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9
“네, 기억력 좋다는 소리는 많이 들었어요.”
폰 노이만이 영어 공부를 위해 브리태니커 사전을 통째로 암기할 정도였으니 그 능력을 갖춘 태범에게는 언어 능력이든 암기 능력이든 더 이상 감출 수 없는 능력이었다.
감추려 해도 자기도 모르는 게 능력이니 태범은 더 이상 부정을 하는 것보다 그냥 인정하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다.
“혹시 기억력 대회나 그런 건 나갈 생각은 안 해봤어요?”
조원 중 한 명인 서동희가 태범에게 물었다.
“기억력 대회요?”
“네, TV에서 많이 나왔잖아요. 카드 외우기나 사람 이름 외우기 같은 걸로 대회 하던데요? 세계 대회도 있고.”
“아, 본적 있는 것 같네요.”
“그런 데서 우승하면 상금도 꽤 되고 이름도 알릴 수 있을 텐데 생각 있으면 도전해봐요. 재미있을 것 같은데.”
“지금 제가 거길 어떻게 나가요. 이제 막 회사에 들어왔는데.”
“아, 그건 그러네요. 하하.”
태범의 기억력에 대해 한참을 이야기하던 중 어느새 주문한 음식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다.
스테이크부터 시작해 햄버거에 샌드위치, 샐러드 등 맥주와 어울리는 음식이 테이블 위에 가득 찼다.
최후의 만찬이라도 즐기려는 건지 생각보다 많이 나온 음식에 태범은 이걸 다 먹을 수 있을까 생각이 들었다.
“잠깐 사진 좀 찍고요.”
여성 조원 한 명이 손을 펼치며 음식을 막아섰다.
역시 음식 앞에서 SNS용 사진을 그냥 지나칠 수는 없었던 모양이었나 보다. 게다가 필리핀에서 보는 새로운 음식들이었으니 한 명이 사진을 찍기 시작하니 너도나도 한 컷씩은 핸드폰에 담아두기 시작했다.
“자 다들 회계사 시험공부 하느라 고생 많으셨고 다시 한번 열심히 해봐요. 짠!”
사진 찍기가 끝나고 안영미의 건배사와 함께 모든 조원이 맥주잔을 들고 건배를 했다. 그리고 본격적으로 술이 들어가며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조원들 술자리의 이야기는 대부분 회계사 준비 시절 고생했던 스토리였다.
졸업 후 2년 동안 눈칫밥 먹으며 공부했던 이야기, 시험 공부하다 여자 친구랑 헤어져 슬럼프 온 이야기, 합격 후 부모님과 눈물을 흘린 이야기 등 시험은 단 한 가지였지만 그 속에는 각자의 희로애락 담겨 있었다.
다들 시험에 대한 고생을 술로 씻어내려는 듯 빈 술병에 테이블 위에 빠르게 쌓여 가며 주문한 음식들은 어느새 절반이나 줄었다.
“궁금한 게 있는 데 수석이면 몇 점이에요?”
남자 조원 중 한 명이 태범에게 혀가 꼬인 발음으로 물었다.
“평균 90점이에요.”
“크억!”
남자는 트림을 하는 건지 감탄을 하는 건지 모르게 입을 벌리며 놀라워했다.
커트라인 61점에 평균 90은 역대 수석 점수 중에서도 높은 편에 속했다.
머릿속에 책이 들어있는 태범으로서는 당연한 결과였지만 일반 사람들 입장에서는 죽어라 암기를 하고 이해를 해야만 겨우 합격할 수 있는 점수를 얻을 수 있었다.
분명히 놀라워할 만 했다.
“근데 왜 두 분은 서로 이야기를 안 하세요?”
안영미가 태범과 효준을 보고는 물었다. 술자리에서조차 서로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기에 누가 봐도 둘 사이에 문제가 있다는 걸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조원들 중 가장 말이 많고 활발해 보였던 안영미의 호기심이 결국 불씨를 건든 셈이었다.
그녀로 인해 이 불씨가 커질지 작아질지는 태범도 모르는 상황이었다. 하도 이효준이라는 인물을 예측하기가 힘드니 말이다.
“말해드려요?”
“네, 이제 같이 일할 사람들인데 서로 풀건 풀어야죠.”
입을 꾹 다물고 연이어 술만 마시던 효준은 술기운 때문이라 그런지 꾹 다물고 있던 입을 벌리며 말을 하기 시작했다.
안영미는 그런 효준에게 몸을 기울이며 경청할 자세를 취했다.
그리고 이 상황에 귀가 제일 번뜩 뜨인 사람은 태범이었다. 드디어 저 인간이 왜 본인을 싫어하는지 이유를 알 수 있으니 말이다.
“제가 당신 때문에 얼마나 힘든 줄 알아요?”
무슨 억하심정인지 갑자기 효준은 태범에게 삿대질을 하며 화풀이를 했다.
술에 취해 제정신이 아닌 사람도 눈을 번뜩이게 만드는 광경이었다.
“왜 그러신 거예요? 저도 이유 좀 자세히 알고 싶어요.”
