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8화 (8/188)

# 8

다음 전공 수업은 ‘원가 회계’였다.

이전 수업과 마찬가지로 수업에 집중하기 위해 가장 앞자리에 앉았다. 태범은 눈이 좋은 편이 아니었기 때문에 멀리에 있는 칠판의 글씨는 잘 보이지 않았고 수업을 제대로 듣기 위해서는 앞에 앉아야만 했다.

하지만 수업을 방해하는 존재가 있었으니 태범은 자신의 뒤에서 사늘한 기운을 느끼고 있었다. 자신이 발표 수업에서 비꼬았던 하연이가 뒤에 앉은 것이다.

그리곤 자기 친구들과 뭔가를 구시렁거리고 있는데 태범은 자신에 관해 이야기 하고 있는 것 같아 기분이 꺼림칙했다.

“자. 부문별 원가 계산까지 배웠지?”

교수가 들어오고 책을 펴는 동시에 수업은 시작됐다.

하연이 뭐라 하던 어차피 자기 인생과 상관없는 여자였다. 태범은 다시 수업에 집중했고 배운 내용을 머릿속에 차곡차곡 집어넣고 있었다.

“상호 배분법은 꼭 써야 할까? 여기에 대해 아는 사람?”

교수가 학생들에게 질문을 건넸다. 학생들이 가장 초조해하는 시간. 다들 교수의 시선을 자연스럽게 피하려 하고 있지만 교수의 눈에는 질문을 받기 싫어 고의로 피하는 학생들의 시선이 모두 보였다.

“태범이 네가 답해봐.”

교수의 입에서 자신의 이름이 나왔을 때 태범은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이 들었다.

발표를 하는 건 아니지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대답을 하는 것도 긴장되는 일이었다.

‘난 스티브 잡스다!’

자신감과 언변 능력으로 성공적인 발표를 했던 태범은 다시 한번 그날을 떠올렸다. 그리고 자신이 스티브잡스의 능력을 갖췄다는 확신과 함께 입을 떼기 시작했다.

“어…… 그…… 상호 배부법과 직접 배부법에 큰 차이가 없을 땐 사용 안 해도 됩니다.”

태범은 빠르게 한 문장으로 대답했다. 빠르게 뛰는 심장이 점점 조여져 죽을 것만 같았다. 얼굴을 새빨개진 것 같고 확실히 저번 발표 때와는 달랐다.

‘으…… 능력이 없어진 건가?’

태범은 이로써 ‘자신감’의 능력이 사라졌다는 걸 알게 되었다. 능력이 이렇게 쉽게 사라질 수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몸은 어느 정도 기억을 하고 있을 줄 알았건만 완전히 사라졌다.

마치 뒤에서 하연 일당이 자기를 보며 비웃는 것만 같았다. 태범은 고개를 들 수 없었고, 수업 내내 책을 바라보고 있었다.

* * *

태범은 집에 돌아와, 스캐너를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했다.

‘능력이 100% 스캔되기 이전에 다른 인물의 능력을 스캔하면 취소가 된다.’

‘취소된 능력은 몸에 조그마한 흔적도 남기지 않고 사라진다.’

‘그럼 100%를 채우기 위해서 얼마나 걸리는 걸까?’

‘처음 능력을 스캔할 시 대략 10%였으니까, 100%면 열흘?’

태범은 스캐너에 대해 궁금한 것 투성이였다. 하지만 스캐너의 설명은 불친절했고 직접 몸으로 부딪치며 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오늘 중요한 걸 깨달았다.

능력을 사용할 때는 항상 뒷일을 생각하고 해야 한다는 것.

능력을 100%까지 가지고 갈 것이 아니면 능력이 없어진 이후 뒷일을 어떻게 처리할지 생각을 가지고 있어야만 했다.

오늘처럼 자신감을 가지고 복수를 실컷 해놓고 개망신당하는 일이 발생하지 않으려면 말이다.

11시 59분.

오늘도 역시 내일을 기다리며 스캔을 위해 모든 세팅을 맞춰놓았다.

태범에게 능력을 스캔하는 것만큼 기다려지는 건 없었다. 물론 다음날 아침에 해도 상관은 없을 것 같지만 1초라도 빨리 능력을 얻고 싶은 게 태범의 마음이었다.

12시.

컴퓨터 시계가 화요일에서 수요일로 바뀌자 태범은 바로 스캔을 시작했다.

스캐너에는 폰 노이만 사진이 올라가 있고 모니터에는 능력창이 나타났다.

[스캔할 능력을 선택해주세요]

[폰 노이만 능력]

-암기력(10%)

-암산능력(0%)

-수리 이해력(0%)

-언어 이해력(0%)

태범은 고민 없이 바로 암기력을 클릭했다. 이미 스캔을 하기 전에 곰곰이 생각했던 결과, 능력의 분산투자는 좋은 방법이 아니었다.

