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7화 49장. 송연희의 정체
6.
송연희는 장거리 공간 이동 마법을 사용해 세피아의 마도공학 연구소로 날아갔다. 그리고 중앙에 배치된 책장에서 골렘 제작과 관련된 정보를 확보했다.
세피아 이외에 단 두 명만 출입할 수 있어, 연구소가 약탈당하거나 훼손당하지 않았다. 이것이 온전한 정보를 얻을 수 있었던 이유.
그러나 좋은 일만 있었던 건 아니다. 연구소에 골렘 제작에 필요한 재료가 전혀 남아 있지 않았다.
아마도 세피아가 테라로 돌아가기 전에 사용할 수 있는 모든 재료를 짜내서 골렘을 만든 것이리라.
골렘 제작에 필요한 재료를 모으는 것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적지 않은 시간이 걸린다. 하는 수 없이 송연희는 창수가 소유한 골렘을 업그레이드하기로 결정했다.
창수는 단숨에 선양으로 달려가 녹색마탑에서 개조 중이던 골렘을 회수한 뒤 송연희에게 맡겼다. 그리고 99.999994% 초고순도 은을 비롯해 필요한 물품을 지구에서 조달했다.
골렘 업그레이드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6서클 마스터 송연희의 능력과 창수가 마련한 뛰어난 재료를 바탕으로, 기존 능력보다 5배 이상 향상한 골렘으로 재탄생시킬 수 있었다.
“저 석상이 테라로 가는 통로야?”
“예. 여기서부터 조심해야 해요. 무단 침입 하면 경비 골렘이 나타나요.”
“어차피 그놈을 잡아가려고 온 거잖아. 돌쇠의 힘을 믿을 수밖에 없지.”
2023년 11월 27일, 창수와 송연희가 히말라야산맥 인근에 위치한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외부인의 접근을 막는 경비 시스템이 있다. 테라에서 평행우주를 넘어온 12명을 제외한 외부인이 접근하면, 골렘이 나타난다.
이 시스템과 골렘은 세피아가 만든 것이다, 송연희는 경비 골렘을 제압한 뒤 창수가 가지고 온 재료를 투입해 업그레이드할 계획이다.
걸림돌은 통로를 지키는 골렘이 세피아의 명령만 듣는다는 것. 송연희를 먼저 공격하지 않지만, 포획하려 들면 반격하기에, 부득이 창수의 골렘 돌쇠를 동원해서 제압하려는 거다.
- 쿠워워!
창수가 석상에 접근하자, 땅속에서 골렘이 튀어나와 포효를 질렀다. 이쯤에서 돌아가는 것이 신상에 좋을 거라고 협박하는 듯 보였다.
- 슥!
“돌쇠야, 저놈을 제압해.”
- 쿠워워워!
- 쿵쾅! 쿵쾅!
창수는 경비 골렘의 경고를 가볍게 무시하고, 마법자루에서 돌쇠를 꺼냈다. 그리고 경비 골렘을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주인의 명령을 알아들은 돌쇠가 괴성을 지르며, 경비 골렘에게 다가갔다. 접근하는 모습이 위풍당당하다. 경비 골렘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모습.
- 휘익! 휘익!
- 쾅! 쾅!
골렘의 싸움은 단순하다. 강력한 위력을 가진 양팔을 휘둘러 적을 분쇄하는 것.
마도공학자 세피아가 만든 돌쇠와 경비 골렘이 정면으로 맞붙어 동일한 방식으로 상대를 공격했다. 따지고 보면 서로 형제 관계이니, 비슷한 방식으로 싸우는 것이 당연하기는 하다.
“저놈 전투력이 만만치 않은데.”
“예상보다 두 배는 강해요. 왜 저렇게 강한지 모르겠어요.”
돌쇠가 경비 골렘보다 강한 건 확실하다. 그러나 전투력 차이가 생각보다 적다. 전투가 시작하기 전 예상은 경비 골렘 전투력이 돌쇠의 40%에 불과할 거라고 봤다.
실제 나타난 결과는 돌쇠 전투력의 80%에 달한다. 송연희는 예상치 못한 결과가 나타난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당황하는 모습을 보였다.
“최신 기술이 따로 있는 것 아닐까?”
“더 강력한 골렘을 만드는 방법이 있다는 건가요?”
“그렇게 생각할 수밖에 없어. 같은 방식으로 골렘 성능을 두 배 강화하는 건 정말 어려운 일이야.”
“언니 연구실로 돌아가서 비밀금고가 있는지 살펴봐야겠네요.”
“좋은 생각이야. 그리고 세피아가 연구한 다른 기술도 살펴봐. 어쩌면 그 안에 강력한 골렘을 만드는 비법이 숨어 있을 수 있어.”
