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화 50장. 또 다른 세상 Earth
2.
송연희의 말에 따르면, 통행권 하나로 평행우주 여러 곳을 이동하기 어렵다고 한다. 횟수가 증가할수록 통로를 여는 감정 소모량이 급격히 증가하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용한 감정의 3배가 모여야 두 번째 통로를 열 수 있다. 그리고 세 번째 통로를 열려면, 다시 3배가 필요하다.
통행권 하나를 계속 사용하면, 통로를 열 때마다 1, 3, 9, 27, 81배……. 기하급수적으로 감정 소모량이 증가한다.
지금 창수가 51구역에 있는 통로로 넘어가면, 송연희와 같이 테라로 가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어떻게 해서든 돌파구를 마련해야 해. 지구에서는 답이 없어.’
창수는 김근홍의 도움을 받아 골렘을 강화할 신물질을 백방으로 찾아봤다. 일본에서 싹쓸이한 기업 65개 중 소재 관련 기업이 7개에 달하기에 성과를 기대했으나, 쓸 만한 것이 없었다. 세계적인 소재 기업을 찾아봐도 마찬가지.
현재 지구상에 존재하는 물질로 골렘 성능을 향상할 수 없다는 걸 인정하고, 평행우주 너머 다른 세상으로 가야 한다고 결론 내린 거다.
지구, 혼원구, 테라가 아닌 제4의 평행우주 세상이 필요하다. 그리고 후보지로 떠오른 곳이 빅벤 본부와 레드실드 본부였다.
‘드루이드 마법으로 돌쇠를 당해 내지 못했어. 게다가 레드실드 골렘은 너무 허약해. 가능성 있는 건 이곳뿐이야. 과학기술에 기대해 볼 수밖에 없어.’
빅벤과 레드실드가 대단한 전력을 가진 건 사실이지만, 창수의 눈높이에는 한참 모자란다.
창수가 51구역에 온 이유는, 미국이 영국 식민지에서 세계를 호령하는 초강대국으로 성장한 원동력이 여기서 나올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특히, 세계를 선도하는 과학기술에 주목했다. 미국은 1870년대 시작한 전기-화학 혁명을 주도했다.
그 이후 자동차 시대와 컴퓨터 시대를 만들었고, 인터넷과 4차 산업혁명 시대에서도 압도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다.
1870년대 이후 세계 과학기술을 이끌고 있는 국가가 미국이다.
‘아끼면 쓰레기 되는 거야. 질러 보자!’
- 척!
고민을 길게 한다고 문제가 해결되는 건 아니다. 창수는 언제나 그렇듯 자신의 판단을 믿고 바위에 오른손을 올렸다.
- 슥!
순간 눈앞이 깜깜해지는 블랙아웃 현상이 나타났다. 북한산에서 혼원구 한양으로 이동할 때와 정확히 같은 현상.
창수가 두 번째 평행우주 너머 세상에 발을 디딘 것이다.
‘경비가 삼엄하군. 일단 움직이지 말고 대기시간을 기다리자.’
창수가 도착한 곳은 가로 20m, 세로 20m, 높이 5m 크기의 넓은 방이었다. 내부에는 단 한 명도 배치돼 있지 않지만, 방 외부 4면에 2m 간격으로 경비병이 배치돼 있었다.
창수 이전에 통로를 이용한 인물이 철저한 방어선을 구축한 것이 분명하다.
상대방이 어떤 함정을 파 놓았는지 알 수 없다. 지금 중요한 건 퇴로를 확보하는 일. 창수는 평행우주 통로를 다시 이용할 수 있는 한 시간 동안 미동도 하지 않았다.
‘완전히 요새처럼 만들었군, 블링크를 사용해도 경비병을 따돌릴 수 없겠어.’
대기하면서 단전에 담긴 200년 내공을 온전히 사용해 북명신공을 펼치자, 주변 상황을 보다 명확하게 파악할 수 있게 됐다.
방 주위로 최소 4중 방어선이 펼쳐져 있고, 경비병 수백 명이 배치돼 있다. 투명 상태에서 15m 공간을 뛰어넘는 블링크 마법을 사용한다고 해도, 경비병의 이목을 피한다는 확신이 서지 않는다.
‘그냥 돌파할까? 아니야. 너무 무모한 짓이야. 그렇다면, 경비병이 교대하는 시간을……. 아! 저기로 가면 되겠군!’
바위가 놓인 방위에 여러 층이 있었다. 평행우주로 이동할 수 있는 통로 위에 건물을 건설한 듯하다.
1층을 제외한 각 층은 3m 높이였고, 경비병들이 배치돼 있다. 그러나 위층으로 올라갈수록 인원 수가 줄었다.
4층에는 배치된 인원이 9명에 불과했고, 이동도 자유로운 듯 보였다. 창수는 방금 한 명이 자리를 비운 곳을 집중했다.
