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5
“안녕하세요.”
태범과 희준에게 다가온 백인 여성은 가지런한 하얀 치아를 들어내며 환하게 미소를 띠었다. 그러곤 어눌한 한국말로 인사를 건네고 있다.
“길 좀 물어도 될까요?”
“네, 네 물론요.”
인사를 하고는 영어로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여자는 길을 물어보았고 태범과 희준은 미소로 응대했다.
미소가 저절로 나올 수밖에 없는 게 굉장한 바스트가 눈앞에 보이니 뇌 속의 엔도르핀이 감동을 주고 있었다.
“미술 교육관을 가려고 하는데 어떻게 가나요? 여기서 가깝다고 들었는데.”
“직진해서 오른쪽 그리고 왼쪽.”
where로 시작하는 영어는 기초 단어였기에 여성이 말하는 말을 쉽게 이해할 수 있었다.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는 희준은 기회를 놓칠세라 짧은 영어 단어와 온갖 손짓으로 길을 알려주기 시작했다.
“아, 그…… 중간 계단.”
하지만 영어 영문학과인 희준이는 전형적인 대한민국의 영어 교육을 받아온 학생이었기에 회화에는 능숙하지 않았다. 특히 이런 돌발적인 상황을 더더욱 말이다.
‘잠깐? 영어로 도와주면, 내 능력으로 남을 도와주는 거잖아.’
그저 지켜만 보고 있던 태범의 머리에서 번뜩 해야 될 일이 떠올랐다.
드디어 태범의 능력을 통해 도움을 받을 사람이 나타난 것이다. 아침부터 눈에 불을 키고 찾아다녔는데 결국 나타났다. 스캔의 진행률이 왜 상승했는지 확인해볼 수 있는 중요한 실험이었다.
태범은 입을 떼기 시작했다.
“말로 설명하면 헷갈릴 수 있으니, 저 따라오세요. 직접 안내해드릴게요.”
“아, 정말요? 감사합니다.”
완벽한 영국식 발음이었다. 영화배우 베네딕트 컴버배치와 흡사한 수준의 영국 발음이 태범의 혀에서 나오고 있었다.
“영국인 맞으시죠?”
“네, 어떻게 아셨어요?”
“발음 들어보면 뻔하죠.”
태범은 외국인 여성이 영국인이라는 걸 단박에 맞췄다. 토익을 공부하는 사람들이라면 미국, 영국, 호주 발음쯤이야 쉽게 구별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태범은 여성보다 살짝 앞에 서서 대화를 나누며 길을 직접 안내해주기 시작했다.
“영국에서 사셨나 봐요?”
“아니요. 전 해외 나가본 적 한 번도 없는데요.”
“와. 근데 발음이 어쩜 그래요.”
영국 여성은 태범의 발음에 놀라워하고 있었다. 영국 특유의 자음, 모음에 대한 강한 발음이 정확히 태범에게서 나온 것이다.
하지만 더 놀라워하고 있는 사람은 희준이었다.
초중고대, 인생 절반을 같이한 불알친구인데 갑자기 자유자재로 내뱉은 영국식 영어에 다른 사람을 보는 줄만 알았다.
“야…… 너, 뭐야?”
“뭐가?”
희준은 그런 태범에게 물었지만 태범은 당연 하다는 듯 표정을 지으며 갈 길을 걸었다.
“이 학교 다니는 학생이에요?”
“네, 교환 학생으로 왔어요. 제가 K-POP을 좋아해서요. 한국에 관심이 생기더라고요.”
“요즘 K-POP 많이 좋아하긴 하죠. 근데 영국이 가수로 유명한 사람들이 더 많잖아요. 비틀즈며 오아시스에 아델까지…… 전 영국 가수 좋아하거든요.”
“호호, 그럼 서로 문화 교류가 된 셈이네요?”
말이 전혀 막힘없이 진행되었고 영국 여성은 고향 친구라도 만난 듯 어느새 태범에게 고향의 향수를 느끼고 있었다.
“그럼 한국어는 할 줄 아시고요?”
“그냥 인사랑 간단한 말 정도만 할 줄만 알아요.”
“아까 저희한테 인사하실 때 보니 한국어 발음 잘하시던데.”
“헤헤, 아니에요.”
대화를 나누던 중 어느새 여성이 찾고 있던 미술 교육관 앞에 도착했다.
“고마워요. 감사합니다.”
영국 여성은 두 손은 곱게 모으고 90도로 허리를 굽히며 한국어로 감사의 인사를 건넸다.
“아니, 그렇게까지 인사할 필요는 없어요. 그냥 허리만 살짝 숙이시면 돼요.”
여성의 과도한 인사에 태범은 부담스러워하며 손사래를 쳤다. 아마 어디서 본건 있어서 90도 인사가 한국식 인사로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네? TV에서 보면 한국 연예인들은 다 이렇게 인사하던데.”
“아휴. 평소에 그러면 너무 부담스러워요. 그냥 조금만 숙이시면 돼요.”
“아하.”
“그럼 가볼게요.”
태범은 간단히 인사를 하고 등을 돌린 뒤 집 방향으로 발걸음을 이동하려 했다.
“저기요.”
“네?”
