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능력을 주는 스캐너-1화 (1/188)

# 1

1장 스티브잡스

“하연아 여기!”

자리에 앉아있는 강태범은 커피숍으로 들어온 하연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어.”

하연은 천천히 태범의 자리로 다가왔다. 역시 예쁘긴 예뻤다. 푸석함 없이 매끄럽게 찰랑거리는 생머리에 커다란 눈, 높은 코 그리고 갸름한 얼굴은 이국적인 이목구비를 만들어내고 있었으며 모델 같은 키에 블라우스 밖으로 드러나는 묵직함과 잘록한 허리 라인은 완벽한 미인의 모습을 갖추고 있었다.

그렇게 커피숍 내의 남정네들의 마음을 훔치고 있는 하연이는 태범이의 친구였다.

“너, 발표 어떻게 할 거야?”

하연이는 자리에 앉자마자 냉소를 지으며 말했다.

여기서 말하는 발표란 매주 한 번 수업이 있는 교양 과목 ‘인물로 배우는 삶의 지혜’ 라는 수업에서의 발표를 말했다.

매주 두 명으로 구성된 두 팀의 조가 인물들을 조사해 발표하며 그들을 통해 얻을 만한 삶의 지혜를 알아가는 것이었다. 그리고 다음 주는 같은 조인 태범과 하연의 발표가 있는 날이었다.

“하연아 네가 발표하면 안 될까? 대신 내가 자료 조사하고 PPT만들게.”

태범은 올 것이 왔다는 듯 머리를 긁적이며 말했다.

태범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게 있었으니, 그건 바로 무대 울렁증이었다. 친구들과 잘 어울리며 대화 역시 줄곧 잘해왔지만 이상하게도 무대에 올라서면 사지가 떨리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고 태범은 그 기분 나쁜 감정을 견딜 수가 없었다.

“왜. 네가 발표해. 나 너랑 같이 있으면서 네가 한 번도 발표하는 거 못 봤어.”

“아니, 알잖아. 나 무대 공포증…….”

“군대도 갔다 온 놈이 뭐가 겁난다고 그러냐.”

하연이와는 같은 회계학과 동기로 1학년 때부터 친하게 지내던 친구였다.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때부터 친해진 하연과는 1년 내내 같이 붙어 다녔고, 심지어 사귀는 사이가 아니냐는 의심도 많이 받았었다.

분명 2년 전인 1학년 때까지만 해도 하연이는 태범을 배려해주어 발표를 대신 맡아주기도 했고 태범을 가장 잘 이해해주는 친구이기도 했다.

하지만 태범이 군대를 다녀온 후 복학한 이 시점에서 4학년이 된 하연이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훤칠한 키와 외모에 하연이는 모델일을 병행하며 흔히 이름 좀 알린다는 사람들과 어울리기 시작했고 다른 세상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것이다.

태범이의 기억에 하연이는 순수했던 1학년 대학생의 모습이었지만 지금은 셀럽들과 어울려 다니며 세상물정을 다 겪은 듯 행동했다.

“진짜 미안한데 내가 조사할 테니 네가 발표해주면 안 될까?”

“미쳤어? 1학년 때 내가 대신 발표해준 거 기억 안 나? 이번에는 네가 해.”

하연이는 다리를 꼬며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그 사이 옆 테이블 남자들은 하연이의 다리를 힐끗 쳐다보고 있었다.

“아. 미치겠다.”

태범은 저절로 한숨이 내뱉어졌다. 죽기보다 싫은 게 발표였으니 태범은 이 상황이 끔찍했다.

차라리 그날 수업을 빠질까 생각도 해보지만 다시는 하연이 앞에서 얼굴을 들지 못할 것 같아 그럴 수도 없었다.

“야. 남자가 뭐 그러냐. 군대 갔다 온 거 맞냐.”

하연이는 태범의 마음을 잔인하게 긁어냈다. 더 이상 마음을 감싸주던 따뜻함이 아닌, 마음을 얼려버리는 냉정함만이 남아있었다.

“알았어. 내가 발표할 테니 네가 조사해.”

자존심이 바닥에 눌려 곧 터질 것만 같았다. 태범은 하연의 차가운 말에 이를 악물며 발표를 하겠다고 말해버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태범에게 후회가 밀려왔다. 발표라니, 미친 거 아닌가.

* * *

“하.”

태범은 집을 가는 동안 한숨을 계속 내쉬며 바닥만을 바라본 채 걷고 있었다. 발표를 한다니 온갖 걱정이 머릿속에 가득 차 태범을 괴롭히고 있었다.

“야. 태범아.”

태범은 앞에서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어.현찬아.”

“너 무슨 일 있냐? 왜 바닥만 보고 걷냐.”

김현찬, 태범이와 같은 학과의 동기로 이번에 같이 복학한 태범이의 친구였다. 평소 운동이든 공부든 뭐든 열심히 하던 친구였던 현찬이는 이번에 회계사 시험을 준비한다며 대학 고시반에 들어간 친구였다.

