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4
어느 순간 벼랑 끝처럼 떨어지던 진행률이 다시 반등을 보였으니, 태범은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태범 역시 사람인지라 능력을 빠르게 채우고 싶은 욕심이 가득 했고 어떻게 하면 이 스캐너를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까 많을 고민을 했었다.
‘다른 능력하고 같이 올리면 스캔 진행률이 상승하는 건가?’
‘혹시, 능력으로 사람을 도와주면? 맞아! 내 암기력 때문에 아이를 다치게 한 범인을 잡긴 했지.’
‘아니면, 칭찬을 받았을 때?’
‘아니지, 스캐너가 눈이 달린 것도 아니고 내가 뭘 하는지 어떻게 알아?’
‘그냥 지 맘대로 인가.’
태범은 컴퓨터에서 메모장을 켜 가능성을 하나하나 적어갔다.
설명에 야박한 스캐너 때문에 사용법과 법칙에 대해서는 태범 스스로 알아가야만 했다.
‘일단 이 두 가지가 진행률을 높일 확률이 많아.’
손으로 턱을 괴며 천천히 생각을 하던 태범은 가능성이 높은 방법을 추측해갔다.
태범이 생각 두 가지는 이러했다.
남에게 능력을 통해 기여를 했을 때 혹은 다른 능력들을 같이 올렸을 때, 아무리 생각해도 이 두 가지 중에 스캔의 진행률을 올리는 방법이 있는 것 같았다.
‘실험해보면 되지.’
덜컥.
태범이 고민을 마치고 메모장을 닫으려는 찰나, 방문이 벌컥 열리며 동생 태인이 들어왔다.
“형, 여기 내 이어폰 있어?”
“아, X발. 깜짝이야.”
동생의 갑작스러운 등장에 태범은 심장이 내려앉는 줄만 알았다. 너무 놀란 나머지 입에서 욕설이 튀어 나와 버렸다.
“허, 왜 그렇게 놀라?”
태범이 놀라자 태인은 코웃음을 한 번 치더니 옅은 미소를 지으며 물었다.
“아니, 노크 좀 하고 들어와. 진짜.”
“웬 갑자기 노크?”
태범은 아무도 모르게 숨겨놓은 귀중한 보물단지를 들킨 듯 심장이 쿵쾅거리고 있었다.
태인은 그런 형의 태도에 어이가 없다는 표정이었다.
평소 노크를 하거나, 서로의 프라이버시를 지키는 스타일의 집 분위기가 아니었기에 형의 모습에 태인이 어이없어 하는 건 당연했다.
‘혹시?’
태인은 혹시 남자의 비밀 시간인가 싶어 태범의 등 뒤에 있는 모니터를 흘겨봤다.
그걸 본 태범은 잽싸게 메모장을 닫고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표정을 유지하고 있다.
“크흠. 알겠어.”
방금까지 어이없어하던 태인의 표정이 지금은 부처상을 보는 듯 인자해진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리고 모든 걸 알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방을 나섰다.
“휴.”
태범은 안도의 한숨을 깊게 내쉬며 컴퓨터를 완전히 꺼버렸다.
태범은 혹시나 메모장에 적어 놓은 스캐너에 대한 내용을 걸릴까 조마조마 했던 것이다.
능력을 주는 스캐너에 대한 사실은 아직 가족에게도 알리고 싶지 않은 비밀이었다.
부모님과 주변 사람들이 자신에게 잔뜩 기대하고 있는 상황에 스스로의 힘이 아닌, 도구의 도움을 받았다는 건 자기 가치를 그만큼 깎아 내리는 것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특별한 일이 생기지 않는 이상, 스캐너를 공개하고 싶지는 않았다.
* * *
‘도와줄 사람 어디 없나?’
학교에 나서는 태범은 눈을 부릅뜨고 주변을 살폈다.
스캐너의 진행률이 왜 갑자기 올라갔는지 확인하기 위해서 능력을 통해 도움을 받을 대상을 찾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찾아봐도 주변에는 도움이 필요한 사람이 없어 보였다. 사람들은 다들 자기 갈 길 열심히 걷고 있을 뿐이었다.
그렇다고 흥부와 놀부에서 놀부처럼 제비의 다리를 부러트리고 다시 고쳐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어! 할머니 제가 도와드릴까요?”
“아니야. 됐어.”
드디어 발견!
학교로 올라가는 언덕에서 할머니 한 분이 폐지가 담긴 수레를 끌며 걷고 있었다.
학교 근처에서 자주 보이는 할머니였다.
근처 상가나 학교에서 나오는 폐지를 줍곤 하셨는데 1학년 때부터 봤으니 아마 이곳에서 꽤나 일을 하신 모양이었다.
