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33
태범의 가족 앞에 보이는 건 성체가 되기 전 100㎏정도 돼 보이는 멧돼지였다.
물론 태범이 군대에 있을 때 봤던 거대 멧돼지에 비하면 어린아이 수준이지만 충분히 위협적으로 느껴질 만한 크기였다.
멧돼지들은 산소에 사람들이 놓고 간 음식을 먹으러 깊은 산에서 내려오곤 했으나 이렇게 대낮에 나타난 건 흔치 않은 일이었다.
“쉿!”
할아버지는 멧돼지의 출현이 익숙한 듯 손가락으로 입을 가리며 조용히 하라고 제스처를 취했다.
자칫 멧돼지의 신경을 건드렸다가는 공격을 받을 수 있으니 절대 멧돼지를 놀라게 하거나 적대적인 태도를 보이면 안 됐다.
멧돼지의 날카로운 엄니는 단번에 사람 피부를 뚫을 수 있을 정도로 강했고 피부는 총이 아닌 이상 어지간한 무기로 공격해도 뚫리지 않을 만큼 두꺼웠다.
그러니 괜히 멧돼지와 싸움이 일어났다가는 황천길행이 될 수 있었다.
“어머! 어머!”
작은어머니와 어머니는 뒤늦게 따라오며 천천히 잡담을 나누며 올라오고 있었다.
그리고 멧돼지를 보자 본인도 모르게 비명을 지르고 말았다.
두 어머니 역시 앞에 보이는 큰 덩치의 멧돼지에게 공포가 느껴지는 건 당연했다,
“조용히 해!”
천천히 자리에서 물러나려는 할아버지의 계획은 물거품이 되었다. 멧돼지는 어머니들의 비명 소리에 놀라 털을 잔뜩 세우고 공격 자세를 취했다.
그러더니 멧돼지는 가장 가까이 있는 할아버지와 아버지 방향을 향해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차라리 젊은 사람이면 모르겠지만 나이 먹으면 뼈도 잘 안 붙는다. 순간 태범은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가 걱정됐다.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태범은 무슨 자신감이 있었던 것인지 바닥에 있는 짱돌을 집어 멧돼지를 향해 힘껏 던졌다.
태범의 강한 어깨 근육에 추진력이 더해져 날아간 짱돌은 멧돼지의 정수리를 정확히 맞췄다.
아마도 이소룡의 무술 능력으로 육체의 미세한 움직임을 컨트롤 할 수 있었기에 가능했던 던 것 같았다.
쿠르르.
다행히도 할아버지와 아버지에게 다가가던 멧돼지는 돌이 날아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잔뜩 화가 났는지 멧돼지의 입에서는 분노의 울음이 들려왔다.
일단 일을 벌이긴 했는데 멧돼지와 눈이 마주친 태범은 그제야 자신이 실수했다는 걸 깨달았다.
아무리 육체적인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한들 눈앞에 보이는 날카로운 엄니와 단단하고 질긴 가죽을 가진 멧돼지를 상대하기에는 불가능했다.
아직 싸워보지는 않았지만 상대에게 느껴지는 기(?)라는 것에서 거대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투두둑!
돼지 주제에 얼마나 빠른지 짧은 다리로 바닥을 구르며 태범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점점 가속도가 붙더니 마치 돌진해오는 탱크처럼 맹렬하게 다가왔다.
‘부딪혔다간 죽음이다!’
아주 짧은 시간이었지만 태범은 생각했다.
죽음 위기에 닥치면 초인적인 능력이 생긴다고 태범의 시야는 점점 또렷해지는 듯했고 멧돼지가 달려오는데도 눈동자가 흔들리지 않고 움직이는 이동 방향을 주시했다.
“윽.”
다행히 멀리서부터 추진력을 얻어 달려오는 멧돼지의 박치기를 피해 빠르게 옆으로 이동하면서 공격은 피했다.
