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3
다음 날 태범은 감사 현장인 필드로 나갔다.
회계법인으로 출근하는 것이 아닌 구로동에 있는 ‘한아름상사’의 본사로 출근을 하는 것이고 앞으로 이곳에 출근 도장을 찍을 것 같았다.
“어, 강태범 씨 왔나요.”
“네, 안녕하십니까.”
태범은 한아름상사 본사의 건물에 들어섰고 손님을 위한 휴게실에는 몇몇 회계사들이 있었다.
그리고 강인후 차장은 태범에게 간단히 인사를 건넸다.
“아직 사람들이 다 안 왔으니까 조금 기다리죠.”
필드에서 감사를 진행할 회계사는 태범을 포함 총 5명으로 이뤄질 것이라 했다. 아직 2명의 회계사가 현장에 도착하지 않았고 태범과 회계사들은 그들이 모두 올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다.
“실무는 많이 다를 거예요.”
“네?”
조용한 휴게실 분위기에 강인후 차장이 태범에게 먼저 말을 걸어왔다.
“듣자 하니, 태범 씨 공부 좀 했다고 들었는데 실무라는 게 사실 숫자와의 싸움이기도 하지만 사람과 싸움이기도 하거든.”
“아, 네!”
“숫자는 계산할 수 있지만 사람 마음이라는 건 계산할 수가 없거든요. 이래서 이론과 달리 실무가 참 어려운 거죠.”
다른 회계사들을 기다리면서 강인후 차장은 신입인 태범을 위해 이론과 다른 실무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태범 씨, 내가 말 편하게 해도 되지?”
“물론요. 편하게 하세요. 저도 그게 편합니다.”
“그래, 잘해보자.”
사내에서의 무뚝뚝한 첫인상에 잘 몰랐는데 현장에 오니 강인후 차장이 꽤 친절하게 느껴졌다. 신입을 배려해서 일까 태범의 어깨를 만지며 격려를 해주었다.
“어이구야. 왜 이렇게 단단해. 뭐 이렇게 어깨가 뭉쳤어.”
강인후가 태범의 어깨를 만졌을 때 돌멩이 같은 단단함을 느껴졌다. 마치 어깨에 어깨가 한 개 더 얹어진 느낌인지라 이를 느끼곤 놀라워했다.
“뭉친 게 아니라 제가 운동을 해서요.”
“그래? 이게 다 근육이라고?”
“뭐, 그렇긴 하죠.”
태범은 일명 마른 근육에 속하는 편이었기에 옷을 두르고 있으면 몸이 잘 나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 속에는 단단한 근육이 숨겨있었고 직접 손으로 만지면 얼마나 좋은 몸을 가지고 있을지 예상할 수 있었다.
“와. 운동 좀 했나 봐?”
“취미로 조금씩 하는데 요즘에는 바빠서 많이 못 했네요.”
“공부하는데 운동할 시간이 있었어? 이야! 이렇게 겉으로 볼 때는 몰랐는데 이거 알고 보니까 운동선수잖아?”
“그냥 취미로 하는 건데요. 뭐.”
사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운동을 못 할 거라는 편견이 있었다.
머릿속으로 공붓벌레를 떠올리면 자연스럽게 책상 앞에만 앉아 책만 읽고 있는 모습을 떠올리니 수석을 한 태범이 몸까지 완벽히 갖추고 있다는 건 신기할 수밖에 없었다.
“언제 한번 태범 씨한테 운동 좀 배워야겠는데? 허허.”
강인후 차장은 자신의 삐쩍 마른 팔을 만지작거리며 말했다. 태범이 슬쩍 곁눈질로 그의 팔을 보니 근육을 만들기에는 꽤 시간이 필요해보였다.
“죄송합니다. 도로에 사고가 있어서 차가 막히는 바람에…….”
다른 회계사들을 기다리며 잡담을 나누는 사이, 드디어 두 명의 회계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건물로 뛰어 들어왔는지 그들의 이마에는 땀이 맺혀 있고 헐떡이는 숨소리가 들리고 있었다.
“어허. 왜 이렇게 늦었어.”
“죄송합니다.”
“그러니까 시간 좀 여유 있게 잡고 오지 그랬어.”
김양원 대리와 윤지원 사원. 둘이 같은 차를 타고 오다가 늦은 거로 보였다.
하필이면 태범을 제외하고 가장 낮은 직급의 둘이 지각을 했으니 강 차장은 그냥 보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현장의 가장 높은 강인후 차장은 인상은 쓰며 한마디를 했고 둘은 몇 번이나 고개를 숙였다.
“상정회계법인에서 오셨죠?”
“네, 맞습니다. 강인후 차장입니다.”
“반갑습니다. 한아름상사 회계팀 안진환 팀장입니다.”
회계사들이 휴게실에 모두 모이고 얼마 되지 않아 회계팀의 팀장이라는 사람과 몇몇 직원들이 휴게실로 들어와 인사를 건넸다.
