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50화 (50/188)

# 50

태범이 형이라 부르니 반말로 대답은 했지만 효준에게 매우 어색한 상황이었다.

어제 일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이미 일어난 일이었다.

그에 맞춰 최대한 자연스러운 척 행동은 하고 있으나 하루아침에 바뀐 분위기에 얼떨떨했다.

“형, 마음 다 알았어요. 그런 문제가 있었으면 미리 말씀하시지.”

그에 반해 태범은 아주 자연스럽게 행동했다.

효준의 마음을 이해한다는 듯 온화한 표정으로 효준을 바라봤다.

“어제 내가 뭐 실수한 거 있었어요?”

“말 편하게 하세요. 형 동생 하기로 했잖아요.”

“아. 그렇지. 그래, 내가 어제 일이 자세히 기억이 안 나서 그런데 내가 뭐라고 했어?”

희미한 기억이지만 효준은 본인이 한 말이 대충 머릿속에는 떠오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물어보는 건 한 번 더 확인을 위함이었다.

“다 말해드려요?”

“아니, 그냥 대충 말해줘도 돼. 혹시 내가 실수했나 싶어서.”

태범은 시선을 위로 응시하며 잠시 고민을 했다.

실수? 물론 했다. 자칫하다가 필리핀 양아치한테 끌려가 맞았을 뻔했으니 말이다.

게다가 소란의 주범이니 이는 큰 실수라면 실수였다.

하지만 모르는 게 약이라고 태범은 이를 덮어두기로 하고 대화 내용만 설명하기로 했다.

“형이 그때 고민을 이야기하셨어요. 요즘 왜 힘들어하는지도 알았고 아버님이 상정회계법인 대표님이라는 거까지?”

“아…….”

효준은 자기 이마를 붙잡으며 한탄을 했다.

조원들 앞에서 모든 걸 말했구나 하는 걸 깨달은 것이었다.

그러고는 이놈의 술이 문제라며 다시는 술을 마시지 않겠다고 속으로 다짐하고 있었다.

“너무 심각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저희 다 이해해요. 그럴 수 있는 거죠. 형이 절 안 좋게 봤던 것도 알고 보니 이해가 되더라고요.”

“아…….”

효준은 한동안 말을 잇지 못했다.

자기가 싫어하던 사람이 저렇게 인자한 표정으로 말을 하니 효준은 괜히 본인 스스로가 부끄러웠다.

“형, 이제 내려가죠. 모일 시간이 거의 됐는데.”

“응, 가야지.”

효준은 아직은 어색한지 자신의 이로 입술을 물더니, 개미 지나가는 소리마냥 작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리고 그렇게 둘은 어색한 기운을 가득 품을 채 방에서 나와 교육장인 호텔 강단으로 내려갔다.

“잠은 잘 주무셨어요?”

미리 강단에 와있던 조원이 아침인사를 건넸다.

다들 얼굴이 말이 아닌 게 피곤함이 역력했다. 태범의 조 뿐만 아니라 다른 조들도 밤을 불 질렀는지 눈이 반쯤 잠겨 있는 모습이었다.

오늘 오전에는 클라이언트를 응접하는 교육이 계획돼있었다.

회계사의 매출은 결국 영업에 달려있다.

능력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중요한 건 얼마나 입을 잘 놀리며 고객을 현혹시켜 계약을 따내는가에 있었다.

오전 교육은 박현민 차장이 맡았다.

“실무에 직접 부딪혀 보다 보면 현실과 책 속의 세상이 크게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을 겁니다. 항상 책 속의 세상은 깨끗하고 정직한 이야기만 할 뿐 현실의 진상을 보여주지는 않죠.”

단상에 올라간 박현민 차장은 영업에 관한 현실을 설명하기 시작했다.

매니저 직급에 속하는 박현민 차장은 똥배가 셔츠 사이를 뚫고 나올 것만 같았다.

그의 배는 고객사와의 잦은 술자리로 만들어진 술배였다.

