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43화 (43/188)

# 43

“내가 너를 왜 못 알아봐?”

“아니, 그때쯤이면 왠지 많이 바뀌어있을 것 같아서.”

“우리가 얼마나 떨어져 있는 다고. 설마 다 늙어서 온다는 건 아니겠지? 그리고 요즘 시대가 어떤 시대인데 아무리 그래도 얼굴을 잊을까?”

캐서린은 태범의 말도 안 되는 말에 어이없는 듯 웃으며 이야기했다.

“그래, 너 말이 맞아. 내가 괜한 소리를 했나 봐.”

태범은 캐서린의 말에 수긍하며 괜히 멋쩍은 미소를 지었다.

캐서린 말은 틀린 것 하나 없었다.

백만 년 영원히 떨어져 있을 것도 아니고 사람을 못 알아보는 건 말이 안 되니 말이다.

하지만 태범이 한 말에는 이유가 있었다.

요즘 스캐너로부터 능력을 얻고 난 뒤 달라진 게 있었는데 그건 바로 ‘시간’이었다.

현재의 모습은 과거의 시간이 쌓아 올린 결과이지만 태범에게는 달랐다.

남이 일생동안 쌓아올린 능력은 단시간에 얻어서 그런 걸까, 가끔 인생이 과정 없이 결과만 툭 하고 하늘에서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싫다는 건 아니었다.

스캐너 앞에서 엎드려 감사의 절을 몇 번이나 하래도 할 만큼 스캐너에게 감사했다.

그저 본인의 빠른 변화에 혹시나 곁에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변화 속도에 적응하지 못할까 우려가 될 뿐이었다.

“그동안 나 없다고 눈 돌아가면 안 되는 거 알지?”

“만약에 돌아가면?”

“뭐?”

순간 캐서린의 미간이 좁아지며 태범을 날카로운 눈으로 쳐다봤다.

“아 농담이야. 농담. 하하. 난 절대! 죽는 한이 있어도 그럴 일 없을 테니까 걱정하지 마.”

이에 태범은 조건반사라도 하듯 바로 꼬리를 내렸다. 괜히 농담 잘못했다가 이별 데이트가 될 뻔했다.

“진짜다? 약속해”

“알았어. 약속”

캐서린이 내면 손에 태범은 새끼손가락을 걸며 약속을 다짐했다.

졸업하고 다시 만날 때까지 서로 한눈팔지 않기로 말이다.

쪽.

약속의 대가로 캐서린은 태범에게 선물을 줬다.

그리고 이것이 캐서린과의 한국에서의 마지막 입맞춤이었다.

* * *

2, 3평정도 되는 조그마한 스터디룸, 그곳에서 태범과 현찬 그리고 두 명의 수험생이 스터디 모임을 가지고 있었다. 현찬이 권유했던 모의고사 스터디였고 모두 회계사 1차에 합격한 사람들이었다.

“아. 또 틀렸네.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왜 자꾸 실수하는 거지.”

태범과 같이 공부하고 있는 회계사 준비생 이원욱은 자신이 푼 모의고사 문제를 확인하고는 죄 없는 머리카락만 쥐어뜯고 있었다.

아는 문제를 틀리는 것. 이는 공부하는 사람에게 가장 억울한 일이었다.

그 모습을 옆에서 보자니 안 그래도 곳곳이 비어있는 이원욱의 머리에 혹시나 머리털이 남아나지 않을까, 태범은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너무 잘난 척하는 것 같아 입을 꾹 다물고 참고는 있지만 입술이 간질간질한 게 결국 입을 떼고 말았다.

“원욱이 형은 세무 문제를 푸실 때 풀이 과정을 미리 정해진 양식에 만들고 문제를 푸는 게 나을 것 같아요. 형은 잘 풀긴 하는데 자신만의 틀을 안 잡아 두시니까 자꾸 실수를 하는 거예요.”

“그래? 그럼 내가 어떻게 해야 해?”

“자주 나오는 문제에 대해서 항상 일률적으로 사용할 수 있는 형만의 양식을 만드세요. 아무리 문제를 잘 푸는 사람일지라도, 세무 항목이 많아지면 실수가 나오거든요.”

태범의 혀를 찌르는 지적에 원욱은 아무 말을 할 수 없었다.

태범이가 하는 말이 족족 맞는 것 같고 수긍할만한 말들이었기 때문이다.

“태범아, 나는? 뭐가 문제인 것 같아?”

태범이 원욱에게 피드백을 건네자 옆에 있던 윤한석도 기회를 틈타 자신의 문제를 평가해달라며 태범에게 물었다.

“형은 엊그제 보니까 감사 문제 12번, 16번, 21번 틀렸잖아요. 그 문제의 공통점은 회계 기준을 물어보는 게 아니라, 기준을 통해 얼마나 잘 적용시키느냐의 문제였거든요. 제가 볼 때 앞으로 시험에서 이런 추세가 계속 될 것 같은데, 아마도 이런 유형을 집중적으로 공부하셔야 할 것 같아요.”

