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7
숨 쉬듯 자연스럽게 떠오르는 기억이 이미 머릿속에 예전부터 자리 잡고 있던 것처럼 느껴졌다.
태범은 앞장의 영단어부터 뜻을 빠르게 대답해 나갔다.
“무리, 집단!”
“담보!”
“압수하다!”
태범은 확실히 암기력이 좋아졌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평소라면 미간에 주름을 가득 모은 채 집중을 해야 겨우 몇 개의 뜻을 대답했겠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분명 단 한 번만 봤을 뿐이었는데 머릿속에는 기억으로 자리 잡고 있었다.
“음…….”
암기력이 아직 10%밖에 스캔이 안 돼서 그런지 몇 개는 평소와 마찬가지로 잘 떠오르지 않는다.
눈을 감고 손을 이마에 얹은 채 집중을 하고 있지만 이놈의 영어 뜻이 떠오르지 않는다. 한번 막히니 그 이후의 단어조차 헷갈리기 시작했다. 결국 태범은 20개 정도를 맞췄고 그 이후부터는 답을 내뱉지 못했다.
물론 한국어를 영어로 맞추는 것보다는 쉬운 일이겠지만, 이 정도면 충분히 엄청난 능력이었다.
‘이제 토익 600점은 탈출하는 건가?’
태범은 자신감과 언변 능력을 얻었을 때보다 더 만족스럽고 흥미로웠다. 이제 토익 점수를 600점을 넘을 수 있다니 미소가 저절로 지어졌다.
태범에게 토익 점수가 600점대인 이유는 있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배우며 10년이 넘는 기간 동안 영어를 배워왔고 그만큼 영어는 가깝지만 멀리하고 싶은 존재였다.
단어책을 펼치면 몇 개를 외우다가도 잘 안 외워지면 책을 덮고 딴 짓을 하곤 했다. 암기를 한다는 것보다 지루한 건 없었다.
가끔은 한국인이 왜 영어를 배워야 하는가 하면서 자기 합리화를 하기도 하고 왜 난 영어권에서 안 태어난 건가 원망을 하기도 했다.
“astute 기만한, recharge 재충전하다…….”
태범은 스캐너로부터 받은 능력에 대한 테스트를 끝냈지만 여전히 영단어 책을 펴놓고 단어를 암기하고 있었다.
“fixture 붙박이 가구, bae 벌거벗은, frankly 솔직히.”
천재들이 괜히 공부를 열심히 할 수 있던 게 아니었다. 역시 노력보다는 재능인가? 태범은 전보다는 술술 외워지는 영어 단어에 마치 게임에서 몬스터를 잡듯 영어 단어를 하나씩 잡아먹고 있었다.
“오!”
태범은 자기 능력에 스스로 감탄하며 공부를 이어나갔다.
그리고 새벽1시 30분, 잠시 잠을 자다가 물을 마시러 나온 태범의 어머니는 태범의 방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을 보곤 생각했다.
‘저놈 자식. 또 밤늦게까지 게임이나 처하고 있구나!’
태범의 방문을 벌컥 열며 호통을 치려는 순간, 태범의 모습을 보고는 목구멍 근처까지 나왔던 호통을 다시 목으로 삼켰다.
“앗! 태범이 공부하고 있었구나..시험기간이니?”
태범의 낯선 모습에 어머니는 당황하고 있었다. 그리고 놀란 표정은 금세 미소로 바뀌며 아들을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아, 깜짝 놀랐잖아. 문을 그렇게 갑자기 열고 들어오면 어떻게 해.”
“난 또 밤늦게 게임하고 있는 줄 알았지. 그래, 아들 공부 열심히 하렴.”
태범의 어머니는 무안한 듯 멋쩍은 미소를 보내며 방에서 나갔다. 태범은 심기가 불편한 듯 인상을 쓰고 있었지만 어머니가 방에서 나간 뒤 작은 소리로 웃기 시작했다.
공부하는 모습으로 어머니를 당황케 한 태범은 스스로가 자랑스럽기도 했고, 동시에 자부심이 느껴지는 것만 같아 기분이 한껏 좋아졌다.
* * *
태범은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눈을 비비며 컴퓨터를 켰다.
토익 특별 추가 접수 기간이 오늘까지였고 빨리 스캔 된 능력을 제대로 확인하고 싶어 가장 빠른 기간의 토익을 신청했다.
바로 5일 뒤 보는 시험이었다. 1학년 막바지에 받았던 680점이 최고 점수였고 그 이후로 영어는 손을 놓다시피 했다.
