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
한아름상사 중간 감사 마지막 날.
“자 다들 수고 많았다.”
강인후 차장이 마지막 서류를 확인하고 서류철을 덮으며 일의 마무리를 알렸다.
한아름상사의 중간 감사가 5일간의 기간으로 끝이 난 것이었다.
일이 마무리되자 다들 퇴근할 생각에 싱글벙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다들 이대로 집에 갈 건 아니지?”
“네?”
“한잔 어때?”
강인후 차장이 손으로 소주잔을 집는 모양을 만들더니 눈에 보이지 않은 투명한 술을 입에 털어 넣었다.
그 순간 회계사들은 서로의 눈을 보며 눈치를 봤다.
짧은 시간에 이걸 가야 할까, 말까 고민을 한 것이다.
“가시죠!”
차장의 바로 밑 직급인 양현성 과장이 차장의 제안에 승낙했고 자연스럽게 다른 회계사들도 이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회계사들은 사무실에서 짐들을 빼고 사내 회계팀과 인사를 나눈 뒤 밖으로 나섰다.
“신입! 뭐 먹고 싶은 거 있나?”
메뉴 선택은 자연스럽게 막내인 태범에게 돌아왔다.
태범은 메뉴 선택에 이번에도 망설일까 싶었지만 오늘만큼은 단박에 선택했다.
“삼겹살 어떠십니까?”
“겹살이 좋지!”
이상하게도 고기가 당기는 날이었고 같은 일은 하는 사람들로서 같은 음식을 원하고 있을 것만 같았다.
다행히 강인후 차장은 마음에 드는지 집게손가락으로 허공을 가리키며 태범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태범은 출근하면서 미리 봐뒀던 가게들을 머릿속으로 떠올렸다.
암기력이 이럴 때 쓰일 줄은 몰랐다. 천천히 출퇴근길을 시뮬레이션 하며 주변 가게들을 떠올렸고 다행히 머릿속에는 고기집이 들어있었다.
태범은 그렇게 찾은 고기집을 향해 선임들을 안내했다.
“차장님, 앉으시죠.”
역시 사회생활을 오래 한 사람이라 달랐다, 양현성 과장은 차장이 앉을 의자를 빼주며 알랑방귀를 뀌고 있었다.
“차장님은 막걸리죠?”
“응, 당뇨 때문에 소주는 웬만하면 피해야지.”
“요즘 많이 괜찮아지시지 않으셨어요?”
“응, 이제는 인슐린 주사는 안 맞을 정도는 됐는데 그래도 관리는 해야지.”
강인후 차장은 당뇨를 앓고 있는 듯 보였다. 태범은 이제야 그가 살이 왜 삐쩍 말라 있는지 깨달았다.
“여기 삽겹살 6인분이랑 소주 3병, 막걸리 1명 주세요.”
태범은 이곳의 막내였기에 눈치껏 손을 들며 주문을 했다.
“태범 씨는 술 얼마나 해요?”
김양원 대리가 태범에게 주량을 물었다.
역시 회계사라고 다를 건 없었다. 대한민국에서 사회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술은 필수였기 때문이다.
“저는 그냥 소주 2병정도…….”
“어허, 보통 다들 2병이라고 말은 하죠. 하지만 술은 마셔봐야 아는 거 알죠?”
태범 본인이 느끼기에 술을 그렇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니었다. 그저 평범한 수준 정도라고 생각을 했다.
하지만 단 한 가지 사실이 있다면 지금껏 단 한 번도 취해서 기억을 잃었다던가 어디서 쓰러졌던 일은 없다는 것이다.
“가끔 술 못 마시는 사람도 있는데 사실 회계사 하면서 술은 어느 정도 마실 줄은 알아야 거든.”
“네, 익히 들었습니다.”
해외 연수에서 있던 영업 교육에서 들었다. 고객사 직원과 술 마시는 일이 잦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술자리를 가는 경우가 있다고 말이다.
“신입, 일은 할 만 하지?”
강인후 차장이 태범에게 물었다.
“네, 생각보다 괜찮은 것 같습니다.”
