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1화 50장. 또 다른 세상 Earth
4.
“디온의 어머니가 어디로 수거 작업 나간 건가요?”
“동쪽이오.”
“그쪽으로 가면 강과 가깝지 않나요?”
“그렇소. 하지만 다른 쪽은 중앙사무국에서 고용한 인력이 물을 수확하니 달리 방법이 없소.”
매도우 시티에서 동쪽으로 50km 부근에 콜로라도강 지류가 흐르고 있다. 넓지 않지만, 주변에 초목이 자라는 생태 환경.
물이 있고 강한 햇볕을 피할 수 있는 곳에 변이체가 몰리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매도우 시티를 공격하는 변이체 대부분이 이곳에서 오고 있다.
중앙사무국은 물 응집기를 사막 전체에 골고루 설치하고, 전문 팀을 투입해 주기적으로 물을 수확하고 있다. 그러나 동쪽은 변이체와 조우할 가능성이 높기에, 가급적 피하는 상황.
디온의 모친 애쉬는 위험을 무릅쓰고 동쪽에서 물 수거 작업을 한 거다. 달리 수입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선택이리라.
“제가 디온의 어머니를 찾아보겠습니다.”
“아니요! 마음은 고맙지만, 그러지 마시오! 변이체가 출몰하는 곳이라, 혼자서 가기는 너무 위험하오!”
“변이체 정도는 처리할 수 있습니다. 걱정하지 마십시오.”
제라드는 창수가 애쉬를 찾아보겠다고 말하자 화들짝 놀라며 만류했다. 젊은 혈기와 의협심만으로 변이체를 상대할 수 없다고 생각한 것.
무장한 병력 다섯은 있어야, 변이체 하나를 상대할 수 있다. 제라드는 생명의 은인이 허무하게 죽는 걸 바라지 않았다.
하지만 창수의 생각은 달랐다. 변이체가 위험하기는 하지만, 한 번은 맞붙어 봐야 할 상대다. 이번 기회에 견식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을 터.
그리고 매도우 시티에서 제대로 활동하려면, 협력자가 필요하다. 이미 제라드를 도운 상황에서 애쉬를 구해 내면, 디온 가족을 확실한 우군으로 만들 수 있을 거다.
“허어……. 그것참……. 젊은이가 자신하니 더 이상 말리지 못하겠소.”
창수의 자신만만한 말에 설득을 포기한 제라드. 무사 귀환을 빌며, 외부로 나갈 수 있는 비밀 통로를 알려 줬다.
매도우 시티는 30m 높이 외벽으로 둘러싸여 있다. 외부로 출입할 수 있는 문은 동서남북 4개에 불과하고 삼엄한 경비를 한다.
출입할 수 있는 대상도 물 수확 인력, 변이체 제거 병력과 같은 공공 업무를 맡은 이에 국한한다.
개인적으로 매도우 시티 밖으로 나가는 건 불법이고, 원천적으로 막혀 있다. 이 제약을 피하려고 마련한 것이 땅굴이다.
블링크 마법을 사용하는 창수에게 땅굴이 반드시 필요한 것은 아니나, 유용한 것이 사실이다. 게다가 외부인에게 땅굴을 알려 주는 건 제라드에게 큰 모험일 수 있다.
창수는 비밀을 공유해 준 제라드의 믿음에 든든함을 느끼며, 매도우 시티 외부로 빠져나갔다.
- 스슥!
비밀 통로는 외벽에서 200m 떨어진 바위 뒷면까지 이어져 있다. 바위가 제법 커서 사람이 출입해도 외벽 위에서 감시 중인 경비병의 눈에 띄지 않는다. 밤에 출입하면, 적발될 일은 없을 듯하다.
하지만 현재 시각은 오후 3시 30분, 바위를 벗어나면, 경비병에게 발각될 수 있다. 창수는 투명망토를 가동하고 땅굴에서 나온 후, 동쪽으로 이동했다.
‘30km 떨어진 곳이군. 해가 지면 변이체들이 공격할 거야.’
땅굴 입구에서 1km 이동한 뒤, 동쪽으로 정찰 드론 4대를 날렸다. 그리고 해발 1,900m로 측정되는 산봉우리에 고립된 5명을 발견했다.
그중 한 명의 얼굴이 제라드가 건네준 애쉬의 사진과 유사하다. 제대로 찾았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5명 중 3명이 쓰러져 있었고, 애쉬와 나머지 한 명은 지쳐 보였다. 치열한 전투를 벌인 듯, 몸 이곳저곳이 상처투성이다.
문제는 산봉우리 인근 그늘에 변이체가 다수 숨어 있어 탈출이 어렵다는 것.