하지만 이건 1차 공격에 불과했다. 멧돼지는 머리를 들이밀며 태범에게 다시 다가왔다.
“뭐해! 막대기 들어!”
태범이 공격받는 모습을 본 할아버지는 바닥에 떨어진 나뭇가지 수준의 작은 막대기를 집었다.
그러고는 옆에 있는 아버지에게 소리치며 말했다.
태범이 공격당하는 걸 보고 가만히 있을 수 없는지 아버지와 힘을 합쳐 멧돼지와 싸우려는 셈이었다.
“오지 마세요!”
멧돼지가 물려는 걸 발길질을 하며 가까스로 피하던 태범은 커다란 나무 한 개를 발견했다.
그리고 힘껏 점프해 죽기 살기로 나무를 올랐다. 악력으로 나무의 표면을 강하게 쥐고 발을 나무를 감싸며 올라갔다.
태범은 나무 오르는 노하우 따위는 전혀 몰랐고 그저 힘을 이용해 나무를 오른 것이었다.
그리고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되도 않는 나무막대를 무기라고 들고 오는 모습을 보고는 손짓을 하며 피하라고 외쳤다.
기껏 멧돼지를 피했는데 또 다시 할아버지와 아버지를 공격하면 안 됐기 때문이었다.
“일단 가서 119에 신고하시죠.”
태범이 어느 정도 안전한 높이의 나무 위에 올라가자 그제야 안심이 되어 이성을 찾은 아버지는 할아버지를 데리고 천천히 자리를 이동했다.
“악!”
혹시나 멧돼지가 시선을 돌려 다른 사람을 공격할까 태범은 잠시 동안 멧돼지의 시선을 끌기 위해 고함을 질렀다.
멧돼지가 저 짧은 다리로 나무를 오르는 건 불가능하고 나무 위는 완전히 안전한 공간이었다.
쿵. 쿵.
멧돼지는 자기 분에 본인이 못 이겨 나무를 몇 차례 강하게 박더니 아무런 효과가 없다는 걸 알고는 자리를 떠났다.
일단 멧돼지가 시야에서 사라지긴 했으나 섣불리 나무에서 내려올 수는 없었다.
멧돼지 놈들도 지능이 있는 걸 알고 있는 태범은 혹시나 잠복해있을 멧돼지 때문에 나무 위에 계속 올라가 있었다.
그리고 잠깐의 시간이 지나고 119구조대원의 모습이 보였다. 그들의 손에는 마취총에 들려있었고 태범은 그제야 안심할 수 있었다.
* * *
결국 사라진 멧돼지는 잡지 못했다. 아마도 자기가 살던 깊은 산속으로 돌아간 모양이었다.
이미 수많은 멧돼지가 존재하는 이 산에서 굳이 한 마리 잡자고 쫒으며 잡을 필요까지는 없었다. 구조대원들은 사건이 일어나고 얼마 있지 않아 해산했다.
“태범이가 날 살렸다니까, 이 할애비가 여태 태범이를 잘 몰랐던 것 같다. 내 손자에게 대장군감이 있다니! 그런 배짱이면 나중에 군수 출마해도 되겠어. 허허.”
할아버지는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태범의 활약상을 되짚으며 이야기를 했다.
“영감, 무슨 일 있었어?”
“글쎄 말이야. 산소에 가다가 멧돼지를 봤는데 태범이 우리를 구해줬지 뭐야. 허허.”
그리고 집에 와서까지 멧돼지 이야기를 멈추지 않으니 자연스럽게 할머니 귀에까지 들어갔다.
할아버지는 마치 무용담처럼 허허 웃으며 이야기했지만 할머니의 얼굴이 잿빛으로 변했다.
“아!”
어머니는 태범의 손바닥에 박힌 나무가시를 빼고 있었다.
껍질이 강한 나무를 살고자 하는 마음으로 맨손으로 급하게 올라가다 보니 손에 가시가 박힌 것이었다.
“뭐! 우리 강아지 다친 데 없어?”
