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화 52장. 안드로이드는 인간을 꿈꾸는가?
5.
레이나와 대화를 마친 창수는 돌쇠를 마법자루 안에 갈무리한 뒤, 폐기물 재처리 공장 안으로 들어갔다.
“목숨을 구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몬스터에게 위협당하는 사람을 구하는 건 당연한 일이죠. 어디 다친 곳은 없나요?”
“없습니다! 덕분에 멀쩡합니다!”
창수가 A급 변이체를 처리했다는 걸 파악한 야닉이 상황실 밖으로 뛰어나와 반갑게 맞이했다.
어눌하고 소극적인 성격이지만, 자신의 목숨을 구해 준 은인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적극적으로 보였다. 창수에게 우호적인 대우를 받을 최소한의 인성은 갖춘 셈.
목숨을 구해 줄 때 감사하는 것이 당연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류도 있다는 것을 알기에, 창수는 야닉에게 호의적인 태도를 이어 갔다.
“다행입니다. 그런데 공장에 혼자 남은 건가요?”
“아……. 직원들은 모두 대피하고, 제가 임시 공장장 자격으로 남은 겁니다.”
“희생정신이 투철하군요.”
“아닙니다. 여기 남으면, 임시 공장장으로 승진시켜 준다는 말에 넘어간 겁니다. 달콤한 말에 넘어가 자칫하면 죽을 뻔한 거죠.”
창수에게 고마움을 느껴서일까? 아니면 죽음의 문턱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뒤 겪게 된 외상 후 스트레스일까?
야닉은 공장장과 부공장장을 비난하며, 자신이 임시 공장장이 된 과정을 소상히 이야기했다.
물론, 이건 일방적인 주장이다. 공장장과 부공장장이 야비한 짓을 한 것이 분명하지만, 야닉도 욕심에 눈이 멀어 꼬드김에 넘어간 잘못이 있다.
창수는 야닉의 말을 듣고, 이 점을 바로 파악했으나, 내색하지 않았다. 그저 분노한 야닉에게 적당히 맞장구쳐 주면서, 중요한 정보를 확보했다.
여행업에 종사하며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본 노련한 처세술이 발동한 것.
“그런데 공장 피해는 어떤가요?”
“외벽이 부서지고, 에너지 실드에 과부하가 걸려 망가졌습니다. 수리하는 데 적지 않은 비용이 들 것 같습니다. 그래도 기계가 망가지지 않아 다행입니다.”
“자금이 필요하겠군요.”
“그래서 걱정입니다. 마테이스 그자가 저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울 수도 있습니다.”
“설마 그렇게까지 하겠습니까? 공장을 끝까지 지킨 공이 있는데요.”
“후……. 그자의 악랄함은 상상을 넘습니다. 공적도 자기가 가로채려고 할 겁니다.”
야닉은 공장장 마테이스를 극도로 불신했다. 자신을 죽음이 기다리는 곳에 남겨 두고 도주했고, 평소에 식충이 취급했으니 당연한 일이리라.
재처리 공장에서 가장 중요한 시설은 각종 기계지만, 그 못지않게 중요하고 돈이 많이 들어가는 시설이 에너지 실드다.
A급 변이체가 에너지 실드를 완력으로 파괴하면서, 생성 장치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에너지 실드를 복구하려면, 연간 공장 예산의 30%를 사용해야 한다.
야닉은 임시 공장장직을 맡은 자신에게 마테이스가 그 비용을 떠넘길 가능성이 있다고 생각했다.
해결할 수 없는 막대한 수리 비용을 생각하면 깊은 한숨만 나온다.
“돈은 문제가 안 될 겁니다.”
“예? 무슨 말씀이신지…….”
“우리 전투단이 사냥한 A급 변이체 위탁판매를 야닉 공장장님께 맡기겠습니다.”
“저… 정말 그렇게 해 주실 겁니까!?”
“수수료는 11%로 하겠습니다. 10%는 공장 수입으로 잡고, 1%는 공장장님 개인 수익 삼으십시오.”
“그렇게만 해 주시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야닉이 어눌하지만, 멍청이는 아니다. 해양도시에서 A급 변이체가 100억 실링 이상의 가치가 있다는 걸 알고 있다.
위탁판매를 맡으면, 재처리 공장에 10억 실링이 들어온다. 에너지 실드 수리비 정도는 껌값에 불과하다.