“그걸 기억하고 있어?”

“네? 아 제가 형 문제지 채점해드렸잖아요.”

“아니, 그래도 그걸 어떻게 기억하고 있어?”

한석은 태범의 기억에 놀라워하다가, 명강사라도 된 듯한 예리한 피드백에 두 번이나 놀랬다.

“그냥 머릿속에 남아있는데요?”

이제는 당연하게 여겨지는 암기력. 태범에게 더 이상 특별한 능력은 아니었다.

하지만 남이 보기에는 흠칫 놀라는 경우가 있었으니 간혹 태범의 입에서 나오는 암기력이 그랬다.

“그래? 네 머릿속은 어떻게 됐기에 그게 기억이 난다냐.”

“제 머리라고 뭐 다르겠어요? 다 똑같죠 뭐.”

태범은 아무렇지 않은 척 미소를 지어 보였다.

미소를 짓는 건 능력을 얻고서 생긴 하나의 버릇이랄까 놀란 상대를 진정시키기에는 하나의 특효약이었다.

빼빼 마른 툭 치면 부러질 것 같은 몸에서 이소룡의 힘을 얻어 엄청난 무게를 들 때도 사람들이 쳐다보면 멋쩍은 미소를 짓곤 했었다.

“태범아, 이거 어떻게 해야 빨리 풀 수 있을까?”

같은 모의고사를 풀고 정답을 맞춰보던 중 현찬이 문제지를 태범이 앞에 들이밀며 물었다.

언제부터인가, 태범과 스터디원은 학생과 학생의 관계가 아닌 선생과 학생의 관계가 된 기분이었다.

결국 모르는 게 있거나 문제가 있으면 질문은 태범에게 돌아왔기 때문이다.

“그러지 말고, 내가 문제를 만들어 온 게 있거든요. 그거 같이 풀어보실래요?”

태범은 모든 걸 받아들이고 선생님 역할을 자처하기로 했다. 가르치면서 배우는 것도 하나의 학습이기에 나쁠 건 없었다.

심지어 태범은 문제를 만들어 오는 수준까지 되었으니 지금껏 회계사 시험에 나온 문제를 파악해보고 심사 위원들의 취향과 심리를 분석해 태범이 나름대로 문제를 만들어 온 것이다.

“문제를 만들었어? 신 유형이네?”

윤한석이 문제지를 받아들자 고개를 끄덕이며 한번 훑고 있었다.

“제가 좀 꼬아봤어요. 이거 풀 수 있으면 다른 것도 풀기 쉬워질걸요?”

워렌버핏의 기업 분석력은 생각 외로 2차 시험을 준비하는 데 큰 도움을 주고 있었다.

그저 투자하는 곳에 쓰일 것 같던 워렌버핏의 능력이었지만 스캔이 진행될수록 깨달은 게 있었다.

회계사 2차 시험은 모두 주관식으로 결국은 화폐 단위를 계산하는 문제인데 이 기업 분석력이 올라갈수록 문제가 이미지화되기 시작한 것이다.

그저 문제지 위에 숫자에 불과했던 화폐 단위는 살아 움직이듯 눈앞에 보이는 것 같았고 특히 재무쪽에는 실무와 이론을 대비하여 떠올리는 능력이 생겨 더욱 문제가 생동감 있게 느껴졌다.

“와. 이거 얼마나 꼰 거야.”

원욱은 태범의 문제를 풀다가 안 풀리는지 또 머리를 쥐어뜯고 있다.

어쩌면 태범이 그의 탈모에 한몫 기여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도 그럴 것이 3명 모두 문제 앞에서 한참 동안 고개를 숙이고 있었다.

“야, 이런 게 시험에 나올 것 같냐? 문제를 두 개 섞어버리면 어떻게 풀어.”

윤한석도 결국 고개를 들며 문제풀기를 포기했다.

그러고는 문제에 대한 불만을 털어놓는데 그럴 만도 한 게 사실상 두 과목을 한 개로 엮여 놓은 거라 보면 욕이 나오는 문제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끝까지 보고 있는 사람이 있으니, 그는 현찬이었다.

“이거 맞아?”

시간은 오래 지나 사실상 시험이라면 포기해야 할 문제였지만 현찬은 끝까지 풀어냈고 태범에게 자신의 풀이를 보여줬다.

“아깝다. 회수 가능 액수만 제대로 봤으면 맞췄을 텐데…….”

현찬이 보여준 풀이는 정답에 가깝게 다가왔지만 문제를 너무 꼰 탓일까 숫자를 잘못 봤는지 실수가 있었다.

현찬은 자신의 풀이를 다시 보고는 실수를 발견하고 아쉬워했다.

그래도 자기 잘못을 앎으로서 현찬은 한 단계 성장할 수 있는 계기가 됐다.

