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27화 (27/188)

# 27

“도대체 교수랑 사이가 어떻기에 글을 이렇게 쓰냐.”

[이 수업 듣지 마세요. 학비가 아까울 정도입니다. 열심히 해도 학점 개 짜게 줍니다.]

[쓰레기 과목입니다. 쓰레기가 돼서 쓰레기통에 들어가고 싶으면 들으세요.]

이 사람들은 학점을 못 받아 원망을 가지고 있던지 교수와의 심한 트러블이 있던 사람임이 분명했다. 웬만한 사이가 아니고서는 이런 글을 쓰기 힘들 테니 말이다.

태범은 욕설이나 비난에 대한 필터링을 만들어볼까 생각은 했지만 이도 한계가 있을 것 같아 그만두었다.

태범은 또 다른 문제가 생길까 걱정하는 마음에 다른 프로그램도 살펴보기 시작했다

‘하…… 내릴까, 말까.’

사랑 고백, 미팅 매칭 등 다른 프로그램들도 마찬가지로 익명의 게시글이 가능한 시스템이었기에 혹시나 이와 같은 문제가 우려되고는 있었다.

하지만 사용자가 제로(0)에 가까운 수준에 악성 글은커녕 글 1개조차 안 올라왔고 굳이 프로그램을 내릴 필요는 없어보였다.

어차피 수강 과목 추천 프로그램처럼 누군가를 평가하는 것도 아니었고, 사랑, 미팅과 같은 긍정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었기에 악성글이 올라올 만한 근거도 없었다.

결국 태범은 이번에 문제가 된 프로그램만 내리기로 하고 다른 건 유지하기로 결정했다.

태범은 사이트에 올려놓은 수강과목추천 프로그램을 미련 없이 과감히 내렸다. 홈페이지에서 내린다고 해서 프로그램이 사라지는 건 아니니 말이다.

아쉽긴 해도 속이 후련해진 기분이었다.

시계를 바라보니 아직 오후 3시밖에 되지 않았다.

괜히 학교에 다시 가는 것은 뭐하고 태범은 오랜만에 집에 빨리 온 김에 캐서린을 만날 생각이었다.

1달 정도 만나면서 캐서린은 여자 친구에 가까운 존재가 됐다. 아직 정식으로 사귀자는 말은 하지 않았으나 이미 서로는 연인의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 * *

아직 방학인데도 불구하고 학교 근처 커피숍은 항상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역시 대한민국이 커피 공화국이라고 불리는 데는 이유가 있었다.

태범은 커피숍 구석에 자리를 잡고 캐서린을 기다리며 사람 구경을 했다.

평소라면 태범은 혼자 있을 때면 절대 브랜드 커피숍의 커피는 이용 않지만 오늘같이 사람은 만나는데 있어서는 예외를 두곤 했다.

태범의 입맛에는 오히려 200원짜리 인스턴트 싸구려 커피가 입맛에 맞았으니 아메리카노만 3,000원이 넘는 가격대의 커피는 사치에 불과했다.

‘오!’

수컷은 본능적으로 아름다운 암컷에 눈이 돌아가니 태범 역시 눈알을 돌려가며 예쁜 여자들을 관찰하고 있었다. 하지만 시선 폭력이니 뭐니 해서 조심스러운 시대에 눈알 움직이는 것도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태범 오빠.”

“어. 왔어?”

캐서린의 목소리에 태범은 시선을 빠르게 그녀에게 돌려 미소를 지으며 반겼다. 그리고 캐서린이 자리에 앉자마자 오늘 있었던 일들을 하소연하기 시작했다.

“내가 저번에 홈페이지에 올렸던 프로그램 있잖아, 강의 평가. 아까 그것 때문에 학교에서 전화가 왔다니깐.”

“왜?”

“아니, 강의 평가 글에 교수님을 비난하는 악성 글이 올라와서…… 뭐, 익명이라 어쩔 수 없긴 한데 학교 측에서 탐탁지 않게 보더라고.”

“그래서 어떻게 했어? 글 내렸어?”

“아니, 그냥 프로그램 자체를 내렸지. 어차피 확인할 건 다했고, 굳이 계속 올려둘 필요는 없었거든.”

“그래도 되게 잘 만든 건데 아쉽다. 그래도 너무 기죽지마. 컴퓨터 공학과인 나도 혼자 못 만드는 걸 오빠는 만들었잖아. 나한테 프로그래밍 물어보는 게 엊그제 같은데.”

캐서린은 아쉬운 듯 씁쓸한 표정을 지으며 태범을 달래주었고 태범은 괜찮다며 미소를 지어 보였다.

“우리 그러지 말고 나중에 합작해서 프로그램 하나 만들어 볼래? 재미있을 것 같은데.”

“정말?”

