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9
일요일 토익 시험 당일.
태범은 아침 일찍 일어나 단어책을 읽고 있었다. 남들은 시험 당일 공부해봤자 결과는 별 차이 안 난다곤 하지만 태범에게는 아침 잠깐 단어책을 보는 것만으로도 수백 개의 단어를 암기할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오늘까지 스캔한 것까지 합해서 태범은 폰 노이만의 암기력이 29% 진행 중에 있었다.
“으음…… 태범이 일찍 일어났네?”
미리 나갈 준비를 하는 태범이가 세안을 하는 소리를 듣고 방에 있던 어머니가 나왔다.
일요일은 항상 온 가족이 늦잠을 자는 날이었지만 태범의 요란스러운 소리가 어머니의 잠을 깨고 만 것이다.
“오늘 토익 시험이라 일찍 일어났어.”
“토익 시험? 엄마한테 말 안 했잖아.”
“뭐. 어차피 자주 보는 시험인데, 대단한 것도 아니고.”
어머니는 아직 잠에서 덜 깨 눈을 찡그린 채로 태범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태범이 시험을 보러 간다는 소리에 듣곤 눈을 번쩍 뜨며 주방으로 걸어갔다.
“에이. 그래도 엄마한테 말했으면 미리 밥이라도 차렸지. 아침밥 먹고 가.”
“아니야. 됐어. 시험 보는 날에는 빈속으로 가야 편해.”
태범은 아침식사를 거절하고 머리를 대충 수건으로 말린 후, 다시 책상 앞에 앉아 책을 펴기 시작했다.
이 모습을 뒤에서 물끄러미 어머니는 흐뭇한 미소를 지으며 주방으로 다시 들어갔다.
태범의 엄마는 요즘 기분이 묘했다.
마치 첫째 아들과 둘째 아들의 입장이 바뀐 기분. 한참 열심히 해야 할 둘째는 요즘 공부와 멀어졌고 첫째는 군대를 다녀오고 철이 들었는지 최근 공부에 빠져있었다.
“이거라도 먹고 가렴.”
어머니는 공부하는 태범의 책상 위에 주스를 올려놓았다.
직접 바나나, 블루베리, 복분자, 꿀, 우유를 갈아 만든 건강 주스였다. 간혹 아버지가 급하게 아침을 나설 때 어머니가 해주던 주스였다.
어머니는 혹시나 방해가 될까 주스를 놓고 조용히 방을 나갔다.
“캬!”
어머니의 성의에 태범은 건강 주스를 한 번에 들이켜고 다시 시선은 책 위로 올라갔다.
그렇게 7시에 일어나서 9시까지 마무리 공부를 한 뒤 가방을 메고 집밖을 나섰다.
집에서 시험장까지는 지하철로 20분 거리 중학교에서 시험을 보게 되었다.
대부분 20~30대 청년들이었지만 어린 학생부터 나이 많은 아저씨까지 많은 나이대의 사람들이 시험을 보기 위해 학교로 들어가고 있었다.
이는 토익이 이미 대한민국 사회에서 필수가 돼버렸다는 걸 의미하는 듯했다.
‘강태범, 강태범, 강태범…….’
태범은 학교 문 앞에 붙어있는 시험 명단에서 자기 이름을 찾아 교실로 들어갔다.
교실 안은 대체로 조용했다. 사람들의 표정에도 별 긴장이 보이지 않았고 편안하게만 느껴졌다. 어차피 토익은 한 달에 한번 볼 수 있는 시험이니 그렇게 중요한 건 아니었다.
태범이 역시 편안한 마음에 책을 펴고 나머지 못 봤던 부분을 외웠다.
얼마 지나지 않아 시험 감독관이 들어오고 시험에 대한 유의사항과 시간을 알리며 시험은 시작되었다.
가장 먼저 영어 듣기(LC) 100문제를 풀어야만 했다. 교실 스피커에는 문제가 흘러나오고 사람들은 숨소리조차 안 들릴 정도로 조용히 스피커 소리에 집중했다.
“He is stacking some plates."
역시 단어 위주로 공부해서 그런지 태범은 영어의 문장을 해석하는데 시간이 걸리긴 했다. 하지만 거의 영단어 마스터가 되어버린 태범은 문장의 단어를 쪼개 하나씩 연결해서 머릿속으로 해석하기 시작했다.
완벽하지는 않아도 대충은 이해가 갔다. 그렇게 문제에 신중히 체크를 해 나가며 영어 듣기(LC)를 마무리 했다.
생각보다 어려울 줄 알았는데 토익 단어가 머릿속에 박혀있는 탓에 생각보다 문장으로 된 영어도 잘 들렸다.
그맇게 듣기를 마무리하고 독해(RC) 문제를 펼쳐 풀기 시작했다.
101번부터 200번까지 총 100문제의 독해 문제는 얼마나 빠르고 정확히 푸는가가 관건이었다.
과거 태범은 항상 시간이 촉박해 200번 문제를 보지 못한 채 문제지를 접고는 했었다. 오늘만은 200번 문제를 보자는 각오로 눈을 열심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헉!’
태범은 너무 기쁜 나머지 소리가 입 밖으로 나올 뻔했다. 독해의 문장을 눈으로 보는 순간 단어 하나, 하나가 머릿속에서 자동으로 해석되어 나타나 보였다.
‘이럴 수가.’
그저 침대에 누워 재밌는 웹소설 한 개 보는 것만 같았다. 영어 지문이 그저 한글처럼 읽혀 나가는 것이 어떤 단어도 태범의 독해를 가로막지 못했다.