어떤 사람에게는 게으르고 관리하지 않아 생긴 몸이라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박현민에게 있어서는 노력의 결과이자 경력의 상징이었다.

“만약 윤리적인 문제와 현실의 문제가 부딪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예를 들어 회계법인 측에서 감사를 위해 자료를 요구했다 쳐요, 근데 그쪽에서는 뭔가 숨기려는지 안줍니다. 그럼 여러분들의 선택은 어떨 게 할까요? 저기 앞에 저분 말씀해보세요.”

박현민 차장이 앞 테이블에 있는 1조의 한 사람을 가리키며 물었다.

지목을 당한 회계사는 자리에서 일어나 잠시 고민하는 듯 머뭇거리다 대답하기 시작했다.

“회계사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윤리 기준을 지켜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너무도 정직한 대답이었다. 시험에서 문제가 나왔다면 정답인 대답이었을 것이다.

하지만 박현민 차장은 손가락을 세운 뒤 좌우로 흔들더니 뭔가 마음에 들지 않는 표정을 지었다.

“그럴 거면 여기서 제가 굳이 말로 교육할 필요가 있을까요? 윤리 기준을 지키는 게 정답이라면요? 저기 4조에 저분 한번 말씀해보세요.”

이어서 박현민은 태범을 지목했다.

태범은 자리에서 일어나는 잠깐의 찰나에 고민했다.

정직함이냐, 현실성이냐. 그리고 선택했다.

“중요성을 따져보고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 서류가 재무제표에 중대한 영향을 주면 반드시 확인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득과 실을 따져서 선택해야겠죠.”

태범 역시 공인 회계사 윤리 기준 그대로 대답할까 생각했었다.

하지만 박현민 차장은 정직함을 말하려는 게 아니었다.

괜히 세상을 정직하게 살면 손해라는 말이 생겼을까. 차장이 말하려는 건 현실의 벽이었고 책 속의 아름다운 세상이 아닌 현실의 어두운 면을 말하려는 것이었다.

태범은 그런 그의 생각을 캐치했다.

“사실 여기에는 정답이 없습니다. 그저 여러분들이 클라이언트를 직접 만나서 같이 일을 해보면 그때야 본인만의 답을 깨달을 겁니다.”

박현민 차장이 직접적으로 말하지는 않았지만 대충 그가 설명하고자 하는 건 적당히 융통성 있게 일을 처리하라는 것이었다.

만약 철저하게 원리 원칙을 지키려 한다면 고객사와 거래하는데 있어서 문제가 생길 것이다. 영업에는 원리원칙보다 융통성이 중요한 요소였다.

그리고 오전 교육이 끝나고 시계는 12시 식사시간을 알렸다.

“효준이 형, 같이 식사하러 가시죠.”

“효준 씨 같이가요.”

효준은 조원들 얼굴보기가 부끄러워 얼른 자리를 뜨려했다.

어제만해도 가득 찬 패기는 온데간데없고 자신의 속마음이 모두에게 밝혀져 마치 발가벗은 기분을 느끼고 있으니 말이다.

“전 괜찮은데.”

“에이. 그러지 말고 같이 가요.”

하지만 살갑게 자신을 부르는 태범과 조원들이 그를 막아서니 효준은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네, 알겠어요. 그럼 같이 가요.”

그렇게 효준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답했고 조원 모두 식사를 위해 식당으로 향했다.

오후 교육은 조별로 이뤄지는 교육이었고 고객사들의 재무제표와 경영상태를 보고 경영 자문을 하는 것이었다.

식사를 마친 회계사들은 교육 시간에 맞춰 테이블을 채웠다.

조별로 모두 같은 고객사 정보가 담긴 서류가 주어졌고 조원들이 머리를 맞대어 경영에 대한 자문보고서를 작성하고 이를 선임 회계사가 평가하는 것이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1등은 3점, 2등은 2점 3등은 1점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교육은 어제 보았던 서상범 과장이 진행했다.

