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4
날짜와 금액만 다를 뿐 두 개의 같은 영수증이 덩그러니 원탁 테이블 한가운데 올려져있다.
“흠, 뭐가 문제라는 거지.”
“도장을 자세히 확인해보세요.”
“내가 눈이 나빠서 그런지 잘 안 보이는데.”
강인후 차장은 아무리 얼굴을 가까이 들이밀어도 보이지 않는 듯 계속해서 눈을 찡그리며 영수증을 바라봤다.
“도장이 너무 흐릿해서. 이거 뭐. 구별되겠나?”
영수증에 찍힌 도장의 한 쪽은 흐릿해서 잘 구별되지 않았다. 육안으로는 구분하기 어려울 정도.
태범은 더욱 자세히 알려주기 위해 정확한 부분을 손으로 짚었다.
“여기요.”
한자 도장, 획의 끝부분 모양이 분명 달랐다.
얼핏 보면 도장이 번져 그렇게 된 거로 보이지만 영수증을 여러 개 비교해보면 확연히 구분할 수 있었다.
“어? 그러네.”
옆에 있는 양현성 과장도 알아차렸는지 ‘어!’ 하며 소리를 내뱉었다.
“잠깐, 내가 안진환 팀장한테 연락을 해볼게.”
그제야 강인후 차장도 이상한 점을 발견하고는 스마트 폰을 빼들어 전화를 걸기 시작했다.
전화를 거는 와중에도 영수증을 눈앞에 들어 여러 번 확인하고 있었다.
“여기 좀 와보셔야 할 것 같은데요.”
“네? 무슨 일이라도 있나요!”
회계사가 기업 내 회계팀을 호출한다는 건 일이 발생했다는 의미이다. 이를 직감적으로 감지한 안진환 팀장은 긴장된 말투로 대답했다.
“창고 임차료 영수증에서 뭔가 위조 흔적이 보여서요.”
“위…… 위조요?”
“네, 와보세요. 확인시켜 드릴게요.”
“바로 가겠습니다.”
그렇게 전화를 끊고 얼마 후 안진환 팀장은 구둣발 소리를 내며 헐레벌떡 사무실로 들어왔다.
“어디, 뭐가 잘못됐다는 거죠?”
감사에서 문제가 지적됐다는 건 결국 기업의 회계팀이나 내부 통제에 구멍이 생겼다는 걸 의미했다.
회계팀 입장에서는 적잖이 당황스러울 수밖에 없는 상황.
“제가 임차료 파악 중에 갑자기 비용이 증가한 게 있어서 수상하게 봤는데 영수증이 위조된 것 같습니다.”
태범은 안진환 팀장에게 상황에 관해 설명했다.
“아, 이것 때문에 그런 건가요.”
안진환 팀장은 생각보다 적은 금액에 안도를 했다. 한 해 판관비만 수십, 수백억에 달하는 금액에 비하면 영수증의 금액은 확실히 적은 금액 하지만 설상 이게 정말 누군가에 의해 위조된 거라면 횡령의 문제로 불거질 수 있다.
“비용 처리는 대부분 경리부에서 처리하는 거라서 그쪽에서 물어봐야 할 것 같습니다. 같이 가시겠습니까?”
사태를 파악한 안진환 팀장은 비용 처리를 담당하는 경리부로 가서 확인하자며 나섰다.
“태범 씨랑 나랑 가죠. 나머지는 계속 작업하고 있고…….”
“따라 오시죠.”
그렇게 태범과 강인후 차장은 안진환 팀장의 안내에 따라 아래층에 있는 경리부 사무실로 향했다.
“저기요, 은혜 씨.”
경리부에 들어갔을 때는 6명의 직원들이 업무 중에 있었다.
다들 많이 바쁜지 회계사와 안진환 팀장이 사무실로 들어와도 전혀 신경 쓰지 않고 있었다. 안진환 팀장이 영수증과 서류철을 정리하고 있던 한 여성에게 말을 걸어서야 직원들의 시선이 옮겨졌다.
“네?”
“이것 좀 봐주시겠어요? 회계사분들이 감사하던 도중에 발견한 건데 이게 위조된 것 같다고 해서.”
“위조요?”
‘위조’라는 단어에 사무실 모든 직원들의 시선과 관심은 한 곳으로 쏠렸다.
자리에 앉아있던 직원들은 하나같이 일어나 이 상황을 구경하고 있었다.
“임차료 비용 처리 누가 한 거죠?”
“그건 박하윤 부장님이 하신 거로 알고 있어요.”
“박하윤 부장? 어딨는데요?”
“잠시 화장실 가신 거 같은데요. 기다리시면 올 거예요.”
“무슨 일이에요?”
경리부 직원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박하윤 부장이 모습을 드러냈다.
40대쯤으로 보이는 박하윤 부장은 정장 차림에 금테 안경을 끼고 지적인 느낌을 풍기고 있었다. 그런 그녀는 경리부의 소란스러운 모습에 어리둥절한 모습이었다.