그렇게 태범이 만들어온 문제로 혹독한 트레이닝을 한 네 남자는 시계가 저녁 9시를 가리킨 걸 보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매번 같은 시간대 시작해 같은 시간에 끝나는 정확한 사람들이었다.

“형, 내일 봬요.”

“그래, 조심이 들어가.”

스터디가 끝나고 태범과 형석은 인사를 하고 집으로 향했다. 그리고 현찬과 한석은 항상 그래왔듯 스터디 도중 참았던 흡연을 위해 담배를 꺼내 건물 밖 음침한 구석으로 들어갔다.

가로등 빛이 희미하게 닿는 공간에서 둘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야, 가만 보면 걔 기억력이나 학습 능력이 남들하고 다른 것 같지 않냐?”

한석은 담배연기를 내뿜으며, 옆에 있던 현찬에게 말했다.

“태범이요?”

“그래, 태범이 아 물론 너도 잘하지만 걔는 약간 우리랑 다른 분류라 할까? 하여간 느낌이 달라.”

“형, 무슨 무당이세요? 갑자기 느낌이라뇨. 하하.”

한석의 말에 현찬은 한쪽 입꼬리를 올리며 피식 실소했다.

“아니, 넌 못 느꼈냐? 뭐 1차 시험 전에는 따로 공부했으니까 그냥 잘하는 애인가 싶었는데 직접 같이 공부해보니까 우리랑 뭔가 다른 것 같은데.”

“저도 알아요. 태범이 쟤 확실히 머리통이 우리랑 달라요.”

“그러고 보니 너 태범이랑 동기니 잘 알겠네? 쟤 원래 공부 잘했어?”

“음…… 1학년 때까지만 해도 안 그랬는데, 군대에서 뭘 좋은 거 먹고 왔는지 사람이 완전 변했더라고요.”

“그래? 1학년 때는 안 그랬어?”

“그때는 그냥 평범했는데…… 지금처럼 공부를 열심히 한다던가 그런 이미지는 아니었어요.”

“그래? 각성이라도 했나? 어떻게 그럴 수가 있지?”

현석은 담뱃재를 털어내며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 * *

봄의 따스함은 물러가고, 이제 강한 햇빛이 내리 째며 무더워지고 여름이 찾아오고 있었다.

[기업분석력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99% 진행되었습니다.]

[스캔이 100% 진행되었습니다.]

[강태범님의 소유 능력]

[워렌버핏 능력]-시장통찰력(100%)-기업분석력(100%)-도전정신(20%)

[폰 노이만 능력]-수리이해력(100%)-언어이해력(100%)-암기력(100%)

[이소룡 능력]-힘(100%)-유연성(100%)

“으…….”

몇 번이나 경험해봤지만, 100%가 되었을 때 몸에 흐르는 전류는 여전히 참기가 힘들었다.

혹시나 방 밖에 신음이 새어나갈까 태범은 이를 악물고 고통을 참아내고 있었다.

마치 피부 속 세포까지 날카로운 무언가로 각인시키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고통을 참아내면 엄청난 보상이 따라오니 어떻게 해서든 이를 악을 쓰며 견뎌내는 것이다.

“흡…… 흐…….”

태범은 입을 다물고 있다 보니, 거친 호흡이 코를 통해 나오고 있었다.

어쨌든 숨은 쉬어야 하니 모슨 소리를 막는 건 불가능했다.

그리고 조금씩 통증의 강도가 잦아지기 시작했다. 온몸이 감전된 것만 같이 짜릿한 느낌은 이제는 솜털을 건드리는 정도의 간지러움 밖에 남지 않았다.

“아직 안자니?”

결국 소리가 문밖으로 새어나간 걸까, 어머니가 태범의 방으로 들어왔다.

“어. 아직 볼게 남아서.”

“내일 시험인데 얼른 자고 컨디션 유지해야지.”

“알았어. 이제 잘 거야.”

“그래, 잘 때는 아무생각 하지 말고 그냥 잠만 푹 자고 일어나.”

“응.”

태범은 어머니의 말에 침대 위로 올라가 바로 누웠다.

내일은 기다리던 회계사 2차 시험이 있는 날이었다.

그리고 하필 12시가 지나는 오늘 기업분석력을 100% 채우는 날이었기에 이를 버려두고 잠을 잘 수는 없었다.

분명 99%와 100%는 큰 차이였고 시험에 사용될 능력인 기업 분석력을 100%를 채우는 건 오늘 있을 시험에 중요했으니 말이다.

느려진 스캔 진행률 탓에 100%가 도달하는 데는 오랜 시간이 걸리긴 했지만 시장 통찰력과 기업 분석력의 힘은 내일 있을 회계사 시험에 큰 도움을 줄 것으로 보였다.

태범은 이불을 덮고 눈을 감았지만 기대와 설렘 때문일까 이 날은 잠에 쉽게 빠질 수 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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