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20화 (20/188)

# 20

태범은 아무 긴장감 없이 토익 고사장인 인근 중학교로 향했다.

마치 한국 사람이 한국어 능력 시험을 보러 가는 느낌 실수를 하지 않는 이상 문제를 틀릴 수 없는 상황이었다.

고사장으로 들어가 자리에 앉은 태범은 여유롭게 핸드폰을 만지며 속으로 콧노래를 불렀다.

‘다들 열심히 하네.’

주위를 둘러보니 사람들은 한자라도 더 보려고 열심히 책을 읽고 있었다.

물론 벼락치기 한다고 점수가 확 오르는 건 아니겠지만 운만 좋다면 1문제라도 더 맞을 수 있으니 기회이니 말이다.

같은 공간이지만 여유와 긴장감이 뒤섞여 묘한 분위기를 이루고 있었다.

시간이 지나고 10시 5분이 되자 시험지가가 배부되기 시작했다.

태범은 문제지를 받자마자 바로 LC(영어 듣기)뒷장의 RC(독해) 부분을 펼쳤다.

학원에서 배운 하나의 노하우였다.

스피커에서 영어 듣기에 대한 안내문이 나올 때 그걸 가만히 듣고 있는 것이 아니라 RC를 먼저 푸는 것이다.

몇 개의 문제를 풀고 있을 때쯤 LC(영어 듣기) 문제가 스피커로 흘러나오기 시작한다.

태범은 영어를 듣자 라디오를 듣는 줄만 알았다.

모국어가 한국어였는지 영어였는지 헷갈릴 정도로 스피커 속 성우의 목소리가 자연스럽게 귀로 들어오는 것이었다.

최근 미국 드라마 좀 본 게 효과가 있던 모양이다.

모든 LC문제가 끝나고 다시 RC로 돌아왔다.

태범은 그저 소설책 읽듯 지문을 읽어나갔다. 글을 읽는 시선은 단 한 번도 멈추지 않고 이어갔다.

심지어 ‘뚱뚱한 사람들이 왜 오래 살까?’ 라는 영어 지문을 보고 피식 미소를 짓기도 했다.

비만인 사람들이 더 의사를 자주 찾아 건강 상담을 하기 때문이라는데 너무 흥미로운지 답이 이미 나왔음에도 모든 지문을 끝까지 읽기까지 했다.

마지막 200번 문제까지 모두 풀고 정답 마킹까지 마무리 한 태범은 펜을 내려놓았다.

‘실수만 안 했다면 만점이다!’

확신할 수 있었다. 막히는 문제 하나 없이 모두 확신을 가지고 문제를 풀었기 때문에 실수만 아니라면 만점이라는 걸 말이다.

심지어 시험이 끝나기까지 15분이나 남았다.

태범은 혹시나 실수한 게 있나 마킹용지를 몇 번이나 살펴본 뒤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지긋지긋한 영어는 여기서 끝이다.

* * *

태범은 인생의 한 가지 숙제를 풀었다는 생각에 기쁜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까톡.

주머니에서 올리는 알림음. 태범은 핸드폰을 꺼내 열어봤다.

캐서린: 안녕하세요. 그때 학교에서 만났던 사람입니다.

인사만 한글로 적혀있고, 나머지 영어로 적혀있는 메시지. 불알친구 희준과 함께 길을 걷다가 만난 영국여자였다.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시험 볼 때 보다 더 긴장되는 게 심장소리가 바깥까지 들리는 것 같다.

태범: 네, 안녕하세요.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아니야. 기다리다니. 너무 없어 보여.’

태범은 깊게 고민하여 정성을 다해 답변을 적고 있었다.

태범: 안녕하세요. 근데 무슨 일로?

‘이건 너무 냉정하고.’

태범은 메시지를 몇 번이나 고쳐 쓰다가 결국 가장 무난한 인사만 보내기로 했다.

태범: 네, 안녕하세요.

캐서린: 그때는 정말 고마웠어요. 혹시 실례가 안 된다면 내일 시간 되세요?

태범: 무슨 일이신데요?

캐서린: 내일 일요일이라 서울을 둘러보고 싶은데 혼자 다니기는 뭐해서…….

말은 저렇게 하지만 분명 데이트 신청이었다.