“자. 다들 이번에는 사이좋게 해볼까요?”

사실상 분식 회계를 잡아내는 문제를 풀 때 효준과 태범의 두 구도로 이뤄져 분열된 조와 다름없었다.

하지만 같이 술도 마시고 회포도 풀었겠다. 더 이상의 갈등은 없다고 생각한 안영미는 조원들에게 힘을 불어넣었다.

“네, 열심히 해보죠!”

태범도 안영미의 말에 손을 불끈 쥐며 답했다.

효준을 포함해 다른 조원들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자 역할을 분담해야 하는 데 어떻게 할까요?”

태범이 손바닥을 치며 주의를 집중시키며 말했다.

“각자 자기가 잘 아는 부분이 있을 거 아니에요? 회계사 공부할 때 쉬웠던 부분이나 점수가 높게 나온 부분. 그 부분과 맞춰서 일을 나누죠.”

태범의 질문에 효준이 대답했다. 그는 괜히 시험에서 차석을 한 것이 아니다. 일이 시작되니 효준은 빠르게 일에 몰입하기 시작했다.

효준의 말에 모두 수긍하는 분위기였다.

그리고 이어서 태범이 작업에 대한 분담을 지휘했다.

조원들에게 어떤 역할이 맞을지 물어보며, 서로가 잘 아는 분야를 맡기로 한 것이다.

같은 회계사라 할지라도 어떤 이는 세무 부분을 잘 알 수도 있고 어떤 사람은 주식에 대해 잘 아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일단 제가 불필요한 비용이 있는지 살펴볼게요. 효준이 형은 법인세 문제를 파악해주세요.”

태범은 추진력 있게 일을 지휘하며 진행시켰다.

“응, 그렇게 할게.”

“영미 씨는 현금성 자산을 체크해주세요.”

“네, 그렇게 할게요.”

어제와는 완전 딴판이었다.

기름칠 잘된 쳇바퀴를 보는 듯 효준이 역시 조원들과 합세하며 일이 수월하게 진행되었다.

각자 맡은 부분의 서류를 집어 든 뒤 검토를 시작했다.

어느새 강당은 종이 넘기는 소리와 논의를 하는 아주 학습적인 분위기가 형성되었다.

역시 공붓벌레들이 모인 곳이라 다르긴 했다.

“모르는 것 있으면 서로 물어보고요. 이상한 게 있으면 지나치지 말고 꼭 확인해 주세요.”

태범은 자기 일을 하는 도중에도 조원들에게 유의사항을 상기시켰다.

꼭 1등하겠다는 생각이었다.

어제 해본 결과 높은 확률로 1등에 승산이 있어 보였다.

쓱쓱쓱.

다들 잘 하고 있는 걸까 조원들의 고요함 속에 그저 종이 위에 움직이는 펜 소리만 날 뿐이었다.

“다했다!”

시간이 지나고 가장 먼저 태범이 펜에서 손을 놓았다. 태범의 A4용지 위에는 기업의 효율적인 자산구성에 대해 설명이 빼곡히 적혀있었다.

“도움 필요하신 분 말씀하세요. 손이 놀고 있습니다.”

태범은 자산의 두 손을 흔들며 놀고 있는 손에게 일을 달라고 재촉했다.

그러자 조원 중 한 명인 서동희가 자신의 서류를 내밀었다.

기업 부채와 관련된 서류였다. 태범은 그의 서류를 받아들고 경영자문을 위해 부채를 분석하기 시작했다.

부채는 적을수록 좋은 기업이기는 하나 어느 정도 부채를 가지고 투자를 하고 있어야만 기업의 발전 가능성을 볼 수도 측면도 있었다.

즉 기업의 부채 비율을 어떻게 조정하느냐는 경영자문에 중요한 요소이기도 했다.

마찬가지로 태범은 검토한 내용을 토대로 자문서를 작성했다.