영국 여성은 등 돌려 이동하려는 태범을 불러 세웠다. 옆에 있던 희준도 고개를 돌리고 둘의 이상한 기류를 파악하고 있었다.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으세요? 제가 한국에 아는 친구들이 얼마 없어서…….”
태범은 겉으로는 아무런치 않은 척 무표정이었지만 속으로는 쾌재를 불렀다.
“알겠습니다. 폰 주세요.”
태범은 영국 여성의 핸드폰에 자신의 번호를 입력했다. 그러곤 자신의 핸드폰을 내밀며 여성의 번호를 받았다.
“그럼 다음에 봬요. 연락하세요.”
태범은 평소에도 이런 일 많이 겪어본 것처럼 여유 있는 표정으로 인사를 한 뒤 자리를 떠났다. 하지만 겉과 다르게 심장은 이미 미치도록 뛰고 있었다.
퍽.
“야. 무슨 말을 했기에 여자가 너한테 번호를 주냐. 그것도 외국 여자가.”
희준은 못 볼 거라도 본 듯 눈이 휘둥그레져있었다. 그러곤 태범의 팔을 툭 치더니 상황 설명을 요구하고 있다.
“그냥 한국에 왜 왔냐, 어느 나라 사람이냐 그런 거 물어봤지.”
“근데 번호를 너한테 왜 주냐고.”
“뭐 내가 마음에 드나 보지.”
“미친.”
그 여느 때와 다르게 자신감을 내비치고 있는 태범의 모습에 희준은 역겨운 나머지 짧은 욕설을 내뱉었다.
“아니, 그건 그렇다 쳐. 근데 너 영어 왜 이렇게 잘해? 내가 알던 태범이가 맞냐?”
희준은 이제야 정신을 차리고 여자 이야기에서 영어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방금 전 모습은 자신의 불알친구가 아닌 낯선 사람의 모습이 보였기 때문이다.
“평소에 영어 공부 해왔지. 요즘 취업하려면 영어는 필수잖아?”
“아니, 그래도 너 방금은 완전 외국 사람이었어.”
희준은 목소리를 높이며 태범을 우주에서 온 외계인 취급을 하고 있었다. 믿을 수 없는 그런 존재가 돼버린 것이다.
“그냥 많이 듣고 내뱉다 보면 그렇게 할 수 있어.”
사실 태범도 스스로의 언어 능력에 대해 놀라워하고 있었다. 아직 뇌의 필터를 거쳐야 하지만 거의 원어민 수준으로 말이 나오니 스스로에게 신기함을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최대한 태연한 척 희준에게 설명했다.
“야…… 씨. 너 생각보다 공부 많이 했구나.”
희준은 태범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줄만 알았는데, 이제 보니 완전 다른 친구라는 걸 깨달았다. 심지어 자신이 진짜 친구가 맞았나 싶을 정도로 지금까지의 우정에 회의감이 들기까지 했다.
* * *
집에 돌아온 태범은 12시가 되고 내일이 되기만을 기다렸다.
오늘 실험한 결과를 확인해야만 했다.
과연 스캔 진행률이 남을 돕는 데서 상승하는지 확인할 때가 온 것이다.
12시를 기다리며 태범은 다음 주부터 있을 시험 공부를 했다.
그리고 어느새 해가 기울고 12시가 다가오고 있었다.
12시가 되기 1분 전 태범은 능수능란하게 방문을 잠그고 이불을 덮어 썼다. 혹시나 저번처럼 엄마나 동생이 갑작스러운 방문을 할지 몰라 만반의 준비를 한 것이다.
12시가 되자 스캐너를 작동시켰다. 그리고 재빨리 자신과 함께 스캐너를 이불로 감쌌다. 밤마다 들리는 요란한 스캐너 소리를 차단하기 위한 방법이었다.
[스캔할 능력을 선택해주세요]
[폰 노이만 능력]
-암기력(40%)
-암산능력(0%)
-수리 이해력(0%)
-언어 이해력(23%)
태범은 언어 이해력을 선택했다.
[암기력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23%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25% 진행되었습니다.]
[강태범 님의 소유 능력]
[폰 노이만 능력]
-암기력(40%)
-언어 이해력(25%)
“X…… 발”
마지막 언어 이해력을 올렸을 때 5%의 진행률을 보였는데 이번에는 더 떨어진 2%밖에 오르지 않았다. 태범의 이번 실험은 실패로 돌아간 듯 보였다. 아무래도 남을 돕는 거랑은 상관이 없어 보인다.
결국 오늘의 봉사는 모두 헛수고였다. 물론 가슴 큰 외국 여성의 핸드폰 번호라는 귀중한 것을 얻었긴 했지만 말이다.
이제 남은 추측은 한 가지였다.
다른 능력을 올리면 시너지 효과를 받고 스캔 진행률이 상승한다. 설마 이것도 아니면 뭐도 아닌 그저 운빨이라고 생각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것만은 아니길.’
이번 주말 태범은 나머지 한 가지 추측을 확인해볼 생각이었다.
어차피 다음 주부터 시험이었고 폰 노이만의 수리 이해력도 궁금해지는 찰나였다. 태범은 겸사겸사 한다는 마음으로 다음을 기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