일단 스캔을 100% 완료시켜 자신의 것을 만드는 게 가장 중요했다. 일시적으로 뭔가를 얻고자 하는 게 아니라면 한 가지 능력에만 집중을 해야 했다.

[암기력을 스캔하겠습니다.]

[스캔이 11% 진행되었습니다.]

.

.

[스캔이 18% 진행되었습니다.]

“올라가! 더! 더!”

태범은 기도하듯 손을 모으고 스캔의 퍼센트(%)가 올라가길 빌었다. 야동을 다운 받을 때, 다운로드가 빨리 되길 빌던 모습과 비슷했다.

100%가 아닌 이상 마음이 편치 않을 것 같았다. 100% 이하의 능력은 마치 능력을 빌려 쓰는 것만 같은 느낌.

태범은 능력을 완전히 소유하길 원했다.

[강태범 님의 소유 능력]

[폰 노이만]

-암기력(18%)

태범이 얻은 능력은 암기력 8%였다. 어제 10% 올랐던 것에 비하면 2%가 적은 수치였다.

‘무슨 기준으로 %가 오르는 거지? 점점 낮아지는 건가?’

어제보다 좀 더 오르길 원했던 태범에게는 8%의 수치는 실망스러운 수치였다.

아직 몇 번밖에 스캔을 해보지 않았기에 어떤 방식으로 스캔이 진행되는지 추측하기 어려웠다.

스캔을 마무리하고 다시 토익 단어책을 책상 위에 펼쳤다.

“captivate 매혹하다, culminate in 결국 ~이 되다, defiance 반항.”

확실히 이전과는 달라진 암기력이었다. 입으로 내뱉는 단어들은 더욱 강하게 머릿속에 입력되었다.

덕분에 책장을 넘기는 속도가 빨라졌다. 이렇게 암기력이 능력을 집중투자하며 단어를 외운다면 토익 시험 이전에 단어장 한 권을 암기하는 게 가능할지도 모른다.

* * *

드디어 내일이면 토익을 보는 날이었다.

태범에게 내일이면 1학년 때 이후 처음 보는 토익 시험이었다. 5일이라는 짧은 시간 동안 모든 능력을 암기력에 투자했고 그 능력을 테스트 하는 날이었다.

현재 태범의 능력은 폰 노이만의 암기력(27%)였다. 확실한 건 스캔의 횟수가 거듭될 때마다 스캔 진행 속도가 느려졌다. 이대로 100%를 채우려면 시간이 꽤나 걸릴 것 같았다.

‘일단 영어 듣기(LC)는 포기하고 독해(RC)에만 집중해야겠다.’

아직 영어 듣기(LC)는 전혀 공부가 되지 않아 점수에 대한 큰 기대는 하지 않지만 단어만큼은 자신이 있어 독해(RC)만큼은 점수가 잘 나올 것이라는 확신이 있었다.

태범은 나름 전략을 짜며 700을 넘기 위해 노력을 다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태범의 집중을 깨는 소리가 문 밖에서 들려왔다.

“태인아 넌 공부 안 하냐?”

“아. 이것만 끝나고 독서실 갈 거야.”

“아니, 만날 이것만 한 다고 하고 너, 지금 고3이야, 고3!”

“아, 알았어. 이거 끝나야 가지.”

동생과 어머니가 다투는 소리. 매일 놀기만 하는 고3은 어머니에게 골칫거리였다. 고2까지 잘하다가 요즘 ‘레드 오브 레전드’ 라는 게임에 빠져버려 공부는 뒷전이 돼버렸다.

“쯧쯧.”

태범은 혀를 차며 동생을 한심하게 생각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동생도 불쌍한 존재였다. 재수 없게도 고3이 돼서 중독성 최강이라는 게임을 만났으니 말이다.

태범은 사람이 의지대로 움직일 수 없다는 걸 진작 깨닫고 있었다.

태범 역시 멋진 미래를 꿈꾸며 의지를 다짐하곤 했지만 행동은 매번 내일로 미루고 온갖 자기 합리화로 자신의 꿈을 가로막곤 했다.

누구나 자기 의지대로 살 수 있었다면 개나 소나 판사, 변호사, 의사가 됐을 것이다. 노력을 하면 된다고 하지만 ‘노력’ 그 자체 또한 재능에 영역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이번에 마법 같은 스캐너로 능력을 얻음으로서 확신은 더해졌다.

재능이 최고라는 것.

공부에 흥미 없던 태범은 암기력이라는 능력을 얻고 나서부터 탄력을 받고 공부에 흥미를 붙였다. 태범은 이것이 자신의 이론을 뒷받침하는 증거라고 생각했다.

“휴.”

태범은 한숨을 크게 내뱉은 후 이어폰을 귀마개 삼아 귀에 끼고 동생과 어머니의 다투는 소리를 차단했다. 그리고 내일을 위해 토익 공부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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