변이체들은 물통을 옆에 끼고 있었다. 아마도 애쉬 일행으로부터 탈취한 것이리라. 창수는 변이체들이 해가 지기를 기다리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 타다닥!
해가 질 때까지 2시간 남짓 남아 있다. 일몰 전에 땅거미가 지는 시간을 생각하면, 1시간 안에 도착해야 애쉬 일행을 구할 수 있을 터.
더구나 현재 위치에서 산봉우리까지의 높이가 600m에 이른다. 창수가 절정 경지에 오른 고수라 하더라도, 평소 이동 속도보다 빠르게 이동하지 않으면, 때를 놓칠 수 있다.
창수는 단전의 내공을 다리로 보내고, 신속하게 이동하기 시작했다.
* * *
- 슬금슬금.
- 스스슥.
“마커스! 변이체 놈들이 움직이기 시작한다! 준비해!”
“후……. 이제 끝장이군. 우리 두 명으론 저놈들을 막아 낼 수 없어.”
“멍청한 소리 하지 마! 우리는 아직 살아 있어!”
해가 서쪽으로 기울어지며, 매도우 시티를 붉은색으로 물들였다. 거대한 회색 원판에 둘러싸인 코어 지역. 고층 건물에서 나오는 빛이 비현실적으로 아름답다.
그러나 애쉬는 이런 장관을 즐길 여유가 없었다.
물 수확을 위해 5명이 팀을 꾸려 나온 것이 4일 전, 야간 작업 욕심을 부리다 변이체들과 조우해 쫓기면서 지금까지 버텼다.
하지만 2일 전 팀원 한 명이 죽고, 어제 두 명이 죽었다. 이제 변이체들이 설치는 밤을 두 명이 버텨 내야 한다.
끝장이라는 마커스의 말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렇다고 이대로 죽을 수 없는 일.
“애쉬, 그만 포기하자. 우리는 할 만큼 했어.”
“절대 포기 못 해! 내가 죽으면 디온은 어떻게 하라고!?”
“너만 자식이 있냐? 나도 헤라가 눈에 밟혀.”
“그러니까! 우는 소리 하지 말고, 돌 굴릴 준비를 하라고! 어서!”
애쉬 일행이 봉우리로 대피한 이유는 경사면에서 돌을 굴려 변이체를 막기 위함이다.
변이체는 인간보다 신체 능력이 월등히 뛰어나지만, 균형 감각이 떨어진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돌 굴리기는 변이체의 취약점을 파고든 대응이다. 수적으로 불리함에도 3일간 버틴 것을 고려하면, 탁월한 선택이라 할 수 있다.
애쉬는 자포자기에 빠진 마커스를 다그치며, 끝까지 싸운다는 각오를 보였다.
- 쿠에에엑!
- 크에엑!
가장 가까운 그늘에 숨어 있던 변이체 3마리가 괴성을 지르며 경사면을 기어 올라왔다. 오늘은 반드시 애쉬 일행을 잡아먹을 거라는 확신에 찬 목소리처럼 들렸다.
“밀어!”
- 대굴! 대굴!
- 탁! 툭!
- 키에에엑!
확실히 효과가 있다. 애쉬와 마커스가 굴린 돌이 변이체에게 직접 큰 타격을 주진 못했으나, 중심을 흔들기는 충분했다.
마치 바나나 껍질을 밟은 것처럼 변이체들이 허둥거리다가 경사면 아래로 굴러 떨어졌다.
“잘했어! 마커스! 이렇게 하면 되는 거야!”
“그래! 하는 데까지 해 보는 거야! 까짓것 죽기밖에 더 하겠어!?”
보잘것없는 작은 승리. 그런데도 힘이 난다. 결사항전을 외치던 애쉬는 물론이고, 자포자기에 빠졌던 마커스도 눈앞에 보이는 성과에 고무됐다.
변이체에 대항할 인원이 5명에서 2명으로 줄었지만, 2배 이상 빠르게 움직이면, 막을 수도 있을 거라는 희망이 생겼다.
- 대굴! 대굴!
- 우당탕!
마음은 행동의 변화를 불렀고, 이어서 결과를 만들어 냈다. 평소 운동량을 월등히 뛰어넘는 마커스의 활약에 힘입어, 몰려오던 변이체 11마리를 경사면 아래로 밀어낼 수 있었다.
그러나 동시에 피로가 증가한다는 부작용이 있다. 아드레날린 분비로 당장 느끼지 못하는 순간에도 체력을 갉아먹는 피로가 차곡차곡 쌓여 갔다.
- 헉! 헉!
“애쉬! 나는 틀렸어! 더 이상 몸이 움직이지를 않아!”
“앉아서 근육 풀어! 내가 어떻게 해서든 막아 볼게!”