술기운을 빌려 진실을 말하려는 효준의 모습에 태범은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태범은 당장이라도 삿대질하는 손가락을 분질러 버리고 싶었지만, 효준의 속마음을 알아내기 전까지는 참기로 했다.
“저는 세상에 저보다 잘난 놈이 있으면 보기 싫어요. 인정받고 싶어서 죽어라 노력해도 항상 보면 제 앞에는 누군가 있었거든요. 그게 얼마나 비참한지 아세요?”
효준은 손을 이리저리 흔들며 온갖 제스쳐와 함께 자신의 분한 감정을 표현했다.
“아, 참 힘드셨겠네요.”
분에 찬 효준의 말을 안영미는 모두 대꾸하고 있었다.
그러자 효준은 말에 탄력을 생겼는지, 점점 속마음 깊은 곳 이야기까지 하기 시작했다.
“우리 아버지가 누군지 알아요? 네?”
“그게 누군데요?”
갑자기 아버지 이야기라니 효준의 정체를 모르는 사람들은 의아해 할 수 밖에 없었다.
주로 갑질 하는 재벌 2세가 하는 멘트를 그대로 하고 있으니 말이다.
중요성을 따져보고 선택해야 할 것 같습니다. 만약 그 서류가 재무제표에 중대한 영향을 주면 반드시 확인해야 되고 그렇지 않으면 그냥 포기하는 게 나을 것 같습니다. 득과 실을 따져서 선택해야겠죠.”
네?”
“정말요?”
사실을 모르고 있던 조원들을 눈이 휘둥그레져, 술기운이 한방에 물러날 정도로 놀라워했다.
“근데 말이에요! 우리 아버지가 날 미워해요. 네?”
“무슨 일 있으셨어요?”
안영미가 사근사근한 말투로 질문을 하니 효준은 이에 홀려 속마음을 모두 털어낼 기세였다.
“전 아버지 보다 못한 놈이에요. 멍청이에요. 멍청이.”
뭔지는 모르겠으나 효준는 아버지에게 쌓인 게 많았던 모양이다.
효준은 아버지와 본인을 비교해 스스로를 자책하고 있었다.
“아버지는 최고 자리까지 올라갔는데 전 뭘 해도 최고가 될 수 없나 봐요. 꺽. 도대체 얼마나 해야 되는 걸까요? 아니면 애초에 못 올라가는 곳일까요?”
태범은 효준의 말을 들어보니 대충 뭔 말인지는 이해가 갔다.
아마도 아버지를 만족시키기 위해 열심히 노력하는데 그게 잘 안 풀린 모양이었다. 그리고 차석인 본인보다 높은 점수를 받은 태범이 어쩌면 걸림돌로 보였을지도 모른다.
태범은 이제야 머릿속 퍼즐이 모두 맞춰진 기분이었다.
“도대체 얼마나 노력해야 되는 거야. 흐흑.”
심지어 효준은 감정에 복받쳐 눈물을 흘리며 흐느끼기 까지 했다.
“괜찮아요. 괜찮아.”
이러라고 한 질문은 아니었는데 안영미는 효준을 토닥거리며 달래줬다.
“야! 거기 조용히 좀 해!”
옆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던 필리핀 사람이 벌떡 일어나더니 태범의 테이블을 가리키며 소리를 질렀다.
갑작스런 호통에 모두 당황하긴 마찬가지. 조원들은 소리가 들려온 옆 테이블로 시선을 돌렸다.
얍쌉하게 생겨 딱 봐도 한 성깔 할 것 같은 외모였다.
물론 외형으로 성격을 판단하는 건 잘못된 일이지만 마른 체형에 문신이 몸에 덕지덕지 보이는 필리핀인은 분명 평범한 사람은 아닌 거로 보였다.
“죄송합니다.”
요즘 필리핀에서 한국인을 상대로 사고가 많이 난다고 들었다.
태범 역시 이를 언론을 통해 많이 접했기에 괜히 싸움이 나는 건 피하고 싶었다.
태범이 필리핀 남자에게 영어로 공손히 사과했다.
“하여간 한국인 놈들은.”
태범의 사과를 듣고 다시 자리에 앉던 필리핀 남자에 입에서는 한국인에 대한 욕이 나왔다.
영어를 잘 알고 있는 회계사들로서 분명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는 욕이었다.
“우리 욕한 거 맞죠?”
“조용히 해요. 괜히 여기까지 와서 싸우면 저희만 손해에요.”
조원들은 조용히 한국말로 이 상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야, 너 뭐라고 했어! 내가 누군지 알아?”
조원들은 쥐죽은 듯 목소리를 낮추며 말했지만, 이것도 잠시 효준이 정적을 깨고 말았다.
“많이 취한 것 같은데 그냥 앉아요.”
조원들이 효준을 말렸지만 일은 이미 벌어졌다. 필리핀 남성이 태범의 테이블로 다가오더니 욕짓거리를 하기 시작했다.
F시작하는 욕과 한국인을 무시하는 듯한 발언을 쏟아 내는데 결국 효준의 멱살까지 붙잡은 상황이었다.
‘이러다 총 맞는 거 아니야?’