체크, 체크, 체크.
문법적인 문제에는 조금 고민이 있었지만 독해 문제는 누워서 떡 먹기보다 쉬웠다. 마치 영어 원어민에게 영어 문제를 풀어 보라도 던져 준 것만 같았다.
태범은 문제를 푸는 줄곧 입 밖으로 터져 나오는 웃음 겨우 막으며 문제를 풀었다. 그리고 결국 200번 문제까지 도달했다.
200번 문제는 이메일, 기사, 보고서로 되어있는 3개의 지문이 섞인 문제였다. 영어가 쉽게 읽히긴 하지만 문제 자체가 꼬여 있어 자칫하면 실수할 수 있는 문제였다.
태범은 신중을 가하며 몇 번이나 확인하고서 답을 체크했다.
모든 문제를 풀고 태범은 미소를 지으며 숙이고 있던 고개를 일으켜 세웠다.
칠판 위에 걸려있는 시계는 1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끝나는 시간인 12시 10분보다 10분 일찍 문제를 끝낸 것이다.
태범은 여유가 넘치다 못해 흐르고 있었고 속으로 노래를 흥얼거렸다. 그러다가 자신이 찍은 정답을 수험표에 옮겨 적기 시작했다.
토익은 시험 정답이 당일 나오는데 가채점을 통해 자신의 점수를 당일에 예측할 수 있었다. 점수가 나오는 2주는 기다리기에는 너무 긴 시간이었다.
그렇게 정답까지 옮겨 적고 고개를 들어 주위를 살폈다.
문제를 다 풀었는지 엎드려 있는 사람도 있고 다급하게 문제지를 넘기며 시계를 바라보는 사람까지 실력에 따라 사람들의 행동이 나눠져 있었다.
“자 시험 끝났습니다. 다들 펜 놓으세요.”
시험이 끝났다는 소리와 함께 시험관은 답안지를 걷기 시작했다. 태범은 기분 좋게 기지개를 활짝 켜며 성공을 확신했다.
문제는 생각보다 쉬웠다.
700점 이상을 기대했지만 확실한 건 700점은 무조건 넘을 수 있다는 것이다. 심지어 잘만하면 800점까지 나올 수 있을 것만 같았다. 태범은 자신만만해진 가슴을 품고 집으로 향했다.
* * *
“토익 시험 보고 왔다며. 시험은 잘 봤어?”
그날 저녁 태범은 오늘 본 토익 시험의 정답이 올라오길 기다리고 있었다. 아버지는 태범이 오랜만에 시험을 보고 왔다는 소식에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방으로 들어 왔다.
“응, 지금 답안 올라오는 거 기다리고 있어.”
“뭐 요즘 애들 대부분 800, 900은 쉽게 맞는다며? 만점인 애들도 많다고 들었는데.”
“누가 그러는데?”
“아니, 태준이도 고등학교 때 900점 받았다고 하던데?”
아버지는 또 태준이 이야기였다. 큰아버지의 셋째 아들, 태범이와 같은 또래의 친척인 태준이는 중학교를 조기 졸업하고 과학고를 거쳐 현재 한국대에 입학한 영재였다.
강 씨 가문의 영광이라며 항상 친척들은 태준이를 띄워주곤 했다.
아버지 역시 다를 바 없었다. 항상 태준이와 비교하고 항상 주변에는 천재들만 있는 건지 친구 아들은 어찌 된 게 모두 명문대에 들어가고 대기업에 취직하는 건지 모르겠다.
가끔은 아버지가 거짓말을 치는 게 아닌가 생각이 들 정도였다.
그래서 언제 부터인가 태범은 아버지랑 성적 이야기를 하는 걸 피하기 시작했었다.
“그건 공부 잘하는 애들이고 800점도 넘으려면 힘들어.”
“에이! 그건 니들이 안 해서 그런 거고. 너 그리고 저번 1학년 때 600점 맞은 거 기억나?”
“680점인데…….”
태범은 쥐 죽은 듯 조용한 소리로 흘려 말했다.
“그게 무슨 자랑이라고. 600점이나 680이나 똑같지.”
물론 아버지 말이 틀린 건 아니었다. 600이나 680이나 사실 한 끗 차이었다. 그저 운이 잘 따라 줬는가의 차이정도 하지만 태범은 그 80점 차이를 무시한 것에 자존심이 끓었다.
“나왔다!”
드디어 정답이 토익 학원 홈페이지에 올라왔다.
유명 토익 사이트에서 제공하는 가채점 시스템을 통해 대략적인 점수를 확인 하는 것이 가능했다.
태범은 수험표 뒤에 적어놓은 자기 정답을 채점 칸에 맞춰서 각 번호에 맞게 입력했다.
“엄마가 그러는데 요즘 열심히 했다며, 점수 얼마나 나오나 보자.”
잘 나올 거라고는 생각하지만 아버지가 옆에서 두 눈 뜨고 기대하며 바라보는 탓에 긴장감은 배가 되었다.
쓱. 쓱.
맞는 건 동그라미, 틀린 건 빗살 표시. 가채점 프로그램은 내가 입력한 정답을 채점하기 시작했다.
그리고 나온 점수 780점.
태범은 기쁜 나머지 주먹을 불끈 쥐고 애써 기쁨의 표현을 참고 있었다. 방에 아무도 없다면 소리라도 지르고 싶었다.
그리고 점수를 보자 아버지가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