그리고 모든 조원들은 역시 최선을 다해 자문서를 작성했다.

종이 위에 글씨가 빽빽하게 적혀 있는 게 각자의 열의를 보여주고 있었다.

모든 작성이 마무리 되고 태범은 조원들이 작성한 자문서를 모두 걷고 서상범 과장에게 제출했다.

“또 4조에요? 1등 하겠는데요?”

어제와 마찬가지로 4조가 가장 먼저 일을 끝마치자 태범에게 자문서를 받아든 서상범 과장은 놀라워했다.

그리고 서상범 과장은 느꼈다.

자신의 눈앞에 있는 사람이 확실히 남들과는 다르다는 걸 말이다.

* * *

필리핀에서의 마지막 저녁이 찾아왔다.

태범은 조원들과 친분을 쌓았고 대표 아들인 효준과도 서로의 오해를 풀며 더욱 가까워진 사이가 되었다.

태범과 효준이 있는 4조는 다른 조에 비해 우수한 교육성적을 보였고 아마도 내일 오전 발표하는 우승 조에 포함이 될 거라 생각했다.

“태범아, 대화 좀 해도 될까?”

침대에 누워 잠시 천장을 바라보던 효준은 정적을 깨고 태범에게 말을 걸었다.

바로 옆에 있음에도 대화를 승낙 받으려는 모습이 효준은 아직 태범을 편하게 받아들이지는 못하는 모양이었다.

“네, 편하게 말씀하세요.”

효준이 말을 걸어오자, 태범은 전혀 망설이지 않고 흔쾌히 대화를 승낙했다.

사람의 말에는 그 사람의 마음과 감정이 들어있는 법이다, 태범은 효준의 속마음을 더 알고 싶고 대화를 나누고 싶었다.

“태범아, 너도 말 편하게 해. 이제 형, 동생 하기로 했는데 서로 말 편하게 하는 게 좋지. 그리고 우리 동기잖아. 나이가 뭐가 중요하니.”

“네? 그럼 그럴까?”

효준의 요구에 태범은 이때다 싶어 자연스럽게 말을 놓았다. 반말은 확실히 서로의 사이를 좁혀주는데 큰 효과가 있으니 이는 둘이 가까워졌다는 의미였다.

“내가 생각해보니까 괜한 오기를 부렸던 것 같다. 사실 겉으로 널 욕했지만 속으로는 널 부러워했거든.”

“난 괜찮아…….”

술이 들어가지 않았지만 효준은 자신의 마음속 진심을 털어놓기 시작했다. 이는 태범에게 마음을 열겠다는 의미였다.

“아니야. 넌 사실 아무 잘못이 없잖아. 괜히 나 혼자 죄 없는 너한테 분풀이 한 거지.”

“이제 앞으로의 관계만 생각해. 이미 일어난 과거는 돌릴 수 없는 거잖아. 과거는 그냥 과거라 생각하고 너무 나한테 미안해 할 필요는 없어.”

효준이 원래 이렇게 감성적인 사람이었는가 싶을 정도로 처음 볼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었다.

“너는 회계사 됐을 때 부모님이 뭐라고 하셨어?”

효준은 자신의 속마음에 이어 태범에 대한 궁금함을 털어 놓기 시작했다.

“좋아하셨지. 내가 원래 공부를 그렇게 잘 하는 편은 아니었거든. 하하.”

“그래? 근데 어떻게 수석 합격을 했대. 네가 몰랐던 숨겨진 재능이 있었나 보네.”

태범을 뜨끔하게 만드는 말이었다.

효준은 숨겨진 재능 같은 걸 말하는 것 같은데 본래 태범에게 그런 건 없었으니 말이다.

재능이라기보다는 선물에 가까웠다. 스캐너가 준 선물 말이다.

“아니, 숨겨진 재능이라기보다는 부여받은 재능에 가까웠지.”

“부여 받다니 그게 무슨 소리야?”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