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47화 (47/188)

# 47

“아. 짜증 나게. 뭐야 일부로 그런 거야?”

효준은 자신의 캐리어를 침대 옆에 놓곤, 구시렁거리며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도대체 뭐가 짜증 나고, 뭘 일부로 그랬다는 거지.’

어쨌든 몸은 다른 방향에 있지만 뚫려있는 귀는 막을 수가 없었다.

뭔가를 구시렁거리는 효준의 말이 태범의 귀속에 들려 왔고 궁금증을 자극했다.

뭔가 힌트를 더 줬으면 했지만 효준은 더 이상 말을 꺼내지 않은 채 입을 꾹 다물고 침대 위에 누워버렸다. 그리고는 책을 펴더니 독서를 하기 시작했다.

분명 한 공간이지만 서로 다른 세계에 사는 듯. 태범과 효준은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행동했다.

태범 역시 지지 않겠다는 마인드로 침대에 누워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렸으며 효준도 자기 할 일만 할 뿐 전혀 태범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어린애도 아니고 도대체 뭐 하는 거야?’

태범은 가만히 이 상황 생각해보니 어릴 적 동생과 하던 짓과 똑같은 느낌이 들었다.

서로 삐져서 말 한마디 하지 않고 마치 서로를 투명인간 취급하며 지냈던 적이 있었다.

물론 다 큰 부모님도 부부싸움 후 그런 적이 있었으니 나이를 따질 문제는 아니지만 생각을 해봐도 이러기에는 너무 유치했다.

“저기요. 혹시 저한테 안 좋은 감정 가지고 계신가요?”

태범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켜 세운 뒤 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뭔가 이유라도 알아야 문제를 풀겠는데 도저히 생각을 해봐도 효준과는 관련 점이 없었다. 태범 본인 인생의 효준은 단 한 번도 엮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

대답은 없었다. 분명 열려있는 귓구멍으로 소리가 들릴 텐데 말이다.

태범은 다시 한번 말했다.

“저기요?”

“…….”

좋게 말해서 들을 사람이 아닌 듯 보였다. 태범은 약간의 도발을 섞어 보기로 했다.

“저기요 안 들리세요?”

태범의 입에서 뱉어진 말이 효준의 귀로 전달되자 효준은 인상을 깊게 쓰며 태범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자꾸 귀찮게 말 걸지 마시고 할 일이나 하세요.”

효준은 태범의 도발에 걸려들었고 인상을 잔뜩 쓰며 태범을 째려보며 말했다.

뱀눈처럼 가느다란 눈이 금방이라도 공격할 것 같은 태세였다.

똥은 무서워서 피하는 게 아니라 더러워서 피하는 것이다. 효준은 태범에게 확실한 인상을 남겼다. 그는 ‘똥’이다.

태범은 효준에게 더 이상 말을 섞지 않겠다는 생각과 함께 시선을 거둬들였다.

그리고 스마트 폰을 만지작거리며 친구와 대화를 나눴다.

[태범: 나 지금 필리핀이다.]

[현찬: 아 좋겠다. 우리는 사내 연수로 끝날 것 같은데.]

[태범: 그쪽 분위기는 어때?]

[현찬: 그냥 다들 좋은 사람들 같아. 딱딱한 분위기도 아니고 서로 존중하는 느낌이랄까?]

현찬은 BIG4 회계법인에 속하는 안정회계법인에 입사했고 태범과 마찬가지로 연수 중에 있었다.

태범이 현찬과 대화를 나눠보니 기업 분위기는 크게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글로벌 회계 기업과 파트너쉽을 맺고 있는 것부터 시작해 국내에 많은 감사업무를 맡고 있는 BIG4의 기업은 대부분 비슷한 성격을 취하고 있었다.

하지만 한정된 시장에 BIG4의 법인이 자리싸움을 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상 현찬과 태범은 친구이자 라이벌이 된 셈이었다.