대부분 조원들의 마음속에는 이 생각이 떠올랐다.
눈앞에 아른거리는 문신을 보자니 조원들은 안절부절 못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필리핀 경찰도 112인가?”
안영미는 혹시 일이 생길까 경찰서에 전화를 하려 했지만 생각해보니 이곳은 필리핀이었다. 경찰서 번호가 112인지 뭔지 모르는 상황.
“어!”
그 순간 안영미를 포함해 조원들은 눈앞에 보인 모습에 눈이 휘둥그레졌다.
효준의 멱살을 잡고 있는 필리핀 남성이 하늘로 나르듯 공중으로 붕 뜬 것이다.
태범이 필리핀 남성의 하체를 붙잡아 높게 들쳐 올려놓곤 효준의 곁에서 떼어낸 것이었다.
마치 어머니가 자기 자식 품에 안듯 태범의 표정에는 아무런 변화 없이 남자를 들어 올린 것이었다.
“어…… 어.”
자신의 몸이 공중으로 붕 뜨자 필리핀 남성은 당황한 듯 놀람이 얼굴에 그대로 보였다.
데드리프트(바닥에 놓인 봉을 들어 올리는 운동)를 최고 230㎏까지 뽑아내는 태범으로서 기껏해야 80㎏로 보이는 남성의 몸은 그저 깃털과 같이 한없이 가벼운 존재였다.
“제가 사과드렸으니 그만하시죠. 이분도 많이 취해서 그런 거니까 이해 좀 해주세요.”
“아나…… 알았으니 다음부터 조심해요.”
힘에 놀란 탓일까, 필리핀 남성의 얼굴은 잔뜩 화가 나있었지만 몸은 테이블에서 멀어져 가고 있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제자리에 돌아갔다.
“날 지켜준 거예요? 하하. 고마워요. 태범 씨 역시 나보다 위에 있는 사람은 달라! 힘도 쌔고 말이야. 내가 형이죠? 형 동생 어때요? 좋다!”
“네, 형. 동생해요……. 저기 여기서 그만하고 호텔로 돌아가죠.”
태범을 그렇게 미워하던 효준의 말은 그가 이미 제정신이 아니라는 걸 말해주었다. 그렇게 혼자 말없이 술만 들이켜더니 결국 이 사달이 난 것이다.
더 이상 마시다가 무슨 일이 벌어질지 모르는 상황.
태범은 빠르게 자리를 정리하자며 조원들에게 말했다. 조원들도 낯선 이국땅에서 걱정되는 건 마찬가지였다. 다들 빠르게 짐을 챙기며 술집을 나섰다.
* * *
띠리리리리리.
핸드폰은 알람을 강하게 울리며 아침을 알렸다.
“아으!”
오랜만에 술을 마신 탓일까, 침대에서 일어난 태범은 숙취 때문에 전혀 개운하지 않은 아침이었다.
여전히 속은 니글거리고 머리는 띵한 게 이대로 좀 더 누워있고 싶다는 마음밖에 없었다.
옷을 보니 외출했을 때 입었던 그 옷 그대로였다.
“크르렁…… 크르렁…….”
옆 침대에 있던 효준도 마찬가지 외출복 그대로 침대에 뻗어 잠을 자고 있었다.
알람 소리를 못 들었는지 여전히 꿈나라에 있었고 게다가 코까지 골며 세상모르게 잠을 자고 있었다.
“저기요. 일어나야죠.”
이대로 뒀다가는 효준은 제시간에 교육을 들으러 못갈 수도 있었다.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뒀다가는 모든 책임이 같은 방을 사용하는 태범 본인에게로 올 게 뻔했고 어떻게 해서든 깨워야만 했다.
“일어나요. 일어나.”
“아으…….”
태범이 깨우는 소리에 효준은 앓는 소리를 하며 일어났다.
그리고 침대 위에서 잠시 멍하게 앉아 있더니 화장실로 들어갔다.
어푸, 어푸.
효준은 어제 뭔 일이 있었던 것 같았는데 생각이 안났다.
그리고 찬물로 힘껏 세수를 하던 도중 효준의 뇌리에는 어제 했던 말들이 꽂혔다.
자신의 속마음을 조원들에게 모두 이야기 했고 심지어 질질 짜기까지. 대표 아들로서 체면이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내가 착각하는 거겠지. 아니야.”
효준은 세안을 하면서도 어제 일을 곰곰이 생각했다.
세안을 마치고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며 화장실에서 나왔다.
그리고 최대한 자연스럽게 수건의 틈을 통해 태범의 표정을 살펴봤다.
“잘 주무셨어요? 전 숙취 때문에 미치겠는데 형은 그런 게 없나 봐요.”
효준이 화장실에서 나오자 태범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걸어왔다.
그리고 태범에게 형이라는 단어를 듣는 순간 효준은 깨달았다.
자신이 술집에서 했던 말이 착각이 아닌 사실이라는 걸 말이다.
“어…… 어…… 난 괜찮아.”
사실 효준도 숙취 때문에 머리가 아픈 건 마찬가지. 하지만 숙취 따위를 전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본인을 보고 형이라고 부르는 태범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