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26화 (26/188)

# 26

태범은 공인회계사 1차 합격자들과 함께 김현수를 따라 빈 강의실로 들어갔다.

합격자 4명과 태범을 포함 총 5명밖에 없었으니 마치 개인 과외를 받는 수준과 다름없었다.

“자 다들 들어오셨죠?”

회계사인 김현수는 칠판 앞에 서서 인원을 체크했다. 어차피 5명밖에 없는 거 한눈에 들어왔지만 역시 정확한 성격을 요구하는 회계사답게 꼼꼼하게 명단을 확인하고 있었다.

“누가 강태범 학생이죠?”

“저요!”

“교수님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어요. 아직 1차 시험도 보지 않으셨는데 교수님이 인정하시더라고요.”

“아. 그래요? 감사합니다.”

다른 학생들 옆에서 대놓고 칭찬을 받으니 태범은 쑥스러워 어쩔 줄 몰라 하며 어색한 미소를 지었다.

“제가 회계사 생활이나 재밌는 이야기 같은 것 좀 하고 싶은데 여러분들이 아직 시험이 남았으니까 꼭 필요한 이야기만 해드릴게요. 좀 지루해도 참아주세요,”

“네.”

학생들은 눈이 초롱초롱해져 김현수의 말 한마디를 놓칠까 얼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었다.

이미 1차를 합격한 학생들에게는 다음 2차 합격보다 간절한 것은 없었다. 학생들에게는 지루함이라는 감정을 느낄 수 없는 상황이었다.

“일단 제 소개를 하자면 전 09학번으로 회계학과에 나왔고요. 작년에 51회 회계사 시험해 합격해서 지금은 상정회계법인에서 일하고 있는 김현수라고 합니다.”

5명밖에 없는 강의실이었지만 박수소리만큼 가득 찬 강의실 못지않게 강렬했다. 현직에서 일하고 있음에도 동문을 위해 이 자리에 와준 것에 대한 감사의 의미였다.

“여기 있는 분들 모두 2차 한번 떨어지고 유예 생활 하시는 분이잖아요? 유예 과목이 적은 사람도 있겠지만 많은 분들은 걱정하고 계실 거예요. 근데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회계시험은 1차 합격 후 다음 2차에 불합격을 했어도, 내년에 1차를 거치지 않고 불합격한 과목만 다시 볼 수 있는 유예 제도가 존재했다.

6월 2차 시험이 끝나고 결국 현재 이곳은 유예 생활을 하는 학생들만 남아 있었다.

“다른 과목은 몰라도 재무 관리만큼은 자세하게 지속적이라 할 정도로 공부를 하셔야 해요.”

회계사 김현수는 각 과목의 공부 방법부터 답안지 작성 요령, 남은 유예 기간 시간 관리 방법까지 세세하게 알려주었다.

학생들은 하나라도 놓치지 않기 위해 노트를 펼치고 필기를 하고 심지어 핸드폰을 이용해 녹음까지 하고 있었다.

‘와. 치열하다. 치열해.’

태범은 학생들이 강의에 완전히 몰입해 있는 걸 보고 이 자리에 자신이 있어도 괜찮은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비록 딱딱한 의자에 가만히 앉아 있는 것뿐이지만 피 튀기는 전쟁 못지않게 보이지 않는 전쟁이 일어나고 있었다.

“이번 유예 기간을 마지막으로 합격한다는 마인드로 공부하셔야 돼요. 1차 합격에 안도하면 안 되시고 서로 간에 어느 정도 통제도 하면서 공부에만 집중하시도록 노력해야만 할 겁니다.”

김현수의 강의를 듣는 학생은 5명밖에 안되니 그의 입장에서 학생들의 모습이 한눈에 들어왔다. 학생들 한명 한명에게 아이 컨텍을 해주며 동기를 부여해주었다.

“강의는 여기서 마치겠고요. 혹시 궁금한 점 있으시면 저한테 이메일을 보내주시면 시간 날 때 답변해드리겠습니다. 다들 시험 잘 보시고 꼭 합격하시길 바랍니다.”

