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7
‘현택이 형 각성이라도 했나?’
태범은 가장 앞줄에 앉아있는 오현택이 자꾸만 신경 쓰였다.
마치 호랑이가 사슴을 사냥하기 위해 바라보는 눈빛.
시선이 태범의 얼굴에서 절대 벗어나지 않으며 손은 펜을 쥐고 노트 위에 있었다.
심지어 책상 위에는 스마트 폰은 놓여있었고 태범의 강의를 녹음이라도 하려는 듯 녹음 장치가 켜져 있었다.
어쩌면 오현택에게는 정말 마지막 기회일지도 모른다.
어떻게 생각해보면 죽기 살기로 하는 게 당연할지도 몰랐다.
‘내년에는 꼭 합격해야 할 텐데…….’
오현택을 보자니 가슴이 찡해지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분명 3자 입장에서 볼 때 열심히 하는 것 같았지만, 뭐가 문제인지 1차의 합격문도 넘기지 못하고 벌써 학교에 몇 년이나 묶여 있었다.
태범 본인이라면 진작 그만두고 딴 일을 했을 텐데, 끈기 하나만은 상을 줄 만큼 대단했다.
태범은 오현택에 대한 생각을 잠시 하다가 다시 말을 이어가기 시작했다.
“저는 교수님에게 처음 회계사를 권유받고 본격적으로 공부를 시작했을 때가 2학년 2학기부터였습니다. 그리고 다음 해에 바로 합격할 수 있었죠.”
“와!”
태범의 말에 학생들은 감탄사를 내질렀다.
사실상 1년도 공부하지 않고 회계사 1차에 합격한 셈이니, 이들로 하여금 태범은 소문대로 ‘전설’이었으니 말이다.
“짧은 시간 내에 합격할 수 있었던 이유는 마음가짐이었던 것 같습니다. 만약 이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다면 난 죽은 목숨이라는 마음으로 공부에 임했죠.”
“불합격이라는 가상의 인물이 내 옆구리에 칼을 들이밀고 있다고 생각해보세요. 그리고 불합격에 가까워질수록 그가 쥔 날카로운 칼날은 내 옆구리를 파고든다고 생각하면 절대 나태해질 수가 없습니다.”
태범은 시험 준비를 하는 데 있어서 절박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리고 싶었다.
태범 역시 본인이 절박하고 간절히 원할 때 눈앞에 마법처럼 나타난 스캐너의 능력을 보았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 말하는 절박함은 노력이었으니 스캐너와 다른 면은 있지만 어쨌든 절박함은 일을 일궈내는데 중요한 요소였다.
“우리는 현재에 살고 그 현재가 쌓여 미래가 만들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일이 있어서 내일로 미루는 습관은 좋지 않습니다. 정말 남들보다 죽기 살기로 해야만 최종 승리자가 될 수 있는 것이죠.”
이 이야기를 하며 태범은 과거 자신의 모습을 떠올렸다.
항상 뭘 하려던 간에 ‘내일부터 해야지’를 밥 먹듯 외쳤고 어느 순간 자신을 되돌아보면 어느 것도 이루지 못한 자신의 모습을 말이다.
현재의 일은 ‘현재의 나’가 처리해야지 이를 ’미래의 나’에게 떠넘긴다는 것은 본인 스스로에게 괘씸한 짓이었다.
“그럼 그 절박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어떻게 하느냐? 다음 단계는 ‘몰입’입니다.”
학생들은 태범의 말에 따라 손이 움직였다.
이미 그들의 노트 위에는 ‘몰입’이라는 단어가 적혀있었다. 태범이 말하는 모든 걸 스펀지처럼 흡수할 기세였다.
“제가 말하는 몰입은 뒤에서 누가 말을 걸어와도 모를 정도로 작업에 빠져있는 걸 말합니다. 눈 깜빡할 사이에 낮이 밤이 되고, 식사를 하는 것도 잊은 채 몰입하는 걸 말이죠.”
실제로 태범은 최근 몰입을 자주 경험했다. 과몰입이 아닐까 의심이 들 정도로 문제를 깊게 파고들다 보면 머릿속에 온전한 생각이 하나의 문제에 집중되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 수준에 맞는 난이도를 풀고 특히 바로 답을 보는 습관보다는 머리를 사용하는 걸 익히셔야 합니다. 회계는 화폐를 다루는 학문이라서 완벽한 계산이 이뤄져야죠. 답을 쫓기 보다는 본인만의 공식을 이루고 찾아내는 것이 중요합니다. 과정이 있어야 결과가 나타나는 법이거든요.”
이렇게 태범이 강의에서 말한 내용들은 대부분 추상적이었다.
족집게 선생처럼 문제를 짚어주는 것도 아닌, 그렇다고 비밀의 기법을 알려준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그런지 태범의 강의가 길어지고 별 내용이 안 나오니 학생들은 점점 집중력을 잃어갔다.
