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2
박철중 전무는 태범에게 꼭 필요한 사람이 본인이라는 걸 어필하고 있었다.
“제가 사람은 잘 알아봅니다. 꼭 말하지 않아도 느낌이라는 게 있지 않습니까? 나도 반 오십은 살아왔고, 이 세월 동안 쌓인 경험에서 나오는 사람 보는 눈이 있습니다. 태범 씨 당신은 나랑 잘 어울릴 거예요.”
‘라인을 타라는 거네…….’
결국 박전무가 말하려는 건 자신의 라인을 타라는 것이었다.
나무 한 그루에도 나뭇가지가 여러 개 나 있듯 한 회사에도 수많은 라인이 존재할 것이다. 심지어 예능계에서도 유라인이니 강라인이니 하면서 편을 나누니 말이다.
‘정말 저 라인을 타면 승승장구할 수 있을까?’
태범은 고민하고, 의심하고 있었다.
만약 썩은 동아줄을 잡다가, 떨어지기라도 하면 큰일. 신중히 선택해야만 했다.
하지만 워렌버핏의 능력 중 도전정신 때문일까, 태범은 평범함을 거부하고 있었다.
이미 정해진 길 그리고 평범한 길을 걸으면 결국 인생은 평범하게 끝나는 것이다.
가시에 찔리지 않고서 장미를 꺾을 수 없는 법, 태범은 결정했다.
“네, 전무님과 같이하고 싶습니다.”
“그래요? 정말 결정한 거 맞죠?”
능력과 지위도 충분히 있는 사람이니 같이 일을 할 만하다고 생각했다.
“네, 같이 하겠습니다.”
고민 끝에 태범은 박철중 전무가 내민 손을 잡았다.
왠지 모르겠지만 이 순간을 놓치면 후회할 것만 같았다. 이 줄이 썩은 동아줄이든 아니면 정말 위로 보내줄 튼튼한 동아줄이든 간에 일단 그 줄을 타고 보자는 게 태범의 생각이었다.
“하하하. 역시 똑똑한 사람은 다르네요. 잘 선택하셨어요. 앞으로 잘 해보죠.”
박철중 전무는 기분이 좋아졌는지 한번 호탕하게 웃더니 악수를 청했다.
태범은 그 손을 붙잡고 악수를 나눴고, 그로서 서로 간의 암묵적인 계약이 체결된 셈이었다.
“회사에서 봐요.”
그렇게 모든 이야기가 끝나고 태범이 회의실을 나서려 하자 박전무는 앞으로 잘해보자는 의미로 어깨를 토닥였다.
태범은 회의실에 나와 다시 본인의 호텔방으로 올라갔다.
“어. 너 어디에 있었어?”
“어? 나 잠깐 볼 사람이 있어서. 근데 왜?”
태범이 모습을 보이지 않자, 효준은 궁금했던 모양이었다.
어느 순간부터였을까, 첫날에는 그렇게 태범을 똥 보듯 피해 다니려 했지만, 이제는 강아지마냥 태범의 뒤꽁무니를 쫓아 다녔다.
한 번 마음을 열면 친해지는 스타일인가 싶었다.
“네가 벌써 말없이 나갔나 싶어서.”
“여기 내 짐이 있는데 어딜 나가겠어.”
“하긴 그러네. 허허”
가끔 효준이 정말 회계사 차석 합격한 사람이 맞는가 싶을 정도로 어리바리한 면을 가지고 있었다. 하긴 공부만 잘한다고 모든 게 완벽하다는 걸 의미하는 게 아니었다.
“형, 주말 잘 지내고 월요일에 봐.”
“그래, 회사에서 보자. 뭐 문제가 생기면 바로 나한테 말하고.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건 도와 줄 테니까.”
효준의 살가운 말에 태범은 든든한 지원군을 얻은 느낌이었다.
평범한 사람도 아니고 엄청난 노력파에 대표의 아들이라는 명함까지 가지고 있는 그는 충분히 사회생활에서 도움이 될 만한 인맥임이 분명했다.