길면 길고, 짧으면 짧은 2시간이라는 시간이 지나고 김현수는 칠판에 자신의 이메일을 적으며 강의를 마무리 지었다.

현수는 마지막에 명함이라도 나눠주고 싶은 마음이었지만 괜히 바쁜 시간에 시도 때도 연락이 올 것 같아 생각을 접어 두었다.

“저기 강태범 씨?”

특강이 끝나고 강의실을 나가는 학생들 사이에서 김현수는 태범을 이름을 불렀다.

“네?”

태범은 문밖으로 나서려던 발을 멈추고 현수에게 다가갔다. 그러자 현수는 문밖으로 나가고 있는 학생들의 눈치를 보며 명함을 꺼내 들었다. 혹시나 사람차별 한다는 소리를 들을까 걱정됐기 때문이다.

“궁금한 거 있으면 명함에 적힌 번호로 연락해요. 교수님이 진짜 아끼시는 것 같은데 합격해서 만나죠.”

태범은 얼떨떨하게 현수의 명함을 받아들었다.

명함에 적힌 상정회계법인은 4대 회계법인 중 한 곳이었고 그중에서도 가장 메리트를 자랑하는 최고의 회계법인이었다.

서울 하위권 학교인 우리 대학교에서 나온 회계사가 이곳에 들어간 것만 해도 자랑거리가 될 정도였다.

“저도 아직 수습 회계사라 크게 도와드릴 건 없지만 합격하셔서 우리 법인에 오셨으면 좋겠네요. 여기에 저희 학교 출신이 얼마 없어서 좀 힘들거든요. 하하.”

“저만 또 이렇게 챙겨주시는 것 같은데, 감사합니다.”

평소에는 잘 몰랐지만 교수님이 자신에 대해 좋게 말하고 다니는 것 같아 태범은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 * *

특강이 끝나고 태범은 다시 평소대로 고시반 내 독서실에 들어가 공부를 하고 있었다.

‘좀 쉬어야겠다.’

태범은 공부를 하다가 1시간 간격으로 휴게실에 들어와 휴식을 취하곤 했다.

암기 능력이나 이해력과 같은 능력은 뛰어났어도 엉덩이를 의자에 오래 붙이는 능력만큼은 그저 태범이 가지고 있던 그대로였으니 말이다.

“으아.”

뚜두둑.

태범은 휴게실에 들어와 하품을 크게 뱉으며 기지개를 켰다. 얼마나 근육들이 움츠리고 있었으면 뼈 소리가 휴게실 전체에 울려버렸다.

뼈 소리에서 나오는 묘한 쾌감에 태범은 미소를 지으며 사물함에서 자신의 핸드폰을 꺼냈다.

휴식 시간만큼은 핸드폰을 사용할 수 있었고 이 시간은 태범이 캐서린과 메시지를 주고받을 수 있는 타이밍이기도 했다.

어 뭐지?

캐서린에게 까똑을 보내려던 찰나, 부재중으로 낯선 번호가 찍혀있는 걸 발견했다. 그리고 메시지 하나가 도착에 있었다.

[우리 대학교 총무과입니다. 연락가능 하시면 이 번호로 연락 부탁드립니다.]

‘총무과?’

가끔 대학교에서 홍보 메시지는 오긴 했어도 개인적으로 오는 메시지는 흔하지 않았다. 심지어 총무과라니 태범은 왜 그러는지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태범은 메시지에 찍힌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네, 우리 대학교 총무과입니다.”

태범이 전화를 걸자 중년의 여자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조금 전에 저한테 전화가 왔기에 전화했거든요.”

“아, 강태범 씨 맞으신가요?”

“네, 맞습니다.”

“저기 혹시 ‘나의 보물 창고’라는 사이트 운영하고 계시지 않나요?”

“네?”

전혀 예상치 못한 말이 나오니 태범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기껏 해봐야 학사 문제 정도가 나올 줄 알았는데 자신이 만든 사이트 이야기는 너무도 뜬금없는 상황이었다.

“요즘 우리 대학교 학생들이 사용하고 있는 사이트라고 해서 저희가 들어가 봤거든요. 그런데 거기에 수강 과목 추천하는 그런 게 있더라고요?”