“하하하. 아직은 지옥 시즌을 경험해보지 못해서 그렇지”
“지옥 시즌이요?”
“그래, 12월 31일 재무제표가 결산되고 그 다음부터 1월부터 기말 감사가 시작되는데 그걸 지옥 시즌이라 부르지. 아마 그때는 지금처럼 회식하는 건 꿈도 못 꿀걸?”
12월부터 3월까지 회계사들이 가장 바쁜 달이었다.
1년 동안에 있었던 수많은 기업 활동의 재무결과를 감사하는 달이기에 회계사들의 손이 부족할 정도라고 들었다. 하지만 직접 경험해보지 못한 태범은 피부로 와닿지 않았다.
말 하는 사이 고기가 담긴 접시가 테이블 위에 올려졌다.
그리고 태범은 누가 시키지 않았지만 당연히 눈치껏 집게를 들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태범 씨, 어렸을 때 속독 배웠어요?”
“네? 속독이요?”
양현성 과장이 태범이 구운 고기를 집어 들며 물었다.
“네, 보니까 서류들을 빠르게 읽던데, 혹시 속독을 배웠나 싶어서…….”
속독이라 하면 글을 빠르게 읽는 기술을 말했다.
타고나는 사람들도 있겠지만 대부분 속독 교육을 받고 속독 기술을 습득하는 편이었다.
속독은 그저 읽는 기술일 뿐, 암기와 달라 학습에 그렇게 중요히 여겨지는 기술은 아니었다.
“아니요. 속독을 배운 건 아니고, 그냥 집중해서 읽다 보니까 이해가 금방 돼서 빠르게 넘겼던 거예요.”
“아, 한 번만 보면 이해가 된다고?”
“아뇨…… 그런 건 아닌데. 그냥 조금 빠른 정도?”
태범에게 속독 능력이 있는 건 아니었다.
그저 언어 이해력을 바탕으로 글의 내용을 빠르게 이해했고 수리 이해력으로 서류에 적힌 숫자들을 빠르게 계산 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암기력으로 정점을 찍어주며 한 번 본 서류는 절대 다시 보지 않으니 당연히 작업 속도가 빠를 수밖에 없었다.
“나도 처음 봤을 때 오해했다니까. 첫날에 보니까 서류를 대충 보는 것 같더라고? 그래서 내가 한소리 했잖아. 근데 그날 바로 횡령을 발견하대? 허허.”
강인후 차장은 첫날 자신이 태범을 오해했던 경험을 덧붙여 말했다.
“생각해보면 다행이야. 괜히 어리바리한 신입이 들어왔으면 아마도 아직 이 자리가 아닌 필드에서 있었겠지. 그러고 보니 양원이 너 생각나네.”
강인후 차장은 4년 차인 김양원 대리의 신입 시절을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양원이 처음 필드에서 감사 업무 볼 때 전기 조서 업그레이드 안 하고 한동안 업무 보다가 그날 반나절의 시간을 날린 적이 있었지. 그때 모르면 물어봐야 하는데 긴장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하하. 그때는 참 순수했어.”
강인후 차장의 말에 김양원 대리는 본인이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는지 그때를 떠올리며 웃음을 터트렸다.
아무리 유능해 보이는 사람일지라도 첫날에는 그럴싸한 에피소드 한 개씩은 있었다.
그때야 끔찍한 일이었지만 되돌아보면 웃을 수 있는 추억들이었다.
그렇게 회게사들은 술잔은 계속해서 기울였고, 서로의 속마음과 애환을 안주 삼아 한동안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 * *
한아름상사의 중간 감사가 끝났고 바로 주말이 이어졌다.
태범은 늦잠을 자며 나른한 아침을 맞이했다.
“아하.”
눈을 뜨자마자 허리와 팔을 쭉 펴며 기지개를 켰다. 그러고는 바로 머리맡에 놓인 스마트 폰을 확인했다.
[캐서린: 태범! 회계사 일은 안 힘들어?]
[캐서린: 아! 잠자는 시간이겠구나…….]