할머니는 방 안의 이부자리에서 일어나 거실로 나와 태범을 살폈다.
“네, 괜찮아요.”
“병원 가야 되는 거 아니야?”
“아니에요, 할머니. 그냥 손바닥에 가시 살짝 몇 개 박힌 것뿐이에요.”
걱정하는 할마니의 모습에 태범은 애써 웃음을 지어 보이며 손바닥을 보여줬다.
“아이고 다행이다.”
“어머니, 걱정하지 마시고 쉬세요.”
안 그래도 편찮으신 할머니가 스트레스를 받을 까, 어머니는 미소를 지으며 할머니의 걱정을 덜어주었다.
* * *
해가지고 저녁이 되자 큰아버지와 아버지 그리고 두 명의 작은아버지는 술상을 펴고 사는 이야기를 안주 삼아 술을 들이켜고 있었다.
“나도 이제 확실히 늙었다는 게 느껴져. 요즘에 친구나 주변사람이 하나씩 세상을 떠나는데 참 기분이 묘하더라.”
한동안은 멧돼지 사건에 대해 이야기를 하다가 술기운이 점점 들어가니 마음속 이야기가 나오기 시작했다.
58년생인 큰 아버지는 세월의 아쉬움을 동생들에게 하소연했다.
마음만은 여전히 20대 청춘이라며 지나간 세월에 안타까움과 동시에 허탈감을 느끼고 있었다.
“형님, 저도 결혼한 지 얼마 안 된 것 같은데 벌써 애들이 다 커서 결혼할 나이가 됐잖아요. 젊었을 때는 몰랐는데 결혼한 이후 먹고 살려다 보니 벌써 세월이 이만큼이나 갔네요.”
아버지 역시 형의 말에 공감하며 씁쓸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시간은 나이를 먹을수록 빨리 흘러가며 과거는 항상 미화되는 법이기에 지나간 세월이 아쉬운 법이었다.
그리고 그렇게 서로의 속마음을 털어놓다가 남자들의 이야기는 결국 돈으로 흘러가기 마련이었다.
“내가 이번에 확실한 주식 정보가 있는데 어때 생각 있어?”
돈에 대한 이야기의 첫 스타트는 큰아버지가 끊었다.
“뭔데요, 형님.”
큰 아버지의 말에 동생들은 귀 기울이며 이야기를 들었다.
“영월 식품 알지?”
“네, 알죠. 과자나 도시락 뭐 웬만한 식품 다 만드는 곳이잖아요.”
“그래! 거기가 조만간 대박이 난다고. 이번에 중국 시장에서 좋은 소식 알려온 데.”
“요즘 사드 문제 때문에 중국하고 사이가 안 좋은데 그게 가능해요?”
“에이 사이가 안 좋다고 다 안 좋나? 좋은 곳도 있고 아닌 곳도 있는 거지.”
아버지가 살짝 의심을 하니 큰 아버지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태범이한테 물어봐. 태범이가 회계학과잖아.”
막내 작은아버지가 태범에게 물어보자며 제안했다.
“에이. 걔도 잘 몰라.”
“형님이 뭘 모르시네. 요즘 애들도 주식에 관심 많은데 태범아 일로 와 봐.”
작은아버지는 거실 이부자리에 누워있던 태범을 불렀다.
“너, 회계학과니까, 주식 잘 알지? 그 영월 식품 좀 알아봐봐.”
“지금요?”
“응, 지금 빨리.”
“어허! 세상에 공짜가 어딨나! 태범아 자!”
막대 작은 아버지의 요청에 둘째 작은 아버지는 5만 원짜리 지폐를 태범에게 건네며 힘을 더했다.
5만원을 받아든 태범은 작은아버지들의 요청을 수용하고 바로 스마트 폰을 이용해 정보를 검색하기 시작했다.
가장 먼저 금융 감독원의 전자 공시 시스템을 이용해 기업의 재무 정보를 살펴봤다.
