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58화 (58/188)

# 58

“다녀왔습니다.”

“그래, 왔냐.”

집에 돌아올 때쯤이면 오현택은 기진맥진했다.

현택의 인사에 그의 어머니는 잠깐 시선을 돌리나 싶더니 금세 TV로 눈이 돌아갔다.

“저년이 나쁜 년이라니까!”

“엄마! 그건 아니지, 남자도 잘 못 한 건 있잖아.”

어머니와 백수인 오현택의 누나는 드라마를 보며 열띤 토론 중에 있었다.

현택이 집에 들어오든 말든 그들에게 있어서 별 신경 쓸 문제는 아니었다.

그가 처음 회계사 시험을 도전한다고 했을 때는 부모님은 반기며 적극적으로 밀어줬으나 지금은 거의 자포자기한 심정이었다.

졸업한지도 이제 4년, 20대 후반을 달리고 있지만 여전히 부모님의 용돈을 받아쓰며 안 되는 공부만 붙잡고 등골만 빼먹고 있으니 그 누구도 이를 반겨주지는 않을 것이다.

“왈왈!”

“뽀삐! 너밖에 없구나.”

밤늦게까지 공부하고 돌아온 현택을 격하게 맞이해주는 건 집에서 키우는 강아지인 ‘뽀삐’밖에 없었다.

현택은 뽀삐를 한번 쓰다듬더니, 부모님의 눈치를 힐끗 보고 방으로 들어갔다.

원래라면 바로 침대에 뻗어 잠을 잤을 현택이었지만 정말 이번이 마지막 기회라고 생각하고 미치도록 공부를 할 생각이었다.

‘간절해 져야 해!’

오늘 현택은 태범의 특강에서 얻은 게 있다면, 바로 간절함이었다.

태범이 간절함을 강조했듯, 현택에게 유일하게 남은 건 합격에 대한 간절함 뿐이었다.

눈꺼풀이 천근만근 무거워지고, 허리가 찢어지듯 아파와도 결국 책상 앞에 앉았다.

“하…….”

현택은 펜과 오늘 공부할 책을 가방 속에서 꺼내는데 한숨이 저절로 내뱉어졌다.

노력과 결과가 비례하면 얼마나 좋을까 본인은 이렇게 죽도록 열심히 하는데 일이 안 풀리니 가끔 생각해보면 헛짓하는 게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지금도 마찬가지 독서실에서의 고난에 이어 집에서 까지…….

이번에는 정말 합격하지 않으면 죽고 싶은 심정이었다.

피곤한 몸과 함께 부정적인 생각이 드니 이대로 공부하기는 힘들 것 같았다.

현택은 그대로 화장실로 이동했고 수도꼭지를 가장 차갑게 틀어 차가운 물로 정신을 번뜩 깨웠다.

“후…… 후…….”

그러곤 자신의 뺨을 손바닥으로 강하게 내리치며 속으로 외쳤다.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정신을 차리고 마음속으로 각오를 다지며 다시 방으로 들어왔다.

앞머리 끝이 마치 땀에 젖은 것처럼 축축이 젖은 채로 책상 앞에 앉았다.

그리고 오늘 태범이가 건네준 노트를 책상 위에 펼친 뒤 펜을 잡았다.

‘어려워.’

태범의 노트를 받고 바로 고시반 독서실에서 문제를 풀어 봤지만 절대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문제를 풀기 위해서는 수많은 공식을 거쳐야 했으며 이는 답을 내놓으라고 만든 문제이기보다는 이해력을 높이기 위한 문제였다.

“음…….”

어떤 문제는 아예 시작도 못한 채 그저 손으로 팬만 돌려댈 뿐이었다.

‘이런 문제를 어떻게 만든 거지…….’

현택은 한 번 더 태범의 재능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꽤 난이도 있는 문제임에도 불구하고, 문제가 몰입을 가져다주었다.

단 한 문제에는 여러 과목의 문제가 응용되어 있었고 보물찾기하듯 하나씩 이를 해결해야 했다.

마치 게임을 하면서 한 단계씩 클리어해가며 앞으로 나가는 기분이었다.

어렵지만 재밌다.

태범의 문제는 이 한 문장으로 표현이 됐다.

“오호!”

마치 고기를 잡아주기보다는 고기를 잡는 법을 알려주고 있는 듯한 문제였다.

예를 들어 어린아이에게 덧셈, 뺄셈 원리를 직접적으로 가르쳐주는 게 아니라 스스로 답을 찾을 때까지 생각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같았다.

분명히 어려운 문제이긴 했지만 차근차근 하나씩 공식을 통해 풀어가며 얻어지는 쾌감이 있었다.

분명 사람의 몰입을 이끌어내는데 가장 최적화된 문제인 듯 보였다.

그렇게 현택은 노트에 있는 문제를 풀며 태범이 특강에서 말했던 ‘몰입’을 경험할 수 있었다.

