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32화 (32/188)

# 32

“저한테는 솔직히 말해주셔도 돼요. 저 보면 모르겠어요?”

“아…….”

트레이너는 본인이 약물을 써서 몸을 만들었다고 간접적으로 실토했다.

몸을 만들 때 주로 사용되는 약물은 아나볼릭 스테로이드였다.

남성 호르몬인 테스트테론을 인공적으로 신체에 주입시키며 근육량을 늘리고 힘을 키우기 위해 사용되는데 이는 스포츠계에서 엄격히 금지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 러시아가 국제 대회에서 조직적으로 약품을 사용한 게 걸렸듯이 알게 모르게 선수 개인적으로도 약물을 사용하곤 했다.

특히 전문적인 보디빌딩 쪽에서는 사용하지 않으면 바보가 될 정도로 꼭 필요한 약물이었다.

“하하하. 저는 진짜 안 썼어요. 전 그냥 공부하는 학생인데 뭐 하러 부작용을 감수하고 약물을 쓰겠어요? 오해하시는 거예요.”

트레이너가 오해를 해도 단단히 오해를 하고 있었다.

그런 트레이너가 자신의 약물 사용을 실토하면서까지 동질감을 부여하려는 모습에 태범은 웃음이 나오고 말았다.

“정말이에요?”

“네, 전 아직 여자랑 못해본 게 많거든요.”

“그게 무슨?”

“아! 아니에요. 어쨌든 전 아니에요.”

약물을 사용하면 피부병, 심장 질환 등 각종 부작용이 나타나고 심지어 고환 위축과 발기 부전 같은 남자로서 종족 번식의 기능을 상실할 수도 있었다.

운동을 직업적으로 하는 게 아닌 일반인 태범에게 이를 감수할 이유는 없었다.

“그러세요? 제가 오해해서 죄송하네요. 제가 회원님 운동하는 거 보고 깜짝 놀라서 잠깐 머리가 돌았었나 보네요.”

트레이너는 태범의 단호한 태도에 자신이 회원에게 무슨 말을 했는가 싶어 사과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속마음은 여전히 태범을 의심하고 있었으나. 그렇다고 매달리며 알려달라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 그럴 수도 있죠. 저 그럼 운동하러 나가볼게요.”

“네! 저한테 뭐 물어보실 거 있으시면 언제든 불러주세요.”

* * *

10월 3일 추석 전날.

태범의 가족은 아버지의 차량을 타고 할아버지 댁인 경북 봉화로 내려가고 있었다.

부모님은 집에서 공부하라며 태범이 시골에 내려가는 걸 만류했지만 최근 건강이 악화한 할머니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시골에 가는 걸 선택했다.

아버지도 태범에게 말은 그렇게 해도 내심 같이 시골에 내려가길 원하는 눈치였으니 태범은 이를 눈치 채고 같이 시골로 향하는 차에 오른 것이었다.

“형, 공부해야 하는 거 아니야?”

“그건 내가 할 소리지. 수능이 이제 한 달밖에 안 남았는데.”

“그건 인정!”

차에서 출발한 지 1시간 정도 지나 잠을 잘 만큼 자고 두 눈이 멀뚱거리는 상황. 핸드폰을 만지작거리자니 멀미가 올라왔고, 할 수 있는 건 대화뿐이었다.

“대학 어디 갈지 결정했어? 수시는 어디에 넣었는데”

“나? 집 근처 전문대 가려고. 미대로…….”

“뭐? 미대?! 너 그게 무슨 소리야.”

눈을 껌뻑껌뻑하며 앞자리에서 졸던 어머니가 태인의 말에 화들짝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아마도 태인이 부모님에게 아무 말 없이 독단적으로 대학을 넣은 듯 보였다.

“말하려고 했어.”

“아니, 그래도 미리 엄마한테 이야기를 해야지 뭐야?”

오늘도 역시 어머니와 태인이의 다툼이 시작됐다. 하루도 가시지 않고 매일 이벤트처럼 열리는 다툼이었다.

“명절은 조용히 넘어가자. 좀! 집에 가서 이야기해!”

다행히 아버지의 중재로 차 안은 다시 조용해질 수 있었다.

평소 3시간이면 도착할 거리였지만, 명절 교통 체증을 실감하듯 2시간이 더 걸린 5시간이 지나서야 할아버지 댁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왈! 왈!”

시골에 오면 가장 먼저 맞이해주는 건 항상 개였다.

마당에 말뚝에 묶여있는 똥개 한 마리가 태범의 가족을 보며 짖었다.

하지만 이곳에 개는 한 마리가 아닌 여러 마리였다.

“할아버지, 할머니 안녕하세요.”

“우리 강아지들 왔어?”

할머니에게 손자에게 모두 강아지라 불렀고 수염이 징그럽게 올라올 정도로 다 큰 남자가 됐음에도 할머니 눈에는 여전히 귀여운 손자였다.

“그래, 먼 길 오느라 수고 많았다.”