어쩌면 돈보다 유용하게 쓰이는 게 인맥일 때도 있다.
* * *
“집이다!”
필리핀을 떠나고 저녁이 돼서야 대한민국에 있는 집에 도착했다.
그리고 드디어 태범의 눈앞에 집이 보였다.
짧은 기간이긴 했지만, 며칠 떨어져 있다 보면 또 그리운 게 집이니 반가운 건 당연했다.
“태범아 잘 다녀왔니?”
“그럼. 잘 갔다 왔지.”
번호키를 누른 후 문을 열고 집으로 들어서자 부모님이 반갑게 반겨줬다.
마침 아버지까지 있었고 보고 있던 TV드라마를 내 팽개치고 다가와 이것저것 회사 생활에 관해 물어봤다.
“그래, 사람들은 다 괜찮고? 뭐 문제 되는 건 없지?”
“응, 다들 좋은 사람들이던데. 뭐 사람 마음이라는 게 하루아침에 알 수 있는 건 아닌데 어쨌든 일단 보였던 것만 생각하자면 다들 괜찮았던 것 같아.”
“그래? 다행이네. 어딜 가던 일이라는 게 일보다는 사람한테 스트레스를 받는 거거든. 역시 배운 사람들인지 다들 괜찮은가 보네. 잘 됐어.”
아버지는 태범을 다독이며 흐뭇하게 미소를 짓고 있었다. 그저 아들이 사회에 나가 잘 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대견스러웠기 때문이다.
“네가 내 방에서 왜 나와?”
그렇게 부모님의 관심을 잔뜩 받고 방으로 들어가는 순간, 방이 열리고 나타난 건 동생 태인이었다.
갑자기 기분이 싸한 게 불안해졌고, 태범은 태인이를 째려보듯 바라보며 말했다.
“응? 뭐가.”
“아니, 지금 내 방에서 나왔잖아. 뭐 한 거야?”
“아…… 내꺼 노트북 그래픽카드가 맛이 가서 A/S맡겼어. 그래서 형 컴퓨터 잠깐 하고 있었는데…….”
“뭐?”
아마도 태인이 자신의 고장 난 컴퓨터 때문에 태범의 방에 들어와 컴퓨터를 사용한 것으로 보였다.
“아니, 내 컴퓨터를 마음대로 사용하면 어떻게 해?”
태범은 자기도 모르게 화를 내뱉고 말았다.
“그게 뭐 어째서. 형도 가끔 내 노트북 사용할 때 있었잖아.”
“그래도. 이건 아니지.”
“뭐가 아니야.”
사실 태범은 할 말이 없었다. 그저 홧김에 말이 뱉어졌을 뿐 사실 말을 따지자면 태인이의 말이 크게 틀린 게 없었다. 그걸 알고 있는 태범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아휴. 다음부터 내 방 들어올 때는 물어보고 들어와.”
태범의 말에 태인은 듣는 둥 마는 둥 그냥 자신의 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이 상황을 두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부모님. 과거였으면 어머니의 호통과 함께 등짝 스파이크가 강하게 날라 왔을 터.
하지만 태범이 부모 품에서 벗어날 만큼 충분히 성장했다고 생각했기에 눈앞에 보이는 싸움에도 꾹 참고 있던 것이다.
“엄마. 난 방에서 짐 정리하고 있을게.”
“피곤할 텐데 내일 하지?”
“괜찮아. 어차피 해야 되는 거. 미리 하는 게 낫지.”
별것 아닌 거 가지고 화를 낸 것도 그렇고 괜히 기분이 민망해지는 게 태범은 아무소리나 내뱉고 방으로 들어갔다.
방으로 들어간 태범은 바로 스캐너로 다가갔다.
“스캐너야. 너 이 자식 무사한 거지?”
태범은 마치 스캐너가 살아있는 생물처럼 말을 건넸다.