프로그래밍은 협업이 중요한 작업이었다. 프로그래밍은 새로운 걸 만드는 창조 작업이자 같은 언어를 반복 나열해서 작성하는 노가다에 가까운 작업이기도 했다. 그만큼 사람의 머리와 손이 많이 필요했고 협업이 잘 이뤄져야만 했다.

“응, 같이 하면 좋지. 그냥 나처럼 공부하는 겸 취미로 하면 스트레스 안 받고 재밌게 할 수 있을 거야.”

캐서린은 소풍날을 기다리는 어린아이처럼 벌써부터 잔뜩 기대하는 모습이었다.

그렇게 캐서린과 프로그래밍과 관련하여 이야기를 실컷 나눴고 어느새 커피 잔의 커피는 모두 비워졌다.

“오빠, 우리 운동하러 갈래?”

태범이 다음 이동 장소를 생각하고 있던 도중 캐서린이 먼저 말을 꺼냈다.

“갑자기 웬 운동?”

“나 원래 운동 갈 시간이었는데 나왔거든. 근데 오빠랑 가면 좋을 것 같아서.”

캐서린은 다른 건 몰라도 운동은 꾸준히 하는 여성이었다. 영국에 있을 때도 평소 조깅이나 사이클 그리고 각종 근력 운동을 즐겨 했으니 괜히 건강미가 넘쳐 보였던 것이 아니었다.

그에 반해 태범은 학창시절 체육 시간 외에는 운동이라는 걸 안하던 몸이었으니 캐서린과는 정반대로 근육 없는 마른 체형의 몸매를 가지고 있었다.

하루에 한 시간 운동을 한다면 1년에 365시간

요즘 100세 시대라 하니 한 80세까지 운동을 한다면 약 21900시간

날로 치면 912일을 소모하는 것이다.

운동하고 약 2년하고 반 정도의 시간 동안 근육이 찢어지는 고통 속을 사는 거나, 운동 안하고 좀 일찍 하늘로 가는 거나 비슷하다고 합리화하기 까지 했던 태범이었다.

그만큼 운동과는 거리가 멀었으나 오늘만큼은 달랐다.

“그래, 한번 가보지 뭐.”

캐서린과 함께 운동한다니 뭔가 색다를 것 같았고, 힘들어도 사랑의 힘으로 견딜 수 있을 것만 같아 태범은 흔쾌히 승낙을 했다.

* * *

태범은 캐서린의 손에 이끌려 학교 후문에 위치한 헬스장으로 가게 되었다.

이름부터가 ‘우리헬스장’ 이였으니 학교 학생들이 많이 다니던 헬스장이었다.

“하이(HI) 캐서린.”

“오빠, 안녕하세요.”

헬스장 안내데스크에 있는 남자 직원이 캐서린을 보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캐서린은 직원의 인사에 반갑게 받아주는데 태범은 괜히 신경이 쓰였다.

남자 트레이너와 여성 트레이너가 눈 맞는 경우가 많다는 소문을 들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에 괜히 질투를 부렸다간 남자 자존심 다 내팽겨 치는 꼴이 되니 올라오는 감정을 참았다.

“오늘 하루만 등록해서 운동할게요.”

캐서린은 영어와 어눌한 한국말을 섞어가며 직원에게 말했다. 직원은 캐서린에 말에 용케 알아듣고 고개를 끄덕였다.

“하루? 남자분 여기 처음이시죠?”

“네.”

태범이 헬스를 했던 적은 단 한 번, 군대에 있을 때였다.

선임 손에 이끌려 체력 단련실에서 운동을 해본 적은 있으나 그곳에는 아령, 바벨, 줄넘기, 윗몸일으키기 받침대 등 최소한의 기구만 있었고 아무런 지식 없이 아령으로 팔만 깔짝이다가 그만뒀었다.

“여기요.”

태범은 만원을 지급하고 일단 오늘 하루만 이용하기로 했다. 보통은 3개월, 6개월, 1년 단위로 등록이 가능했지만 오늘은 체험삼아 한번 경험해보는 것이기에 1일짜리를 등록한 것이다.

‘저건 뭐지?’

헬스장에는 봐도 무슨 운동에 쓰이는 건지 모르는 기구들이 놓여 있었고 태범은 신기하게 운동 기구를 바라봤다.

“여기 있는 운동복 가지고 탈의실에서 갈아입고 오시면 돼요.”

트레이너의 안내에 따라 반팔, 반바지로 된 운동복을 가지고 탈의실로 들어갔다.

‘헉!’

태범은 탈의실에서 옷을 갈아입고 있는 근육맨들을 보고 놀라워했다. 웬만한 여자 가슴 사이즈 못지않게 흉근이 커다랗게 잡혀있었으며 넓은 어깨에 등에는 날개라도 달린 듯 활배근이 펼쳐져 있었다.

태범은 근육맨들 앞에 서니 자신의 속살을 보이기 부끄러울 정도였다.

