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8
“네, 저 혼자 만들긴 했는데 그건 왜…….”
“학생 혹시 만나서 이야기할 수 있을까요? 내가 그 프로그램에 대해서 설명해주고 싶은 게 있어서요.”
태범은 서원종 교수가 무슨 말을 하려는 건지 짐작할 수 없었다.
무언가 원하는 말투였지만 태범은 본인이 만든 프로그램에 대해 특별함을 느끼지 않았기에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교수가 말한 전사적 관리(ERP)는 기업에 주요 업무인 회계, 인사, 급여, 생산 관리 등 각종 업무를 하나의 시스템으로서 통합하여 관리하는 시스템을 말했다.
하지만 태범이 만든 ERP는 재무와 관련된 회계, 급여와 같은 일부분만을 관리했고 기존 시장에 나와 있는 ERP보다 기능이 많이 떨어졌다.
그런데 교수가 왜 저렇게 관심을 가지고 있는지 전혀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뭐 때문에 그러시는 건지 알 수 있을까요?”
“그게 ERP에서 사용한 알고리즘에 대해 묻고 싶은데요. 전화로 하기에는 어려울 것 같고 한 번 만나 줄 수 있을까요?”
다른 학과의 교수일지라도 같은 학교 사람이고 인연이라는 건 어떻게 이어질지 모르는 것이었다. 게다가 교수의 간절함이 수화기로 전해오니 거절할 수가 없었다.
“제가 다른 공부를 하고 있어서 그런데 만나시려면 저녁 8시 이후에나 가능할 것 같거든요.”
“물론 학생 편한 데로 해야죠. 그럼 8시쯤에 공대 건물에서 만나요.”
“네, 알겠습니다.”
* * *
해가 내려앉고 캠퍼스 내 조명등이 빛을 비추고 있었다.
태범은 8시가 되자 고시반에서 나와 약속대로 공대 건물로 향했다.
“혹시 나의 보물창고 사이트 운영하는 학생 맞나요?”
“네, 안녕하세요.”
흰머리가 군데군데 나 있고 은색 안경을 쓴 50대의 한 남성이 태범에게 다가오더니 말을 걸었다. 그는 우리 대학교 컴퓨터 공학과의 서원종 교수였다.
“학생, 사무실에서 이야기 나눌까요? 아니면 근처 커피숍 괜찮을까요?”
“저는 아무데나 상관없습니다.”
“그래요? 그럼 커피숍 가서 이야기하죠? 학생은 아무래도 그게 편하겠죠.”
보통 사람이라면 아버지뻘 되는 사람이 학생에게 반말로 대했겠지만 서원종 교수는 달랐다.
교수는 나긋나긋한 어투와 존댓말을 섞어가며 태범에게 친절하게 대해주었다.
아직 몇 마디 안 나눴지만 태범은 교수의 올바른 인성을 파악할 수 있었다.
둘은 학교 쪽문에 있는 커피숍으로 들어가 구석에 자리 잡고 대화를 나누기 시작했다.
“태범 학생이 만든 사이트 인기가 대단하던데요?”
커피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자마자 교수는 칭찬을 날렸다.
교수의 칭찬에 태범은 쑥스러우면서 머쓱한 웃음을 지어 보였다.
“대단한 건 아니고 잠깐 뜬 거예요. 얼마 전까지 회계사 채용만 해도 하루 방문자가 10명이 될까 말까 했는데요.”
“아? 그래요? 보니까 수강 과목 추천 프로그램 때문에 뜬 것 같은데 아까 보니까 지우셨더라고요. 학교 측에서 컴플레인 들어와서 그런 거죠?”
“네, 사실 아무 생각 없이 올린 건데 이렇게 반응이 뜨거울 줄은 저도 몰랐어요. 혼자 관리하긴 아닌 것 같아서 그냥 내려버렸어요.”
서원종 교수도 대충 상황은 파악하고 있었다.
본인도 태범의 사이트에 들어가 수강 과목 추천 프로그램에서 자신의 수업을 검색해봤기 때문이다.
“나도 다른 직원들이랑 식사하다가 듣게 됐는데 처음에는 컴퓨터 공학과 학생인가 싶어서 물어보니 회계학과 학생이더라고요? 프로그래밍은 뭐 개인적으로 따로 공부하는 거예요?”
“네, 그냥 취미로 독학한 거예요. 제 여자 친구가 컴퓨터 공학과라 물어보기도 하고 개인적으로 책이나 강의를 보고 언어를 익혔죠.”
“여자 친구가 컴퓨터 공학과에요? 우리 학교 학생?”
“한국 사람은 아니고 교환 학생인데 캐서린이라고 영국에서 온 친구에요.”