[태범: 내가 나중에 재미있는 이야기 해줄게.]

[현찬: 무슨 일 있어?]

[태범: 응, 어떻게 된 게 오자마자 일이 생겼거든. 나중에 만나서 알려줄게.]

태범은 지금 일어나고 있는 기괴한 일을 친구에게 말해주고 싶었다. 대표 이사의 아들이 자신과 동기이자 지금 같은 방 옆 침대에서 서로를 노려보고 있는 재미난 이야기를 말이다.

[현찬: 궁금한데. 지금 알려주면 안 돼?]

[태범: 나중에 알려줄게. 나 곧 교육 들어가야 한다. 그럼 다음에 보자.]

어느새 시간은 집합 시간인 4시를 가리키려 했다.

태범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킨 뒤 집합장소인 강당으로 나갈 채비를 했다.

효준은 여전히 책에 푹 빠져 일어날 생각을 안 하고 있었다.

혹시나 늦을까, 태범은 바로 강당으로 내려갔다.

그러자 효준은 태범이 나간 후 얼마 뒤 마찬가지로 강당을 향해 내려갔다.

어떻게 해서든 태범과 접촉을 피하려는 효준의 모습이었다.

강당으로 내려오는 회계사들의 얼굴에는 싱글벙글 미소가 지어 있었다. 그리고 금세 사람들과 친해졌는지 첫날과는 다르게 서로 대화도 많이 나누며 이제는 꽤 가까워진 사이가 된 듯 보였다.

“테이블 앞에 조 번호가 표시돼있을 겁니다. 본인의 조에 맞춰 자리에 착석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유혜영 과장이 마이크를 잡고 강당으로 들어오는 신입 회계사들을 자리로 안내했다.

감사 2팀 유혜영 과장은 상정회계법인에 입사한 지 5년 차가 된 S시니어 직급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다.

검은색 천으로 쌓여있는 원탁 테이블 위에는 각 조의 번호가 적혀있었고 태범은 본인의 조인 4조의 테이블에 앉았다.

그곳에는 이미 같은 조의 몇몇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안녕하세요.”

“네, 안녕하세요.”

태범과 사람들은 서로 어색한 미소를 보이며 인사를 나눴다.

얼굴을 보니 인성은 좋아 보이는 사람들이었다.

저렇게 웃으며 인사를 받아 준다는 게 얼마나 소중한 건지. 태범은 자신의 룸메이트를 통해 깨닫게 되는 순간이었다.

한 조에는 7명이 자리하며 현재 6명이 자리에 앉아있었다.

하지만 한 명이 보이지 않는다. 대표 아들인 이효준.

아버지 믿고 여유 부리는 건지, 뭔지는 모르겠으나 분명한 건 보통 사람이 아니라는 거였다.

그리고 시간이 정확히 4시를 가리키자 효준이 모습을 드러냈다.

“안녕하세요.”

“네.”

다른 조원이 효준에게 인사를 건네자, 효준은 그저 목만 까닥이며 ‘네’라는 한 글자로 인사를 받아 줄 뿐이었다.

‘아우. 저 예의 없는 놈!’

예의 없게 구는 효준의 모습에 태범은 속으로 그를 욕했다.

그리고 태범은 처음 효준의 이름을 알게 되었다. 서로 통성명도 안한 상황이라 이름을 모르고 있었지만 목에 건 명찰 덕에 ‘이효준’이라는 이름 석 자를 그제야 알게 됐다.

“여기는 어떻게 수석이랑 차석이랑 한 조에 있대요?”

4조 테이블을 지나가던 유혜영 과장이 신기한 듯 태범과 효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혜영 과장은 수석과 차석이 누구인지 알고 있는 듯 보였다.

“네?”

아무것도 모르는 조원들은 얼떨떨한 표정을 지었다.

태범 역시 효준이 차석이라는 말에 조원들과 같은 표정이었다.