“부장님, 임차료 영수증이 잘못됐다고 하는데요?”
경리부 직원이 박하윤 부장에게 상황을 설명했다.
“이분들은?”
“아. 이번 중간 감사를 맡은 상정회계법인에서 나온 회계사입니다.”
강인후 차장과 태범은 그녀에게 본인을 소개한 뒤 지금까지 의심됐던 모든 걸 설명했다.
영수증의 도장부터, 갑자기 증가한 임차료까지 의심되는 부분을 말해주었고 그 말을 들은 박하윤 부장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 갔다.
하지만 이도 잠시 굳어진 표정도 잠시 경리부의 박하윤 부장은 눈을 동그랗게 뜨며 설명에 반박을 하기 시작했다.
“이게 왜 잘못됐다는 거죠? 이미 위에서 결제된 비용대로 창고주랑 계약대로 지급된 거고 영수증의 도장은 번져서 다르게 보이는 것 뿐 것 같은데요.”
“그렇긴 한데 임차료가 너무 많이 올랐고 영수증도 의심이 되는 상황인지라…… 확인은 해봐야 할 것 같습니다.”
태범은 다시 그녀의 말을 반박했다.
“아니, 임차료야 증가할 수도 있는 거지. 어떻게 매번 같습니까?”
“아니요. 제가 말하자고 하는 건 임차료뿐이 아니라 영수증도 보시면 이상하지 않습니까.”
박하윤 부장은 입을 뾰로통하게 내밀며 어이가 없다는 듯 태범을 쳐다봤다.
“뭐가 이상해요, 흐릿하게 찍혀서 잘 보이지도 않는데 그리고 감사를 오셨으면 중요성을 따져서 조사를 해야지 겨우 이것 가지고 사람을 불렀습니까?”
겨우 이거라니…… 박하윤은 회사 돈이 자기 돈이라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거액의 회사 돈을 관리하는 입장에서 어쩌면 돈에 대한 감각을 잃은 것일지도 모른다.
태범은 씁쓸한 감정을 감추지 못하며 박하윤을 바라봤다.
“회계팀에 임대차 계약서 있을 거예요. 그거 확인해보면 어떻습니까?”
영수증보다는 상호간의 약속이 담긴 계약서에 정확한 임대 금액이 나타나 있기 마련이다. 보다 못한 안진환 팀장은 임대차 계약서를 확인하자며 의견을 밝혔다.
“네, 그렇게 하면 되겠네요.”
안진환의 제안에 박하윤 부장은 기꺼이 받아들었다.
‘뭔데 저렇게 자신감 있게 말하는 거지.’
박하윤의 자신감 가득한 표정에 태범은 혹시 본인이 실수한 게 아닐까 의심이 들었다. 하지만 이리저리 머리를 굴려 봐도 머리는 문제를 말하고 있었다.
설마 천재적인 폰 노이만과 워렌버핏의 능력을 갖추고 실수를 할까. 의심을 금세 접었다.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안진환 팀장은 계약서를 가져오기 위해 회계팀 사무실로 올라갔다.
그러고 박하윤은 여전히 씩씩거리며 태범을 째려보고 있었다.
이 상황에 강인후 차장은 무슨 고민을 하는지 팔짱을 끼고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가져왔습니다. 확인해보시죠.”
안진환 팀장이 서류 봉투 한 개를 손에 쥐고 들어왔다.
그리고 그 속에서 계약서를 꺼내더니, 모두가 볼 수 있도록 탁자 위에 올려놨다.
만약 계약서의 금액이 영수증과 다르다면? 100% 위조이다.
‘과연…….’
모두가 탁자에 놓인 계약서를 주시하며 금액을 살폈다.
“자 봐 봐요. 금액 모두 일치하죠?”
안진환 팀장이 가져온 임대차 계약서에는 영수증의 금액과 일치하고 있었다.
이를 본 박하윤은 기세등등해져 고개를 치켜들며 말했다.
순간 태범은 본인이 실수 한 건가 생각이 들었지만, 여전히 의심을 접어 둘 수는 없었다.
“뭐죠? 왜 계약서의 도장 흐릿한 게 기존 영수증에 찍힌 도장과 많이 다른데요?”
남들은 금액을 보고 있을 때 태범은 모든 걸 살펴봤고 임대차 계약서에 찍힌 도장 역시 이상했다.
선명하지 않고 위조로 생각되는 영수증에 찍힌 도장과 닮아있었기 때문이다.
“아니, 보셨잖아요. 도장이야 찍는 사람이 실수로 잘못 찍을 수도 있는 거고.”
“그럼 임대인을 통해 실사 확인해보겠습니다. 그렇게 하면 간단하겠네요.”
태범은 다시 머리를 굴렸고 가장 확실한 방법인 임대인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보기로 한 것이다.
“네, 그럼 해보세요. 분명 제대로 된 비용이면 이에 대한 책임은 감당하셔야 할 거예요.”