하지만 다행이(?)도 근육질의 사람만 있는 건 아니었다. 똥배가 볼록 나온 아저씨 삐쩍 말라 툭 치면 뼈가 부러질 것 같은 어린 학생들 까지 익숙한 몸매의 사람들도 있었다.

동지를 만난 기분으로 나름대로 위안을 느끼며 태범은 운동복으로 갈아입고 탈의실 밖으로 나갔다.

‘뭐부터 해야 되는 거야?’

헬스에 처음 온 태범은 뭘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서서 케서린이 탈의실에서 나오길 기다렸다.

태범은 트레이너가 와서 설명해 주는지 알았는데 다른 회원과 개인운동을 하고 있는지 태범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괜히 가만히 서 있기도 민망해서 결국 러닝머신에 올라가 달리기를 시작했다. 태범이 유일하게 아는 운동기구 중 하나였으니 어머니가 살 뺀다고 집에 들여놨다가 빨래걸이 신세가 된 러닝머신이었다.

“오빠, 몸 푸는 거야?”

드디어 캐서린이 운동복을 갈아입고 나왔다.

생각했던 몸매가 드러나는 운동복은 아니었지만 헬스장의 반팔, 반바지 운동복을 입은 캐서린은 다른 사람들의 시선을 빼앗기 충분했다.

아무리 요즘 세계화 시대, 다인종 국가가 돼가고 있다. 하지만 여전히 하얀 피부의 금발 머리의 백인은 사람들에게 눈에 띌 수밖에 없었다.

캐서린는 태범의 옆 러닝머신에 올라가더니 달리기 시작했다.

“하…… 하.”

태범은 얼마 뛰지도 않았는데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있었다. 요즘 너무 앉아만 있던 탓일까 체력이 바닥인 상태였다.

하지만 캐서린은 지치지 않고 러닝머신의 벨트 위를 달렸다. 주위를 보니 다른 여성들은 빨라야 경보 수준으로 걷고 있지만 캐서린은 뛰고 있었다.

모든 몸풀기를 마치고 근력운동을 하기 위해 운동기구 앞에 섰다.

“오빠, 이거 해보자.”

캐서린도 태범이 운동과 거리가 먼다는 것을 알기에 기구를 지목해주며 하나씩 알려주기 시작했다.

여자 그것도 백인 여성에게 운동을 배우자니 태범은 어색했다.

태범이 어색함을 느끼는 만큼 주위 사람들도 낯선 광경에 힐끔힐끔 쳐다보고 있었다.

“한 번 더! 한 번 더!”

태범은 팔은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처럼 부들부들 떨며 벤치프레스 기계를 밀고 있었다. 캐서린은 태범의 근육을 모두 짜낼 기세로 기합을 넣어주고 있었다.

가슴운동을 마치고 이어서 하체, 어깨, 복근까지 헬스장에 있는 기구를 한 번 씩 경험했다.

놀이공원에 온 것도 아니고 기구를 하나씩 다 체험해보는 자신의 모습에 태범은 헛웃음이 나와 버렸다.

“오늘은 끝! 다음에 또 오자.”

한 시간 반 정도의 대장정 끝에 운동이 끝났다. 캐서린은 오늘 맛보기에 불과했다며 장난스럽게 말하지만 태범은 죽을 맛이었다.

오랜만에 쓴 근육은 너덜너덜해져 걸레짝이 된 기분이었다. 태범은 지친 몸을 이끌고 탈의실로 향했다.

‘뭐지?’

샤워를 하고 옷을 갈아입은 뒤 습관적으로 핸드폰을 한번 살펴보는데 부재중 전화 한 통이 와있었다.

이번에도 낯선 번호였다. 혹시나 또 학교에서 전화가 온 건 아닌지 걱정되는 마음에 태범은 바로 전화를 걸었다.

“혹시 강태범 학생 맞나요?”

“네, 맞는데요.”

순간 태범의 미간에는 주름이 깊게 잡혔고 짜증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분명 학교 측이 원하는 데로 프로그램을 내려 줬는데 또 무슨 트집을 잡으려는 건지 태범은 불만이 가득했다.

“컴퓨터 공학과 서원종 교수인데요. 수강 과목 추천 프로그램 운영하는 ‘나의 보물창고’라는 사이트 운영하던 학생 맞죠?”

“네, 맞는데요.”

혹시 강의 평가에서 악평을 들었던 교수 중 한 명일까? 괜히 욕을 먹는 건 아닌지 괜히 한 소리를 들을 것 같은 느낌에 태범은 마음의 준비를 했다.

“내가 다른 교수님이 말해 줘서 학생 사이트에 한 번 들어가 봤거든요.”

“네…….”

“혹시 그 사이트에 있는 프로그램들 학생 혼자 만든 거예요?”

“네, 저 혼자…….”

“그걸 정말 혼자 만들었어요? 전사적 자원 관리(ERP) 프로그램도요?”

태범의 예상과 달리 전화 속 교수의 목소리는 불만이 아닌 호기심 가득 찬 목소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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