게다가 자신은 1억 실링을 챙길 수 있다. 위탁판매만 무사히 끝나면, 자기 평생은 물론이고, 대대손손 떵떵거리면서 살 수 있는 거금을 확보하게 된다.
만약 이 제안을 거절한다면, 해양도시에서 수백 년간 조롱받을 바보가 될 것이 분명하다.
야닉은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창수의 제안을 단번에 받아들였다.
“일단 계약서를 작성하시죠.”
“당연히 해야죠!”
“그리고 계약금으로 공장에서 재처리를 마친 물품을 받고 싶은데, 어떻겠습니까?”
“아주 좋습니다! 직원 구매가로 판매하겠습니다! 필요한 것이 있으면 말씀하십시오!”
창수가 노린 것이 바로 이것. 레이나의 말에 따르면, 재처리 공장에서는 해양도시에서 유통하는 고급 소재 대부분을 구할 수 있다고 한다.
고물을 수거하거나 해양도시로 갈 것 없이, 필요한 물품 대부분을 여기서 쉽게 확보할 수 있다.
그리고 임시라는 딱지가 붙어 있지만, 공장장 야닉의 목숨을 구해 주고 커다란 재물을 안겨 주면, 창수가 원하는 대로 계약을 맺어 줄 가능성이 높다.
또한 한번 계약을 맺으면, 마테이스가 돌아온다고 해도, 10배에 달하는 막대한 위약금을 물어야 하기에, 계약의 안전성을 보장받을 수 있다.
창수는 레이나를 불러 완벽한 계약서를 작성한 뒤, 본격적인 고급 소재 쇼핑을 시작했다.
* * *
“레이나, 수완이 대단했어.”
“그 정도는 기본입니다.”
“그래도 공장 창고의 절반을 확보할 줄 몰랐어.”
레이나는 인간을 뛰어넘는 지적 능력을 갖춘 안드로이드답게 창수가 원하는 것 이상의 결과물을 만들어 냈다.
먼저 계약서에, A급 변이체 사체 총 판매 금액이 최소 150억 실링은 돼야 한다는 조항을 명시했다.
이어서 창수가 원하는 고급 소재와 에너지셀은 물론이고, 전투 안드로이드 부품과 각종 첨단 부품을 대량으로 확보했다. 그리고 물품들을 보관할 창고를 100년간 임대했다.
야닉은 다소 무리라고 생각했으나, 창수로부터 받은 은혜와 레이나의 논리적인 말솜씨를 버텨 내지 못하고, 원하는 대로 모두 들어줬다.
“합리적인 일입니다. 대표님께서 한 번에 운송할 수 있는 부피가 70m²이니까요.”
“하긴, 임대한 창고가 없으면, 여러 가지 불편한 점이 많지. 정보가 새어 나갈 위험도 있고.”
“그렇습니다. 대표님께서 언제든지 창고에 출입할 수 있습니다. 안드로이드가 경비를 서니, 외부 출입도 막을 수 있고요.”
폐기물 재처리 공장 1년 매출액은 1억 실링이다. 창수는 이번에 5,000만 실링 상당의 물품을 구매했다.
공장에서 6개월간 생산할 수 있는 물품을 확보한 거다. 하지만 창수가 보유한 마법자루에 집어넣을 수 있는 물량은 한정돼 있다.
매도우 시티까지 수시로 오가며 운송해야 하는 상황. 창고를 임대하지 않고, 기존 창고에 방치하면, 재처리 공장에 올 때마다 행적을 드러내야 한다. 그리고 순차적으로 이동하는 물품 수량이 드러나게 된다.
레이나는 불편함과 정보 유출을 방지하는 방안으로 창고 임대를 선택했다.
그리고 산업 안드로이드 100대를 구매해, 그중 90대를 창고 경비와 관리에 투입하는 치밀함을 보였다.
“좋아. 계속 이렇게 나를 도와줘. 매도우 시티에서도 할 일이 많으니까.”
“물론입니다. 오백세건강 기획 이사로서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창수는 레이나를 Earth에 설립한 오백세건강의 이사로 선임했다. 일 처리는 대만족. 기술 이사 마커스와 함께 많은 일을 할 수 있을 거라 기대하고 있다.
이제 레이나는 안드로이드라는 한계를 넘어, 월급 받는 직장인이 됐다.
그리고 이건 레이나가 누구에게 소유된 물건이 아니라, 어엿한 지성체로서 대우받는 확실한 증거라 할 수 있다.
6.
