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8
기말 고사가 끝나고 방학이 찾아온 대학 캠퍼스는 조용했다.
저번 주까지만 해도 학생들의 발걸음으로 가득 찼던 공간인데 이제는 몇몇 동네 주민이 산책 삼아 길을 걷고 있을 뿐이다.
“어! 여기!”
“안녕하세요, 교수님.”
김영석 교수는 경상대 건물 앞 벤치에 앉아 태범을 기다리고 있었다.
태범은 멀리서 교수를 바라봤지만 긴가민가했고 조금 더 다가가서야 얼굴을 알아보고 인사를 건넸다.
태범이 평소 알던 교수의 깔끔한 셔츠차림의 스타일과는 다르게 등산복을 입고 있어 동네 산책하는 아저씨인줄만 알았던 것이다.
“그래 밥 아직 안 먹었지? 식사하면서 이야기할까?”
“네.”
교수는 벤치에서 일어나 태범을 이끌고 식당가로 발걸음을 옮겼다.
“그래, 먹고 싶은 건 있고?”
“전 아무거나 잘 먹습니다.”
“에이. 그러지 말고 먹고 싶은 거 말해봐.”
이럴 때가 항상 예매한 상황이다. 교수님은 저렇게 말하고 있지만,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좋아하는 음식을 아무거나 말할 수는 없었다.
사실 태범은 지금 피자가 당기긴 했는데 차마 입 밖으로 말할 수 없다.
교수의 입맛을 중심으로 자신에 입맛을 맞춰야 하는 아주 절묘한 균형점이 필요했다.
친구들과 밥을 먹으러 갈 때도 서로 메뉴 선택을 떠넘기는 선택 장애를 겪고는 했는데 이는 심지어 교수님과의 식사였다.
태범에게 있어 그 어떤 기말 고사의 시험 문제보다 어려운 문제 결국 고심 끝에 횡단보도 앞 가게를 가리켰다.
“아귀찜 어떠세요?”
“오. 저기 맛있지. 태범이가 맛 집을 잘 아네.”
교수는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태범을 선택에 엄지손가락을 치켜세웠다. 다행이다.
“그래, 부모님한테는 말씀드렸고?”
“네, 두 분 다 찬성하셨어요.”
“다행이네. 회계사 준비한다고 반대하는 부모님 많거든. 태범이 부모님은 적극적으로 밀어주나 본데?”
자리에 앉아 식사를 주문하고 본격적으로 대화를 나눴다.
교수는 먼저 부모님의 동의 의사를 물어보았다. 스스로의 다짐도 중요하지만 가족들의 서포터도 시험공부에 있어서 큰 영향을 끼친다며 교수는 설명했다.
“그래, 회계학에는 원래 관심이 있었어? 아니면 하다 보니 들어 온 거?”
“뭐, 그냥 관심은 조금 있었는데. 마침 수능 점수도 맞고 해서 들어왔어요.”
사실 이는 태범의 거짓말이었다.
고등학생 때까지만 해도 회계라는 단어조차 모르는 상태였다. 그저 교회 가서 ‘회개’하는 그 회개인가라고 생각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하지만 괜히 이 말을 꺼냈다간 별 의지 없는 놈으로 보일까 살짝 거짓말을 보탠 것이다.
“맛있게 드세요.”
커다란 접시에 아귀찜이 나왔고 교수와 태범은 식사를 시작했다.
식사 중에도 교수의 질문은 마구 쏟아졌다. 밥을 먹는 건지 질문을 먹고 있는 건지 모를 정도로 태범은 씹어 먹으랴 말하랴 입이 고생이었다.
“일단 회계사 합격하면 취직은 걱정할 필요가 없어. 어떤 기업이든 돈 관리 하는 사람은 필요하거든. 그중의 최고가 바로 공인회계사지.”
“네.”
“보통 처음에는 회계법인에 들어가서 일을 할 텐데 거기서 열심히 해서 회계법인 파트너라도 되면 수억대 연봉은 간단하지. 꼭 회계법인이 아니더라도 일반 기업의 재무 업무로 들어가도 회계사라는 타이틀만 있으면 괜찮은 직책으로 들어가니 이보다 좋은 게 없지.”
“그리고…….”
교수는 회계사에 대한 장점만 늘어놓고 있었다.
심지어 태범의 눈에는 교수가 영업사원으로 비치기도 했다. 마치 보험 상품을 깔아놓고 판매 영업을 하는 것 마냥 좋은 점만 말하니 말이다.
“우리 학교 선배들이 많이 회계사로 진출해 있어서 라인타기에 좋을 거다. 그리고…….”
‘교수님…… 그만.’
김영석 교수는 투 머치 토커 (Too much talker)였다.
수업을 들을 땐 몰랐지만 개인적으로 만나니 얼마나 말이 많은지 태범은 귓구멍을 막고 싶은 심정이었다.
더 이상 교수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오지 않고 그저 고개만 끄덕이며 속으로 스탑!(STOP)을 외칠 뿐이었다.
결국 교수가 말하고자 하는 건 단 한 가지였다.
‘공인회계사 합격하면 좋으니 열심히 해라.’
* * *
대학 내 종합관 건물 모퉁이에 2개 층을 쓰고 있는 고시반은 공인회계사(CPA) 뿐만 아니라 7급 공무원, 5급 공채, 언론 고시, 노무사, 변리사 등 각종 시험을 위한 반으로 구성돼있었다.
거의 200명이 이곳에서 공부하고 있으며 대학 내 시험 합격자를 생산해내는 공장이라고 볼 수도 있었다.