“하…… 그게 혹시 너 시간 있냐?”

“나는 뭐. 시간이야 만들면 만들 수는 있는데. 근데 왜?”

“술 한 잔 할래? 내가 살게. 치맥 콜?”

시험을 위해 공부를 하던 현찬이에게 무리한 부탁이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태범은 이 가슴 아픈 자신의 심정을 누군가에게 하소연하고 싶었다.

풍선에 공기가 가득 차 곧 터질 것 마냥 태범의 마음에는 걱정으로 가득 차 곧 터질 것만 같았다.

“나 술은 안 되는데. 들어가서 할 게 있거든.”

“아. 그래? 그럼 치킨만 먹을래? 잠깐 식사만 하자.”

“그래, 그건 좋지.”

태범은 겨우 현찬이를 꼬셔 학교 근처 치킨 집으로 데리고 갔다.

“여기 후라이드 반이랑 양념반이요.”

태범이 주문을 한 뒤 메뉴판을 내려놓으며 옅은 한숨과 함께 말을 꺼내기 시작했다.

“나 큰일 났어.”

“뭐가? 왜 그러는데.”

“나 발표하게 생겼어.”

“발표? 하하하.”

현찬이는 안주로 나온 과자를 집다가 다시 내려놓더니 박장대소를 했다.

“야, 넌 알잖아. 나 심각한 거.”

“알지. 아주 잘 알지.”

현찬이 역시 태범의 사정을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학교 입학 때부터 어울리던 친구였으니 수업도 같이 듣고 했다. 태범은 몇몇의 발표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마다 벌벌 떨며 얼음이 되어 자리로 돌아오는 모습을 보곤 했다.

“나 진짜 미치겠다. 도대체 왜 이럴까? 아니 친구들하고 있을 때는 진짜 말이 술술 나오는데 꼭 앞에만 나오면 심장이 떨린다니깐. 아주 자동이야 자동.”

태범은 자신의 가슴을 붙잡으며 이 어려운 상황을 극적으로 표현하며 말했다. 그런 모습에 웃음기를 머금고 있던 현찬이의 표정도 신중하게 바뀌었다.

“그러지 말고 계속 도전해봐. 원래 그런 공포증이 있으면 자주 접하면서 적응해 가는 게 제일 좋은 거래.”

“그거야 나도 잘 알지만.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

현찬이가 맞는 말을 했긴 했으나 그 방법은 태범이와는 동 떨어 것이었다. 상상이상의 무대공포증을 가진 태범에게는 단 한 번의 발표를 경험하는 것조차 힘들어했고, 심지어 발표 후 무대에 적응하기 보다는 자책감 때문에 공포심이 더 심해지곤 했다.

“치킨 나왔습니다.”

현찬이는 고개를 끄덕이더니 닭다리를 한 개 들고 물어뜯기 시작했다.

“그럼 발표는 너 혼자 하는 거야?”

닭고기를 오물거리며 현찬이가 말했다.

“아니, 하연이랑 같은 조인데. 나보고 발표 맡으라네.”

“헐. 너 아직도 하연이랑 같이 다녀?”

“어쩌다 보니 같은 조가 됐는데. 요즘 좀 그러네.”

현찬이는 배고팠는지 말 한마디 하는 사이에 닭다리 한 개를 모두 뜯어 먹은 후 뼈를 테이블 위에 있는 통에 집어넣었다.

“너 그거 알아? 우리 군대 가있을 동안 하연이 모델계에서 유명해진 거.”

“응, 연예인들 이랑도 어울리고 다닌다며.”

“개 쩐다니까. 내가 들었는데 작년에는 서울 패션 위크에서 모델로 나간 적도 있대. 걔 1학년 때는 모델하고 전혀 관련 없었는데 말이야.”

현찬이는 갑자기 주제를 바꾸더니 하연이 이야기를 쏟아내기 시작했다.역시나 남자끼리 만나면 주된 이야기는 여자 이야기였다. 그것도 같은 동기에 가까운 친구였던 하연이가 유명해지니 남자들 사이에서는 가십거리 중 한 개가 되어버렸다.

“하긴. 바뀌긴 많이 바뀌었지.”

1학년 때 까지만 해도 하연은 전혀 거리감이 느껴지지 않는 친구였다. 남들에게 싹싹하고 붙임성도 좋았기에 하연을 싫어하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다.

외모도 완벽한 데다 성격도 좋았던 하연이는 당연히 남자들 유명했고, 여자들의 질투를 받기도 했었다.

하지만 가깝게나 느껴졌단 하연에게 2년이 지난 지금 마치 커다란 벽이 사이를 가로막는 기분이 들었다.

하연이에게 느껴지는 아우라는 더욱 커져갔으며 이제는 일반 학생과는 어울릴 수 없는 수준으로 성장한 듯했다.

“그러고 보면 네가 군 생활 했다는 게 참 신기해.”

현찬은 고기를 뜯으며 말했다.

