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60
“여기서 내려주세요.”
“네, 8,200원입니다.”
이른 아침 태범은 택시를 타고 오늘부터 일할 필드인 영월식품 본사로 갔다.
‘와, 건물 봐라. 이거.’
택시에서 내린 태범에 눈앞에 보이는 건 높이 솟아 있는 빌딩이었다.
역시 대기업이라 다른 걸까 이전 기업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영월식품의 본사는 강남에 커다란 빌딩을 통째로 사용하고 있었다.
‘저기 꼭대기에는 누가 있을까…….’
정장을 입고 지나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멈춰선 태범은 빌딩의 가장 위층을 바라봤다.
그리고 항상 이런 빌딩을 보면 저 위에서 누군가 밑을 내려다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저기서 내려다보면 기분이 어떨까…….’
저 자리에 서서 서울 시내를 한눈에 볼 수 있을 때가 온다면, 그때의 기분은 세상을 다 가진 것만 같을 것이다.
영화나 드라마 같은 곳에 보면 높으신 분들이 거대한 거울로 되어있는 창 앞에 서서 밑을 내려다보곤 한다.
그만큼 건물의 꼭대기는 힘의 상징이었고 어쩌면 태범이 꿈꾸던 장면이기도 했다.
‘나도 언젠가는 저곳에 있을 날이 오겠지.’
태범은 언젠가 서울 시내가 내려다보이는 저 높은 곳에 올라갈 자신을 상상했다.
그리고 상상이 더해질수록 입꼬리가 저절로 벌려지고 있었다.
“어! 태범 씨 맞죠?”
빌딩 앞에 서서 잠시 상상에 빠져있는 태범을 누군가 불렀다.
“안영미 씨?”
“네, 오랜만이에요. 여기서 만나네요. 영월식품?”
“네, 영월식품이요. 영미 씨도?”
“네.”
태범의 이름을 부른 사람은 안영미였다.
태범의 동기이자, 해외 연수에서 같은 조가 되어 친해진 사람이었다. 물론 그 이후에는 필드에 나가는 일이 많았기에 얼굴을 보기가 힘들었다.
“이렇게 같이 일하게 되니 반갑네요.”
“그러게요. 여기서 태범 씨를 만날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그래도 아는 얼굴과 함께 일을 해서 다행이다.
게다가 붙임성 있는 성격을 가진 안영미와 함께한다면 이번 일은 꽤나 재밌을 거라 생각했다.
“근데 뭘 그렇게 웃고 계셨어요?”
“네?”
“방금 활짝 웃고 계셨는데. 무슨 좋은 일이라도 있어요?”
“아니요. 그런 건 아니고 오늘 이곳에서 첫날인데 웃으면서 시작하면 좋잖아요?
태범은 다시 한번 아까 지었던 미소 그대로를 지으며 안영미에게 말했다.
“성격이 참 긍정적이시네요.”
긍정적인 마음이 안영미에게 전달됐는지 그녀도 태범을 따라 미소를 지었다.
“태범 씨 들어갈까요?”
안영미는 자신의 손목시계를 한 번 보더니 건물 입구를 가리키며 말했다.
“네, 들어가요.”
그렇게 태범과 영미는 영월식품 본사 건물 안으로 발을 옮겼다.
“상정회계법인에서 나온 회계사입니다. 어디로 가면 되죠?”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강태범 그리고 이쪽은 안영미입니다.”
“잠시만 확인 좀 하겠습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보안 게이트를 통과해야만 했다.
그리고 태범과 영미는 안내데스크로 다가가 신원을 밝히며 출입증을 발급받고 있었다.
“저기 신분증 좀 보여주시겠어요?”
“네.”
어느 회사든 요즘은 보안이 까다로워 출입하기가 쉽지 않았다.
태범과 영미는 신분증을 건네며 출입 허가가 날 때까지 기다렸다.
“저기 상정회계법인에서 오셨나요?”
“네, 맞습니다.”