어느새 창문 밖은 날이 밝아 왔고 현택은 그제야 자신이 문제에 푹 빠져 몰입했으며 밤을 샜다는 걸 알 수 있었다.

* * *

1주일 후, 상정회계법인 감사1본부 사무실.

“태범아, 필드 첫날에 횡령 사건 하나 처리했다며?”

대표 아들인 이효준이 작업하고 있는 태범의 뒤에서 어깨동무를 하더니 말을 걸어왔다.

분명 같은 곳에서 일하지만 효준은 필드로 끊임없이 외근을 나가는 바람에 얼굴을 자주 보지는 못했다.

태범 역시 한아름상사에 이어 국제건설의 중간감사를 마치고 오랜만에 사무실에 들어온 것이었다.

사실상 감사 기간에는 같은 팀이 아니면 얼굴을 마주치는 일은 흔치 않았다.

“어떻게 알았어?”

“어떻게 알긴 같은 데에서 일하는데 비밀이 어딨어.”

“아…… 뭐 대단한 건 아니고 경리부 쪽에서 잠깐 돈 가지고 장난질 한 거였어. 아마 사내에서 논의하고 일단 경찰에 인계한 걸로 알고 있는데…….”

“그래도 한 건 했으니 대단하네.

효준은 태범의 어깨를 토닥이며 성과에 대해 칭찬을 건넸다.

“어? 너 그림도 그릴 줄 아냐?”

“응?”

효준은 태범의 책상 위에 있는 포스트잇을 보고는 말했다.

그 포스트잇 위에는 태범이 끄적거린 낙서가 있었다.

마치 의상 디자이너가 크로키(대상의 형태와 특징을 단시간에 포착해 빠르게 그러는 그림 기술)한 것처럼 검은색 볼펜으로 그려진 사람 형태의 그림이 포스트잇에 그려져 있던 것이다.

“너, 그림까지 그릴 줄 아나 보네?

“아? 이거. 아무것도 아니야. 그냥 가끔 손이 심심하면 움직일 때 있잖아. 그냥 낙서한 건데 뭐.”

국제 건설의 감사를 마치고 아직 일을 배정받지 못한 태범은 심심한 나머지 포스트잇에 낙서를 끄적거렸는데 그게 효준의 눈에는 나름 그림답게 보였나 보다.

현재 태범에게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미술 감각이 20%까지 스캔 된 상태였다.

분명 20%는 작은 수치에 불과했지만, 다른 능력들과 함께 시너지로 작용하니 미술 실력은 실제로 20% 이상을 발휘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형은 일 잡힌 거 있어?”

“난 내일부터 또 필드 나가야지. 지금 전기조서 검토하고 있어,”

“어디로 가는데?”

“나? 샘성전자.”

“와…… 아무리 중간 감사라 해도 그 정도 사이즈면 바쁘겠는데?”

“그만큼 인력이 많이 투입되니까, 크게 힘든 건 없을걸. 나도 처음이라 자세히는 모르겠네.”

‘대표 아들이라 다른 건가…….’

처음부터 대기업이자 대한민국의 일류기업인 샘성전자에 감사로 들어간다는 건 분명 힘이 있어서 그런 게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물론 회계사도 차석으로 합격했겠다. 능력도 부족한 게 없으니 가도 말이 안 나올 것이다.

“넌 아직? 배정 안 됐어?”

“차장님이 좀 있다가 일 있을 거라고 말은 했는데 모르겠어.”

저번 주에 있던 국제 건설에 이어 곧 또 다른 필드를 배정될 예정이었다. 태범은 강인후 차장의 업무지시만 기다리고 있었다.

“태범아, 혹시 이 문제 네가 만든 거야?”

필드를 배정해 준다던 강인후 차장이 들고 온건 다음에 맡을 기업의 감사조사가 아닌, 뭔가 인쇄된 A4용지 몇 장이었다.

‘뭔데 그러지?’

태범은 무슨 일인지 전혀 몰랐고, 강인후 차장이 건넨 A4용지를 건네받았다.

“어? 이거…….”

“네가 작성한 거 맞아?”

A4용지에 인쇄되어 있는 건 자신이 현택에 줬던 노트 속에 있는 문제였다.

자신의 노트를 복사한 걸로 보이는 게 자신의 필체와 완전히 똑같았고, 문제 또한 태범, 본인이 작성한 게 분명했다.

이게 도대체 왜 강인후 차장 손에 있는지는 의문이었다.

“네, 제가 작성한 건 맞는데. 이게 왜 여기에…….”

“아니, 아까 출판부에서 사람이 와서 이걸 나한테 주던데? 감사1본부 강태범을 찾는다하니까 내 밑에 있다 하니 전달해달라고 부탁을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직접 전달해주러 왔지.”

“출판부요?”

