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3화 (3/188)

# 3

마법 같은 스캔에 태범은 스캐너에 대해 자세히 살펴보았다.

샘성 전자에서 2013년에 출시된 BSK-008이라는 제품의 스캐너이다. 요즘 하도 인터넷으로 뭐든 하던 세상이기에 문서를 컴퓨터에 저장시킬 수 있는 스캐너는 필수였다.

그래서 샀던 스캐너인데 태범은 이런 기능이 있을 줄은 전혀 상상도 못했다.

“윽!”

태범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TV속 드라마처럼 자신의 볼을 꼬집어보았다.

물론 꿈일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았지만 역시나 생각대로 꿈이 아닌 현실이었다.

꿈이 아니라는 걸 확인한 태범은 인터넷을 킨 뒤 포털 사이트 네이년으로 들어가 ‘BSK-008’을 검색했다.

“중고나라에 밖에 없네.”

BSK-008은 특별함과 거리가 먼 스캐너였다. 4년 전 출시된 스캐너라 이제 공식 판매는 하지 않지만 중고 판매 사이트 중고 나라에는 판매를 위해 여러 개 올라온 상태였다.

“이거 내 것만 그런 거야?”

BSK-008의 사용 후기를 보더라도 그 어떤 이야기가 나와 있지 않았다. 그저 일반 스캐너와 다를 바 없는 후기들밖에는 없었고 이 일은 오직 태범이의 스캐너에서만 일어나는 것 같았다.

태범은 한참을 자기 스캐너에 대해 검색을 하다가 결국 아무런 정보를 얻지 못한 채 손을 들었다.

‘아직도 시간이 이렇게 남았네.’

발표가 있을 수업은 11시. 새벽에 일어나 한참을 있었지만 아직 3시간이 남았다.

“아직 3시간이 남았어!”

자신감이 때문인가 덩달아 긍정적인 마음마저 생기는 것 같다.

태범은 더 이상 알 수 없는 스캐너에 집착을 버리고 다시 발표를 위한 준비를 하기 위해 다시 한번 프레젠테이션을 점검했다.

딸각. 딸각.

태범은 파워 포인트에 있는 설명문을 최대한 줄이기 시작했다.

청중의 입장에서 가장 싫어하는 것이 단순한 설명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태범은 말로써 설명이 가능한 글들은 모두 지워버렸다.

그렇게 정리에 나서고 대망의 마지막 장에는 태범의 비밀 무기를 만들어 놨다. 상상만 해봤지 이렇게 써먹을 날이 올지는 몰랐다.

파워 포인트 작성을 마무리하고 어제 적은 대본을 다시 한번 읽어보았다.

대본은 하나같이 딱딱한 문장이었다. 물론 가장 무난한 말들로 채워졌긴 했지만 이대로 발표했다가는 전혀 임팩트가 없을 것 같았다.

태범은 스캔으로 얻은 자신감으로 대본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단순 설명만 하던 대본은 조금 더 부드럽고 스토리가 담긴 느낌으로 바뀌었다.

발표에 대한 모든 준비가 되었다.

태범은 그동안 하연이에게 연락 온 것이 있나 스마트 폰을 확인하지만 여전히 아무런 소식이 없었다.

“차라리 잘됐지.”

태범에게는 차라리 잘된 상황이었다. 하연이 지금 와서 숟가락을 얻으려 한다면 하연이는 파렴치한 인간이 되기 때문이다.

모든 마무리가 된 태범은 컴퓨터를 끄고 세안을 하기 위해 화장실로 들어갔다.

“오늘은 빨리 일어났네?”

어김없이 이른 아침이면 어머니는 출근하시는 아버지와 등교하는 남동생을 위해 아침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였다면 아침도 안 먹고 후다닥 학교로 가던 태범이었지만 오늘은 일찍 일어난 모습을 어머니가 보곤 태범을 낯설게 바라봤다.

“엄마 밥 줘.”

세안을 간단히 한 뒤 화장실에서 나온 태범은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닦으며 식탁 의자에 앉았다.

“웬일이래? 아침밥도 먹고”

아까 전까지만 해도 긴장감에 쪼그라든 위장이 이제는 활짝 펴지며 식욕을 돋우고 있었다.

“나도 이제 좀 일찍 일어나고 규칙적으로 생활해야지.”

자신감이 너무 넘치는 상태. 지키지도 못할 것 같은 말을 태범은 스스럼없이 내뱉었다.

“그럼 우리 아들 이제 다 큰 건가? 장가보내도 되겠네? 호호.”

“무슨 벌써 결혼이야.”

여자친구도 없는 태범에게 부모님은 수시로 결혼이야기를 했다. 이럴 때마다 항상 태범은 요즘시대에 결혼 빨리 하는 사람 없다며 시대 탓으로 말을 돌리곤 했다.

태범은 오늘 발표할 말들과 함께 밥을 곱씹으며 식사를 하기 시작했다.

‘우리의 시간은 영원하지 않습니다. 항상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며 하루하루를 살다 보면 순간의 가치를 느낄 수 있을 거라 생각합니다. 시간은 소중하고 아름다운 자원입니다.’

태범은 생각을 했다.

한국 문화 특성상 일개 학생 주제에 장황한 연설하듯 발표를 한다면 속으로 미움 받을게 분명했다.

아무리 좋은 발표라 할지라도 3자 입장에서는 잘난 척하는 걸로 보일 수 있다. 그러므로 어느 정도 발표의 강약 조절이 필요했다.

“뭘 그렇게 생각하니?”