“네…….”

‘아! 뭔가 잘못됐구나.’

학교 직원의 쏘아붙이는 말투에 태범은 뭔가 안 좋은 낌새를 느꼈다. 심장이 덜컹 내려앉는 기분에 태범은 조심스럽게 대화를 이어나갔다.

“저기 그런데 제 연락처는 어떻게 아셨죠?”

“학교 SNS에 홈페이지를 한번 소개하신 적이 있으시더라고요. 찾아보니까 저희 학교 학생이시더라고요.”

태범이 몇 번 학교 SNS에 자신의 홈페이지를 소개한 적이 있었는데 학교 측에서 그걸 찾아서 학교 전산망 내 등록돼 있는 태범의 연락처를 통해 연락한 것이었다.

“아, 그런가요. 근데 혹시 뭐가 잘못됐나요?”

“아니, 거기 글 보니까 학생들이 교수의 강의를 평가하고 있더라고요? 그렇게 학교 허락 없이 그런 프로그램을 운영하시면 안 되시죠. 보니까 교수들에 대한 직설적인 심한 표현들도 많이 있더라고요. 그런 글은 좀 관리 해주셨으면 해요.”

“아…… 죄송합니다.”

태범의 강의평가 프로그램의 글들은 익명으로 이뤄지다 보니 다소 교수들이 보기에 불편한 글들이 있었다.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일부 몇 명이 익명이라는 가면 뒤에 숨어 악의적인 태도를 보여주곤 했었다.

그렇다고 태범이 하루 종일 모니터링을 할 수 없는 노릇이었고 익명이라는 가면을 벗기자니 평가 참여도가 낮아질 게 뻔했다.

“저기 학생, 그러니까 그 사이트에 올라온 글 좀 빨리 지워주셨으면 좋겠어요. 저희도 이런 일로 학교 학생이랑 얼굴 붉히기 싫거든요. 아니면 프로그램을 내려주던가요.”

“바로 지워드리도록 할게요.”

“알겠어요. 그럼 빨리 부탁드려요.”

“네.”

“휴…….”

태범은 전화를 끊자마자 한숨을 푹 쉬었다.

자신이 취미로 만든 작품을 사람들에게 선보여 반응을 확인하고 싶었던 태범은 괜히 돌멩이만 맞게 된 꼴이니 되니 허탈감이 들었다.

‘그냥 지워버려야지!’

이미 프로그램에 대한 호응도는 알게 되었고, 또한 이를 운영하기에 많은 문제가 있다는 것도 깨달았다. 더 이상 프로그램을 올리고 있어봤자 이득이 될 게 없었고 태범은 그냥 프로그램을 홈페이지에서 내릴 생각을 했다.

아직 집으로 갈 시간인 8시가 되려면 한참이나 남았지만 태범은 책상 위의 책을 가방 속에 넣으며 짐을 싸기 시작했다.

“야, 너 벌써 집 가게?”

옆에 앉아있던 현찬은 태범이 가방을 들고 자리를 일어서자 조용히 말을 걸었다.

“갑자기 집에 일이 생겨서. 혹시 실장님이나 교수님이 찾으시면 말 좀 해줘.”

“왜 무슨 일인데?”

“나중에 말해줄게. 일단 난 간다.”

태범은 하고 있는 공부를 잘 진행하고 있는 상황이라 그 누구도 터치하지 않았다.

다른 학생이 아무 사유 없이 독서실을 나섰다면 감독 실장에게 한 소리를 듣겠지만 태범은 별 걱정하지 않았다.

태범은 가방을 메고 고시반 건물에서 나오면서 핸드폰으로 자신의 홈페이지를 살펴봤다.

“하…….”

사용자가 많아지면 꼭 그중 몇몇 미꾸라지가 물을 흐려놓는 법이었다. 어제 저녁까지만 해도 없었던 악성글들이 태범의 눈앞에 보였다. 글을 보자니 태범은 탄식할 수밖에 없었다.

마치 교수에게 스트레스를 받았던 학생이 복수를 하듯 인터넷에서는 몇 명의 익명의 사람들이 교수를 흠씬 두들겨 패고 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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