“여기 몇 분은 저번에 보던 분이네요.”
“아. 네, 작년에 뵈었죠? 사모님은 건강 좀 괜찮아지셨어요?”
양현성 과장이 회계팀장의 앞으로 다가와 대답했다.
“네, 많이 나아졌죠.”
“아휴, 다행이네요. 그때 고민이 많으셨던 것 같아서 사실 저도 속으로 걱정을 했거든요.”
“하하, 이제 다 괜찮아졌습니다.”
회계법인의 양현성 과장과 이곳의 회계 팀장이 서로 아는 사이로 보였다. 심지어 개인사인 가족 이야기까지 하니 말이다.
“그럼 회계사분들이 쓰실 사무실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따라오시죠.”
회계팀 팀장의 안내로 회계사들은 사무실로 향했다.
긴 복도를 따라 끝에 있는 작은 회의실 하나 그곳이 회계사들이 감사할 때 사용할 공간이었다.
그곳에는 기다란 원형의 테이블이 놓여있었고 상석에는 자연스럽게 강인후 차장이 자리했다.
이미 약속이라도 했듯 직급 순서대로 상석에 가까운 자리에 착석을 하기 시작했고 대충 눈치를 보다가 태범 역시 끝자리에 자리를 잡고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얼굴을 가릴 정도로 높게 쌓인 서류가 있었다.
“난 나가서 잠시 관계자랑 이야기 좀 나누고 올 테니까 업무 분담하고 있어.”
“네, 알겠습니다.”
강인후 차장은 고객사의 담당자와 인터뷰를 하기 위해 부하 직원들에게 지시를 내려놓고 다시 사무실을 나섰다.
“박태범 씨.”
“네.”
“전기 조서 업데이트하시고 판관비(판매비와 관리비)부분 확인해주세요. 모르는 게 있으면 그때그때 물어보고 필요한 자료가 있으면 회계팀한테 물어보세요.”
양현성 과장은 처음 필드에 나와 실무를 맡는 태범을 고려해 업무처리 방법에 대해 간단하게 설명해주었다.
“양원 씨는 내부 통제 점검하고 샘플 거래 확인하세요.”
“네.”
자리에 없는 강인후 차장을 대신에 양현성 과장은 개인별로 업무를 분담시켰다.
그리고 업무 분담을 받은 회계사들은 지체 없이 개인 노트북을 켜고 능숙하게 자기 일을 보기 시작했다.
다른 회계사가 하는 걸 눈치껏 본 뒤 태범도 머리에 생각해둔 업무 진행 방법에 따라 움직였다.
노트북을 켜서 전기 조서를 당기의 금액으로 업그레이드하고 업무상 편리를 위해 서류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도록 정리했다.
‘이제 시작인가?’
모든 준비가 마무리되었고 이제 태범에게 첫 실무가 시작되는 것이었다.
실제 기업의 재무 정보가 태범의 손아귀에 들어있었고 첫 업무인 만큼 열심히 해보자는 마음가짐과 함께 일을 시작했다.
딸칵, 딸칵.
태범의 눈은 노트북과 증빙 자료 서류들을 오가며 빠르게 작업하기 시작했다.
서류 넘기는 소리와 마우스 클릭 소리가 얼마나 일을 빠르게 하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엄청난 암기력으로 한 번 본 자료는 다시 보지 않았다.
모두 머릿속에 그대로 남아있었고 그저 눈과 손이 얼마나 빠르게 움직이는가의 문제만 있을 뿐이다.
그리고 화폐로 된 숫자는 시야에 가득 들어왔다.
비용이 적절하게 계상 되었는가 확인을 해야 하는데 사실상 덧셈, 뺄셈, 곱셈, 나눗셈만 잘하면 확인할 수 있는 것들이고 이는 태범에게 식은 죽 먹기에 불과했다.
오케스트라 악기들이 지휘자의 지휘에 환상의 소리를 만들어 내듯 각기 다른 능력들은 태범에 의해 조화를 이루며 작업을 진행하고 있었다.
“신입은 잘 하고 있나?”
어느새 일을 마치고 사무실로 들어온 강인후 차장은 태범의 업무를 지켜보고 있었다.
하지만 일에 푹 빠져 몰입 돼있는 태범은 어떠한 인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강인후 차장은 ‘어디 얼마나 잘하나 보자’하는 마음으로 태범을 잠깐 동안 지속해서 지켜봤다.
다른 회계사들은 강차장이 온 걸 인지하고 있었지만 시간이 지나도 태범은 자료에 빠져 그가 뒤에 있는 줄 상상조차 못 하고 있었다.
“강태범 씨, 제대로 확인하고 있는 거 맞아?”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강인후 차장이 태범의 업무 태도에 의문을 가졌다.
저건 뭐 만화책을 읽는 것도 아니고 자료를 보는 둥 마는 둥 휙휙 넘기니 말이다.
