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1
“내 능력은 어느 날 갑자기 생겨난 것 같았어.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말이야.”
태범은 스캐너의 존재에 대해 말하지는 않았다.
대신 표면적으로 능력을 주는 스캐너와 비슷한 뉘앙스로서 말할 뿐이었다. 물론 효준은 태범이 무슨 말을 하는지 도통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난 네가 무슨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다.”
“사실 나도 내가 뭔 소리 하는 건지 모르겠네.”
“네가 말하고 싶은 건, 노력하다 보니 어느 순간 펑! 하고 능력이 나타났다는 말 아니야?”
“응, 그렇지.”
효준은 태범의 말을 전혀 다른 의미로 받아들이고 있었다. 누가 요술램프 마냥 능력을 주는 스캐너를 상상할 수나 있을까, 어차피 사실을 말할 것도 아닌데 이쯤에서 효준의 생각이 맞는다며 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나 정말 궁금한 게 또 있는데 물어봐도 돼?”
또 다시 효준은 태범에게 질문을 요청했다.
“형, 제발 편하게 물어봐.”
“알았어. 정말 궁금해서 그런데 너 이번에 회계사 공부 얼마나 노력한 거야?”
“노력?”
“난 정말 이번 시험에 있어서 그 누구보다 공부를 많이 했다고 생각했거든, 인간이 물리적으로 견딜 수 있는 시간 모두를 공부에 투자했는데 말이야. 그렇다면 도대체 내 앞에 있는 사람은 얼마나 공부를 한 건가 싶어서…….”
“나도 죽도록 공부했지. 미쳐야 성공한다는 말이 있잖아. 그때는 잠시 미치도록 공부에만 빠져있었던 것 같았어.”
효준의 질문에 태범은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물론 거짓말이 잔뜩 섞인 대답이었지만 선의의 거짓말은 이럴 때 쓰라고 있는 것이다.
사실을 이야기 하자면 노력보다는 능력으로 인한 성공이었고 이를 남에게 함부로 알렸다간 노력한 자에게 좌절을 안겨줄지도 모르는 것이었다.
“너도 죽도록 했었구나.”
“힘들긴 했지.”
“그래도 힘들 만큼 좋은 결과가 있어서 다행이네. 난 결국 언제나 2등 신세인데.”
효준은 태범을 부러워하듯 바라봤다.
“왜? 2등이 어때서. 세상이 사람이 몇 명인데 그중에 2번째면 엄청난 성과잖아.”
“너 내가 왜 1등에 집착하는지 알아?”
“응?”
“보통 사람들은 내가 악착같이 하는 이유가 본인을 위해서라고 생각하거든, 하지만 그건 틀린 말이야. 사실 아버지에게 인정받고자 하는 내 욕심 때문에 그런 거지.”
“대표님하고…… 무슨 문제라도?”
태범의 질문에 효준은 잠시 말을 멈추고 씁쓸한 표정을 한 채 고민에 빠졌다.
“하…… 아니다. 내가 괜한 소리를 한 것 같다.”
효준은 결국 하려던 말을 거둬들였고 태범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자신의 아버지와 트러블이 있는 건 분명해 보였고 굳이 남의 가슴 아픈 이야기를 긁어낼 필요는 없었기 때문이다.
깜깜한 저녁 호텔 방을 은은하게 비추는 조명 때문인지 태범과 효준은 한동안 분위기에 취해 대화를 나누다 그대로 잠에 들었다.
* * *
해외 연수 마지막 날.
오늘 오후에는 모든 인원이 비행기를 타고 집으로 돌아가는 일정이 잡혀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오늘은 교육보다는 연수의 마무리를 위해 오전에 잠깐 행사가 있을 계획이었다. 우수한 조를 수상하고 앞으로의 마음가짐을 다짐하는 등 연수의 마무리는 그렇게 잡혀있었다.
이제 정들만한 이곳도 떠날 때가 됐다.
고난 했던 군대 생활을 제외하고는 오랜만에 사람들끼리 어울려 한 곳에서 지내는 것도 꽤나 괜찮았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같이 붙어 다니다 보니 동기들과도 많이 친해졌고 정도 많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박철중 전무입니다.”
‘어 저 사람!’
마지막 날 강단 위에 올라온 사람은 태범의 면접을 맞았던 박철중 전무(파트너)였다.
연수 기간 동안 단 한 번도 보이지 않았는데 마지막 날이 돼서야 모습을 드러냈다.
역시 높은 사람들은 항상 보면 처음과 끝에만 모습을 드러내지 그 외에는 모습을 잘 드러내지 않는다. 얼마나 귀하신 몸이면 저럴까.
“다들 교육받느라 고생들 많으셨습니다. 연수는 마음에 드셨나요?”
“네!”
박철중 전무의 질문에 신입 회계사들은 힘차게 외쳤다.
