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40화 (40/188)

# 40

태범은 ‘가치’라는 포인트에 중점을 두며 기업을 검토하기 시작했다.

물론 투자는 돈을 벌기 위한 수단이지만 가치 투자는 당장 눈앞에 보이는 불확실한 돈을 쫓는 게 아닌, 오랜 시간 동안 공들여 기업을 다방면으로 분석한 뒤 가치를 찾아내는데 있었다.

이는 좋은 원석을 캐내기 위한 끊임없는 과정이었다.

기업의 안정성 그리고 자산이 어떻게 평가됐는지 자산 가치를 확인하고 꾸준한 성장이 이뤄지고 있는지 성장 가치를 확인해야만 했다.

게다가 재무적인 정보뿐만 아니라 비재무적인 정보까지 파악해야만 했다.

아무리 기업이 잘 나가고 건재해도 사람에 의해 부실화되는 건 한순간이다.

비도덕적인 경영자, 종업원들의 불만 등의 기업 문화에서 나타나는 인간행동까지 모든 것이 변수로 작용할 수 있기에 하나도 놓쳐서는 안 됐다.

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투자에 중요한 정보는 기업의 재무정보에 있었다.

기업의 과거이자 미래를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정보였고 태범의 지위로서 접근할 수 있는 가장 가까운 정보였다.

태범은 그렇게 이 모든 정보를 종합 분석하며 자신만의 투자 포트폴리오를 작성하고 있었다.

“으아아.”

태범은 근육이 끊어질 정도로 강하게 기지개를 켜며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로 다가갔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투자에 빠져 정신이 없이 머리를 쓰던 태범은 이내 지쳐 쓰러져 침대 위에 대(大)자로 퍼지고 말았다.

인간의 뇌는 체중에 2%에 불과하지만 몸 전체의 에너지 25%를 소모하는 장기였다. 그저 가만히 책상 앞에 앉아 있을지라도 소모되는 에너지는 엄청났다.

“후…….”

침대 위에 있을 때만큼은 아무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해 머리를 비우려 했다.

눈을 감고 생각에서 하나씩 벗어나며 온몸을 이완시키기 시작했다.

그렇게 태범의 육체는 점점 침대와 한 몸이 되기 시작했다.

‘워렌버핏처럼 미래 안정적인 가치만 찾아다니면, 혁신적인 기업은 찾기 힘든 게 아닐까? 그도 애플, 구글, 알리바바에 투자 못한 걸 후회하고 있으니…….’

‘그럼 이에 대한 대안은 없는 걸까? 전통 업종뿐만 아니라 첨단 기술주에 가치 투자 하는 방법!’

과몰입의 후유증이랄까 쉬려고 해도 머릿속의 생각에서 벗어나기 힘들었다.

‘아 맞다! 학점!’

잊고 있었지만 오늘쯤이면 2학기 점수가 나오고도 남은 시간이었다.

다른 것에 정신이 팔려 잠시 잊고 있었던 것이다.

태범은 결국 눈을 얼마 붙이지도 못하고 몸을 일으켜 세워 컴퓨터 앞에 앉았다.

1학기 때는 중간고사 때문에 아쉽게도 고득점의 점수는 얻지 못했지만 2학기는 충분히 기대할 만했다.

2학기는 스캐너의 능력에 모두 영향을 받았기에 모든 시험에 능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탈칵.

학교 홈페이지에 학번과 비밀 번호를 입력하고 학사 정보에 들어갔다.

당연히 점수는 잘 나왔을 거라 생각은 들지만 언제나 세상에는 불확실이라는 게 존재하기에 긴장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태범은 모니터 화면을 손으로 가리며, 마치 첫 화투장을 받았을 때 패를 쪼는 심정으로 손을 천천히 내리면서 하나씩 보기로 했다.

중급 회계 A+

회계 연습 A+

태범의 눈앞에 A+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것도 연달아 나오는 A+에 심장이 두근거리며, 혹시나 갑자기 지뢰가 터지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성적을 확인했다.

.

.

.

원가 회계 A+

“우와!”

태범은 모니터에서 손을 떼고 모든 점수를 확인했을 때, 감탄을 하고 말았다.

지뢰는 터지지 않았다. 한 개쯤 A나 B+이 나올 줄 알았는데 성적표에는 오점 하나 없이 완벽했다.

이대로 가면 장학금은 확정된 것이었다.

순간 몸에 쌓였던 모든 피로가 이 한방에 사라지는 기분이었다.

지금이라도 당장 부모님에게 달려가 점수를 자랑하고 싶지만 감정을 꾹 누르기로 했다.

아직 이 정도로 호들갑 떨 일은 아니었다.

앞으로 보여줄 게 많은데 겨우 이걸 가지고 호들갑을 떨다간 나중에는 아예 기절이라도 해야 할 판이었다.

* * *

스캐너가 준 능력을 정신없이 사용하며 매일을 보내다 보니 어느새 대학교 겨울방학은 끝을 보고 있었다.