캐서린에게 메시지가 와있었다. 영국과 대한민국의 시차는 거의 반대에 가까워, 메시지를 바로 못 보는 경우가 많이 있었다.
[태범: 어. 괜찮아. 생각보다 적성에 딱 맞더라고.]
태범은 캐서린에게 답장을 보냈지만 아마도 그녀가 이 답장을 보려면 7시간 후쯤이 될 것이다. 지금 영국은 새벽이니 말이다.
잠깐 침대에 뒹굴며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다가 어느 정도 정신이 깨어진 것 같을 때 자리에서 일어나 컴퓨터 앞으로 다가갔다.
쉬는 날이면 투자하고 있던 주식 계좌를 점검하곤 했고, 오늘도 마찬가지로 확인에 나섰다. 게다가 아버지의 돈까지 묶여있으니 어느 정도 책임감은 가져야만 했다.
‘계속 오르고 있어…….’
전체적인 포트폴리오를 봤을 때 투자한 주식은 상승세를 보이고 있었다.
물론 개별적인 주식에서 마이너스(-)를 본 것도 있지만 이는 일시적인 하락일 뿐 가치 투자의 끝은 분명 상승으로 마무리될 거라 믿었다.
가치 투자자의 필요한 자질은 기다림이다. 주가가 잠깐 오르고, 내리고 했다고 시장에 크게 휘둘리면 안 되고 오직 기업의 미래가치를 보고만 가야 했다.
주식 점검을 마무리하고 태범은 화장실에 들어가서 세안을 하기 시작했다.
평소 쉬는 날이었으면 그냥 이대로 지냈겠지만 오늘은 특별한 날이었기에 꽃단장이 필요했다.
“오늘도 일 나가니?”
“아니, 볼일이 있어서 잠깐 나갔다 올게.”
세안을 마친 태범은 깔끔하게 니트와 청바지를 차려입고 머리를 다듬은 뒤 집을 나섰다.
교수님과 약속대로 오늘은 대학 고시반의 회계사 준비생들을 위해 특강을 해주러 가는 날이었다.
태범 본인도 현직 회계사이자 학교 선배에게 특강을 받았었고 이를 그대로 보답할 생각이었다.
‘무슨 이야기를 할까?’
태범은 길을 걷는 내내 바닥을 보며 생각에 빠져있었다.
시험 준비생들이 원하는 건 합격 비법이자, 생생한 공부 경험을 원하고 있을 것이다.
특강이라 하면 짧은 시간에 임팩트있는 정보를 전달해줘야 하는데 사실상 태범에게 그럴 만한 스토리는 없었다.
물론 능력을 줬던 스캐너 덕에 시험에 합격할 수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이걸 강의에서 이야기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느새 생각과 고민을 하고 길을 걷다 보니 눈앞에 학교 건물이 보였다.
매일을 오가던 길이자 캠퍼스였지만 이상하게 오늘만큼은 기분이 달랐다.
감회가 새로운 느낌 확실히 학생일 때와 사회인으로서 학교를 올 때는 느낌이 달랐다.
마치 어릴 적 추억에 담긴 고향에 온 느낌이랄까 이제는 공부하기 싫어 오고 싶지 않던 학교가 아닌 과거의 향수가 느껴지는 학교였다.
태범은 회계학과가 있는 경상대 건물을 지나 고시반이 있는 건물로 향했다.
“감독 실장님 안녕하세요.”
역시나 한결같이 고시반에는 유혜경 감독 실장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수험생에게만큼은 그 누구보다도 엄격한 분이지만 오늘만큼은 미소를 지으며 태범은 맞아 줬다.
“어 왔어? 오랜만이네.”
“잘 지내셨어요?”
“나야 잘 지낼 게 있겠어? 매일 똑같지. 뭐 그래도 태범이 너 때문에 우리 고시반이 위상이 좋아졌어.”
“정말요?”
“그래, 이번에 회계사 합격률 높았다고 학교에서 지원금 많이 나왔거든. 특히 태범이 네가 회계사 수석을 했던 이유가 컸지.”
“다행이네요. 잘 돼서.”