회계학과 학생으로서 주식에 접근하는 가장 이상적인 방법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주식에 대해 잘 아는 건 아니었다.
사실 주식이라는 건 재무 정보에 움직이는 것보다 사람 심리에 따라 움직이는 것에 가깝기 때문에 이를 모두 통찰하기 위해서는 주식에 대해 따로 학습이 필요했다.
“다른 동종 업종에 비하면 매출액 증가 대비 영업 이익이 너무 적게 잡혀있어요. 예로 들면 상진 식품은 매출 10% 증가에 영업 이익이 50%나 증가했는데 영월 식품은 매출 7%증가에 영업 이익이 14%밖에 증가하지 않았어요.”
태범은 짧은 시간동안 영월 식품에 대해 살펴보고 공시된 재무 정보를 토대로 자신의 생각을 말했다.
“뭐 다를 수도 있는 거 아니냐? 회사가 다른데 말이야…….”
큰아버지가 반박하며 말했다.
“그렇긴 하죠. 그런데 둘 다 식품회사고 제품도 사업 부문도 비슷한데 이렇게 차이가 난다는 건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거든요. 게다가 특수 관계인과의 거래를 보면 내부 거래가 심각하고요.”
“뭔 말인지 모르겠다. 무슨 말이야?”
막내 작은아버지는 아무것도 모른다며 간단한 설명을 요구했다.
“딱 봐도 일감 몰아주기 하고 있는 게 눈에 보이네요.”
“일감 몰아주기?”
“네, 특수 관계인 지분이 29,9%로 교묘하게 법망은 피하고 있지만 계열사 밀어주기로 사실상 이익은 비상장 계열사들에서 가져가고 있네요.”
공정 거래법에 따르면 자산 총액 5조원 이상의 기업 집단에 속한 회사가 총수 일가 지분이 30% 이상인 계열사(비상장사 20%)와 매출액 200억 이상의 내부 거래를 하면 일감 몰아주기 규제를 받는다.
내부 거래 비중이 전체 매출액의 12%이상일 때도 규제 대상이 된다.
“법만 지키면 되는 거지!”
“법 테두리 안에서도 도덕성이 보이는 법이에요. 분명 문제는 있을 것 같은데 아직 안 터지고 있는 거죠.”
“그럼 내가 아는 사람이 거짓말했다는 거야?”
“아니요. 그 사람은 투자 보다는 투기를 말하는 것 같은데 투기는 재무 제표를 봐도 모르니 저도 잘 모르겠네요.”
“봐봐. 내 말이 맞다니까. 하여간 내가 믿을 만한 사람한테 알아낸 고급 정보니까. 너무 안 좋게는 생각 마. 꺽!”
큰아버지는 정해진 답을 요구하고 있었다. 일단 질문을 받아서 대답을 해줬으나, 결국 큰아버지가 옳다고 할 때까지 말을 이어갈 셈이었다.
술에 취해 이성적인 판단도 안 돼 보이고 태범은 적당히 큰아버지의 말이 옳다고 호응해준 뒤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와 잘 준비를 했다.
* * *
“역시 내 집이 제일 좋아.”
추석 다음날 아침 일찍 할아버지 댁에서 나와 집으로 향했고 드디어 집에 도착했다.
오랜 운전에 지친 아버지도 집이 좋은 듯 소파에 몸을 기대며 피곤함을 씻으며 행복감을 만끽했다.
태범도 마찬가지였다.
그 어느 때보다 집이 기다려진 적은 없었다. 단 이틀이었지만 스캐너는 사용하지 못했다는 아쉬움에 집이 기다려졌다.
특히나 명절에 빈집털이가 많다고 도둑이 와서 스캐너를 털어 가면 어떨까 괜한 생각을 하기까지 했었다.
태범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방으로 뛰어들어가 스캐너부터 살폈다.
“잘 있었니? 스캐너야.”
얼마나 기다려졌으면 태범은 스캐너를 보자마자 사람 만나듯 인사를 건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