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24화 (24/188)

# 24

“몇 번 봤다고 모두 네 것이 되는 게 아니야. 보고 또 보고 계속 봐야 겨우 자기 것으로 만들 수 있는 거야. 근데 뭐 벌써 마무리를 했다고?”

“네.”

“허허. 태범아 혹시 유창성 착각(fluency illusion)이라고 아니?”

“아니요.”

태범은 속으로 또 시작됐구나 하는 마음에 가슴이 답답해졌다.

“우리가 익숙해지면 낙천적으로 추측을 하게 되거든? 네가 분명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 게 사실 아는 게 아니라는 말이야. 말로 설명하기가 어려운데. 그냥 네가 알고 있다는 걸 네 뇌가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면 돼.”

“네, 잘 알겠습니다.”

“네가 알고 있다고 생각해서 정말 모든 걸 알고 있는 게 아니야. 시험공부 다 한 거 같은데 막상 시험 보면 틀릴 때 있지? 그게 이런 거야.”

이제는 하다하다 교수는 심리 용어까지 쓰면서 설득을 하려하고 있다.

“네, 잘 알겠습니다. 그런데 저는 1차 과목은 다 공부한 게 맞다고 생각합니다.”

“아휴. 그래 뭐, 공부하는 당사자가 잘 알겠지만 말이야.”

교수의 계속되는 설득에도 불구하고 태범은 동의하지 않았다. 교수와 태범 둘 모두 오기가 생긴 상황이었다.

“그러면 내가 한 번 테스트해 봐도 될까? 여기서 잠시만 기다려봐.“

교수는 태범에게 테스트를 제안하더니, 답도 듣지 않고 자리에서 일어나 회계사반 사무실로 들어갔다.

“자!”

교수는 책 한 권을 들고 왔는데 자세히 보니 재무회계 연습이라는 제목의 책이었다.

“분명 공부 다 했다고 했지?”

“네.”

“허허. 그래 한번 볼까나?”

교수는 책장을 넘기고 문제를 찾고 있었다. 가장 어려운 문제를 내려는 듯 책장을 넘기는 시간은 길었다.

이 상황에서 태범도 자신만만하지는 못했다. 스스로가 1차 과목에 대한 공부를 마쳤다고 말할 수 있을 만큼 지식이 있는 건 맞지만, 항상 예외는 있는 법이니 말이다.

문제라는 것은 무한대로 응용이 가능한 만큼 예상 밖의 문제가 나올 수도 있으니, 무조건 다 맞춘다는 보장은 없었다.

“자 이거 한 번 풀어보자.”

교수는 페이지 한 부분을 가리키더니 태범 앞에 책을 들이밀었다.

연도별 법인세 부담액과 법인세 관련 회계 처리를 하는 문제였다. 다른 문제들보다 조금 더 복합적이고 풀이 과정이 길어지는 문제였기에 난이도가 꽤 있었다. 역시 교수가 고심 끝에 고른 문제다웠다.

“이거 풀면 되는 거죠?”

“그래, 문제4번.”

태범은 책을 받아들고 문제를 풀기 시작했다.

오른손은 펜과 계산기를 번갈아가며 빠르게 계산을 하기 시작했고 노트 위에는 숫자가 적혀지고 있다.

“흠…….”

교수는 미소를 지으며 한번 할 수 있으면 해보라는 표정이다.

분명 태범의 눈과 손은 현란하게 움직이고 있지만 빈 수레가 요란한 법이라고 교수는 별 신경 쓰지 않았다.

“음…….”

빠르게 움직이던 손이 잠시 멈칫했다. 태범은 잠시 고민의 시간이 필요한지 왼손으로 턱을 만지며 생각을 하고 있었다.

교수는 노트 위에 적힌 숫자들을 보고 있지만 답을 맞게 쓰고 있는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저 태범이 잠시 멈칫거렸다는 것에 당연하다는 듯 표정을 짓고 있을 뿐이었다.