‘좋아! 가자!’
- 블링크!
- 슉!
셀 수 없이 많은 연습을 통해 얻은 거리 감각으로 사람이 있던 곳에 정확히 이동했다.
‘집무실이군. 독방을 쓰는 걸 보니, 지위가 높은 것 같아.’
꽤 넓은 사무실에 빈자리가 하나 있었다. 전체적으로 럭셔리한 내부를 보아, 방주인이 중간 관리자 이상은 될 듯하다.
그렇다면 해야 할 일은 뻔하다.
- 슥!
사무실 안에서 30분가량 대기하고 있을 때, 남자 한 명이 돌아왔다. 몸에서 나오는 미세한 기운을 보아, 방 주인이 분명하다.
- 퓩!
투명 상태로 잠복하고 있던 창수가 기습적으로 움직여 남자의 뒷목에 무언가를 집어넣었다.
워낙 순식간에 벌어진 일이라, 방 주인은 저항은커녕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알지 못했다.
“당신 이름이 뭐요?”
“드와이스 커티스입니다.”
“여기는 어디고? 당신 직위는 어떻게 되오?”
“매도우 시티입니다. 저는 중앙사무국 집행관입니다.”
창수가 드와이스 커티스의 뒷목에 집어넣은 건 마인드컨트롤 아티팩트였다. 마나 사용자가 아니고, 평범한 정신력을 보유한 집행관은 저항하지 못하고 창수가 묻는 말에 순순히 답했다.
“매도우 시티가 어떤 곳인지 구체적으로 말해 보시오.”
“이곳은 변이체를 피해 사막에 세워진 도시입니다.”
“변이체? 그게 뭐요?”
“제약 회사에서 불법 생체 실험을 하다가 버린 클론입니다. 지능을 잃고 몸만 살아서 움직이던 것들이 170년 전쯤 조직적으로 움직이면서 인간을 공격하기 시작했습니다.”
“좀비라는 거요?”
“좀비와 비슷하지만, 훨씬 무섭습니다. 바위를 맨손으로 부수는 괴력을 가지고 있고, 변종은 날아다니기도 합니다. 변이체 때문에 Earth 인구가 90% 감소했습니다.”
창수가 두 번째로 방문한 평행우주 ‘Earth’는 혼원구와 다르게 인류의 생존이 벼랑 끝에 몰려 있는 곳이다.
생명공학 기술이 발전하면서 복제 인간을 만들 수 있게 됐고, 그걸 악용해 신약 임상 실험 비용과 시간을 단축했다.
그리고 그 결과로 인간이 맨몸으로 상대할 수 없는 괴물이 탄생했다. 수많은 인간이 변이체의 공격에 죽어 나갔고, 살기 위해 도주한 곳 중의 하나가 사막이다.
“피난처를 사막에 건설한 건, 변이체들이 사막을 꺼려 하기 때문이오?”
“그렇습니다. 변이체는 4시간에 한 번 물을 마셔야 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격한 갈증을 겪고, 심하면 죽기도 합니다.”
“이곳 인구는 얼마나 되오?”
“정확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대략 150만 명으로 집계하고 있습니다.”
“파악이 안 되는 이유는 뭐요?”
“그건…….”
상대를 제대로 골랐다. 중앙사무국 집행관은 한국 공무원 국장에 해당한다. 매도우 시티 행정 실무를 관장하기에 많은 정보를 알고 있었다.
창수는 매도우 시티에 대한 질문을 시작으로, 이곳에서 통용되는 화폐와 생활양식, 치안 상태, 과학 수준 등… 다양한 질문을 했고, 유용한 정보를 다수 얻을 수 있었다.
* * *
1월 5일 오전 7시, 드와이스 커티스가 구해 온 옷과 약간의 현금을 받은 창수가 중앙사무국 건물을 빠져나왔다.
‘이곳 과학기술이 지구보다 월등히 앞서는군.’
중앙사무국은 매도우 시티의 행정과 치안을 담당하는 핵심 기관이다. 이곳을 중심으로 지름 3km, 면적 7km² 크기의 내부 시가지가 조성돼 있다.
‘코어’라고 불리는 내부 시가지는 높이 1,100m가 넘는 초현대식 건물로 가득했다. 지상은 수평형 무빙워크가 설치돼 힘 안 들인 채 이동할 수 있고, 지상 50m 이상 높이부터 플라잉카가 건물 사이를 오갔다.
그리고 놀라운 건 코어 전체가 투명한 에너지실드로 덮여 있다는 것. 비행하는 변이체의 공격을 막기 위한 장치다.
지구 과학기술과 견주어 최소 170년은 앞선 것이 확실하다.
‘이쯤이 좋겠어.’