“나름 보수적인 문화는 버리고 젊은 사람들이 좋아하게끔 교육 프로그램을 짜본 건데 말이죠. 마음에 들었다니 다행이네요.”
신입들의 좋은 반응에 박철중 전무도 입에는 미소를 지어졌다.
“자 그럼 이번 해외 연수에서 가장 팀워크가 좋고 좋은 활약을 한 조를 수상하는 시간을 갖도록 하겠습니다.”
전혀 긴장감 없는 발표시간이었다. 태범은 본인의 조가 1등이라는 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연수동안 4조가 뭐든 가장 빠르고 정확히 답을 만들어 냈고 누군가 조작하지 않는 이상 1등은 따 놓은 당상이었다.
“자. 기대 되시죠. 과연 3등은 누굴까요. 6조!”
호명된 조는 싱글벙글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강단 위로 올라왔다.
그리고 그럴싸한 상장을 건네주며 나름 시상식답게 모든 건 갖춰졌다.
그리고 이어서 2등인 9조가 호명되고, 마지막 1등만 남은 상황.
“자. 1등은 누군지 궁금한데요.”
태범의 조뿐만 아니라 이미 다른 조들 역시 4조가 1등이라는 걸 예측하고 있었기에 긴장감은 전혀 없었다.
그리고 4조의 조원들은 아직 호명은 됐지 않았지만, 터져 나오는 미소를 막지 못하고 싱글벙글 서로를 쳐다보고 있었다.
태범, 효준도 마찬가지. 자칫하면 발표도 하기 전에 웃음이 터져 나올 판이다.
“가장 많은 점수, 총 12점을 획득한 4조가 이번 해외연수에서 가장 좋은 팀워크를 발휘했습니다. 다들 축하해주세요!”
박철중 전무가 4조를 호명하자 회계사들의 박수 소리가 강당을 메웠다.
그제야 입안에 힘겹게 숨겨놨던 웃음을 터트릴 수 있었다. 조원들은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기쁨을 만끽하고 있었다.
“4조 앞으로 나오시죠.”
박철중은 4조를 강단으로 불렀고, 태범을 포함해 7명은 강단 위에 올라갔다.
“자 소감 한 말씀씩 해보시죠.”
박철중 전무가 조원에게 마이크를 넘겼고, 안영미를 시작으로 한마디씩 하기 시작했다.
“감사합니다. 이런 곳에서 상을 받을 줄은 생각도 못 했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상정회계법인을 위해 열심히 일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저는 조원을 잘 만났고, 운이 좋아서 이 상을 받는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들도 모두 열심히 하셨고, 훌륭한 실력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고생 많으셨습니다.”
마이크가 조원들의 손에서 점차 옆으로 이동했고, 마지막으로 도착한 곳은 태범의 손안이었다.
많은 사람의 시선이 태범에게 향했지만, 이제는 더 이상 두려움의 1조차 남지 않았다.
무슨 짓을 해도 사라지지 않았던 무대 공포증이 이제는 말끔히 사라진 것이다.
모두 스캐너가 준 능력 덕이었다.
“자신이 어떤 마음을 먹느냐에 따라 뭐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여러분과 함께 성공에 대한 마음가짐을 가지고 상정회계법인을 이끌어 가고 싶습니다. 감사합니다.”
이로써 태범은 같은 동기들에게 강한 인상을 남겼다.
수석이라는 타이틀과 이번 1등이 더해져 상정회계법인에서는 이미 유명인사가 돼버렸다.
“주어진 문제에 우수한 실력으로 풀어나갔고, 이는 훌륭한 팀워크가 있었기에 가능했을 겁니다. 인연이 여기서 끝나는 게 아니라 앞으로도 쭉 이어가며 상정회계법인을 위해 힘을 써주셨으면 합니다.”
박철중 전무는 4조에게 기대 섞인 말을 했고 이어서 모든 신입 회계사들을 바라보며 앞으로의 기대감을 내비치며 희망적인 말을 건네줬다.
“수상을 받은 회계사뿐만 아니라 여기 모든 회계사 역시 상정회계법인의 미래를 이끌어나갈 주역이 되실 분들이라 믿습니다.
이로써 시상식을 포함해 해외연수의 모든 일정이 마무리되었다.
이제 한국으로 돌아갈 일만 남았고, 회계사들은 챙기지 못한 짐을 마저 챙기기 위해 호텔 방으로 향했다.
태범은 마찬가지로 위층인 자신의 호텔 방으로 올라가려 했다.
“저기요. 강태범 씨?”
태범이 강당을 나서려는데 처음 보는 얼굴의 남자가 다가왔다.
이름을 알고 있는 걸 보아하니 같은 회계법인 소속인 것 같은데 머릿속 기억에 전혀 없던 얼굴이었다.
“저기 끝나고 잠시 박철중 전무님께서 보자고 하십니다.”