간혹 영어를 배워봤자 실무에선 쓸모없을 거라며 투덜거렸지만 이제 그 말을 취소해야 할 것 같다. 태범은 지금껏 공부한 것 중에 가장 만족감을 느끼고 있었다.

태범: 네, 당연 시간 되죠. 그럼 내일 학교에서 보는 게 어때요?

캐서린: 아, 정말요? 몇 시에 만날까요?

태범: 12시쯤에 만나죠. 같이 점심 먹고 가죠.

태범은 이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사실 남들은 주말은 쉬는 날이겠지만 태범에게는 일주일이면 일주일 모두 공부를 해야 하는 날이었다.

그래도 하루쯤이야 괜찮겠다는 자기합리화에 태범은 약속을 잡았다.

* * *

일요일 주말, 감독 실장님에게는 할아버지 댁에서 가족 모임이 있다고 거짓말을 하고 오늘 집에서 공부하기로 했다.

물론 시험을 위해서라면 준비하는 동안에는 가족과 친구 그리고 여가생활까지 모두 포기해야 된다는 감독실장의 충고가 있었다.

공부만 해도 모자를 판에 할 것 다하고 공부를 한다며 태범을 나무라기도 했다. 하지만 태범의 거짓된 간절함에 실장은 백기를 들고 말았다.

‘멋지다.’

태범은 간단하게 청바지에 검은색의 단색 맨투맨 티셔츠를 입고 신발장 거울 앞에 섰다.

키는 180에 나름 몸매도 잘빠졌다고 생각한 태범은 옷맵시를 정리하며 자기도취에 빠져있었다.

그렇게 옷맵시를 정리한 뒤 태범은 문밖을 나섰다.

혹시나 고시반 사람들이 자기를 알아볼까, 주변의 동태를 살피며 천천히 발길을 옮겼다.

원래는 친할아버지 댁인 대전에 있어야 하지만 이곳에서 자칫 얼굴을 보였다가는 뒷일은 끔찍한 결과가 될 테니 말이다.

태범은 약속대로 학교 정문 앞 버스정류장에서 캐서린을 기다리고 있었다.

“안뇽하세요.”

저 멀리서 다가오는 캐서린, 그녀는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하는데 태범은 저절로 웃음이 나왔다

“네, 안녕하세요”

헉!

한국 문화와 서양 문화의 차이점을 보여주는 듯 캐서린은 목이 파인 티셔츠에 가슴선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인 입장에서 가슴 파인 옷이 야해 보이지만 오히려 서양인 입장에서는 상체보다는 하체를 드러낸 핫팬츠를 야하다고 생각하니 문화차이를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본능적으로 불끈거리는 감정은 참을 수 없었다. 태범은 시선을 어디에 둬야할지 몰라 눈동자를 요리조리 어색하게 굴려댔다.

“학교생활은 할 만해요?”

태범은 괜히 어색한 상황이 나올까 걱정하며 빠르게 질문을 던져 대화를 유도했다.

“네, 한국 사람들은 모두 친절하게 해줘서 불편한 점은 없어요.

“정말요? 다른 나라도 다 비슷하지 않을까요?”

“아니에요. 한국 사람들은 뭐 물어보기만 해도 다 자기 일처럼 도와주던데요. 다른 나라는 안 그래요.”

입에 발린 소리라 할지라도 대한민국을 칭찬해주니 태범은 한국인으로서 괜히 마음이 뿌듯해졌다.

“점심 식사 아직 안 했죠?”

“네.”

“그럼 식사 먼저 하죠. 이 근처 말고 다른 곳에 제가 맛집 아는데 그쪽으로 가죠.”

“좋아요!”

혹시 고시반 사람을 만날까 태범은 캐서린을 이끌고 학교 밖 식당으로 발걸음을 옮겼다.

“매운 거 잘 먹어요?”

“원래는 못 먹었는데 한국에 있다 보니까 잘 먹게 되더라고요. 가끔은 매운 볶음면도 먹는걸요.”

“오, 다행이네요.”

태범이 이끈 식당은 학교에서 조금 떨어진 닭갈비집이었다.