“야. 군대이야기는 하지 마. 아까 하연이도 그렇고 왜 오늘 애들이 군대 이야기를 꺼내냐.”

“아니, 그렇잖아. 군대에 있을 때도 사람들 앞에서 나서야 할 때가 있잖아.”

“야, 그만하자. 생각도 하기 싫다.”

“아. 미안.”

태범에게 군 생활은 생각도 하기 싫은 나날이었다. 남들은 짝대기가 하나씩 올라갈 때마다 좋았다고 말하지만 태범은 반대였다.

오히려 군 계급이 올라갈수록 져야 될 책임이 커 졌고 점호나 인원보고를 할 때는 매번 고통이었다.

가장 최악이었던 건 새롭게 들어온 신병에게 부대원들을 소개시켜줄 때 너무 떤 나머지 자신의 선임 이름을 잊어먹은 것이었다.

짝대기 한 개 신병에게 개망신을 받았던 그날은 태범에게 있어서 잊고 싶은 날이었다.

“그래도 열심히 하면 되겠지. 아직 3년이나 남았잖아.”

배가 부르고 마음에 평온이 왔는지 현찬은 이제야 위안의 말을 건네고 있다.

“그래, 제발 취업 전까지 내 성격이 바뀌었으면 좋겠다.”

그렇게 태범은 친구와 함께 치킨을 뜯으며 하소연을 한 덕에 마음속에 있던 걱정이 좀 사그라졌다.

* * *

“나는 할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

내일 모레면 드디어 발표를 하는 날이었다. 태범은 자리에 가만히 있지 못하고 방안을 돌아다니며 자신에게 주문을 걸고 있다.

방금 전 포털 사이트에 ‘떨지 않고 발표하는 법’을 검색한 후 방법을 찾던 태범은 할 수 있다는 자기 최면을 걸면 떨리는 마음을 진정할 수 있다는 말에 똑같이 행동하고 있던 것이다.

“아니야. 할 수 없어.”

갑자기 쿵 하고 심장이 내려앉는 기분에 태범은 자리에 주저앉았다.

역시나 이런 게 통할 일은 없다. 무대 공포증을 없애기 위해 안 해본 게 없는 태범에게는 이 방법이 별 효과가 없다는 걸 금방 깨달았다.

“아. 진짜 하연이는 왜 연락을 안 받는 거야.”

발표가 바로 내일 모레인데 자료를 조사하기로 한 하연이는 아직 연락이 없었다. 발표 대본을 아예 외울 생각인 태범에게는 시간이 촉박했다.

“아 짜증 나네.”

몇 번의 전화를 시도하던 태범은 핸드폰을 내려놓고 머리를 쥐어짜며 짜증을 부렸다. 이것이 바로 조별과제의 잔혹사였다.

할 수 없었다. 일단 태범은 혼자라도 준비를 하고 있자는 마음에 컴퓨터를 켜고 발표의 주제가 될 인물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세종대왕, 이순신, 박지성, 유재석, 빌게이츠, 스티브잡스.”

삶의 지혜를 배우고 싶은 인물들을 찾던 중 애플사의 스티브잡스의 프레젠테이션 동영상이 눈에 띄었다. 그리고 클릭.

“와. 부럽다. 저 사람은 떨리지도 않나?”

신제품을 소개하는 스티브잡스의 모습.

스크린에는 단순한 이미지만 나올 뿐 PPT의 모든 내용은 스티브잡스가 물 흐르듯 설명하고 있었다.

딱딱한 설명이 아닌 마치 어릴 적 어머니가 동화를 읽어주는 듯한 느낌이었다.

발표에는 이야기와 감정이 담겨있었고 관중들의 마음을 들었다 놨다하는 타이밍을 정확히 알고 있는 듯 보였다.

어느새 스티브잡스의 프레젠테이션에 빠져든 한동안 그의 영상을 바라만 보고 있었다.

결정했다. 이번에 발표할 인물은 스티브잡스다.

태범은 스티브잡스와 관련된 내용을 조사하기 시작했다.

스티브잡스의 개인사부터 이력까지 모두 샅샅이 뒤졌고 운이 좋게도 집에는 스티브잡스의 자서전이 있어 조사에 안성맞춤이었다.

“이 사진 괜찮은데?”

자서전을 살펴보던 태범은 하나의 사진을 보곤 책장을 넘기던 손을 멈추었다. 책에는 스티브잡스가 가부좌를 하고 앉아 사진이 있었다, IT의 기업의 대표와는 다른 신선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사진이 마음에 든 태범은 인터넷에 이 사진을 검색했지만 찾을 수 없었다.

“에이 귀찮아.”

뭐 어딘가 있긴 하겠지만 귀찮은 마음에 자서전에 있는 사진 부분을 오려 스캐너의 유리 위에 올렸다.

[스캔.]

태범은 스캔 버튼을 꾹 눌렀고 웅 하는 소리와 함께 스캔이 시작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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