탁타탁.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태범의 손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마치 피아노를 치듯 계산기 버튼 위에서 현란하게 손가락이 움직이더니 점점 빨라졌다.

“교수님, 정답 확인해도 될까요?”

태범은 문제를 푼 뒤 손을 멈추고 교수에게 말했다.

“그래, 확인 한번 해볼까나.”

교수는 책을 자신에게 끌어당긴 뒤 책장을 뒤로 넘겨 답을 확인했다.

“흐음…….”

답을 확인하던 교수는 입술을 오므린 채 고개를 끄덕이고 있다.

교수의 표정에 태범은 직감했다. 자신이 문제를 맞혔다는 걸.

분명 틀렸다면 교수의 입이 가만히 있을 일이 없을 텐데 저렇게 묵묵히 답을 확인하는 걸 보니 그렇다.

“맞았나요?”

“음…… 잘했네.”

조금 전 까지만 해도 투 머치 토커(Too Much Talker)답게 쉬지 않고 말을 뱉던 모습과는 다르게 단답으로 칭찬을 건네주었다.

“다른 문제도 풀어볼래?”

“네, 상관없습니다.”

교수는 아직 확신이 안 가는지 다른 문제를 권했다.

책장을 휘리릭 넘기더니 이번에는 문제를 빠르게 집어 태범에게 책을 건넸다.

‘희석주당이익, 어! 이건.’

태범은 빠르게 문제를 확인하고 읽어 나가기 시작했다. 문제를 두 줄 정도 읽다 보니 머리가 번뜩였다. 이건 분명 책에서 본 문제였다.

공인회계사(CPA) 출제 문제였는데 그대로 인용해서 책의 문제로 만든 듯 보였다. 이미 문제를 풀어본 태범에게는 너무나 쉬운 문제였다.

태범은 이전 문제보다 빠르게 손을 움직이며 계산을 시작했다. 거의 답을 미리 알고 있다는 수준으로 빠르게 문제를 풀었고 교수는 놀란 표정으로 바라보고 있었다.

“다 풀었습니다.”

“벌써?”

믿기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교수는 답을 확인했다.

“오…….”

교수는 자신도 모르게 감탄을 내뱉어버렸다. 무작위 문제를 빠른 시간 내에 풀어버리다니 이는 교수도 믿기 힘든 장면이었다.

그 이후 교수는 태범에게 몇 개의 문제를 추가로 더 내보았다. 하지만 결과는 마찬가지. 태범은 모든 문제에 답을 내놨고 정답지에 적힌 답과 하나의 오차도 없이 정확했다.

“아니, 태범아. 언제 이렇게 공부한 거야?”

이제 교수도 태범이 회계사 1차 과목에 대해 충분히 공부했다는 걸 인정했다. 하지만 고시반에 들어 온지 1달 그리고 지금 2학년인 태범이 어느 시간에 이렇게 공부를 했는가를 이해할 수 없었다.

“전 그냥 평소에 수업 듣고 교수님들이 내주는 과제 열심히 하고 그런 것밖에는 없었는데요.”

“아니, 그래도 말이야. 이 정도면 엄청 잘하고 있는 거야. 넌 그냥 이대로만 하면 분명 합격할 거다.”

“감사합니다.”

“내가 커리큘럼을 잘 못 짜준 것 같다. 이번 1월 1차 합격을 목표로 가보자.”

교수는 자신이 짜준 커리큘럼이 잘못됐다는 걸 시인했다.

보통 회계학을 준비하는 수험생이라면 첫 번째 시험은 맛보기 정도로 생각하고 공부기간을 1년 이상을 잡았으나 태범은 그럴 필요가 없었다.

그냥 당장 시험을 봐도 되는 실력이었다.

“네, 그럼 교수님이 말하시는 대로 할게요.”

“아우. 참 내가 괜히 미안해지네. 가서 하던 공부 계속해. 내가 계획 새로 짜고 있을 테니까.”

