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1
900점이라니 상담 선생이 영업을 하려고 일부러 기분 좋게 하려는 건가 태범은 의심의 눈초리로 선생을 바라보고 있었다.
“여기보세요. 6문제 빼고 다 맞추셨어요.”
“네?”
모니터에는 방금 태범이 체크했던 답안지와 함께 틀린 문제와 개수가 나타났다.
50문제 중에 6문제 이는 800점대 중 후반의 점수를 말하는 것이었다.
‘운이 좋았나?’
원래 토익의 200문제가 아닌, 간추린 테스트로 50문제이니 충분히 운이 좋아 답안이 잘 찍힌 것일 수도 있다.
‘혹시?’
그저 운으로 치부하려 했지만 그것도 잠시 학원에 오기 전 스캔했던 능력이 떠올랐다.
언어 이해력 혹시나 이 능력이 영향을 끼쳤을지도 모른다. 태범은 그저 평소처럼 자연스럽게 문제를 풀었지만 알게 모르게 능력에 영향을 받았을 거라 생각했다.
“어떻게 하실래요? 800점 반 들어가실래요?”
“힘들지 않을까요?”
“아뇨, 거기에 800~900점대 사람들이 주로 오거든요. 학생한테 적합한 수업일 거예요.”
태범은 잠깐 말을 멈추고 고민을 했다.
800점 반은 이미 토익에 대해 많이 안다는 가정 하에 듣는 수업이었다. 하지만 오직 암기력만 가지고 단어만 많이 알고 있는 태범으로서 수업이 진행이 될까 고민이 들었다.
“그럼 더 고민하시고 말씀해주실래요? 제가 지금 다른 학생을 봐야 돼서…….”
“아뇨, 800점 수업 듣겠습니다.”
“아 그러실래요? 등록은 바로 하실 거죠?”
“네!”
태범은 잠시 고민을 하다가 밖으로 나가려는 선생을 보고는 바로 결단을 내렸다. 이해가 안 되면 그까지 것 깡그리 외워버리겠다는 마음이었다.
그렇게 태범은 거금 35만원을 지급하며 다음 주 월요일부터 시작하는 800점 한 달 집중반을 수강하기로 결정했다.
* * *
[암기력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31%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32% 진행되었습니다.]
“뜨아!”
학교 가기 전 아침 태범은 암기력을 클릭해 스캔을 했다.
하지만 한 번의 스캔으로 진행률은 1%밖에 오르지 않았다. 점점 진행속도가 늦어지더니 심지어 이제는 1%밖에 진행이 되질 않다니 태범은 인상을 쓰며 답답함을 표현했다.
“태범아, 우산 가져가!”
“왜?”
“아까 TV 보니까 오늘 비 온 다더라.”
태범이 가방을 메고 집 밖을 나서려하자, 어머니는 신발장 옆에 우산을 빼어 태범에게 건넸다.
“비 안 올 거 같은데.”
“에이! 그래도 혹시 모르니까 가져가.”
창밖을 보니 아침 햇볕이 내리쬐고 있었다. 전혀 비가 올 거라고 느껴지지 않아 태범은 그냥 나가려 하지만 어머니는 기어코 태범에게 우산을 쥐어주었다.
기다란 장대 우산을 들고 다니기 귀찮아 가져가고 싶지는 않지만, 어머니가 꼭 가져라가는 눈빛으로 쳐다보니 어쩔 수 없이 들고 나왔다.
“딱 봐도 비 안 올 것 같구만…….”
기상청이 하루 이틀 거짓말을 했을까. 태범은 기상 예보를 거의 믿지 않았다. 비가 온다고 우산을 들고 가면 비가 안 오고 비가 안 온다고 우산을 안 가져가면 비가 오는 신비한 경험을 많이 해봤기 때문이다.
태범은 기다란 장대우산을 바닥에 꼭꼭 찍으며 스캐너와 능력에 대해 생각을 하고 길을 걸었다.