생각에 너무 몰입한 탓에 밥을 입으로 먹는 건지 코로 먹는 건지 시선은 밥공기 위로 고정된 채 밥을 먹으니 어머니는 태범을 의아하게 바라봤다.

“응? 아무것도 아니야.”

엄마의 말에 태범은 생각을 마무리하고 다시 힘차게 숟가락질을 하기 시작했다.

* * *

“갔다 올게.”

태범은 힘차게 집 문을 박차며 밖으로 나섰다.

“후.”

확실히 집을 나오니 긴장감이 드리우긴 했다. 태범은 크게 한숨을 내쉬며 아침공기를 들이마셨다.

‘나는 할 수 있다. 할 수 있다.’

태범은 자기 최면을 걸며 길을 걸었다. 태범에게는 이만큼 온 것 만해도 대단한 일이었다.

평소였다면 아침에 일어나 포기했을 것이 분명했지만 특별한 능력 덕에 집 밖으로 나설 수 있었다.

태범에게는 신이 주신 뜻밖의 선물과 같았고 능력을 믿고 힘차게 발걸음을 나아갔다.

“태범아!”

학교 언덕을 올라가던 중 뒤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태범은 고개를 돌렸다.

“어? 재인이형!”

태범과 같은 회계학과이며 1년 선배인 ‘김재인’이었다.

무릎이 다 늘어난 회색 츄리닝 바지에 거적때기 같은 검은 잠바를 걸친 김재인은 언덕에 있는 기숙사에서 강의실로 향하는 길이었다.

재인이 역시 태범과 같은 교양수업인 ‘인물로 배우는 삶의 지혜’를 들었고 같은 강의실을 향하고 있었다.

“너, 오늘 발표지?”

“응, 내 차례지. 형은 아직 멀었지?”

“난 좀 남았지.”

“…….”

사실 재인은 태범과 별 친한 사이는 아니었다. 학번도 다르고, 나이가 달랐기 때문에 친해질 기회가 많지는 않았다.

군 복학 후 우연치 않게 옆자리에 앉아 얼굴을 트며 몇 마디를 나눴던 사이일 뿐 크게 서로를 잘 아는 사이는 아니었다.

그렇게 태범과 재인은 어색한 분위기에 대화를 나누며 강의실로 들어갔다.

강의실은 학생들의 잡담으로 가득 차 시장 분위기를 내고 있었다. 하지만 조용히 뭔가를 집중하고 있던 학생들이 있었으니, 그들은 오늘 태범과 함께 발표할 조였다.

7조인 태범 보다 앞선 조였기에 가장 먼저 발표를 할 조였고, A4용지를 책상 위에 펼쳐 발표 연습을 하고 있었다.

‘역시 안 왔구나.’

상대 조는 저렇게 열정을 다해 연습을 하고 있는데, 태범과 같은 조인 하연이는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어쩌면 대학을 포기하고 모델의 길로 완전히 넘어간 건 아닐까 생각이 들었다.

덜컥.

교수님이 강의실 문을 열고 들어오자 시장 바닥과 같던 강의실은 금세 조용해졌다.

“자. 출석 부르겠습니다. 강희진!”

교수는 들어오자마자 출석을 부르며 인원을 체크했다.

“강태범!”

“네!”

.

.

.

“성하연! 성하연 안 왔나? 이 학생 오늘 발표 아닌가요?”

자리에 없는 하연이 대답할 일은 없었다. 오늘 발표하는 날이었던 하연이가 없으니 대신 대리 출석을 해줄 친구도 없었다. 교수는 인상을 쓰며 성하연의 이름을 몇 번이나 불렀다.

“네! 네! 네! 죄송합니다.”

하연이가 강의실 앞문을 벌컥 열더니 다급하게 대답하며 들어왔다. 그렇게 연락을 안 받던 하연이가 등장한 것이다.

빨간색 구두에 꽃무늬 원피스에 가죽 재킷 그리고 검은색 체크무늬 샤넬 가방. 하연이는 온몸을 한껏 꾸미고 왔다. 자연스럽게 남자들의 시선은 하연이에게 향했다.

“학생, 일찍 좀 다녀요.”

“네, 죄송합니다.”

하연이는 교수에게 고개를 까닥이며 사과하고 태범이의 옆자리에 앉았다.

“태범아 미안.”

하연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태범에게 미소를 지으며 사과를 건넸다.

“너, 왜 전화 안 받았어?”

“아. 진짜 미안. 너무 일이 바빠서. 미안. 헤헤.”

무대 울렁증이 있는 태범에게는 발표를 기다리는 것이 지옥과 같았지만 하연은 그저 허튼 웃음으로 모든 걸 무마하려 했다.

“…….”

태범은 웃고 있는 하연이 얄미웠지만 화를 꾹 참고 아무런 대꾸를 하지 않았다. 오직 오늘 발표를 잘하자는 마음만이 태범의 마음속에 가득했다.

하연은 더 이상 태범의 마음속에 같은 조가 아니었다. 이제 발표는 오직 태범의 몫이었다.

“태범아 발표 준비 했어? 응?”

태범은 하연이의 말과 시선을 무시한 채 오늘 발표할 A4용지의 대본만을 바라보았다.

“야, 강태범. 삐졌냐?”

“…….”

“너, 발표 오늘 못하지?”

“뭐?”

하연은 자신의 미소와 사과를 거부한 채 아무 말 없이 시선을 피하는 태범이 마음에 안 드는지 삐죽 튀어나온 입으로 톡 쏘듯이 말했다.

“너, 어차피 무대 울렁증이라 발표 못 할 거면서 왜 삐지고 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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