“아. 모르셨구나. 다 아는 줄 알았는데. 여기 이분하고 이분. 이번에 회계사 시험 수석하고 차석으로 합격하신 분들 아니에요?”

수석이라는 꼬리표는 어디든 따라다니는 것 같았다.

나쁠 건 없지만 그만큼 다른 사람에게 기대감을 충족시켜줘야 한다는 압박감은 존재했다.

“아. 그렇구나.”

조원들은 태범과 효준을 신기하게 바라봤다.

태범은 조원의 관심이 괜히 멋쩍은 웃음을 지었지만, 효준은 뭔가 탐탁지 않는 듯 표정이 구겨져 있었다.

‘아! 혹시?’

태범은 효준의 표정을 보니 순간 머리 속 뒤죽박죽이던 퍼즐 조각이 맞춰지는 기분이었다.

“개인 능력도 중요하긴 하지만 이번 연수 프로그램에는 팀워크가 필요하니까 서로 많이 도우셔야 할 거예요.”

유헤영 과장은 4조와 대화를 나누다 테이블 자리가 찬 것을 확인하고는 강단 위로 올라갔다.

“다들 모이셨죠? 오늘은 간단하게 연수일정만 설명해드리고 자유시간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당의 테이블에는 사람들로 가득 찼고 유혜영 과장은 시간에 맞춰 이야기하기 시작했다.

“여러분들이 즐기면서 교육에 참여해주셨으면 합니다. 이번 교육의 목적은 협동심과 유대감을 통해 실무에 자연스럽게 적응하는 데 있습니다. 교육을 딱딱하고 일방적인 것으로 생각하지 말고 수평적인 관계로 서로 의견을 교환해가며 정답을 찾고 배워나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그리고 여러 수업에 팀워크를 위한 점수가 있을 겁니다. 가장 많은 점수를 얻은 조는 회사에서 포상이 있으니 열심히 참가해주셨으면 합니다.”

“지금 옆에 있는 사람들이 짧으면 1,2년 길면 10년 20년까지 같이 할 사람들이니 가깝게 지내는 게 좋겠죠?”

유혜영 과장은 연수의 목적과 일정을 상세하게 짧게 설명하는 거로 오늘의 일과는 끝났다.

잠깐의 교육이 끝나고 식사시간과 함께 자유시간이 주어졌다.

다른 방은 서로 룸메이트끼리 대화를 나누며 친해지느라 바빴지만 태범과 효준은 그날 저녁 입에 본드칠이라도 한 듯 단 한마디도 나누지 않았다.

* * *

다음날 오전 9시에까지 호텔 강당으로 모인 회계사들은 교육을 받기 시작했다.

오늘 첫 교육은 회계사 윤리에 대한 설명이었다.

시험에서는 중요하지 않았던 부분이지만, 실무에서는 자칫하면 법적인 문제가 생길 수 있는 만큼 윤리적 부분은 중요했다.

“회계사들에게 어떤 윤리적 문제가 생기는데 실제 사례를 통해 보겠습니다.”

교육을 맡은 서상범 과장이 강당 앞에 있는 스크린을 통해 PPT자료를 보여주며 강의를 시작했다.

“신입들이 가장 조심해야 할 건 주식입니다. 여러분들이 흔히 생각하는 분식 회계(부당한 방법으로 작성된 회계)나 이런 건 신입 단계에서 걱정할 단계가 아직은 아닙니다.”

PPT에는 주식으로 인해 사회적 물의를 일으킨 회계사에 관한 기사가 나타났다.

실제로 신입 회계사들이 미공개 된 내부 정보를 이용해 부당 이득을 챙기는 경우가 종종 발생했었다.

주식 거래를 하는 건 잘못된 건 아니지만 본인이 속한 법인이 맡고 있는 기업의 주식을 구입하는 건 법으로 금지가 돼 있었고 이 부분을 간과했던 회계사들이 결국 법적인 책임까지 물어야 하는 상황이 된 것이다.