아버지는 할아버지의 성격을 물려받은 게 분명했다. 할머니와 다르게 할아버지는 무뚝뚝하게 한마디로 태범의 가족을 맞이했다.

“안녕하세요.”

“태범이 몸 좋아졌네?”

주방에서 전을 굽고 있는 막내 작은어머니가 태범의 몸을 보곤 칭찬을 건넸다.

1월 명절 때까지만 해도 빼빼로 같이 바짝 마른 몸이 이제는 옷 사이로 근육을 드러내고 있으니 몇 달 만에 본 태범은 확연히 다르게 보였다.

“태범이 요즘 운동한다고 헬스 다니잖아. 몸 많이 좋아졌지?”

작은어머니의 칭찬에 태범의 옆에 있던 어머니도 기분이 좋아져 한 몫 거들었다.

“아. 그래요. 태범이 여자한테 인기 많겠네?”

“에이. 공부하느라 바쁜데 뭔 여자야.”

벌써부터 태범은 어머니와 작은어머니의 이야기 소스가 되어버렸다. 괜히 옆에 붙어 있다가 두 어머니의 이야깃거리로 전락할까 태범은 자연스럽게 거실 소파를 향해 이동했다.

소파에는 동생 태인과 큰아버지가 벌써 자리 잡고 TV를 보고 있었다.

“태인아, 네가 지금 몇 살이지?”

“저, 19살이요.”

“19살이면…… 고…… 고3 맞지?”

“네.”

“공부하느라 바쁠 텐데 여기까지 내려왔어?

“해봤자 겨우 이틀인데, 와야죠.”

“그래 공부는 잘하고 있고?”

“네, 열심히 하고 있어요.”

“대학은?”

“음…… 생각 중에 있어요.”

“아니, 생각을 아직도 하면 안 되지! 지금 시간이 얼마 남지 않았잖아.”

“그렇긴 한데…….”

옆에 TV를 보고 있는 태범은 숨이 막히는 줄 만 알았다. 하물며 태인은 지금 기분이 어떨까,

사실 명절은 한 해 얼마나 잘 지냈는지 평가를 받는 날이기도 했다.

좋은 성과를 냈으면 온 친척들에게 관심과 찬사를 받으며 금의환향을 하겠지만 그렇지 못하면 잔소리 폭격으로 이어졌다.

동생 태인이는 애써 큰아버지의 잔소리에서 도망가려 하지만, 설득할 만한 성과가 없으니 그저 묵묵히 충고를 들을 수밖에 없었다.

“태범아 너는 요즘 공부는 잘 하고 있어? 너 회계사 준비한다며.”

큰아버지의 시선은 이제 태인에게서 태범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태범은 지금 모든 게 잘 되고 있으니 전혀 부담은 없었다.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네 아버지가 나한테 네 이야기를 얼마나 많이 하는데.”

“아버지가요?”

아버지는 무심한 척하고 있었지만 사실은 태범에게 관심을 크게 갖고 있었다.

그저 표현하는 방법을 모를 뿐 마음속으로는 아들이 열심히 하는 모습에 자랑스러워하고 있던 것이다.

“태준이는 안 왔어요?”

“걔는 요즘 바빠서 어디 돌아다닐 시간이 없지.”

태범의 사촌인 강태준, 한국대 생명과학부에 조기 입학한 영재였다.

초등학교 때까지만 해도 추석 때면 같이 산으로 메뚜기나 잠자리를 잡으러 다니곤 했었고 꼭 명절이 아니더라도 같은 서울에 살기 때문에 자주 집에 놀러와 같이 놀기도 했었다.

하지만 사춘기가 지나고부터 어느 순간 사이가 멀어지더니 지금은 그나마 명절에 서로의 안부를 알 수 있는 정도가 돼버렸다.

그때는 사촌을 만날 수 있는 명절이 기다려지기만 했었는데 왜 이렇게 변한 건지 태범은 한탄스럽기도 했다.

“그건 그렇고 태범이 너도 여기 오면 안 되는 것 아니냐? 회계사 공부 그거 만만치 않을 텐데 이렇게 할 거 다하고 하면 쉽지 않을 텐데.”

“뭐 어차피 이틀인데요.”

태범은 어쩌다보니 동생과 같은 대답을 하고 말았다.

“한 시간이 하루 되고 하루가 한 달 되는 거야. 태범이 너 그러지 말고 안전하게 공무원 시험이나 공부하지.”

“아…… 공무원도 좋긴 좋죠, 제가 회계학과라 회계사는 한 번 도전해봐야 하지 않겠어요?”

“그게 말처럼 쉽지 않을 텐데.”

“걱정 마세요. 꼭 딸 테니까.”

“오호 이 것 봐라 자신감 있다 본데? 아빠가 괜히 네 이야기 하는 게 아니었네.”

“하하…… 뭘요.”

큰 아버지와 대화를 하던 도중 사촌동생 태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안녕하세요.”

큰아버지의 둘째 딸이자 태범의 사촌 동생 강태희.

그녀는 작은 방에서 공부를 하다가 태범의 가족의 소리를 듣고 방에서 나왔다. 그러고는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인사를 건넸다.