코어에는 행정관청과 고급 생산 시설, 상류층을 위한 거주지 등이 있다. 당장 신분증을 만들 수 없는 창수가 머무르기 어려운 곳.
코어 밖은 생산 구역과 상업 구역이 띠처럼 둘러싸고 있다. 폭 1km, 면적 12.6km². ‘메이커’라 불리는 이 지역은 돈만 있으면, 신분증 없이도 지낼 수 있다.
걸림돌은 코어와 메이커를 연결하는 출입구가 오전 10시에 열린다는 것. 그리고 신분증이 있어야 출입할 수 있다는 것이다.
- 블링크!
- 슉!
하지만 블링크 마법이 있는 창수에게는 사소한 귀찮음에 불과하다. 창수는 인적이 없는 지점을 고른 뒤, 코어 밖 메이커 지역으로 이동했다.
‘헐! 블레이드 러너가 여기를 본뜬 건가?’
1982년 개봉된 SF 사이버펑크 영화가 창수의 눈앞에 펼쳐졌다. 컴퓨터 기계와 네온사인 그리고 암울함이 적당히 섞인 곳으로, 마치 영화 세트장을 가지고 온 듯한 모습이다.
초현대식 건물과 깔끔함을 가지고 있는 코어 지역과 완전히 다른 세상.
그도 그럴 것이, 메이커는 하늘을 제대로 볼 수 없는 쇼핑몰과 같은 곳이다. 에너지실드를 사용할 여력이 없기에, 두꺼운 천장으로 변이체의 침입을 막고 있다.
메이커의 건물은 일률적으로 100m 높이까지 올라가 있고, 건물을 기둥 삼아 천장이 덮여 있다.
군데군데 변이체가 침입할 수 없는 넓이로 채광창을 만들었으나, 햇볕 들어오는 양이 절대적으로 적을 수밖에 없다.
24시간 네온사인이 켜져 있음에도 스산한 분위기가 나는 이유가 바로 이것.
‘평판 좋은 전당포를 찾아봐야겠군. 활동하려면 돈이 필요하니까.’
드와이트 커티스가 준 정보에 따르면, 메이커에서 물건을 사고팔거나 돈을 융통하는 용도로 전당포가 성행하고 있다고 한다.
은행도 있지만, 신분증이 있어야 하기에 당장 이용할 수 없다.
수많은 국가를 여행한 경험이 있는 창수는 이곳 전당포 기능을 단숨에 알아차리고 적극적으로 활용하려 했다.
그리고 바가지 쓰지 않는 비결도 알고 있다. 창수는 집행관이 준 약간의 돈을 사용하며, 상인들로부터 전당포 정보를 얻기 시작했다.
* * *
‘Old friend pawn shop이라……. 이름이 구수하군. 여기로 가 볼까.’
두 시간 정도 발품을 파니, 평판 좋은 전당포 이름 5개 정도를 알게 됐다. 그중에서 가장 마음에 든 곳이 ‘죽마고우 전당포’라는 곳이다.
정말 죽마고우는 아니겠지만, 오랜 친구를 대하듯 손님을 대하는 곳이라고 칭찬이 자자한 전당포다.
창수는 최소한 호갱은 안 당할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죽마고우 전당포 안으로 들어갔다.
“10실링만이라도 주세요! 할아버지 약값이 부족해서 그래요!”
“얘야, 사정이 딱한 건 아는데, 저번에 준 것도 다른 곳보다 30% 더 준 거야. 더 이상은 어려워.”
“아저씨 제발요! 엄마가 돌아오면, 다 갚을게요!”
“아이고……. 이것 참…….”
12~13살 정도로 보이는 남자아이가 다급한 목소리로 전당포 주인에게 급전을 청했다. 이전에 맡긴 물건이 있는데, 10실링(10달러)을 더 빌려 달라고 하는 거다.
마음씨 좋은 전당포 주인은 이미 정상적인 담보가보다 후하게 쳐줬기에, 아이에게 돈을 줄 수 없는 처지다.
10실링이 별거 아닌 금액이지만, 이런 식으로 전당포를 운영하면, 파산에 이를 수 있다는 것이 문제다.
- 저 녀석 뭐야? 생떼를 부려도 봐 가면서 부려야지?
- 그러게 말이야. 저런 녀석이 많아지니, 점점 양심적인 전당포가 설 자리를 잃는 거야.
- 빈민굴 놈들은 저게 문제라니까.
전당포에서 순서를 기다리고 있던 손님들이 이구동성 아이를 비난했다. 터무니없는 요구라고 생각한 것.
그리고 그 터무니없는 요구에 전당포 주인이 시달리느라, 자신들의 차례가 오지 않는다는 것에 짜증을 냈다.
손님들의 비난이 아이 귓속까지 들려오고, 아이의 눈에서 왈칵 눈물이 쏟아졌다.
“얘야, 할아버지가 어떻게 아프신 거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