안내 직원이 출입증을 발급하려는 사이, 출입 게이트 쪽에 있던 한 직원이 태범에게 달려오더니 신원을 물었다.
“아이고! 죄송합니다. 기다리게 해서. 저기 아가씨, 회계사분들 기다리게 하지 말고 오면 나한테 바로 말해요. 내가 옆에 있을 테니까!”
“네…….”
출입증을 건넨 직원은 안내 직원에게 쏘아붙이는 어투로 말했다.
아마도 출입증 문제 때문에 서로 일이 엇갈린 듯 보였다.
직원의 손에는 출입증 목걸이가 잔뜩 들려있었고, 태범과 영미에게 한 개씩 나눠줬다.
“중간감사 때문에 오신 거죠?”
“네.”
“이쪽으로 모시겠습니다!”
태범은 잠깐 식당에 온 게 아닌가 착각이 들었다.
직원은 허리를 살짝 굽힌 채 과대한 손동작으로 태범과 영미를 사무실로 안내를 하는데 마치 일본 식당의 서비스를 보는 듯했다.
“혹시 오시면서 불편하신 점은 없으셨나요?”
“네? 불편한 점이요?”
“네, 혹시 불편한 점이 조금이라도 있으시면 바로 말씀해주세요. 저는 회계팀의 장정국 과장입니다.”
“아…… 네.”
장정국 과장은 태범와 영미에게 본인의 명함을 한 장씩 건네줬다.
“여기가 회계사님들이 쓰실 사무실입니다. 필요한 게 있으시면 언제든 연락주세요. 바로 받도록 하겠습니다.”
“네…….”
“저는 그럼 다른 회계사분들 안내해드리러 내려가 보겠습니다.”
장정국 과장은 뭔가를 말할 때마다 허리가 살짝 굽혀져 마치 내시처럼 행동했다.
온몸에 친절이 배어있는 것 같은데, 태범은 이런 과잉친절에 오히려 거부감을 느끼고 있었다.
“뭐야? 신입 둘이 같이 왔네?”
태범과 영미가 문을 열고 사무실로 들어가자, 이미 대기하고 있던 서수철 부장이 둘을 맞이했다.
“안녕하십니까. 강태범이라고 합니다.”
“그래, 자네 이야기는 많이 들어서 잘 알지. 영미도 왔구나.”
“네, 안녕하세요.”
안영미와 서수철 부장은 서로 아는 사이인 듯했다.
“전무님이 태범씨를 그렇게 이야기하던데, 어떻게 전무님 마음을 사로잡았나 봐? 허허.”
서수철 부장은 태범을 지그시 보며 말했다.
“박철중 전무님 말씀인가요?”
“그래, 박철중 전문님이 자네를 마음에 쏙 들어 하던데.”
“아! 감사합니다.”
역시 박철중 전무와 관련이 있는 감사 업무였다.
첫 만남부터 박철중 전무 이야기를 늘어놓다니 말이다, 태범이 추측하기에 이곳에 모인 회계사들은 모두 박철중 전무와 손잡은 사람이 아닐까 싶었다.
나머지 회계사들도 하나둘 모이더니 총 9명의 회계사가 사무실에 모였다.
“안녕하십니까! 부장님.”
회계사들이 모두 모이자, 영월식품의 회계팀에서 인사차 사무실을 들렀다.
그리고 그들 중 가장 윗사람으로 보이는 사람이 허리를 숙이며 인사를 건넸다.
‘이 기업의 종업원들은 인사를 따로 교육받았나? 어떻게 다들 저러지…….’
저 사람 역시 허리를 90도 가까이 굽혀 인사를 하는데, 태범에게 낯선 모습이었다.
“오랜만이네요.”
“네, 잘 지내셨습니까?”
“저야. 잘 지냈죠. 오히려 걱정할 분은 팀장님이 아닙니까?”
“아닙니다. 부장님 덕분에 저희는 일이 모두 잘 풀렸습니다.”