필기를 하던 손이 멈춰있고 하품을 하며 딴 짓을 하는 사람까지 생기고 있었다.
정말 마음만 같아서는 스캐너를 탁상 위에 딱! 올리고 마치 마법에 가까운 엄청난 광경을 보여주고 싶지만 이랬다가는 스캐너가 어디 미국의 비밀 연구소에 빼앗겨 연구가 될 테고 본인은 과학자들에게 해부가 되어 실험체로 사용되다 저 세상으로 갈 게 분명했다.
어쩔 수 없이 진실을 숨겨야만 했다.
“저에 대한 궁금한 점이나 질문이 있으신 분은 이야기 해주세요.”
그렇게 모든 강의가 끝나고 마지막으로 학생들에게 질문을 받았다.
“저기 어떻게 단시간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는지 자세한 비결이나 비법 같은 건 없나요?”
말이 끝나기 무섭게 중간에 있던 학생이 손을 번쩍 들어 질문을 했다.
역시나 이들이 원하는 건 자세한 비법과 비결이었고, 아예 밥을 떠먹여 달라는 말이었다.
“강의에서 말씀드렸다시피 자신의 마음을 잘 틀어잡고 공부에 몰입한다면 여러분도 저와 같이 합격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아…….”
결국 강의에서 했던 말 그대로 대답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질문자는 대답이 별로 마음에 안 들었는지, 표정이 별 만족스럽지 않아 보였다.
“시험공부는 어떤 책과 강의를 듣고 하셨나요?”
“전 사설 학원에서 나온 책들을 구매해서 공부했습니다. 2차는 모의고사를 위주로 풀었고요. 그리고 어느 정도 수준이 올랐을 때는 제가 직접 문제를 만들어 보기도 했고 저는 답을 찾는 공부보다는 이해를 중심으로 공부했네요…….”
평소 질문이라면 질색하는 사람들인데 오늘따라 태범에게 질문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태범은 ‘스캐너’이야기를 제외하고는 알고 있는 한 모두 이야기해 주려 애썼다.
물론 크게 영양가 있는 이야기가 아닌지라 호응은 별로 좋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질답이 이어졌고 마지막 오현택의 질문으로 강의는 끝났다.
“제가 회계사 공부를 오랫동안 했는데, 여전히 제자리걸음입니다. 회계사님이라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오현택은 후배이자 자신보다 어린 태범에게 정중히 회계사라는 호칭을 붙이며 질문을 했다.
“제가 선배님이 되지 않는 이상 대답을 드릴 수 없는 것 같네요. 만약 본인에게 약간의 희망이라도 보인다면 계속 이어나가긴 하겠지만 도저히 안 될 것 같으면 포기하는 게 옳다고 봅니다. 그건 본인 스스로가 느끼고 판단해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태범의 답변에 오현택은 입을 꾹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강의가 마무리되고 마치 파도에 떠밀려가듯 학생들은 강의실을 빠져나갔다.
“저기. 태범아.”
태범 역시 강의실을 나가려는데 오현택이 팔을 톡 치며 말을 걸어왔다.
“형, 오랜만이에요.”
“잘 지냈냐? 회계사 생활은 어때?”
“뭐 적성에 맞는 거 같아요. 아직은 딱히 힘든 건 없고요.”
“그래? 부럽네. 나도 얼른 너처럼 돼야 하는 데.”
오현택 앞에서 회계사 생활을 이야기하자니 태범은 괜히 미안해졌다.
회계사를 준비하는 고시생 중 가장 최장기로 공부를 했던 사람이었고 게다가 여전히 1차도 합격하지 못하고 머물고 있는 오현택을 보자니 안타깝기도 했다.
차라리 적성이 아니면 다른 일을 해보라고 권하고 싶지만, 후배인 태범이 그런 말을 할 입장은 아니었다.
“하…… 좀 쪽팔리긴 하다.”
오현택은 갑자기 자신의 머리를 긁적이며 한숨을 쉬었다.
아마도 오랫동안 공부했음에도 불구하고 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본인에 대한 부끄러움이 밀려온 듯했다.
게다가 한참을 늦게 시작한 태범의 앞에서 이러고 있으니 사실 체면이 많이 구겨진 건 사실이었다.
“쪽팔리긴 왜 쪽팔려요.”
기죽은 오현택의 모습에 태범은 어깨를 토닥여 주기 위해 손이 올라가려다가 멈칫하고 다시 내렸다.
괜히 위로해줬다가는 그에게 오만한 행동으로 보일 수 있고 어쩌면 후배에게 위로를 받는 것조차 치욕으로 느껴질 수도 있을 것이니 말이다.
“쪽팔린 것 맞지. 세월은 지나가고 다른 애들은 다들 사회에 나가 일하고 있는데 나만 여전히 이러고 있잖아.”