태범은 이때다 싶어 능글맞은 미소를 보이며 수레의 뒤를 밀어주었다.
“학생, 됐다니까. 이 정도면 나 혼자도 가뿐해!”
“에이, 그래도 제가 밀어드리면 편하잖아요.”
“아니, 학생 공부하기도 힘들 텐데 됐어. 그만하고 가봐.”
할머니의 사양에도 불구하고 태범이 계속 수레를 밀자, 할머니는 수레를 강하게 앞으로 밀며 질주하기 시작했다. 수레에서 벗어난 태범의 손은 괜히 민망해졌다.
사실 수레에는 폐지가 얼마 있지도 않았다. 그저 태범은 도움을 줘야한다는 촉박한 마음에 수레를 민 것인데 생각보다 할머니는 너무나도 건장하셨던 것이다.
“봤지? 나 아직 건강해. 학생은 그냥 볼일 보러 가. 마음만 받을 게.”
태범은 괜히 민망해져 죄송하다는 말과 함께 다시 갈 길을 걸었다.
* * *
오늘 금요일 수업은 교양 과목 수업 한 과목밖에 없었다.
그것도 ‘결혼과 가족의 이해’라는 수업이었는데 남녀 간의 이해관계나 결혼 후 가족관계 등 학습에 그다지 중요치 않은 수업이라 가볍게 들을 수 있었다.
오전에 모든 수업을 마친 태범은 갑자기 연락 온 불알친구인 이희준과 점심식사를 같이 하기로 했다.
희준은 초등학교 때부터 시작해 우연치 않게 초, 중, 고, 대학교까지 모두 같은 학교를 다니게 된 친구였다. 태범은 회계학과, 희준은 영어 영문학과로 학과는 다르지만 가끔 만나서 식사나 술을 하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이였다.
“난 치즈 돈가스”
“난 피자 돈가스.”
“여기 치즈 돈가스랑 피자 돈가스요!”
학생들에게 가장 무난한 점심 메뉴는 돈가스였다. 특히 여학생들은 파스타라면 남학생들에게는 돈가스만한 메뉴가 없었다.
태범과 희준은 학교 근처 돈가스 집에 들어가 각자 입맛에 맞는 돈가스를 주문했다.
둘은 나름 교양 있는 척 하며 칼로 돈가스를 썰어 먹으며 이야기를 나눴다.
“너, 요즘 공부 빡세게 한다며?”
“아니, 그다지 열심히 하는 건 아닌데, 누가 그래?”
“은지가 그러던데?
“은지가 누군데?”
“몰라? 너희 학과에 16학번에 여자애”
“내가 어떻게 알아.”
사람들은 겉으로는 의식 안하는 척 하면서 속으로는 온갖 의식을 하는 법이었다.
태범은 자기도 모르는 학과의 여자가 희준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야. 네 뒤에.”
말을 하다 희준은 갑자기 눈알을 돌리며 태범의 뒤를 가리켰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희준의 시선에 따라 태범도 고개를 돌려 바라봤다.
“어때? 예쁘지.”
또다시 예쁜 여자 레이더가 발동됐다.
희준은 여자 친구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예쁜 여자라면 사족을 못 쓰곤 했다.
바람피우다가 여러 번 큰코다치기도 하던 친구였는데 아직 그 버릇 못 고친 듯 보였다.
그래도 항상 여자 친구는 끊임없이 있던 친구였다. 지금 와서 보니 그의 카사노바 기질역시 바꿀 수 없는 재능이라 생각이 들 뿐이었다.
“아. 여친만 없었으면 번호 따는 건데.”
희준은 아쉬움과 함께 식사를 마무리하며 태범과 밖으로 나왔다.
“너, 아저씨 다 됐네. 하하”
“지랄하지 마.”
희준은 아저씨의 필수품이라는 이쑤시개를 이에 물고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태범은 웃음이 빵 터지고 말았다.
“야, 저기, 저기.”
희준은 태범의 비웃음에 전혀 표정 변화 없이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친구의 반응 없는 태도에 시시해져 태범도 웃음을 멈추고 희준이 바라보는 곳을 보았다.
“가슴 봐, 죽인다.”
희준에 레이더에 또 다른 여성이 걸렸다. 저 멀리 서 있는 한 명의 백인여성, 아마도 교환 학생쯤으로 보이는데 주위를 두리번거리는 걸보니 길을 헤매고 있는 것 같았다.
“어! 우리한테 오는 거 같은데?”
백인여성은 자기를 바라보는 태범과 눈이 마주쳤고 태범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