무슨 말을 하는지 속내는 전혀 알 수 없었지만 서수철 부장이 회계팀에게 뭔가 도움을 준 모양이다.
“잘 풀렸으면 다행이네요. 그나마 쌓아온 이미지가 있어서 다행이지, 잘못했다가는 끝장날 뻔한 거 잘 아시죠?”
“네, 잘 알고 있습니다. 모두 회계사님들 덕분입니다.”
“그러니까, 다음부터 조심하자고요. 아직도 많잖아요?”
“아. 물론입니다. 명심하겠습니다.”
“알았어요. 그럼 저희 업무 시작할 테니 필요한 게 있으면 부르겠습니다.”
“네, 알겠습니다.”
한눈에 봐도 서수철 부장이 갑(甲)의 위치에 서 있고, 회계팀이 을(乙)에 있는 거로 보였다.
역시나 사회는 어디를 가든 갑과 을은 존재했다.
이곳에서만큼은 무기를 쥐고 있는 쪽은 회계사인 듯 보였다.
아직 정확히 판단이 서지는 않지만, 태범은 직감으로 갑을 구조를 느낄 수 있었다.
“일들 시작하자고!”
“신입들은 손익 계산서 비교하고, 나머지는 채권이나 부채에 대해 검토해.”
“네!”
서수철 부장의 지시가 내려지고 회계사들은 바로 자신의 업무를 빠르게 진행했다.
각자 능숙하게 노트북을 켜고 관련 서류들을 보며 이상한 점이나, 특이점을 찾아내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나 이번에도 태범의 업무속도에 동료 회계사들은 놀라워하고 있었다.
태범과 같이 감사 업무에 참여했던 몇몇의 회계사들을 제외하고는 이런 광경을 처음 목격했으니 말이다.
“그렇게 빨리하면 뭐 보여?”
“내버려둬요. 저 친구 저래 봐도 일 처리는 실수 없이 하는 사람이에요.”
“저렇게 대충 보는데요?”
“저 친구는 우리랑 다르다고 생각하세요. 저게 대충 보는 것 같아도 지금 얼마나 몰입해서 일하고 있는 건데요.”
“그런가요…….”
태범을 처음 보는 전우현 대리는 역시나 우려 섞인 말을 하고 있지만 옆에 있던 양현성 이 아무런 걱정하지 말라며 걱정을 덜어줬다.
이미 태범과 두 번이나 같이 일을 해본 양현성의 입장에서는 태범의 능력에 충분히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
‘어! 뭔 접대비가 이렇게 많이 나가!’
태범은 비용을 검토하는 중,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접대비, 광고 선전비, 복리후생비 등 한 건에 수백, 수천의 금액이 움직이는 것들이 있었다.
하지만 이들 모두 비정기적이고 불규칙적인 금액을 나타내고 있었다.
재무상태에 변화의 폭이 크다면 확인해 볼 필요가 있었다.
태범은 아까 받은 회계팀 직원의 명함에 전화를 걸었다.
“네, 회계사 강태범입니다.”
“아! 네, 네, 네.”
보이지는 않지만, 왠지 회계팀 직원은 두 손으로 전화를 받고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그의 말투에는 과잉된 친절이 묻어있었다.
“여기 복리후생비 관련해서 증빙 자료 좀 부탁드립니다.”
“뭐 문제라도 있으십니까?”
“문제라기보다는 검토할 부분이 있어서요.”
“아. 그렇습니까, 저희가 바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전화 통화 후 얼마 있지 않아, 회계팀 직원 한 명이 서류가 담긴 박스를 끌차를 끌며 사무실로 가져왔다.
“여기 복리후생비 관련 서류들 가져왔습니다.”
“어우. 많이 있네요. 여기까지 가져오느라 힘드셨겠네요. 감사합니다.”
태범은 회계팀이 가져온 산더미 같은 서류를 건네받았다.
확실히 식품 관련 회사라 그런가, 비용처리와 관련된 서류들이 엄청났다.
‘하…… 뭐야 순서가 뒤죽박죽이잖아.’