기계와 대화라니, 누가 보면 미친놈 소리하겠지만 스캐너가 태범에게 준 능력을 안다면 어떤 것보다도 반가운 건 스캐너였고, 연수 중에도 집에 잘 있나 걱정 되던 것이었다.
혹시나 어디 이상인 곳은 없나 태범은 이곳저곳을 살폈다.
작은 벌레가 지나가다 낸 흠집조차 찾을 기세였다. 눈을 부릅뜨고 그동안 스캐너에 쌓인 먼지 한 톨조차 확인하고 있으니 말이다.
‘다행히 깨끗하네.’
다행히도 동생이 컴퓨터만 사용했는지 스캐너를 건든 흔적은 없었다.
그리고 스캐너를 모두 확인하고 나서야 태범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혹시나 자기 없는 사이에 잘못되기라도 하면? 아우 생각만 해도 끔찍하다.
자, 확인을 했으니 이제 스캐너의 힘을 빌릴 차례이다.
철컥.
항상 그래왔던 것처럼 방문을 걸어 잠그고 이불을 뒤집어쓴 채 스캐너를 실행시켰다.
[스캔할 능력을 선택해주세요]
[워렌버핏 능력]
-시장 통찰력(100%)
-기업 분석력(100%)
-도전 정신(94%)
어차피 선택지는 하나다. 도전 정신!
정신이나 성격 같은 능력들은 사실 추상적인 느낌에 가까워, 구미에 당기진 않았지만 실제로 경험해본바 이러한 능력들은 중요했다.
직접적인 능력 외 에도 사람의 성격을 바꿀 수 있는 능력은 사람을 전반적으로 확 바꿀 수 있기에, 필요해 따라 사용하면 효율적으로 사용할 수 있었다.
[도전 정신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93%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94% 진행되었습니다.]
[강태범님의 소유 능력]
[워렌버핏 능력]-시장 통찰력(100%)-기업 분석력(100%)-도전 정신(94%)
[폰 노이만 능력]-수리이해력(100%)-언어이해력(100%)-암기력(100%)
[이소룡 능력]-힘(100%)-유연성(100%)
스캔을 마치고 태범은 바로 캐리어의 짐을 풀었다.
그리고 캐리어 안에서 기념품을 꺼낸 뒤 거실로 나갔다.
물론 연수였지만 해외여행의 첫 기념으로 부모님에게 드릴 간단한 기념품 몇 가지를 사 온 것이다.
“여기 선물.”
“웬 선물이니?”
“그냥 교육 마치고 잠깐 돌아다닐 때 사 왔어.”
태범이 부모님에게 필리핀 공예품인 지갑과 조각품 등을 꺼내 주었다.
별건 아니지만 부모님은 확실히 미소를 지으며 선물을 반겼다.
“고맙다. 아들이 이런 것도 사 오네. 호호.”
“그냥 조그마한 건데 뭐.”
태범은 아무렇지도 않은 척 애써 무뚝뚝하게 말을 건넸다.
그렇게 부모님에게 기념품을 전달하고, 태범은 태인의 방으로 들어갔다.
“야 강태인!”
“…….”
태인은 금세 삐졌는데 말을 해도 대답이 없었다.
“야.”
“이게 뭔데?”
“필리핀 가서 네 선물은 못 사왔으니까, 용돈으로 줄게.”
태범이 건넨 건 오만 원권 4장이었다.
부모님에게만 선물만 사 온 것도 그렇고 방금 전 별일도 아닌 것에 화낸 것도 미안해서 동생에게 용돈을 주기로 한 것이다.
세상에 현금보다 좋은 선물이 있을까, 오만 원권 지폐가 태인의 눈앞에서 아른거리자 얼굴에는 좋은 티를 팍팍 내고 있었다.
“알았어.”
태인은 이 상황이 극도로 어색한지 용돈을 받았지만 고맙다는 이야기는 못 한 채 무뚝뚝이 대답만 할 뿐이었다.