2024년 1월 20일, 창수는 레이나와 함께 매도우 시티에 도착했다. 바이크를 타고 오는 도중에 변이체 무리를 여럿 만났으나, A급 변이체를 처단한 창수에게 아무런 위협이 되지 못했다.
창수는 오백세건강 연구실이라는 이름으로 불리는 작업실에서 제작에 몰두하고 있던 마커스를 찾아갔다.
“대표님, 무사히 돌아오셔서 다행입니다.”
“덕분에 큰 어려움 없이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인사하세요. 이번에 영입한 레이나 이사입니다. 기획 분야를 담당할 겁니다.”
“아……. 이분은…….”
“단번에 알아보시는군요. 레이나 이사는 안드로이드입니다.”
레이나의 외모는 인간과 차이가 없다. 그런데도 마커스는 레이나가 안드로이드라는 걸 한눈에 파악했다.
이건 마커스가 안드로이드에 대해 어느 정도 알고 있다는 걸 의미하는 것이리라.
창수는 흡족한 얼굴로 마커스를 바라봤다. 능력자와 인연을 맺게 된 것이 다행이라 생각하며.
“만나서 반갑습니다, 마커스 이사님.”
“저도 반갑습니다, 레이나 이사님. 말로만 들었지 실제로 인간형 안드로이드를 보는 건 처음입니다. 앞으로 잘 지내 보죠.”
“그럼요. 잘 지내야죠. 마커스 이사님에게 제가 신세 질 일이 많으니까요.”
“예? 신세요?”
창수로부터 지성체라고 인정받아서일까? 레이나는 마커스와 자연스럽게 대화를 이어 갔다.
그리고 직급이 동등한 직장 동료의 입장에서 당당히 도움을 요청했다. 해양도시에서 시미언의 소유물이었던 때와 완전히 다른 태도.
“지금 제 몸체가 정상이 아니거든요. 수리에 전문가의 도움이 필요합니다.”
“아……. 무언가 오해가 있는 것 같군요. 저는 전문가가 아닙니다.”
“기계와 전자제품 제작을 손수 하시는 것 아닌가요?”
“그거야 어느 정도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간형 안드로이드는 고쳐 본 적이 없습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수리하는 방법을 알려 드릴게요. 숙련자의 솜씨로 섬세하게 작업하시면 돼요.”
레이나는 작업장의 상태와 마커스가 진행하는 작업을 보고, 단번에 능력자라는 걸 알아봤다.
자신을 스스로 수리하기 어렵지만, 어디를 어떻게 수리해야 하는지 자세히 알고 있다.
기계 제작과 수리에 천부적인 자질을 가진 마커스가 레이나의 말만 잘 따라 준다면, 무사히 작업을 마칠 수 있을 거다.
“그렇게 말씀하시니. 일단 시도는 해 보겠습니다. 하지만 부품 구하기가 쉽지 않을 겁니다.”
“그건 염려 마세요. 대표님께서 충분히 가지고 계십니다.”
- 슥!
레이나의 말을 듣고, 고개를 돌려 창수를 바라보는 마커스.
매도우 시티 암시장에서 온갖 물건과 부품들이 매매되고 있다. 그러나 인간형 안드로이드 관련된 것은 거의 찾아볼 수 없다.
안드로이드가 대부분 중앙사무국 소속이고, 수리할 부품을 중앙사무국이 독점하고 있기 때문이다.
간혹 가다 해양도시에서 버리는 고물 중에서 안드로이드 부품을 얻을 때가 있지만, 대부분 중앙사무국에 고가로 판매한다.
수입도 짭짤하고, 중앙사무국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기에, 암시장으로 안드로이드 부품이 흘러올 가능성이 희박하다.
마커스는 창수가 인간형 안드로이드 부품을 대량으로 가지고 있다는 레이나의 말에 의문을 품었다.
“대표님, 정말인가요?”
“그렇습니다. 레이나 이사를 몇 번 수리하고 남을 만큼 가지고 있습니다.”
- 척! 척 척!
“헉! 이렇게나…….”
명불허전. 역시 창수의 능력은 범인의 잣대로 측정할 수 없다.
창수가 눈앞에 안드로이드 3대를 수리할 수 있는 부품을 내놓자, 마커스가 너무 놀라 제대로 말도 못 하는 지경에 빠졌다.
하지만 이건 괴롭힘이 아니다. 기계 제작과 수리에 특화된 능력을 갖춘 마커스에게 크리스마스 선물과 같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