특히 군대에 있던 기간 동안 머리는 거의 텅 빈 깡통수준이었으니 아마 지금 실력 그대로 시험을 본다면 680점 이하가 나올 게 뻔했다.
‘700점만 넘자…….’
남이 보면 700점을 하찮게 볼 수 있겠지만 태범에게는 인생 최고 점수인 680점을 넘는 것만으로도 엄청난 성과였다. 특히 마지막 시험 이후로 아무것도 하지 않았던 태범에게 오직 능력만으로 5일안에 700점을 넘는다는 건 그야말로 기적이었다.
태범은 가방은 멘 채 토익 단어책을 손에 들고 등교에 나섰다.
얼마 만에 느껴보는 공부에 대한 열정인지 모르겠다. 사실 고3때도 이 정도는 아니었던 것 같은데, 5일밖에 남지 않는 토익시험은 태범에게 1분 1초의 시간조차 소중하게 만들었다.
물론 5일이 남았든 1일이 남았든 태범은 격하게 공부하는 스타일은 아니었지만 암기력이 상승하니 공부에 저절로 흥미가 붙었다.
퍽!
“학생! 앞 좀 보고 다녀.”
“죄송합니다.”
앞을 보지 않고 걷다 보니 길을 지나던 아저씨와 어깨를 부딪치고 말았다. 행인은 인상을 잔뜩 쓰며 삿대질을 했고 태범은 고개를 숙여 사과를 건넸다. 그리고 책을 접는 척하다가 고개를 돌려 거리가 멀어진 걸 확인하고 다시 책을 펴 가던 길을 걸었다.
“야. 뭔 그렇게 열심히 하냐!”
학교로 등교하던 현찬이는 책에 집중하며 길을 걷고 있던 태범을 발견하곤 말을 걸었다.
“어, 현찬아.”
“토익 단어? 너 토익 시험 보게?”
현찬은 태범이 들고 있는 책이 궁금한 듯 표지를 들춰보며 말했다.
“응, 5일 뒤에. 너는 토익 공부 안 해?”
“난 이미 토익은 졸업했지. 회계사 시험 보려면 최소 700점은 찍어야 되는데 지금 840점까지 찍고 그만뒀거든 이제 회계 공부하기도 바쁜데.”
역시 고시반에 들어가 회계사를 준비하던 현찬이는 달랐다. 왜 명문대가 아니라 이 학교에 왔는지 궁금할 정도였다.
“넌 항상 열심이네…….”
“넌 지금 몇 점인데?”
“나? 군대 가기 전에 680이었는데 지금은 모르겠네.”
“풋, 그러지 말고 학원 다녀라. 그 점수면 학원에서 한번 빡세게 구르면 점수 좀 오를 거야.”
태범의 점수를 들은 현찬은 자신도 모르게 웃음이 내뱉어졌다. 그 모습을 태범이 날카로운 눈으로 바라보자 현찬은 다시 웃음을 감추며 진지한 표정으로 조언을 했다.
“학원?”
“내가 다니던 학원 추천해줄게. 이번에 시험 보고 한번 다녀봐.”
현찬은 강남에 있는 유명 토익 학원을 추천해주었다. 강사들도 빵빵하고 스터디나 숙제도 체계적으로 잡혀 있어 토익 공부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그래, 생각해봐야지.”
현찬의 조언에 곰곰이 생각한 태범은 고개를 끄덕였다.
* * *
전공 수업인 ‘중급 회계’를 듣고 있던 태범은 교수를 뚫어져라 쳐다보며 수업에 집중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본 교수와 다른 친구들은 태범을 낯설게 바라보고 있었다. 항상 뒷자리에 앉아 수업을 듣는 둥 마는 둥 했는데 오늘은 태범의 눈에서 나온 레이저가 칠판을 뚫어버릴 것만 같았다.
‘역시 공부는 재능이었어! 머리 좋은 놈들은 이런 느낌이었겠구나.’
달라진 암기력으로 태범은 깨달은 게 있었다.
재능이 있으니 확실히 공부에 대한 재미가 달라진 것이다.
겨우 폰 노이만의 암기력 10% 이었을 뿐인데, 교수의 설명이 머리에 차곡차곡 쌓였다.
물론 한 번 보고 모두 기억해내는 서번트 증후군처럼 100% 기억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충분히 공부에 재미를 느낄 정도의 암기력이었다.
마치 게임 속에서 혼자만 핵을 쓰고 몬스터를 학살하는 느낌이었다.
‘이거 잘만하면 올 A+도 받겠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