“아하, 캐서린! 제가 잘 알죠. 학과에 외국인이 얼마 없으니 웬만한 사람은 눈에 띄기 마련이죠. 캐서린이 학생 여자 친구였구나.”
교수는 캐서린이라는 이름이 반가운지 눈을 번뜩 뜨며 태범과 캐서린의 관계를 흥미롭게 바라봤다.
“독학 쉽지만 않았을 텐데 역시 주변에 선생 역할을 해주는 사람이 있었으니 다행이었겠네요. 보니까 오픈 소스를 많이 이용한 것 같던데 그래도 난이도가 상당한 걸 해냈더라고요.”
“그렇게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뭐.”
“아니, 학생 대단한 거 맞아요. 다른 건 몰라도 ERP프로그램 보고 내가 놀랐다니까요? 재무관리 해주는 알고리즘. 난 그거 보고 학생이 대단하다고 생각했어요.”
“그건 그냥 파이썬 머신러닝을 이용해 만든 알고리즘이었는데요.”
“학생 프로그래밍은 취미로만 하려는 거예요? 아니면 본격적으로 해볼 생각 가지고 하는 건가요?”
교수는 초롱초롱한 눈으로 태범을 바라보며 질문을 건넸다.
“제가 이미 회계학에 자리를 잡아서 아마도 취미로만 할 것 같은데요.”
“아…… 그래요? 내가 컴퓨터 공학과 교수잖아요? 많은 학생들을 봤는데 학생 같은 솜씨를 가진 친구는 흔치 않거든요. 확실히 프로그래밍에 재능이 있는 것 같은데 다른 생각은 없나요?”
“다른 생각이요?”
“내가 보기에는 컴퓨터 공학과로 전과해도 좋을 것 같은데…… 진짜 재능이 보이거든요.”
일종의 스카웃이었다. 기업에서 유능한 인재를 다른 곳에서 데려오듯 다른 학과에서 재능이 있는 학생을 데려오려는 생각이었다.
물론 이는 아주 흔치 않은 일이었다.
이미 어느 정도 재능이 있는 사람들은 관련 학과에 들어가기 때문에 타 학과에서 다른 학과의 재능을 가진 학생을 보기 힘든 수준이니 말이다.
“제가 지금 공인 회계사 시험을 준비하고 있어서 고시반에 들어가 있거든요. 그래서 다른 걸 전공하기에는 좀 힘들 것 같아요.”
“아…… 공인 회계사?”
지금껏 교수가 설득하기 위해 뿌린 밑밥의 효과가 모두 사라지는 순간이었다.
고시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다는 건 이미 목표가 확고히 잡힌 상태였고 이를 바꾸긴 쉽지 않다는 걸 교수도 알았기 때문이다.
“네, 이번 방학부터 고시반에 들어가서 회계사 공부하고 있었거든요. 그것 때문에 교수님과 저녁에 만난 것이고요.”
“학생이 정 그러면 어쩔 수 없지만, 참 아쉽네요. 교수 입장에서는 눈앞에 보이는 재능 있는 학생을 놓치기에는 참 아쉽거든요”
유능을 제자를 키워서 무엇을 얻으려는 건가 떨어지는 떡고물을 받아먹으려는 것인가 아니면 성공한 제자를 키웠다는 명예?
태범이 교수가 아니기 때문에 그의 마음을 100% 헤아릴 수 없었다.
하지만 확실한 건 단 한 가지, 태범의 담당 교수인 김영석 교수와 마찬가지로 서원종 교수도 눈앞에 보인 재능을 가진 학생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는 것이다.
“저도 기존에 쌓아 놓은 게 있어서 쉽게 버리기 힘들거든요.”
“아 정말 아쉽네요. 프로그램 조금만 다듬으면 상업화도 가능할 것 같은데 그냥 버리기에는 너무 아쉬워요.”
태범의 확고한 마음에 교수는 고개를 흔들며 아쉬운 마음을 계속 표현했다.
“학생도 알다시피 잘 만든 프로그램 하나면 평생을 먹고 살 수 있죠. 요즘 떠오르는 신흥 재벌들 봐요. 페이스북의 마커 저커버그, 중국 알리바바의 마윈, 이런 둘 모두 아이디어랑 프로그래밍 기술가지고 세계적인 재벌이 됐잖아요.”
교수는 어떻게 해서든 태범을 데리고 오고 싶어 별의별 달콤한 말을 쏟아냈지만 태범은 그저 무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일 뿐이었다.
“학생, 혹시 나중에라도 생각 있으면 연락해요.”
태범을 설득하기 위해 말을 쏟아내던 교수는 태범의 무반응에 결국 포기를 하고 말았다.