‘하루에 1%면 암기력을 100% 채우려면 68일이 남은 건가?’
‘아니지, 나중에 가면 하루에 1%도 안 오를 수 있지.’
‘일단 기말고사랑 토익을 마스터하고…….’
“어?”
학교까지 절반쯤 왔을까, 하늘에서 머리 위로 물방울이 톡하고 떨어졌다.
어느새 하늘의 먹구름이 햇빛을 가려 주변을 어두침침하게 만들고 있었다.
그리고 정말 어머니의 말대로 얼마 있지 않아 비가 내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몇 방울이 머리 위로 떨어지더니 곧 하늘에서 구멍이라도 뚫린 듯 강한 소나기가 쏟아졌다.
이번에는 어머니의 감이 맞았다. 괜히 우산을 안 들고 와서 아침부터 물에 빠진 생쥐 꼴로 수업을 들을 뻔했다.
‘혹시 엄마도 능력자?’
태범은 이상한 상상을 하며 어머니가 준 우산을 폈다.
“아 뭐야!”
“뛰어!”
갑작스러운 비에 우산을 가지고 있지 않은 길거리의 사람들은 뛰기 시작했다.
태범은 비에서 빨리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 학교로 빨리 가기 위해 큰 도로로 우회하지 않고 지름길인 골목길로 발을 옮겼다.
학생들도 잘 모르는 이 지역 토박이만 아는 지름길이었다. 상가 건물의 주차장을 통해 연결된 골목길로 가는 방법이었다.
퍽.
“으어.”
그렇게 골목길을 걷던 태범에게 뭔가 부딪치는 소리와 함께 짧은 비명소리가 들려 왔다. 태범은 자연스럽게 소리가 나는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어린아이가 바닥에 넘어져 있고 자전거를 탄 한 남자도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심하게 부딪혔는지 뾰로로 우산의 살은 다 휘어져 바닥에 내동댕이쳐져 있었다.
아마도 비를 피해 달리던 자전거가 아이랑 강하게 부딪힌 것 같았다.
“괜찮으세요?”
태범은 넘어져 있는 사람에게 다가가며 물었다.
순간 바닥에 넘어져 있는 남자가 자전거를 일으켜 세우더니 골목길 바깥 방향으로 달아나기 시작했다.
“저기요!”
태범은 손을 뻗으며 남자를 불렀지만 남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도주했다. 쫓아가 보려 했지만 얼마나 빠르게 자전거 페달을 밝는지 뛰어서 붙잡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태범은 자전거를 잠깐 쫓다가 다시 아이가 있는 쪽으로 돌아왔다.
“괜찮아?”
“으앙. 엄마, 엄마 불러줘요.”
아이는 비명 섞인 울음을 내뱉으며 엄마를 찾고 있었다. 주위에 사람이라도 있으면 좋으려만 골목길의 사람이라곤 오직 태범과 아이뿐이었다. 태범은 잠깐 어찌할 줄 몰라 허둥지둥 거리다 아이의 상태를 살폈다.
“애야. 어디 아픈 데 없어? 우리 저쪽으로 가자.”
태범은 비를 피하기 위해 아이를 부축하고 주택 현관문 앞에 앉혔다. 아이가 절뚝거리는 걸 보아 몸에 충격을 받은 듯 보였다.
태범은 먼저 119에 전화를 걸어 구조를 요청했다.
“네, 여기 아이가 자전거에 부딪혔는데요. 우림 시장 사거리 농협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오시면 골목길에 있거든요. 빨리 좀 와주세요.”
태범에게 난생처음인 경험이었다. 일단 구조 요청을 해놨고 아이가 그렇게 찾는 부모에게 연락을 해야만 했다.
“애야. 너 핸드폰 가지고 있어?”