교수의 안내에 따라 태범은 고시반의 내부를 둘러보고 있었다.
건물이 얼마나 조용한지 지나던 쥐가 찍소리 한번을 내면 들릴 정도였다.
건물 안은 열람실, 샤워실, 휴게실, 스터디실까지 공부를 위한 제반시설들이 꼼꼼하게 갖춰져 있었다.
회계사반의 방에 들어가니 큰 테이블 한 개와 컴퓨터 한 대가 놓여있는 작은 공간이었다. 그리고 그곳에는 고시반의 감독 실장 유혜경이 앉아있었다.
40대로 보이는 아줌마, 딱 봐도 고상한 학교 선생 느낌의 차분하고 냉철해 보이는 이미지였다.
“이번에 고시반애 들어올 학생?”
“안녕하세요. 회계학과 강태범이라고 합니다.”
감독실장은 10년 동안 고시반을 지도하면서 수많은 합격자들을 지도한 사람이었다.
대한민국 시험에 관해서 모를 게 없을 정도로 지식이 해박했고 나름 직업에 대해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태범을 데리고 온 김영석 교수는 일이 있다며 먼저 자리를 벗어났고 태범은 감독 실장과의 상담이 시작됐다.
가장먼저 회계사 시험 과목에 대해 설명을 해주는데 1차에 경영학, 경제원론, 상법, 세법개론, 회계학 그리고 2차에 세법, 재무 관리, 회계 감사, 원가 회계, 재무 회계로 과목만 총 10과목이었다.
“시험은 짧고 굵게 빠져야 해. 알지? 특히나 고시와 같은 어려운 시험은 말이야. 괜히 한번 잘못 빠졌다가 세월을 버릴 수 있어요. 그러니까 각오를 해야 된다는 말이지.”
감독 실장은 10가지 과목에 대해서 격양된 어투로 설명하며 열심히 할 각오를 하라는 듯 태범의 눈을 강하게 쳐다보고 있었다.
“예전에 학교에 전설로 통하는 학생 한 명이 있었는데 사법 고시 준비만 20년을 했던 사람이 있거든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어린아이 때부터 검사, 판사에 꿈을 가지고 있었지. 근데 눈 한번 깜빡이니 이마에 주름이 자글거리고 이미 머리에 피는 다 말라 비틀어졌네?”
감독 실장은 지금이라도 자신이 없다면 포기하라는 의미로 이야기를 통해 간접적으로 말하고 있었다. 물론 이야기의 진위 여부는 미궁 속에 있지만 말이다.
긍정적인 말만 해줬던 김영석 교수와는 다르게 감독 실장은 현실적인 사정을 말해 주며 태범에게 겁을 잔뜩 주고 있었다.
태범이 역시 실장의 말에 한껏 진지한 표정을 취하고 있었으나, 속으로는 폭소를 내뱉고 있었다.
태범은 과목 10개가 아니라 100개라도 모두 풀어버릴 자신감을 가지고 있던 것이다.
* * *
고시반은 모든 공부를 가르치거나 수업을 하는 그런 곳은 아니었다.
그저 계획을 세워주고 피드백이나 선후배 간의 공부 비법 같은 걸 공유하는 곳이었고, 공부는 순전히 모두 자신의 몫이었다.
감독 실장은 방학동안 기초 종합반 학원을 다닐 걸 권유했지만 태범은 이를 거절했고 인터넷 강의를 통해 단과를 듣기로 결정했다.
학교 수업과 토익 학원을 다녀보면서 깨달았지만 암기 속도가 수업 속도를 초월하는 바람에 시간만 낭비하는 격이 되었다.
차라리 인터넷 강의를 통해 빠르게 암기해 버리자는 게 태범의 생각이었다.
물론 응용을 하기 위해서 이해도 해야 했지만 일단 이론을 암기하므로 기본을 깔고 가면 이해하는 건 수월할 거라 생각했다.
[강태범 님의 소유 능력]
[폰 노이만 능력]
-암기력(53%)
-수리 이해력(23%)
-언어 이해력(30%)
태범은 아침부터 일찍 학교 고시반으로 갔고 스마트 폰으로 인터넷 강의를 켠 뒤 공부를 시작했다.
“어! 태범이?”
태범의 학과 동기인 김현찬은 1학기 때부터 고시반에 들어와 회계사 공부를 하던 친구였다.
현찬이 역시 공부하러 고시반에 나왔는데 태범과 닮은 뒷모습을 보고는 다가갔다.
‘태범이 맞나?’
이곳은 작은 기침 소리에도 민감한 사람들이 모인 곳이었다. 괜히 잘못 건드렸다가는 애꿎은 사람 공부를 방해할 수도 있기에 천천히 다가가 모습을 살펴봤다.
태연하게 옆자리에 앉는 척 매소드 연기를 뽐내며 얼굴을 확인하려 했지만 책상에는 칸막이가 쳐진 데다가 얼굴을 너무 파묻고 있어 확인이 힘들었다.
‘분명 태범이 맞는 것 같은데.’
한동안 옆자리의 태범의 모습을 관찰하던 현찬은 드디어 고개를 든 태범의 얼굴을 확인했다.
하지만 반가움도 잠시 태범의 행동에 놀라워할 수밖에 없었다.
‘쟤 뭐 하는 거지.’
태범이 보고 있는 아이패드 속 인터넷 강의 영상은 두 배 속으로 빠르게 움직이고 있었고 태범의 손은 낙서라도 하듯 책에 빠르게 밑줄을 치고 있었다.
공부라기보다는 행위 예술에 가까운 행동에 현찬은 태범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조용히 이름을 불렀다.
“야, 강태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