태범은 자신이 완성한 투자 포트폴리오에 입각해 몇몇 기업에 가치투자를 해놓은 상황이었고 운동도 꾸준히 다니고 능력을 얻은 힘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야말로 누구보다 성실하고 노력하며 시간을 보냈다.

물론 노력 자체도 어쩌면 스캐너가 준 부가적인 능력이라 할 수 있었다.

애초에 능력이 없다면 능력을 얻는 노력 과정에서 사람은 지치게 되고 일을 꾸준히 이어나가기가 힘들었을 것이다.

그만큼 스캐너는 모니터에 나타난 능력 이상의 힘을 발휘하고 있었다.

그리고 드디어 회계사 1차 시험 날은 코앞으로 다가왔다.

긴 시간이자 오랜 기다림이었다.

태범은 꿈에 한 발짝 더 다가갈 수 있는 날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오전에는 고시반에서 회계사 준비생들이 한 곳에 모여, 시험에 관한 유의 사항이라던가 컨디션 관리법 등 공부 방법을 공유하는 것 보다는 서로에게 격려를 하며 심적인 안정을 취했다.

벼락치기 한다고 되는 시험도 아니고 큰 시험을 앞둔 전날에는 공부보다는 마음을 얼마나 침착하게 유지하느냐가 중요했다.

“태범아 너무 긴장하지 마. 열심히 한 만큼 잘 될 테니까.”

“응.”

아버지가 태범의 방으로 들어오더니 격려의 말을 건네고 있었다.

오늘만큼은 무뚝뚝한 아버지에서 애정 넘치는 아버지로 뒤바뀌어 있었다. 태범의 시험 합격에 말로나마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으면 하는 게 아버지의 생각이었다.

“뭐 먹고 싶은 거 없냐? 시험 전날인데 몸보신 좀 해야지.”

“아니, 괜찮아. 오늘은 그냥 평소처럼 있고 싶어.”

아버지는 외식을 나가자며 권유했지만 태범은 별생각이 없어 거절했다.

오히려 시험 전날이라고 특별하게 생각하기보다는 평소와 같이 지내고 마음 편하게 시험에 임하고 싶기 때문이었다.

그저 아버지의 따뜻한 말 한마디가 그 어떤 좋은 음식보다도 힘이 돼주었다.

“그래, 편안대로 해. 오늘은 아무 생각하지 말고 푹 쉬고.”

아버지는 조용히 방문을 닫으며 밖으로 나갔다.

항상 태범을 보면 까불거리던 동생의 입도 오늘만큼은 굳게 닫혀있었다.

몸이 거부감을 느낄 정도로 평소와는 다른 집안 분위기, 이 분위기를 어디서 느낀 것 같아 생각을 해보니 수능 전날과 똑같은 느낌이었다.

가족들은 애써 웃으며 아무렇지 않은 척하고 있지만 모두 태범에 대한 기대감을 잔뜩 품고 있었다.

* * *

시험 당일.

“그래, 너무 긴장하지 말고 편안하게 시험 보고 와.”

“응.”

“아들 파이팅.”

“갔다 올게.”

칼바람이 부는 추운 날씨에 어머니는 기꺼이 문밖까지 나와 태범이 집을 나서는 모습을 바라봤다.

태범은 어머니의 응원을 받고 아버지의 차량을 이용해 고시장인 성관대학교로 향했다.

“뭐 불편한 데는 없고?”

“응, 평소랑 똑같아.”

차 안의 따뜻한 히터 때문인가 긴장은커녕 오히려 몸이 따뜻함에 녹고 있었다.

“물론 붙으면 좋겠지만 그렇다고 너무 부담은 가지지 말고. 어차피 1년도 공부 안 했잖아. 그냥 편하게 시험 치르고 와.”

아버지와 대화를 나누며 어느새 차는 고시장인 성관대학교에 도달했다.

“하나 경영 아카데미입니다.”

“회계사 학원 에듀원입니다. 오늘 시험 잘 보세요.”

정문에 들어서니 고시 관련 학원에서 홍보물과 선물을 나눠주며 학생들을 유치하고 있었다.

저 학원에서 1차 시험을 다시 공부할 지 아니면 2차 시험을 공부할 것인지는 오늘의 결과에 따라 달렸다.

“시험 보면 바로 집에 와. 엄마랑 태인이랑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알았어…….”

“그래, 추우니까 빨리 들어가.”

“잘 보고 올게.”

태범은 아버지를 등지고 성관대학교의 정문을 통해 고시장으로 들어갔다

“…….”

고시장에 들어왔을 때 느껴지는 건 엄청난 적막감이었다.

숨 쉬는 소리조차 들릴 정도로 조용했고 태범 역시 분위기에 압도당해 행동 하나하나가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수험생들의 시선은 책에 꽂혀 마지막 한자라도 더 보기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었다.

‘치열하다. 치열해…….’

다들 책상에 앉아 있지만, 태범의 눈에는 치열한 싸움으로 보였다.