‘조심해야겠군.’

현재 주식을 활발하게 하고 있는 태범으로서 주의 깊게 들어야 할 사항이었다.

상정회계법인이 업계 1위인만큼 관여하는 기업이 많았기에 주식을 하기 전 일일이 관계를 따져야만 했다.

윤리 교육이 오전에 모두 끝마쳤고 오후부터는 실무 학습이 시작됐다.

“각자 나눠드린 재무제표와 거기에 맞는 증명 자료들이 있습니다. 그 재무제표는 분식 회계(부당한 방법으로 작성된 회계)로 작성됐고 증명자료와 맞지 않는 부분이 있습니다. 그걸 빨리 찾아내는 조가 점수는 따는 겁니다. 1등은 3점, 2등은 2점 3등은 1점입니다.”

서상범 과장이 조별 점수에 대한 설명을 하자 신입 회계사들은 경쟁심이 생겼는지 조원들과 이야기를 하며 논의를 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각 조마다 노트북 두 개씩 지급이 되었고 그 안에는 회계 프로그램으로 작성된 재무제표가 들어있었다.

그리고 A4용지 뭉텅이를 건네주는데 이 안에는 재무제표의 각 항목을 증명하는 증빙 자료가 인쇄되어 있었다.

조원들의 기대감이 투영된 듯 노트북은 자연스럽게 태범과 효준의 앞에 놓였다.

“같이 보면서 해요.”

하지만 모두를 위한 교육이기에 태범은 혼자 할 수 없다고 생각했고 자신 앞에 있는 노트북을 테이블 가운데로 밀었다.

그에 반해 효준은 경쟁심이 강하게 발동된 듯 노트북을 자기 코앞에 두고, 서류 뭉텅이를 한 움큼 집은 뒤 회계기록과 자료들을 비교에 나서기 시작했다.

신입 회계사들에게 익숙지 않은 실무 자료였기에 다들 머뭇거리고 있지만, 효준은 달랐다.

마치 능숙한 경력자처럼 머뭇거림 없이 일을 빠르게 진행하기 시작했다.

“일단 각자 일을 분담할까요?”

한쪽에서는 현란하게 눈과 손이 움직이고 있고 나머지 조원들은 천천히 계획을 세우고 있었다. 마치 한 조에 서로 다른 조가 존재하는 것만 같았다.

조원들은 각자 할 일을 분담했고 천천히 자료를 검토하기 시작했다.

그에 반해 효준은 한껏 여유 넘치는 표정으로 ‘내가 이런 사람이다.’라는 걸 보여주는 듯 자신만만하게 자료를 검토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났을까 태범의 눈에 낯설었던 자료들이 익숙해지기 시작했다.

태범이 소유하고 있는 능력이 복합적으로 작용하며 빠르게 정보를 흡수하고 있던 것이다.

“건설 진행률이 잘못 잡힌 것 같네요. 수익을 높게 잡으려고 한 것 같은데요?”

첫 번째 분식 회계를 발견했다.

태범은 건설 진행률에 따른 수익이 이상한 걸 발견하곤 조원들에게 말했다.

건설 공정이 50%만 진행됐으면 수익도 거기에 맞게 인식을 해야 하지만 투입된 비용에 비해 진행률이 높게 잡혀있었다.

이는 진행률에 대한 분식 회계가 분명했다.

“정말 그러네요?”

이후에도 못 받을 것 같은 채권(대손충당금)이 과소 계상되어 비용이 적게 인식 돼 있는 걸 발견하고 자산성이 아닌 개발비를 자산으로 처리한 항목을 발견하는 등 분식 회계를 빠르게 발견했다.

“역시…… 수석 합격하신 분은 다르구나.”

조원들은 엄지를 치켜세우며 태범을 칭찬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 상황에 효준의 표정은 점점 굳어져만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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