태범이 말에 박하윤 부장은 오히려 열을 내며 자신만만하다는 걸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방귀 뀐 놈이 성낸다고 오히려 그런 태도는 그녀를 의심스럽게 만들고 있었다.
“여기 임대인 연락처 좀 가져와 주세요.”
“네…….”
확인하는 방법은 간단했다. 임대인에게 연락을 통해 실제 임차료를 알아내면 되는 것이었다. 둘이 짜고 치지 않는 이상, 이게 간단한 문제 해결법이었다.
태범의 말에 경리팀 직원이 컴퓨터에 다가가 키보드를 몇 번 두들기더니 메모지 위에 번호를 적어 가져왔다.
“잠깐만요. 잠깐만!”
“네? 왜요?”
박하윤은 태범의 오른팔을 붙잡더니, 전화를 못 하도록 가로막았다.
보통 의심스러운 행동이 아니다!
진짜 본인이 아무런 잘못이 없다면 전화 거는 것쯤이야 당당하게 받아들일 텐데 지금은 그저 막무가내로 태범의 행동을 막으려 했다.
이제는 자신이 횡령을 했다는 걸 실토한 셈이랑 다름없었다.
“저기. 사람을 이렇게 대놓고 무시해도 되는 겁니까? 설마 저희가 실수라도 했다는 거예요?”
“실수요? 저희는 합리적인 의심을 하는 겁니다. 이게 한아름상사에서 저희에게 업무를 준 이유이기도 하고요.”
“아니, 아무리 회계사님들이라도 그렇지, 이건 경리부를 무시하는 행위라고요!”
“무시가 아니라, 의심이 가서 확인을 하는 겁니다. 그게 저희 일이기도 하고요.”
박하윤은 허리에 두 손을 얹은 채 인상을 잔뜩 구기며 태범에게 화를 냈다.
무시라니 지금은 그와 전혀 상관없는 문제이지만 그녀는 일단 어떻게 해서든 이 사태를 막아보려고 최후의 발악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태범은 박하윤의 기세에 전혀 눌리지 않고, 하고 있는 일을 계속 진행하려 했다.
“하윤 씨, 그러지 말고 한 번 확인해보자는 건데 그게 왜 무시하는 겁니까? 이거 이 사람들 일입니다.”
박하윤의 태도를 보다 못한 회계팀의 안진환 팀장이 태범의 편을 들며 화를 냈다.
같은 회사 직원이라 할지라도 그녀의 속셈이 너무 뻔히 보였기 때문이었다.
“아니, 마치 우리 경리부가 잘못이라도 한 것처럼 말하잖아요. 말씀을 곱게 하시던가. 누굴 나쁜 놈으로 만들려고 합니까?”
“아휴, 그게 아니라 확인을 하자는 겁니다. 아니, 아무것도 아니면 이렇게 화낼 필요도 없는 것 같은데요?”
계속되는 억지스런 말에 안진환 팀장은 크게 한숨을 쉬더니 목소리를 높이며 화를 냈다.
“회계사님, 확인하세요.”
“네.”
더 이상 지체할 필요도 없었다. 누가 봐도 박하윤은 자신의 잘못을 덮기 위해 말도 안 되는 억지를 부리는 것이고 바보가 아닌 이상 그걸 속아줄 사람은 없었다.
태범은 다시 임대인의 연락처를 입력하고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이예준 씨, 되시죠? 한아름상사의 감사를 맡은 회계사 강태범이라고 합니다.”
“회계사요?”
“네, 뭐 좀 여쭤볼 게 있어서 전화를 드렸거든요.”
“네, 뭔데요?”
“최근 몇 년간 한아름상사에게 창고 임대를 했잖아요?
“네, 그런데요.”
“여기 감사 중에 영수증을 확인했는데 한 달 임차료가 200만원으로 나와 있어서요.”
“200만원이요? 그게 무슨 소리죠. 저희는 130만원에 계약하고 있었는데.”
“아. 그런가요. 확실하죠?”
“허…… 참, 당연하죠. 누가 여기를 200만에 세를 들어오겠습니까?”
“130만이라고 하셨죠.”
“그렇다니까요. 누가 200이래요?”
“아…… 잘 알겠습니다. 협조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번 사태는 이렇게 끝을 보였다.
태범이 전화를 끊자 사무실 내 모든 직원들은 박하윤 부장을 쳐다봤다.
“경리부장님이 직접 계약하고, 비용 처리하지 않았습니까? 근데 이거 어떻게 된 겁니까?”
안진환 팀장은 이마에 핏대를 세운 채 박하윤 부장을 강하게 노려보며 말했다.
“아니…….”
그렇게 말 많던 박하윤 부장은 말을 잇지 못했다.
“죄송합니다…….”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하다가 박하윤 부장은 결국 모든 걸 실토했고 이는 태범의 감사 업무에 있어서 첫 성과가 나타나는 순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