말을 하느라 못 마셨던 식은 커피를 단숨에 들이마시더니 태범에게 언제든 연락하라며 여지를 남겨 두고 그렇게 둘은 헤어졌다.
* * *
[강태범 님의 소유 능력]
[폰 노이만 능력]
-암기력(100%)
-암산 능력(15%)
-수리 이해력(100%)
-언어 이해력(85%)
태범은 이제 암기력과 수리 이해력을 100% 스캔한 상태였다.
암기력을 100% 채웠을 때와 마찬가지로 태범은 한 번의 감전(?)을 겪으며 수리 이해력을 완전히 자신에게 각인시켰다.
이제 나머지 언어 이해력 15%만 채우면 폰 노이만에게 얻고자 하는 능력을 모두 채운 셈이 되는 것이다.
“오늘 수업 몇 시부터 있니?”
“방학 때랑 똑같이 학교에는 무조건 9시까지는 가야 돼.”
9월 초, 오늘부터 2학기가 시작하는 날이었다.
아침 일찍 일어난 태범에게 어머니는 수업 시간을 물었다. 날마다 첫 수업 시간이 들쑥날쑥했기 때문에 늦잠을 자곤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회계사 공부를 하고 있는 태범은 이제 그럴 수 없었다.
방학 때와 마찬가지로 9시에 고시반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수업이 있으면 듣고 하는 식으로 학교에 다닐 계획이었다.
태범은 스마트폰 속에 저장해둔 시간표를 한번 확인하곤 가방을 챙겨 집을 나섰다.
태범의 2학기 시간표는 대부분 회계사 시험과 관련된 과목들이었다.
쓸데없는 교양 과목은 모두 재껴두고 시험 공부와 함께 학과 생활을 할 수 있도록 교수님이 추천해준 강의로 구성돼 있었다.
‘해바라기네…….’
평소와 마찬가지로 학교로 가기 위해 같은 길을 걸었는데 안 보이던 게 눈에 들어왔다.
커다란 화분에 담긴 노란색 잎의 해바라기였다. 한참 꽃이 개화할 시기이니 미용실 가게 앞에 인테리어용으로 가져다 놓은 듯했다.
‘하나, 둘, 셋, 넷…….’
태범은 가던 길을 멈추고 해바라기 앞에 섰다.
꽃이 예뻐서도 아니었고 향기가 좋아서도 아니었다. 태범은 해바라기 씨를 하나하나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며 세기 시작했다.
‘아오!’
태범은 해바라기 씨의 배열 속에서 피보나치수열(1,1,2,3,5,8,13,21…… 앞항과 뒤항을 더하면 다음 항의 수가 나오는 수열)을 확인하려 했었다. 하지만 최면을 거는 듯한 해바라기 씨의 나선 배열은 눈을 빙빙 돌게 만들어 버리니 확인이 어려웠다.
“저기 뭐 하세요?”
이 모습을 본 미용실 아주머니가 밖으로 나와 태범을 의심스럽게 쳐다보며 말했다. 혹시나 화분의 해바라기를 꺾으려는 게 아닌가 싶었던 것이다.
“아. 그냥 꽃이 예뻐서요.”
태범은 자신의 행동에 괜히 민망한 나머지 빠르게 자리를 뜨며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풋.”
무슨 영화 속 수학 천재를 보는 것도 아니고 길가다 뭔 쌩쇼를 했던 것일까.
태범은 방금 있었던 일에 본인 스스로도 민망하면서 웃긴 나머지 웃음이 터지고 말았다.
이 모든 건 태범이 수리 이해력 100%를 얻음으로써 나타난 행동이었다.
이전까지는 눈으로 사물을 보면 사물 형태 그대로 받아드렸지만 이제는 수학적인 감각이 추가되어 보이기 시작했다.
꽃잎을 보면 피보나치수열이 보이고 나무의 줄기를 보면 프랙탈 기하학이 떠 올릴 정도로 사물 그대로가 아닌, 본질 속에 숨어 있는 수리적 영역을 찾아내고 있었다.
익숙한 캠퍼스이지만 개강을 한 학교의 캠퍼스는 아침부터 학생들로 바글거렸다.
분명 같은 학교이지만 태범은 어제와는 다른 학교의 느낌이 느껴졌다.
“태범아!”
태범이 아침 수업인 ‘원가회계’를 위해 경상대 건물로 들어가려는 찰나,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어, 혜준아.”
태범의 같은 학과 친구인 성혜준과 동기들이 모여 있었다.
그들은 태범과 마찬가지로 원가회계를 들으러 가는 길이었다. 그리고 태범에게 이전과는 다른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