀내고 있었다.
‘이건 언젠가 터진다.’
생각보다 심각한 상황에 태범은 혀를 차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영월식품의 모든 서류를 검토한 건 아니기에 전체적인 분식 회계는 알 수 없지만 분명 회계 기록에 허점이 많은 건 사실이었다.
그저 수익, 비용만 검토했을 뿐인데 많은 분식 회계가 나왔고 아마도 채권이나 부채, 매출액과 관련된 회계에서도 문제가 나올 것으로 보고 있었다.
‘지금까지 버틴 것도 용하네.’
분명 작년에도, 재작년에도 회계 감사를 받았을 텐데 회계 감사의 ‘적정 의견’을 받았다는 건 모종의 거래가 있지 않은 이상 있을 수가 없었다.
* * *
영월식품의 중간 감사가 끝나고 박철중 전무는 이번 감사에 투입했던 회계사들을 격려하기 위해 회의실로 불러 모았다.
“이번 영월식품 중간 감사 다들 수고 많았어요.”
테이블 상석에 앉아있는 박철중 전무는 회의실에 모인 회계사들에게 수고의 말을 건넸다.
“아닙니다. 이 모든 게 전무님 덕이죠.”
“제가 뭘 한 게 있다고 그럽니까, 다 현장에서 뛰어준 여러분이 있었기에 일이 잘 풀릴 수 있는 겁니다.”
박철중 전무의 말꼬리마다 서수철 부장은 아부성 멘트를 날려대며 관심을 갈구하고 있다.
“기존에 같이 일하던 분도 마찬가지고 저기 태범 씨랑 영미씨도 이번에 아주 잘하셨어요.”
신입은 태범과 영미에게는 엄지까지 들어 올리며 칭찬해줬고 영미는 전무의 칭찬에 입꼬리가 귀에 걸릴 것만 같았다.
“이번 중간 감사도 조용히 넘어가서 다행이에요. 저희 팀에게 가장 우선되는 건 고객의 안정입니다. 잘들 아시죠?”
영월식품의 중간 감사는 큰 문제 없이 지나갔다.
분명 수정해야 할 사항이나 내부 통제에 대한 개선 권고가 필요했지만 아무 일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넘어갔다.
이는 박철중 전무를 입김이 없다면 이뤄질 수 없는 일이었다. 이를 깨달은 태범은 박철중을 중심으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음은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태범뿐만 아니었다.
다들 알면서 모르는 척하는 것일뿐 입 밖으로는 쉽게 이야기하지 않지만 다들 암묵적으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박철중 라인은 보이지 않게 연결돼있었다.
“여러분들이 앞으로도 이렇게 고객들의 요구에 잘 맞춰주면 분명 얻는 게 많이 있을 겁니다. 제가 장담합니다.”
태범은 속으로 ‘이게 아닌데……’ 라는 마음을 품으며 씁쓸해하고 있었다.
박철중은 감사 보고서의 ‘적정 의견’을 돈 주고 거래를 하고 있는 것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원칙상으로는 회계사들이 기업의 주주들에 의해 고용되어 경영자의 재무제표를 감사하는 것이지만 사실상 회계사들의 고용은 주주보다는 경영자들이 큰 경우가 많았다.
결국 경영자가 오너이며, 오너가 곧 주주이기 때문에 말이다.
어쩔 수 없이 경영자의 입김이 큰 건 사실이지만 이렇게까지 비리의 한가운데 서 있을 줄은 몰랐다.
“그럼 다음 감사 때도 잘 부탁드립니다.”
“당연하죠. 전무님이 시키시는 일 모든 따르겠습니다!”
서수철 부장의 알랑방귀 소리를 끝으로 박철중 전무의 말을 끝났다.
“태범 씨, 잘 했어요. 앞으로도 잘 해봐요.”
“아…… 네.”
회의장을 나서려는 태범의 어깨에 박철중 전무가 손을 올리며 말했다.
그의 친근한 태도에 일단 대답을 했지만 영 꺼림칙할 수밖에 없었다.
태범이 박철중 전무와 손을 잡을 때 우려했던 게 이런 것이었다.
과연 그의 줄이 단단한 동아줄일까, 썩은 동아줄일까.
그리고 태범이 결론을 내린바 박철중 전무의 줄은 언젠가 끊어질 썩은 동아줄이었다.
그의 동아줄을 잡고 잠깐은 위로 올라가 호사를 누릴 수 있겠지만 언젠가는 바닥으로 떨어질게 눈에 보였다.
그렇기 때문에 태범은 박철중 전무의 동아줄을 잡는 척 손끝만 살짝 걸쳐둘 생각이었다.
그리고 박철중 전무의 썩은 동아줄이 끊어지기 전, 먼저 그 줄을 끊고 그를 이용할 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