“어?!”
강인후 차장이 입을 떼서야 태범은 자신의 뒤에 강인후 차장이 서 있다는 걸 알았다.
“자료는 꼼꼼히 확인하고 있어?”
“네, 꼼꼼히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래? 아닌 거 같은데…….”
태범은 혹시 본인이 잘못한 거라도 있는가 생각했지만, 다시 생각해봐도 전혀 문제 될 게 없어 보였다.
“빠르게 한다고 좋은 게 아니니까, 천천히 해. 이제 일을 막 시작했는데 마음을 급하게 가질 필요는 없어.”
“아…… 네.”
그제야 차장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알 것 같았다.
태범의 행동을 보고 사람들이 오해하고는 했다. 공부할 때도 그랬고 시험 볼 때 그리고 지금 이 상황마저 같았다.
남이 보기에는 태범의 빠른 두뇌 회전과 행동을 이해하지 못했으니 말이다.
“정말 자세히 확인해야 돼. 본인이 맞는다고 생각해도 틀린 부분을 그냥 지나칠 수 있으니까 확실히 확인해야 돼…….”
“네, 알겠습니다.”
태범은 일단 고개를 끄덕이며 알았다고는 했지만 그의 말대로 일을 천천히 한다는 건 곤욕이었다.
마치 최고급 스포츠카를 가지고 속도 제한 구역에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
일단 강인후 차장이 그렇게 지시를 했으니 일부로 작업 속도를 조절해 천천히 움직이며 일을 진행했다.
하지만 어느 순간 일에 몰입되더니 다시 탄력을 받고 손과 눈을 빠르게 움직였다.
이는 능력이 주는 본능에 가까웠고, 누구도 말릴 수가 없었다.
‘임차료(건물, 토지, 기계 장비 등을 대여하고 지불한 비용)가 갑자기 왜 이렇게 증가한 거야?’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까 드디어 무언가 나왔다.
전기 대비 당기의 비용을 확인하던 중 태범에 눈에 포착된 이상한 점 하나.
태범에게 숫자는 본능적인 감각에 가깝게 느껴졌다.
이상한 패턴을 보이는 숫자를 보면 새하얀 백지에 조그마한 점이 찍힌 것처럼 찝찝한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지금 태범은 그 찝찝함에 계속 신경을 쓰고 있었다.
자세히 확인해보니 매월 임차료가 꾸준히 유지되다가 일부 임차료의 금액이 이해할 수 없을 만큼 급등했다.
일부 창고의 임대를 위해 쓰인 임차료가 1.5배로 올랐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넉 달 동안 유지가 되었다.
‘이게 말이 되나?’
갑자기 땅값이라도 급등한 건가, 세상이 아무리 급변할지라도 이렇게 임차료가 갑자기 상승할 수는 없다고 생각했다.
태범은 더 자세히 확인하기 위해 관련 영수증을 확인했다.
수많은 영수증이 서류 사이에 숨어있지만 태범은 단번에 찾을 수 있었다.
이미 머릿속에는 자신이 봐왔던 모든 서류가 들어있었고 컴퓨터에서 검색 기능을 사용하듯 기억을 거슬러 올라, 단 한 번의 손짓으로 영수증을 찾았다.
‘이건 분명 위조된 영수증이다!’
자료를 꼼꼼히 살피던 태범은 드디어 오류를 발견했다.
조개 속 진주를 찾은 느낌, 어쩌면 첫 성과가 될 수 있다는 생각에 태범은 흥분되기 시작했다.
“저기, 김양원 대리님.”
태범은 손을 앞으로 내밀며 본인의 앞자리에 앉아 노트북 모니터에 푹 빠져있는 김양원 대리를 불렀다.
“왜 그러시죠, 뭐 모르는 게 있나요?”
“아니요. 그건 아니고 여기 위조된 영수증을 발견한 것 같습니다.”
“네? 위조라뇨? 그게 무슨 말씀입니까?”
태범은 앞에 앉아있는 대리에게 한 말이었지만 어찌된 게 조용한 사무실에는 개미 지나가는 소리도 들릴 기세였다.
결국 모든 회계사가 태범의 말을 들었고 시선은 한 곳으로 집중됐다.
“제 생각에는 위조된 영수증으로 비용 처리가 된 것 같습니다. 여기보세요.”
이왕 이렇게 된 거 태범은 오른손으로 영수증을 집어 올려 모두에게 보여줬다.
그리고 왼손으로는 영수증 위에 찍힌 도장을 가리켰다.
“이게 위조된 거라고? 제대로 작성돼 있는 영수증 같은데.”
태범에게서 가장 멀리 앉아있는 강인후 차장이 눈을 단춧구멍처럼 모으며 영수증을 바라봤다.
“자 보세요. 도장이 미묘하게 다릅니다.”
태범은 이어서 다른 달의 작성된 또 다른 영수증을 꺼내 두 개를 동시에 보여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