“네, 저를요?”
“네, 강당 옆쪽으로 오시면 조그마한 B회의실이 있을 겁니다. 그쪽으로 오시면 됩니다.”
이쯤 보니 남자는 박철중 전무의 부하직원쯤으로 보였다.
태범에게 뭔가 개인적으로 할 말이 있는지 직원을 보내듯 했다.
“네, 알겠습니다.”
* * *
“역시 대단하네요. 괜히 수석을 한 게 아니었어요.”
“안녕하세요!”
태범이 회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박철중 전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더니 태범을 반겼다.
그러고는 다짜고짜 칭찬부터 건넸다.
환하게 웃어주며 반겨주니, 태범도 똑같이 미소로 인사를 건넸다.
“여기 앉아요.”
“네!”
박철중 전무는 파트너급 회계사로 부대표 아래 급의 직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태범에게 있어서 첫날 대표를 제외하고는 가장 높은 직급의 사람이었고 이곳에서 가장 대장격인 사람이었다.
그러다 보니 태범은 행동을 좀 더 조심해야만 했다.
태범은 허리를 곳곳이 펴고 예의를 갖추며 박철중 전무 앞에 앉았다.
“내가 태범 씨를 왜 개인적으로 불렀는지 아세요?”
“뭔가 할 말씀이 있으셔서 그런 거 아닌가요?”
“당연 할 말이 있으니까 불렀겠죠. 말없이 눈싸움이나 하자고 부른 줄 아세요?”
“아, 죄송합니다.”
“장난입니다. 장난, 하하.”
장난이라는 걸 몰랐을까, 태범도 잘 알고 있었지만 이등병이 이등병처럼 행동할 때 가장 인정받는 법. 박철중 전무의 비위를 마쳐주기 위해 일부로 당황한 척 한 것뿐이었다.
“그래요. 태범 씨가 속한 4조가 1등도 하고, 모든 게 그쪽 능력 때문이었겠죠?”
“아니요. 조원들이 다 잘해서 그런 거죠.”
태범의 말에 박철중 전무는 손을 흔들며 말을 부정했다.
“아니, 겸손하실 필요는 없어요. 우스갯소리로 가는 말이 고우면 얕본다는 말이 있죠. 자신을 드러낼 때는 드러낼 줄도 알아야 합니다. 너무 자신을 낮게만 보지 마세요.”
“네, 알겠습니다.”
“뭐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어쨌든 진짜 중요하게 할 말이 따로 있거든요.”
“네, 말씀해주세요.”
“사실 내가 면접 때부터 시작해 태범 씨를 지켜 봐왔었거든요. 아마 태범 씨도 눈치 챘을 것 같은데?”
“아니요.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래요? 하긴 내가 꽤 치밀하거든요. 내 속셈을 알아차리는 건 명탐정이 와도 못할 거예요. 하하”
박철중 전무는 자화자찬을 하더니 말을 계속 이어나갔다.
“상당히 솜씨가 좋더라고요. 보통 수석하면 떠오르는 게 그저 시험만 잘 치는 공부벌레의 이미지가 떠오르는데 태범 씨는 달라요. 실전에서도 상당히 강하고 말하는 것도 패기가 있고 뭐든 만능적인 느낌이랄까…….”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니요. 아니, 나한테 감사할 건 아니고 뭐든 다 갖춘 본인에게 감사해야 할 일이죠.”
박철중 전무는 태범의 어깨에 손을 얹으며 다정하게 말했다.
“그래서 그런데 내 쪽에서 일해 볼 생각은 없어요?”
“네? 그게 무슨 말씀이신지.”
태범은 박철중 전무가 말하는 ‘내 쪽’ 이라는 게 뭘 의미하는지 몰랐다.
이미 상정회계법인이라는 한 배를 타고 있는데 말이다.
“나랑 같이 일하자는 겁니다. 저의 서포터를 받으면서 태범 씨의 능력이면 분명 저와 일했던 그 누구보다 대단한 곳에 오를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지금까지 그래왔듯 능력이 있으니 사람이 붙었다.
학교에서도 그랬고 이제 사회에 나와서도 그러고 있었다.
“나랑 같이 일했던 사람들이 지금 뭐하고 있는 줄 알아요?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 총수의 돈을 주무르는 사람도 있고 태범 씨가 상상할 수도 없는 저 높은 곳에 있는 분과 함께 일하는 사람도 있어요. 능력! 그리고 사람만 잘 만난다면 세상에 못 할게 없죠.”
갑작스런 제안에 태범은 어안이 벙벙했고, 박철중 전무는 유혹적이고 달콤한 말을 계속 뱉어냈다.
“태범 씨는 운이 좋게도 둘 다 있네요. 능력도 가지고 있겠다. 그에 맞는 사람은 바로 코앞에 나타났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