마지막으로 대화를 나눴을 때는 분명 자신감이 넘치던 형이었는데 어쩌면 그게 몸에 남아있던 마지막 자신감의 일지도 몰랐다.
지금은 자신감이 모두 사라져 실낱같은 간절함만 붙잡으며 겨우 시험 준비를 이어나가고 있어 보였다.
“내가 사실 네 강의를 엄청 기대했거든 이번에 너랑 같이 공부했던 현찬이랑 원욱이, 한석이 모두 회계사에 합격했잖아.”
“아…… 네.”
“그것 때문에 뭔가 있을 줄은 알았거든 태범이 넌 항상 남들과는 다르게 특별했잖아.”
“다들 열심히 해서 된 거죠. 저 때문에 된 건 아니에요. 저랑 같이 공부하기 전부터 1차에 합격했던걸요?”
“맞아. 그러긴 하지. 그런데 사람들이 하도 너 때문에 걔네들이 2차 시험에 붙었다고 하니까, 혹시나 비법이라도 있을까 해서.”
“비법…….”
오현택의 말에 태범은 잠시 고민에 빠졌다.
마음 같아서는 스캐너라도 빌려주고 싶지만 그건 당연히 불가능한 이야기였고 비법을 알려주자니 딱히 그럴 만 한 게 없으니 말이다.
“형, 그러지 말고 제가 만든 문제가 있는데 그거 가져다가 풀어보시겠어요?”
“네가 만든 문제?”
“네, 제가 여러 과목을 조합, 응용해서 만든 문제들이 있거든요. 그걸로 스터디원 들이 공부를 했기도 했고요. 조금이라도 도움이 될 거에요.”
스터디원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태범의 문제가 도움이 됐다는 소리는 했었다.
시험에 합격하고 버리려고 방구석에 처박아 놨는데 생각해보니 현택이 형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정말? 정말 그런 게 있어?”
눈꺼풀로 반쯤 잠겨있던 눈이 갑자기 왕방울만 하게 커지며 태범을 바라봤다.
“대단한 건 아니고 기존에 보지 못했던 문제들 일 거예요. 답을 찾는 문제라기보다는 그 과정을 이해하고 깨달을 수 있도록 만든 거죠.”
“진짜? 그런 게 있어?”
“제가 만든 문제 노트가 집에 있긴 한데 그거 나중에 시간 될 때 보내드릴게요.”
“미안한데. 혹시 시간이 되면 지금 주면 안 될까? 내가 너희 집까지 같이 갈게.”
얼마나 급하면 저럴까,
오현택은 당장이라도 태범과 같이 집에 쫓아갈 기세였다.
태범은 오현택의 절박감을 피부로 느낄 수 있었다.
“저 그러면 교수님한테 인사하고 나올게요. 기다려 주실 수 있죠?”
“당연하지. 그까지 것 몇 시간이라도 기다릴 수 있어.”
태범이 노트를 준다 하니 오현택은 기대감에 잔뜩 차 있었고 태범이 죽는시늉을 하라고 해도 할 것만 같이 반응하고 있었다.
태범은 잠시 교수님과 감독 실장님에게 인사를 건네기 위해 회계사반 사무실로 들어갔다.
그리고 잠깐이라고 했던 태범의 말과는 다르게 30분이 넘어서야 밖으로 나왔다.
교수님과 감독 실장님도 태범에게 궁금한 게 많았는지 질문을 무수히 쏟아냈고 특히 투머치 토커라는 별명답게 교수님의 한마디는 일반 사람들의 두 배는 됐으니 말이다.
“형, 오래 기다렸죠? 가죠.”
“아니, 오래 기다리긴.”
그렇게 오현택은 태범의 뒤를 따르며 태범의 집으로 향했다.
마치 산타할아버지의 선물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기대감에 잔뜩 찬 표정을 지으며 태범을 따랐다.
집은 학교에서 가깝기 때문에 금방 도착할 수 있었다.
“형, 잠시만 기다려요. 노트 가지고 나올게요.
집에 도착한 태범은 재빨리 집으로 들어가 노트 한 권을 들고 나왔다.
그리고 태범이 건넨 건 새것같이 빳빳한 노트 한 권이었다.
“이거야?”
“네, 제가 좀 날림 글씨라 보기 힘들 거예요. 너무 제 문제만 믿지 마시고, 시중에 나온 문제도 같이 푸세요.”
오현택은 태범이 준 노트를 휘리릭 넘기며 한번 살펴보았다.
노트에는 볼펜으로 빼곡히 문제가 작성되어있는데 한눈에 봐도 쉬운 문제는 아니었다.
서로 다른 과목들이 뒤섞여 짬뽕이 되어있었고 보통 회계사 시험에 나올법한 문제는 아니었다.
“정말 고마워. 진짜…….”
마치 비법서라도 넘겨받은 듯 오현택은 얼굴에 미소가 가시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