“아! 그럴 수도 있겠네요!”
송연희가 뛰어난 마법 능력과 지식을 보유하고 있으나, 시야가 좁다는 약점을 가지고 있다. 10세 어린아이로 성장이 멈춘 것이 원인.
반면, 수많은 모험과 여행을 통해 넓은 시야를 가지게 된 창수는, 세피아가 마지막 심득을 문서로 남기지 않았을 가능성이 있다고 봤다.
비밀금고를 만들고 철저히 숨긴다고 해도, 애초에 만들지 않는 것보다 보안이 취약하기 마련이다.
창수는 대안으로 마도공학자 세피아가 진행한 여러 가지 연구를 통해, 마지막 심득을 유추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 *
- 쾅! 쾅!
- 우당탕!
- 쿠워워워!
돌쇠가 경비 골렘을 제압하는 데 걸린 시간은 40분. 10분 안으로 끝낼 수 있다고 예상한 것보다 4배 더 긴 시간이 소요됐다.
“돌쇠만으로 제국 병력을 상대하기 어렵겠지?”
“세피아 언니가 골렘 5대를 가지고 테라에 갔어요. 돌쇠 4대가 있어도, 제국에게 안 되는 거죠.”
“해결 방법이 많지 않겠군.”
“제국을 이길 방법은 있는 거예요?”
“돌쇠 수를 수십 대로 늘리는 것, 세피아의 최신 기술을 찾는 것 그리고 더 나은 재료를 찾는 것. 얼추 생각하면 3가지 정도야.”
“모두 어려운 일이군요.”
“그렇지. 하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니야. 시간을 가지고 차근차근 준비하자. 조급해하지 말고.”
전투 결과가 탐탁지 않지만, 절망적인 건 아니다. 창수는 어떤 방법을 사용하든지, 세피아가 준비했던 전투력보다 최소 5배는 강해야 테라에서 통로를 지키고 있는 제국 병력을 상대할 수 있을 거라 판단했다.
그때가 오기 전까지, 송연희는 테라로 넘어가서는 안 된다.
“알아요. 400년을 기다렸는데, 조금 더 기다리면 어때요. 경비 골렘 가지고 궁으로 돌아가요.”
“그래. 저놈을 개조하다 보면 좋은 일이 생길지도 몰라.”
송연희의 말에 허무함이 가득하다. 창수는 그걸 알아보고 위로의 말을 건넸고, 송연희는 순순히 받아들였다.
어쨌든, 지금 해야 할 일은 돌쇠가 쓰러트린 경비 골렘을 수거한 뒤 업그레이드하는 것이다.
창수와 송연희는 널브러진 경비 골렘을 향해 천천히 걸어갔다.
그리고.
- 부르르!
“응? 뭐지?”
“아저씨, 왜 그러세요?”
“갑자기 지갑이 떨리는데. 이상한 일이야.”
“지갑 줘 보세요.”
쓰러진 경비 골렘을 2m 앞둔 지점에서, 창수의 지갑이 요란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마치 생명력을 가진 것처럼 떨고 있다.
별의별 일을 다 겪어 본 창수에게도 처음 경험이라 얼떨떨한 기분이다. 반면, 송연희는 무언가 짐작이 가는 일이 있는 듯, 담담하게 지갑을 보자고 말했다.
- 슥!
“통행권이 반응을 보인 거예요.”
“통행권? 그게 뭐야?”
“다른 세상으로 가려면 감정이 담긴 통행권이 있어야 해요.”
“너도 통행권을 가지고 있니?”
“아니요. 드루피스 오빠가 가지고 있어요.”
“그러면, 너는 테라로 가지 못하는 거야?”
“그렇지는 않아요. 통로에 처음 들어갈 때, 통행권이 필요해요. 한번 가 본 통로는 통행권이 필요 없고요.”
몰랐던 정보다. 평행우주를 넘어가려면 징표가 있어야 한다. 송연희는 창수의 지갑을 보자마자, 그 안에 통행권이 있다고 말했다.
“글쎄……. 지갑 안에 특별한 것이 없는데, 무얼 보고 통행권이라는 거지?”
“열어 보면 알겠죠.”
- 척!
“이거예요. 이게 통행권이에요.”
“뭐라고!? 로또가 통행권이었어!?”
요즘 놀랄 일이 많이 일어났지만, 단연코 지금처럼 창수가 놀란 적이 없다. 송연희가 통행권이라고 지목한 것이, 999회차 로또였기 때문이다.
2022년 1월, 술김에 998회 당첨 번호로 999회차 로또를 샀다. 당첨을 철석같이 믿고 있던 창수는 999회차 로또가 바람에 날아가자, 위험한 경사지로 뛰어들었다.