사실 태범과 태인은 서로 선물을 주고받는 성격은 아니었기에 지금 이 상황은 매우 낯선 모습이었다.
이 모든 게 가능했던 건 도전 정신 덕분이다.
생각을 곧 행동으로 옮기는 능력, 오글거려 못할 것만 같은 것도 행동으로 일어낼 수 있었다. 태범은 조만간 부모님에게 사랑한다는 말 표현을 해볼 생각도 하고 있었다.
* * *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드디어 오늘은 정식으로 사내에서 일하는 날이었다.
연수 때 자주 보던 동기들과 교육을 담당했던 회계사들이 눈에 띄었고 그들을 볼 때마다 인사를 건넸다.
태범은 암기력 덕분에 사람의 얼굴을 잠깐 스쳐만 봐도 모두 기억할 수 있었다.
태범은 오늘부로 감사1본부에서 일하기로 했다.
감사1본부의 박철중 전무를 중심으로 외부 감사를 주 업무로 일하는 조직이었다.
보통 본부 배정은 회사에서 임의로 지정해주는 것이기 때문에 신입 회계사 들은 선택에 여지가 없었다.
그리고 항상 어딜 가든 첫 번째 숫자인 1은 최고를 의미했고 마찬가지로 감사1본부는 주로 굵직한 기업의 감사를 맡았다.
“반가워요. 강인후 차장이에요.”
“네! 안녕하십니까.”
“그래요. 강태범 씨죠? 오늘부터 제가 태범 씨 담당 선임이니까, 잘 따라와 주세요.”
“네, 알겠습니다.”
강인후 차장, 무뚝뚝한 표정 그리고 몸은 삐쩍 마른 것이 태범은 과거 자신을 보는 듯 했다. 일에 모든 기운을 받친 듯한 모습이었다.
“오늘부터 강태범 씨가 맡을 필드는 ‘한아름상사’라고 중견급의 식품 무역 회사입니다. 그곳의 중간 감사를 맡을 테니 참고하시고 자리는 저쪽입니다.”
일하는 책상 사이에는 칸막이로 쳐져 있어, 서로가 보이지 않게 돼 있었다. 하지만 책상 위에 높게 솟아올라 칸막이 위로 보이는 서류들이 이곳의 업무량을 짐작하게 만들었다.
태범은 강인후 차장이 안내해준 자리로 향했다.
깨끗이 정리된 책상 위에는 노트북과 펜 그리고 삼일회계법인의 마크가 찍혀있는 수첩이 올려져있었다.
“자 노트북 열어봐요.”
강인후 차장의 지시에 따라 태범은 노트북을 열어 전원을 켰다.
“감사 프로그램, 교육 때 익히셨죠?”
“네, 배웠습니다.”
“내일부터 필드에 나가서 중간 감사 실시할 겁니다. 일단 기업에 대한 상태를 알아야 하니까 여기 전기에 작성된 조서를 숙지하셔야 할 겁니다.”
“알겠습니다.”
연수 교육에서 배웠던 감사 프로그램을 열고, 태범이 이번에 맡은 ‘한아름상사’의 전기 파일을 열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는 말고요, 어차피 이번 감사의 참고용으로만 사용되는 거니까 편하게 보세요.”
정말 편하게 보라는 건지, 아니면 말뿐인지는 모르겠지만 일단 최선을 다해보기로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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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태범은 스크롤을 내리자 ‘한아름상사’의 수많은 재무적 정보들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분명 낯선 상황과 정보였지만, 이상하게도 누군가 머릿속에 정답이라도 뿌려주듯 정보가 속속히 머릿속에 박혔다.
“혼자서 볼 수 있겠지?”
“네, 이정도면 혼자서도 충분합니다.”
“그래요? 정말 설명해줄 필요 없다는 거죠?”
“네.”
“알겠어요. 그럼 오늘까지 대략적으로 숙지하시고 내일 필드에서 뵙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