“저기 휴게실 가서 앉아있어. 내가 따뜻한 차 한 잔 가져와 줄게.”
“아니요. 괜찮아요.”
“아니야. 여기서 기다리고 있어. 아직 교수님하고 애들이 다 안 왔거든, 그러니까 좀 쉬고 있어.”
감독 실장이 언제 저렇게 친절했나 태범은 저런 모습이 낯설었다.
항상 날카로운 눈으로 주변을 살피며 학생들을 관찰하는 매서운 분이라 생각했지만 지금은 온화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태범은 감독 실장의 과도한 대접을 한사코 거절하려 했지만 감독 실장은 기어코 사무실로 들어가 따뜻한 커피 한잔은 타가지고 왔다.
역시 지위가 달라지니 대접이 달라졌다.
“현찬이는 저번 주에 왔다 갔어.”
“네, 들었어요.”
“현찬이가 너 칭찬만 그렇게 하더라. 지금 회계사반 학생들이 얼마나 기대하고 있는지 알아?”
“저한테요? 아…… 이러면 부담감 느껴지는데.”
감독 실장은 태범과 차를 마시며 수험생들이 태범에게 거는 기대감이 얼마나 큰지 말로써 설명해줬다.
그리고 감독 실장의 이야기를 들어보니 태범 본인도 모르게 이곳에서는 나름 전설(?)로 통하고 있었다.
뜬금없이 혜성처럼 나타나 전국 수석이라는 타이틀을 획득하고 같이 공부하던 스터디원들까지 모두 합격을 만든 인물로서 말이다.
나이도 어린데 전설이라니 감독 실장에게 이 이야기를 들은 태범은 괜히 멋쩍은 미소를 지을 뿐이었다.
“태범이 왔나?”
“안녕하세요, 교수님.”
얼마 지나지 않아 김영석 교수가 휴게실로 들어왔다.
“학생들 다 모였거든? 바로 시작할까?”
지체할 시간은 없는 듯했다. 물론 수험생들에게 1분 1초가 소중한 시간이기에 태범도 충분히 이해가 갔고 인사가 끝나기도 무섭게 강의실로 들어갔다.
태범의 앞에 앉아 있는 수험생들은 대부분 태범의 선배들이자 본인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들이었다.
물론 이 세계에서는 회계사가 먼저 된 사람이 위이겠지만 어쨌든 선배들을 데리고 강의를 한다는 게 기분이 묘했다.
“안녕하세요, 강태범입니다. 저도 이번 연도까지 여기서 공부했고요. 대부분 한 공간에서 같이 공부했으니 절 잘 아시겠죠?”
다들 아는 얼굴들 이었다. 얼마 전까지 같은 독서실에서 공부를 했었고 친하지는 않더라도 서로 스쳐 지나가며 봤던 익숙한 얼굴들이었다.
“저에게 특별한 비법이라도 있을 줄 알고 기대하시는 분들이 있는 것 같은데 사실 그보다 가장 중요한 건 마음가짐이라고 생각해요. 공부에 대한 태도와 마음가짐을 중점으로 오늘의 강의를 시작하겠습니다.”
수험생들은 태범에게 마치 엄청난 비법이라도 있을 거라 생각했는지 태범의 눈을 빨려 들어갈 것처럼 쳐다보며 귀를 쫑긋 세운 채 말에 경청하고 있었다.
괜히 이들이 실망할까 태범은 그저 걱정스러울 뿐이었다.
과거 기자가 수능 1등에게 인터뷰를 하며, 1등 비결을 물어보자 ‘교과서 위주로 공부했어요.’ 이 대답처럼 태범이 말하려는 것도 이와 크게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어 저 형이 저기 왜 있어?’
그리고 강의를 본격적으로 시작하려는 태범의 눈에 띄는 한 사람, 그는 오현택이었다.
자그마치 6년 동안 회계사 시험을 도전하다가 이번에 역시 미끄러지는 바람에 교수님에게 포기 선언을 했었다.
하지만 생각이 바뀐 걸 까, 그는 여전히 고시반에 있었고, 강의를 듣기 위해 태범의 바로 앞에 앉아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