“어 태희도 있었네?”

“안녕.”

태범의 인사에 태희는 어색한지 한마디 인사를 나누고 다시 방으로 들어갔다.

“태희도 슬슬 대학 준비하고 있잖아. 쟤도 원래는 안 오려다가 온 거야.”

냉정하게 인사만 하고 들어가는 태희의 모습에 큰 아버지는 태희를 옹호하듯 말했다.

무슨 추석에 시골까지 와서 호들갑을 떠나 그럴 수도 있겠지만, 큰아버지 집안은 교육에 대한 엄격한 느낌의 분위기였으니 그럴 만도 했다.

똑똑!

“태희야 뭐해?”

“나, 공부.”

그래도 명절인데 태범은 사촌동생과 한마디도 못 하고 헤어지면 아쉬울 것 같아 태희가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나 태희는 그저 단답으로 대답할 뿐 시선은 책 위에 고정되어있었다.

태범은 뭐라도 말을 걸어보고 싶지만, 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냥 나갈까 고민을 하다가 태희가 한 문제를 가지고 골똘히 고민하고 있는 모습이 보여 다시 말을 걸었다.

“문제 어렵지? 내가 알려줄까?”

“오빠가 이걸 푼다고?”

“일단 풀어봐야 알 것 같은데…….”

태희는 미덥지 않는 눈으로 태범에게 시험지를 건넸다.

태범도 자기가 풀 수 있을 거란 확신은 하지 않았다. 수능을 본 지 벌써 4년이 돼가고 있었고, 그 이후로 수능 관련 내용은 머리에서 잊혀진지 오래였다.

“음…….”

문제 번호 옆에는 난이도는 상! 이라고 적혀있다.

괜히 공부 좀 한다는 태희가 머리를 싸매고 있던 게 아니었다.

y=f(x)…….

역함수, 미분, 합성함수가 섞인 끔찍한 문제였다. 태범 역시 쉽지 않은 문제였기에 펜을 잡고 문제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깊은 생각에 빠졌다.

“답 79맞나? 나도 확실히는 모르겠다.”

얼마나 지났을까 생각보다 시간은 걸렸지만 태범은 정답을 적어냈다. 그리고 태희가 확인을 하기 위해 정답지를 들춰보고 있었다.

“오빠 맞췄어!”

“정말? 오랜만에 풀어서 틀릴 줄 알았는데.”

“와 이걸 어떻게 풀었데.”

태희는 놀란 토끼 눈으로 태범을 쳐다봤다.

사실 서울에 하위대학에 다니는 태범을 낮게 봤던 태희였지만 자신이 풀지 못한 문제를 푸니 어이가 없는 동시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그냥 응용만 좀 할 줄 알면 풀 수 있어.”

최근 폰 노이만의 수리 이해력을 100% 채운 이후 심심할 때면 블로그나 카페에 올라온 수리문제를 풀곤 했었다.

머릿속에 넘쳐나는 수학적 아이디어 때문에 해소할 때가 필요했고, 태범은 평소 수학을 싫어했음에도 불구하고 능력 덕인지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나한테 설명해 줄 수 있어?”

“그럼.”

태범은 수학문제로 태희의 관심을 끌어내면서 대화를 나눌 수 있게 되었다.

* * *

다음날 아침 일찍 증조할아버지와 증조할머니의 차례를 지내고 산소로 향했다.

할머니는 몸이 편찮으셔서 어쩔 수 없이 집에 있기로 했고 나머지 가족들만이 가기로 했다.

무거운 짐은 태범과 태인의 몫이었다.

태인은 과일과 술이 담긴 가방을 들쳐 맸고 태범은 돗자리를 들고 산소로 올라갔다.

태인도 동생이 아니랄까 태범이 이소룡의 능력을 얻기 전 몸과 비슷했다. 그러니 무거운 가방을 메고 산을 타는 건 쉽지가 않았다.

“무거우면 네 형이랑 바꿔.”

낑낑거리며 올라가는 태인의 모습에 아버지는 가방을 태범에게 넘기라며 손짓했다. 그러자 말이 끝나기도 무섭게 태인은 태범에게 가방을 건넸다.

하지만 웬걸 태범은 태인의 가방을 아무 말 없이 건네받고 산을 타기 시작했다.

잔 근육으로 탄탄하게 이뤄진 태범의 몸은 가방을 들고 산을 오르나 안 들고 오르나 큰 차이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다.

“후. 후.”

태범은 숨을 천천히 들이 내쉬며 강한 장딴지와 허벅지 근육을 사용해 빠르게 산을 오르기 시작했다.

“아이고 태범이 쟤는 공부가아니라 농사를 해야 될 녀석이야.”

태범의 날렵함을 본 할아버지는 웃으며 말했다.

“끄르르…… 끄르르.”

“아버지! 멧돼지!”

“뭐?”

“저기…… 숲에.”

아버지의 떨리는 목소리에 할아버지의 웃음기는 금세 사라지고 표정은 어두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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