“알겠습니다, 교수님.”

* * *

“이익 준비금 증가가 이익 잉여금의 증가고 같은 금액만큼 감소한 미처분 이익 잉여금이 감소한 건 이익잉여금의 감소야. 이해했어?”

“아…… 그런가?”

한 달이 지난 지금. 태범과 현찬의 입장이 뒤바뀌어 이제는 태범이 현찬에게 공부를 가르칠 수준이 되어버렸다.

현찬은 원래 1학년 때부터 회계사를 준비하며 주변 친구들로부터 열심히 하는 친구로 알려질 만큼 노력했었다.

태범이 보다 4개월이나 빠르게 고시반에 들어왔고 다른 동급생들 보다는 자신이 잘하고 있다는 것에 자부심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제는 그것이 깨진 것이다.

고시반에 처음 입성한 태범에게 현찬은 선생님처럼 행동을 했으나 어느 순간부터 태범이 자신의 능력을 넘어섰다는 걸 깨달았다.

간혹 회계사 수험생들끼리 모여 모의고사를 풀곤 했는데 태범의 점수가 항상 우위에 있었으니 말이다.

그리고 이제는 현찬도 태범의 능력을 인정해주며 배우려는 자세로 태세를 전환한 상황이었다.

“나 먼저 집에 갈 테니 모르는 거 있으면 전화하던가, 까똑 보내.”

“어? 그래, 내일 보자.”

태범은 한결같이 밤8시가 되면 집으로 돌아갔다. 남들은 10시, 12시 심하면 새벽까지 공부를 했지만 태범은 저녁을 먹고 얼마 있지 않아 집으로 갔다.

그 모습을 본 현찬은 태범을 수상하게 생겼다. 남들 앞에서는 공부 얼마 안 하는 척하지만 집에서는 밤새며 코피 터지게 하는 게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단시간에 이렇게 실력이 오를 수 없다는 게 현찬의 생각이었다.

* * *

태범은 두 가지 공부를 병행하고 있었다.

학교에서는 학과 공부인 회계학을 하며 집에서는 프로그래밍 공부를 하는 이중생활을 하고 있던 것이다.

교수가 이 사실을 알았다면 분명 쓴 소리를 했을 테지만 태범은 이중생활을 하고도 뭐든 잘 할 자신이 있었기에 큰 문제가 없었다.

“오늘은 방문자가 얼마나 되려나?”

태범은 요즘 집에 오면 자신이 만든 홈페이지의 방문자 수를 확인하곤 했다.

첫 홈페이지 수준에 비해 한 달이 지난 지금 장족의 발전을 거듭하며 나름 그럴싸한 홈페이지가 만들어졌다.

홈페이지 디자인도 직접 깔끔하고 직관적이게 꾸며 효율성을 높였고 게시판이나 SNS공유같은 시스템도 있어 나름 갖출 건 다 갖추고 있었다.

또한 웹 언어에 이어 파이썬과 C언어를 배우면서 프로그램을 개발하고는 했는데, 그걸 공유하고자 홈페이지에 올리고는 했었다.

수강 과목 추천 시스템, 밥 친구 구하기, 사랑 고백, 미팅 매칭 시스템 그리고 심지어 회계학과 학생들이 많이 이용하는 전사적 자원 관리(ERP)등 여러 프로그램을 만들었다.

물론 상업적으로 이용하려는 게 아니기 때문에 완벽한 수준은 아니었지만, 취미 삼아 올리는 것 치고는 전문적인 수준이었다.

“1,200명? 갑자기 뭔 일이지?”

태범은 홈페이지 방문자 수를 보고는 깜짝 놀랐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하루 방문자수가 100에서 200이였지만 지금은 하루 만에 천명 이상이 들어온 것이다.

“뭐야…….”

갑자기 늘어난 방문자 수에 혹시 트래픽이 초과되어 사이트가 터지는 게 아닐지 걱정되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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