가끔 가족들과 외식을 할 때 오곤 했는데 춘천에 있는 유명 닭갈비집 못지않게 맛이 좋아 찾아오게 된 것이다.

여자를 만나니 나름 분위기 있는 식사를 해볼까 생각도 했지만, 외국에서 온 여성에게 한국의 맛을 보여주고 싶은 마음이었다.

“여기 닭갈비 2인분이랑 콜라 한 개 주세요.”

메뉴판 볼 것도 없이 태범은 들어오자마자 주문부터 했다.

닭고기라 하면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누구나 좋아하는 음식이니 분명 캐서린도 좋아할 거라 믿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학과를 안 물어봤네요? 무슨 공부 하고 계세요?”

“전 영국에서 컴퓨터 공학 전공했고 여기서도 같은 학과로 들어오긴 했는데 요즘은 한국어 공부 절반, 컴퓨터 공부 절반 이렇게 하고 있어요. 태범 씨는 영어 영문학?”

캐서린은 유창한 영어 실력의 태범이 대학에서 영어를 전공하고 있을 거라 생각했다. 그렇지 않고는 외국경험이 없는 사람이 이렇게 영국식 발음으로 영어를 할 일은 없을 테니 말이다.

“아니요. 전 회계학과 전공하고 있는데요.”

“네? 영어 영문학이 아니고요?”

“영어는 그냥 살기위해 배우고 있는 거고요. 캐서린 씨가 한국말 배우는 것 처럼요”

“아.”

캐서린은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지만 태범의 완벽한 영어 실력에 반신반의하는 마음을 지울 수가 없었다.

“캐서린 씨는 컴퓨터 공학이면 프로그램 만들고 그러시겠네요. 그런 거 보면 항상 멋지다고 생각했거든요.”

학문마다 고충은 있겠지만 태범에게 컴퓨터 공학은 멋지고 뭔가 있어 보이는 학문이었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항상 조명 없는 어두운 방에서 해커들이 비밀스럽게 해킹을 위한 작업을 하고 있다.

컴퓨터 모니터에는 검정색 바탕에 초록색의 숫자와 영어 문자가 가득 차 있고 뭔가를 은밀히 하는데 그게 그렇게 멋져 보였다.

물론 현실과 다르겠지만, 컴퓨터 공학하면 제일 먼저 머릿속에 떠오르는 장면이었다.

“제가 재밌는 거 보여줄까요?”

관심있어하는 태범의 모습에 캐서린은 스마트 폰을 꺼내더니 애플리케이션 한 개를 켰다.

애플리케이션의 이름은 스마트 스타일리스트(SMART STYLIST)였다.

“잠깐 일어서 봐요.”

캐서린은 스마트폰을 들더니 자리에서 일어난 태범의 사진을 찍었다.

“자 봐봐요.”

캐서린이 화면에는 태범의 전체 사진이 있었고, 옷, 바지, 신발과 같은 의류가 선택에 따라 바뀌기 시작했다. 마치 어렸을 적 인형 옷 입히기 게임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게 뭐에요?”

“아. 이거 제가 영국에 있을 때 선배들이랑 같이 만든 건데 의류 판매자들이 자신의 옷이나 액세서리를 이곳에 올리면 사람들이 자신의 사진에 대조할 수 있게 만든 앱이에요.”

“와. 대단하네요.”

사실 별 대단한 앱은 아니었다. 그저 누구나 생각할 법한 어플리케이션이었지만 자랑스럽게 자신의 작품을 소개하는 캐서린을 실망시키긴 싫어 최선을 다해 리액션을 보여주었다.

“어떻게 보면 이때가 한참 프로그래밍에 빠져서 언어공부하고 프로그래밍할 때였거든요. 뭐든 손 만대면 만들 수 있을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쉬운 게 아니더라고요.”

“무슨 언어 공부요?”

캐서린이 이야기를 하던 중 언어라는 한 단어에 태범의 귀가 쫑긋 세워지며 관심을 보였다.

“프로그래밍 언어요. C언어, C++, 자바 아니면 웹문서 만드는 HTML 언어야 다 말하기도 어려울 만큼 많죠.”

태범은 그때서야 잊고 있던 사실을 다시 깨달았다.

폰 노이만은 현대 컴퓨터의 아버지라고 불렸던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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