그 뒤 낙엽 밑 얼음에 미끄러져 가파른 경사지 아래로 밀려 내려갔고, 바위와 충돌하면서 평행우주를 넘어 혼원구 세상으로 오게 됐다.
그리고 얼마 후, 목숨을 걸고 지켰던 999회차 로또가 꽝이라는 걸 알게 됐고, 허탈해하면서도 액땜한 것이라 여기고 부적처럼 지갑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런데 999회차 로또가 평행우주를 넘을 수 있게 한 통행증이라니?
창수는 말로 설명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을 느끼게 됐다.
“로또가 뭐예요?”
“지구에서 흔하게 사용하는 복권이야.”
“좀 더 자세하게 말해 주세요. 이걸 어떻게 구했어요?”
“그건…….”
송연희는 복권이라는 말에 눈을 반짝였다. 창수는 송연희의 관심이 부담스러우면서도 999회차 로또에 대한 이야기를 처음부터 끝까지 자세히 설명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하면, 창피한 내용이 적지 않지만, 평행우주를 넘을 수 있는 통행권과 관련된 것이기에, 숨김없이 모든 것을 말했다.
“복권에 절망의 감정이 쌓이면서 통행권이 된 거예요.”
“내가 그때 절망적이었던 건 맞아. 하지만 나보다 더 절망적인 사람이 많았어. 왜 내가 산 복권이 통행권이 된 거지?”
“정확히는 모르겠어요. 하지만 짐작 가는 건 있어요. 이 복권은 바로 직전 당첨 번호와 같아요. 아쉬움이 깊은 거죠. 그리고 1,000회가 아니라 999회라는 게 감정을 모은 것 같아요.”
테라에서 알려진 거의 모든 지식을 축적한 공화국연합 아카데미에는 평행우주에 대한 자료도 있었다.
송연희는 그 지식을 바탕으로 999회차 로또가 다른 세계로 넘어가는 통행권이 된 이유를 설명했다.
그러나 평행우주와 관련된 것이 워낙 희귀한 일이기에, 모은 정보의 양과 질에 한계가 있다.
송연희는 자신이 정확히 알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짐작’이라는 걸 명확히 밝혔다.
“음……. 우연이 겹쳐서 만들어진 거군.”
“그렇게 봐야죠.”
“그런데 왜 로또가 여기서 반응을 보인 거지? 아직도 절망의 감정이 남아 있는 거야?”
“아니요. 지금 이 복권에 담긴 감정은 고마움과 신뢰예요. 아저씨가 어려운 사람 도와주고 일자리 마련해 준 게 여기에 쌓인 것 같아요.”
“오묘하군. 알면 알수록 더 아는 게 없는 것 같아.”
“통행권은 아카데미 학장님도 정확히 알지 못해요. 아무튼, 중요한 건 이 통행권으로 다른 세상을 한 번 더 갈 수 있다는 거예요.”
통행권을 사용하면, 담겨 있던 감정이 소모되면서 평행우주로 넘어가는 통로가 활성화된다.
그리고 활성화된 시간부터 1시간 이내에 평행우주로 진입한 생물은 숫자와 관계없이 통로를 계속해서 이용할 수 있다.
하지만 1시간이 지나면 통로가 막히게 된다. 다시 통로를 여는 방법은 새로운 통행권을 사용하는 것뿐이다.
창수가 보유한 999회차 로또는 1차로 절망의 감정을 소비한 이후, 다시 감사와 신뢰의 감정을 축적했다.
두 번째 평행우주로 여행하는 길이 열려 있는 거다.
“나도 테라에 갈 수 있는 거야?”
“갈 수 있어요. 하지만 그러지 마세요. 너무 위험한 곳이니까요.”
“하긴, 제국 병력을 이기는 힘을 기르기 전까지, 테라에 가서는 안 되겠지.”
“맞아요. 먼저 힘을 길러야 해요.”
창수가 골렘 업그레이드에 집중하는 이유는, 송연희가 안전하게 테라를 방문할 수 있도록 만들기 위함이다. 그것이 그녀에게 받은 도움을 되갚는 길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창수도 테라로 넘어가는 방법이 생겼다. 송연희를 혼자 보내지 않아도 되는 거다.
간접적으로 돕는 것이 아니라 직접 도울 수 있게 됐다. 하지만 서둘러서는 안 된다. 테라로 돌아간 10명이 다시 혼원구로 오지 못한 것처럼, 창수도 테라에서 빠져나오지 못할 가능성이 매우 크기 때문이다.
창수는 충동적인 감정을 가라앉히고, 냉철한 자세로 미래를 기약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