태범의 말에 아이는 팔을 내밀었다. 팔에는 키즈 폰(스마트워치)를 끼고 있었다. 태범은 아이의 팔을 잡고 시계에서 부모의 연락처를 찾기 시작했다.
“아!!”
태범이 팔을 붙잡으니 아이가 고통을 호소했다. 아마도 팔 부분을 다친 듯 보였다.
아이 부모의 연락처를 찾은 태범은 자신의 핸드폰으로 아이 엄마에게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네, 아이가 다쳐서 핸드폰 전화번호부 보고 연락 드렸어요.”
“아이라뇨. 무슨 아이요?”
“아…… 그. 이름은 모르겠는데. 길 가다가 자전거에 부딪혀서 지금 앉아있어요.”
“거기가 어딘데요?”
“여기 우림 시장 사거리 농협 건물 주차장으로 들어오면 골목길 있거든요. 일단 제가 119에 전화해놨어요.”
낯선 남성의 목소리가 들리자 아이 엄마는 보이스피싱으로 생각했는지 경계하는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하지만 전화기를 통해 옆에 있던 아이의 우는 소리가 들리자 화들짝 놀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통화를 했다.
“많이 다친 거예요? 뭐에요!”
“아니, 외관으로 볼 때 크게 다친 거 같지는 않은데 저도 잘 모르겠어요."
“기다리세요. 빨리 갈게요!”
아이의 엄마와 전화를 끊자, 엠블런스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태범은 아이를 진정시키고 구급 대원에게 달려갔다.
“여기요! 여기!”
태범을 본 구급 대원들은 아이가 있는 골목길로 들어왔고 아이의 상태를 살피며 구급차에 실었다.
“희준아!”
그 사이 아이의 어머니도 골목길로 들어섰다.
얼마나 다급했는지 앞치마를 그대로 두른 채, 비를 쫄딱 맞으며 아이에게 뛰어왔다.
“도대체 무슨 일이에요? 많이 다친 거 아니죠?”
“자전거에 부딪혔는데, 얼마나 다친 건지는 저도 잘 모르겠네요.”
“엄마아~ 으앙.”
아이는 엄마의 목소리가 들리자, 몸을 일으켜 세우려했다. 하지만 괜히 움직였다가 상태가 악화될 수 있는 상황. 엄마는 아이를 천천히 달래기 시작했다.
“괜찮아. 괜찮아. 엄마 여기 있어.”
아이는 구급차 침대에 누워있고, 아이의 엄마와 태범도 같이 구급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다.
구급 대원과 아이 엄마는 태범에게 상황에 대해 물어봤고 태범은 자신이 본 모든 상황을 그대로 설명했다.
그렇게 태범은 얼떨떨하게 병원까지 같이 오게 되었다.
학교 수업은 어떻게 되는 건지 잠깐 고민은 했으나 유일한 목격자가 자신뿐이니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지킬 수밖에 없었다.
응급실에 실려 도착하자마자 아이는 각종 검사를 받기 시작했다. 아무리 자전거 사고라 할지라도 골절이나 내부 출혈 같은 큰 부상이 있을 수 있기에 꼼꼼히 검사를 받아야 했다.
“그때 상황 자세히 좀 설명해주세요.”
아이가 검사를 받는 동안 어머니가 경찰에 신고했는지 경찰관이 병원에 찾아왔다. 그러곤 태범에게 현장 상황에 관해 이것저것 물었다.
태범은 그저 목격자였지만 경찰이 다가와 물으니 자신이 범인이라도 된 듯 손에 땀을 쥐며 대답했다.
“그냥 학교에 가고 있었는데 뭐가 부딪치는 소리가 들려서 보니까 자전거랑 아이가 쓰러져 있더라고요. 그래서 가까이 가려고 했더니 자전거 탄 남자가 도망을 가더라고요.”
“그 남자에 대해 기억하는 거 있으세요?”
“음…….”
태범은 자신의 관자놀이를 손에 가져다 대며 사건 당시의 기억을 찾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