총과 칼이 없다뿐이지 이들은 두뇌를 통해 보이지 않는 전쟁을 하고 있는 것이었다.

합격자는 한정돼있고 상대평가이기 때문에 옆 사람보다 한 개를 더 알고 한 문제를 더 맞혀야만 승리할 수 있는 싸움이었다.

“자 곧 시험 시작하니 책상 위에는 신분증과 필기구, 계산기 외에는 다 집어 넣어주세요.”

시험 감독관의 지시가 내려지고 곧이어 스피커에서는 시험 시작을 알렸다.

1교시는 경영학과 경제 원론이었다.

기존의 기출 문제와 비슷한 문제들이 나왔고 문제를 크게 꼬지 않았기 때문에 수리적인 문제보다는 암기적인 이해의 바탕이 중요한 과목이었다.

폰 노이만의 암기력으로 머릿속에 책이 들어있는 태범으로서 수월하게 진행할 수 있었다.

점심시간은 개별적으로 가져온 도시락을 먹어야 하는데 대부분 빵과 물로 배를 채우며 그 시간동안에도 책을 보고 있었다.

태범도 미리 준비한 크림빵을 먹으며 휴식을 취했다.

시험 보기 전 괜히 과식하다간 식곤증에 잠과 함께 시험을 치를 수도 있다. 아니면 음식을 잘못 먹고 배탈이라도 나면 큰일이다.

그럴 바에 애초에 간단히 배만 채우는 게 가장 좋은 선택이었다.

2교시는 상법과 세법 개론이었다.

상법은 암기한 내용을 토대로 논리를 얼마나 잘 이용하는가가 문제풀이에 가장 중요했다.

태범은 법조문을 떠올리며 언어이해력을 통해 논리를 구성하며 문제를 풀었다.

시험이 진행될수록 사람들의 표정에는 확연히 차이가 느껴졌다.

어떤 사람은 여유가 넘치는 반면에 어떤 사람은 이번 시험은 글렀다는 듯 인상을 찌푸리며 아쉬워하고 있었다.

이쯤이면 이번 싸움의 승자와 패자가 어느 정도 모습을 드러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마지막 3교시 대망의 회계학까지 태범은 가진 능력을 한껏 발휘하며 모든 문제를 풀어나갔다.

마지막 문제를 체크하고 태범이 든 생각은 단 하나.

‘합격이다!’

아직 정답과 점수는 나오지 않았지만, 문제를 풀어봄으로써 몸으로 느껴지는 문제의 체감을 통해 합격이라는 걸 알 수 있었다.

밖은 벌써 해가 지고 있었다. 오전에 들어와 하루 종일 시험을 본 셈이었다.

태범은 마지막 문제를 풀고 손을 놓았을 때 그 전율이 여전히 몸을 돌고 있었다.

“어! 태범!”

익숙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오니, 태범은 고개를 돌렸다.

현찬이었다.

같은 학교에서 시험을 본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렇게 만날 줄은 몰랐다.

“시험 잘 봤어?”

“음, 괜찮게 나온 거 같더라. 너는?”

현찬이 반갑게 미소를 띠며 이야기를 하는 거 보니, 꽤 잘된 모양인가 보다.

태범도 마찬가지였으니 똑같이 미소로 대응하며 대답했다.

“어렵진 않았던 것 같아. 흐흐.”

현찬은 기쁨을 주체하지 못하겠는지 웃음이 새어 나오고 말았다.

하지만 둘 모두 절대 본인이 시험을 잘 봤다고는 말하지는 않았다.

본인을 과시하지 않는 대한민국의 예절 중 하나였으니 굳이 말을 하지 않더라도 태범과 현찬은 서로의 표정만 보고 대충 결과가 어땠는지 알 수는 있었다.

“그래, 학교에서 보자.”

“오케이! 오늘 수고 많았다.”

태범과 현찬은 한참을 시험 문제에 대해 이야기를 나누다 서로 다른 집 방향에서 인사를 나누고 헤어졌다.

“태범아 시험 잘 보고 왔니?”

태범이 집 문을 열고 들어오자 미리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거실 소파에 앉아 있던 어머니와 아버지는 태범을 향해 빠르게 다가왔다.

“태범아?”

하지만 태범은 아무 말 없었고 표정은 시무룩한 게 심상치 않은 상황이었다.

고개는 45도 아래로 향해 부모님의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있었다.

“엄마…….”

“응, 왜? 뭐 잘못됐어?”

태범의 어두운 표정에 부모님도 덩달아 표정이 어두워졌다.

혹시 뭔가 잘못된 게 아닐까, 짧은 시간이었지만 태범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속이 타들어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건 태범의 계획.

사실 태범은 혼신의 연기를 하고 있었다. 드라마에서나 본 깜짝 연기를 본인도 한 번 해보고자 한 것이었다.

“사실…….”

태범은 늘어진 테이프처럼 말을 길게 늘여 트리며 뜸을 들이기 시작했다.

“응, 편하게 말해봐.”

“나 1차 시험 붙은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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