“우리 회사에서도 책 출판하잖아. 몰랐어?”

“아…… 알고는 있는데 그 부서랑 저랑 아무런 관련이 없을 줄 알았죠.”

상정회계법인에는 회계사들의 회계 업무만 하는 게 아니었다.

출판 업무도 도맡고 있었는데 자회사인 상정출판과 연계하여 회계, 세무, 금융과 관련된 책을 출판하고 있었다.

“차장님, 근데 이게 어떻게 출판부에 있는 거죠?”

“나도 자세한 건 몰라. 근데 출판부에서 태범이 네가 작성한 문제에 관심 있어 하는 것 같던데? 나도 잠깐 봤는데 문제가 장난 아니더라?”

“제 문제를요?”

“그래, 아마도 그 문제를 출판시키려는 것 같은데…… 알잖아. 여기서 책도 출판 하는 거. 회계사뿐만 아니라 재경관리사, 관리회계 같은 자격증 책도 여기서 다 만드는데 뭐.”

너무나 뜻밖의 말이었다.

일단 상정회계법인에 출판부가 존재하는 것조차 신기했지만 본인의 문제에 관심을 갖는 다는 것도 상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차장님, 저 잠시 전화 한 통화만 해도 될까요?”

“그래, 편한 대로 해. 일단 전화하고 바로 출판부로 가봐.”

“네, 알겠습니다.”

강인후 차장은 출판부에서 부탁한 모든 말을 전달해준 뒤 등을 돌려 자신의 책상으로 돌아갔다.

그리고 태범은 바로 오현택에게 전화를 걸었다.

“어! 태범아!”

태범이 오현택에게 먼저 전화를 거는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고시반에 있을 때 잠깐 식사를 같이 하자고 전화를 하는 걸 제외하고는 거의 연락하는 일은 없었다.

그래서 그런 걸까, 오현택은 태범의 전화에 놀란 듯 목소리가 높아졌다.

“형, 저희 회사에 출판부가 있는데 지금 거기서 연락이 왔거든요? 제가 형한테 준 문제를 가지고 있던데 이거 어떻게 된 거에요?”

“회사에 출판부가 있어?”

“네, 회계 공부하다가 책 보시면 상정회계법인 이라고 찍힌 것들 있잖아요. 그거 다 저희 쪽에서 만드는 거예요.”

“아…… 맞다. 본거 같아. 근데 그게 왜 거기 있어?”

“제가 그걸 물어보려고 전화한 거예요. 형 그거 다른 사람한테도 보여줬어요?”

“어? 아. 같이 공부하는 몇몇 애들이랑 복사해서 보긴 했는데, 그러면 안 되는 거야? 진짜 미안하다.”

태범의 말 뉘양스를 오해한 현택은 빠르게 사과에 나섰다.

태범은 전혀 뭐라 할 생각은 없었고 그저 궁금해서 전화를 한 것뿐인데 말이다.

“아니, 괜찮아요. 전 그냥 궁금해서 전화 건 거예요. 같이 돌려보면 당연히 좋죠.”

“아? 그래?”

“그냥 궁금하잖아요. 어떻게 이게 저희 회사까지 들어왔는지.”

“그건 나도 잘 모르겠는데, 아마도 내가 문제를 건네준 친구들 중에 어떻게 하다가 밖으로 나간 게 아닐까?”

“그럴 수도 있겠네요. 알았어요, 형. 공부하느라 바쁘실 텐데…… 제가 다음에 따로 연락드릴게요.”

“응, 진짜 언제든 전화 줘. 나 네가 부르면 무조건 나갈 테니까.”

“네, 알겠어요. 그럼 고생하세요.”

“응, 알았어.”

대충 어떻게 자신의 문제가 회사로 흘러왔는지는 알 것 같았다.

굳이 회계사가 아니더라도, 같은 분야를 공부하는 사람끼리 정보를 공유하다가 이곳까지 전해진 듯 보였다.

일단 출판부에서 호출을 했으니 그곳에 가봐야 할 것 같았다.

태범은 자신의 문제가 복사된 종이를 들고 아래층에 있는 출반부로 향했다.

같은 건물에 있는 부서라 할지라도 출판부는 회계사가 거의 가는 일이 없었기에 태범이 역시 처음 가는 곳이었다.

“저기 감사1본부에서 일하는 강태범이라 합니다. 혹시 여기 출판 담당자분이 누구신지..”

“아! 강태범 회계사님이세요?”

“네.”

“잠시만요…….”

태범이 자신의 신분을 밝히자 출판부 직원은 잠시 어디론가 사라졌다.

그러고는 또 다른 직원이 태범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저기 강태범 씨?”

“네, 맞습니다.”

“반갑습니다. 출판부 권희은 차장입니다.”

“네, 반갑습니다.”

“태범 씨가 만든 문제 잘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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