태범은 서류를 넘겨보다가 한숨을 크게 쉬었다.
잘나가는 기업치고는 일을 제대로 하는 게 맞는지, 비용에 관한 서류저리가 제대로 되어있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포기할 태범은 아니었다.
추측에 불과하지만 뒤죽박죽 섞여 있는 서류 속에는 뭔가 숨기는 게 있을 것만 같았다.
태범은 포기하지 않고 능력을 최대한 이용해 서류를 검토했다.
슥슥.
서류를 넘기는 소리가 태범의 열정을 말해주듯 사무실 내에 가득 찼다.
‘도대체 이게 다 뭐야?’
시간이 지나고, 태범의 눈앞에 보이는 비용과 관련된 영수증들이 보였다.
명품 가방에 피부 관리 이용권, 휘트니스 이용권 등 사치 좀 부릴만한 사람들이 사용한 것들이다.
이게 정녕 직원들의 복리후생비에 쓰인 것들일까 아니, 어떤 회사가 직원에게 명품 가방을 주고 고급 피부 관리 이용권을 줄까. 게다가 식품회사에서 말이다.
접대비라 해도 말도 안 되는 물품과 가격이었다.
이건 회사 내에서 개인적으로 사용한 것들이 분명했다.
“저기 부장님, 영업비와 관련해서 법인카드로 사치품을 구매한 흔적이 있는데 이거 보고 내용 아닙니까?”
필드에 오기 전 강인후 차장이 충고한 대로 태범은 이 사실을 감사책임자인 서수철 부장에게 먼저 알렸다.
“뭐? 문제 있어?”
“네, 이 점에 대해 확인해봐야 할 것 같아요.”
태범은 증빙 자료를 손으로 가리켰고, 이를 본 서수철 부장의 표정은 좋지 않았다.
“그런 건 아무것도 아니니까, 여기 내부에서 처리하게 냅둬.”
“네?”
어이없이 돌아온 서수철 부장의 대답에 태범은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예상했던 답변은 이게 아닌데 말이다.
“그래도. 내부통제제도의 부실점이 발견된 건데 이야기라도…….”
“이야기 안 해도 다 알아. 여기 있는 회계처리 모두 회계팀에서 한 건데 지들이 한 것을 지들이 모르겠어?”
서수철 부장은 태범의 질문이 뭔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며 대답했다.
‘설마…… 이게 강인후 차장님이 그렇게 주의를 줬던 이유인가.’
분명 눈앞에는 문제점들이 보였지만 서수철 부장은 스스로의 장님이 된 것 마냥 안 보이는 척 대수롭지 않게 넘기고 있었다.
그저 눈 가리고 아웅 하는 듯, 뭔가를 숨기는 듯했다.
어쩌면 이게 강인후 차장이 말했던 눈치껏 하라는 의미였을까 싶었다.
“네, 알겠습니다.”
태범은 납득할 수 없지만 일단 자신의 의견을 접기로 했다.
삼보전진을 위해 일보후퇴 할 필요가 있었다.
태범은 본인이 도대체 무슨 손을 잡고 어떤 라인을 탄 건지 정확히 파악할 필요가 있었다.
일단 자신이 발견한 문제에 대해서는 덮어두기로 하고 자리에 앉아 다시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혹시 모르니 일단 머릿속에 집어넣자!’
일단 후퇴를 하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증거라도 가져야만 했다.
정보가 곧 자산이자 무기가 될 수 있는 시대.
이곳의 자료들을 복사라도 해가고 싶지만 자료에 대한 외부유출은 철저히 금지되어있다. 하지만 태범은 그 누구도 상상치 못한 방법으로 자료들을 습득하기 시작했다.
태범은 폰 노이만의 암기력을 이용해 지금 검토하고 있는 자료들을 머릿속에 집어넣는 것이다.
태범의 머리에는 ‘영월식품 회계자료’라는 가상의 책 한 권이 만들어졌고 자료 전부를 천천히 이미지화시키며 이곳에 암기시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