드디어 한계가 왔다. 변이체 25마리를 밀어낸 시점에서 마커스의 근육이 비명을 지르며 굳은 것이다.
애쉬는 마커스를 타박하지 않고 몸을 추스르라고 배려했다. 최선을 다했다는 걸 아니까.
하지만 상황은 녹록지 않다. 아니 실상을 말하면 절망적이다. 애쉬 일행이 보유한 강력한 무기 플라즈마 총은 이미 동력을 다 쓴 상태다.
가지고 있는 무기는 전기충격봉이 고작. 아무리 경사지라고 하지만, 애쉬 한 명이 다가오는 변이체를 모두 상대하기 역부족이다.
게다가 더 큰 문제는 경사지 아래로 굴러 떨어졌던 변이체들이 전열을 추스르고, 다시 꾸역꾸역 올라온다는 점이다.
- 지지직!
- 꾸에에엑!
- 휙!
- 우당탕!
“꺄악!”
애쉬가 전기충격봉을 사용해 변이체 3마리를 연속해서 경사지 아래로 밀어냈다. 그리고 4번째 변이체의 일격을 받았다.
공격을 전기충격봉으로 가로막아 즉사는 면했으나, 3m 이상 튕겨 나가며 쓰러졌다.
전투 불능 상태.
애쉬는 입에서 침을 질질 흘리며 다가오는 변이체를 보고 두 눈을 질끈 감았다. 마커스가 말한 포기의 순간이 온 것이다.
디온의 모습이 떠오른 애쉬의 두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 쉐에엑!
- 팍!
- 화르르!
- 키에에에엑!
죽음을 각오한 애쉬의 귀에 예상치 못한 파공음과 비명이 들렸다. 그리고 화들짝 놀란 애쉬의 눈에 화살을 맞고 불타오르는 변이체의 모습이 들어왔다.
변이체는 고통에 찬 비명을 지르며, 두 주먹을 휘두르다가 경사지 밑으로 굴러 떨어졌다.
누군가가 애쉬의 목숨을 구한 거다.
- 쫙!
- 써걱!
- 화르르!
하지만 놀라기는 아직 이르다. 경사면을 올라오던 변이체들의 몸통을 무언가가 잘라 버리고, 불을 붙였다.
변이체가 거동이 불편한 경사면에 있다고 하지만, 저토록 쉽게 당할 거라고 생각도 못 했다.
* * *
경사면을 올라오던 변이체 30여 마리가 순식간에 제거됐다.
아직 변이체가 남아 있지만, 급한 불을 끈 창수는 투명 상태를 해제하고 전투 불능 상태에 빠진 애쉬와 마커스에게 다가갔다.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덕분에 살았습니다!”
“어려울 때 서로 도와야죠.”
“중앙사무국에서 나온 분이 아니군요.”
매도우 시티에도 투명화가 가능한 스텔스 전투복이 있다. 매우 귀한 것으로 보유한 사람이 극소수에 불과한 귀물.
애쉬는 투명 상태로 변이체를 처단한 창수가 중앙사무국 소속 특작부대원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체포당해 처벌받는 걸 각오했다. 자신의 행동이 불법이라는 것을 알기에.
하지만 창수의 말을 듣고 특작부대원이 아니라는 것을 알아차렸다. 자신을 범죄자 취급 하지 않고, 존중하는 모습을 보였기 때문이다.
“디온이 걱정해서 찾아왔습니다. 저는 중앙사무국 소속이 아닙니다.”
“디온이요!? 제 아이의 부탁을 받고 오셨다는 말씀인가요? 흑흑흑!”
생각지도 못한 행운이다. 애쉬는 디온을 세상 풍파에 맡길 수 없다는 일념으로, 변이체와 불가능에 가까운 싸움을 벌였다.
그런데 그녀의 아이가 초인적인 능력을 갖춘 조력자를 보내온 거다. 감동이 밀물처럼 몰려와 눈물이 흐르게 만들었다.
“맞습니다. 그리고 제라드 어르신도 걱정을 많이 하고 있습니다. 밤에 외벽 밖으로 나가다가 폐렴까지 걸리셨죠.”
“어떻게 그런 일이…….”
창수는 처음 디온을 만난 일과 제라드의 상황을 자세히 설명했다.
애쉬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가족이 겪게 된 위험에 놀랐다. 그리고 위험을 모두 제거해 준 창수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지게 됐다.
마커스 역시, 창수에게 감격하는 모습을 보였다.
“감사드립니다. 헤라를 다시 볼 수 있다니, 정말 꿈만 같습니다. 은인께 반드시 보답하겠습니다.”
“보답을 바라고 한 일은 아닙니다.”
“아닙니다. 제가 도움이 될 겁니다. 지금 은인께서 착용하고 계시는 장비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