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6화 49장. 송연희의 정체
4.
잠자코 대화를 듣고 있던 송연희가 나섰다. 국왕과 대비가 건설적인 대안을 만들 수 없다 여기고 개입한 것이리라.
“마법사님, 이 사람은 화영 공주를 거절했습니다. 귀하게 쓸 방법이 없습니다.”
“그건 억지로 장가보내려는 거고요. 일을 맡기세요. 김창수 대표가 녹색마탑과 공동으로 작물 생산 늘리는 연구를 하고 있어요. 그리고 조선에 황탄을 싼값에 공급하고 있잖아요.”
송연희는 창수의 움직임을 제대로 파악하고 있었다. 메이저 마탑에서 정보를 얻은 거다. 6서클 마스터는 마법사들에게 추앙받는 존재. 창수와 관련된 정보를 어렵지 않게 구할 수 있었다.
대비 김의정이 창수를 정치적으로 이용하려다가 실패한 뒤에 감정이 좋지 않다는 걸 송연희도 알고 있다. 그러나 조선을 위해 창수의 힘이 필요하다고 생각하며, 중용하라고 압박했다.
“억지 장가요? 화영 공주가 마법사님 말을 전해 들으면, 매우 슬퍼하겠군요.”
“공주님도 능력 있는 남자가 부마로 묶이는 걸 원치 않아요.”
“왜 그렇게 확신하시죠?”
“공주님에게 직접 들은 이야기에요. 출중한 인재가 아니라 평범한 남자와 결혼하고 싶다고 했어요.”
“화영 공주가 세상 물정을 아직 몰라서 그런 겁니다. 철이 들면 달라질 겁니다.”
“아니요. 시집간 공주님들도 화영 공주님과 같은 생각이었어요. 여태까지 공주님들은 다 그랬어요.”
“흐흠…….”
400년 전 역적 능양군 일당을 처단하고 왕권을 회복한 광종(광해군)은 송연희를 양녀로 삼고 공주 지위를 줬다.
근본을 알 수 없는 외부인을 존귀한 반열에 올린 것에 불만을 품은 신료들이 다수였으나, 송연희는 실력으로 비판을 잠재웠다.
절정의 국력을 자랑하던 금나라의 침략을 막아 내고, 80만㎢에 달하는 광활한 영토를 확보한 1등 공신이 송연희다.
1690년에 광종이 115세 나이로 죽을 때까지, 송연희는 67년간 조선의 공주로 살았다. 그리고 다음 왕 혜종 때 대비급으로 지위가 올라갔고, 왕실 마법사라는 칭호를 받게 됐다.
광종의 손자 혜종이 송연희를 왕가의 웃어른으로 대접한 거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송연희는 조선 왕가 여성 중에서 최고 지위를 유지하고 있다.
대비 김의정이 수렴청정하는 권력자이지만, 송연희의 말을 무시할 수 없다. 속칭 ‘짬’에서 상대가 안 된다.
“어마마마. 마법사님 말씀을 받드시지요. 김 대표에게 식량 생산을 전담하도록 맡기는 것이 좋을 듯합니다.”
“음……. 주상의 뜻이 그렇다면, 말리지 않겠습니다.”
송연희는 국사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 않는다. 몇십 년에 한 번 오늘 같은 형식으로 의견을 내놓는다. 그리고 그 의견은 단 한 번도 헛된 것이 없었다.
왕실 역사를 소상히 알고 있는 국왕 이현은 송연희가 창수를 통해 다가올 식량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고 판단했다.
김의정 역시, 송연희가 미리 짜 놓은 시나리오라고 생각하며, 창수에게 중임을 맡기는 것을 더 이상 반대하지 않았다.
“김 대표, 공조판서직을 맡아 주시오.”
“제가 조선에 머무는 시간은 많지 않습니다. 자리만 차지하고 일 안 하는 사람이 될 가능성이 큽니다. 그렇게 되면 조정에 악영향을 끼칠 겁니다.”
“음……. 그런 면이 있구려.”
“오백세건강을 통해서 생산량이 많은 작물 씨앗을 공급하고, 수확한 농작물을 유통하는 방법이 있습니다.”
“좋소. 그리하시오. 그리고 흥농원 도제조직을 맡아 주시오. 상근직이 아니니 업무 부담이 없을 거요.”
창수는 가능한 한 공직에 나서지 않으려 했다. 필연적으로 벌어지는 권력 싸움에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
이현은 대화를 통해 창수의 의도를 파악하고, 농업 전반을 관장하는 흥농원의 최고직을 수여했다.
도제조는 조선의 주요 기관에 배치된 으뜸 벼슬로 의정부 정승이나 정승을 지낸 사람이 겸임한다.
정1품 관직으로 왕실 이외의 인사가 올라갈 수 있는 최고 자리지만, 실무에 관여하는 일이 많지 않기에, 창수에게 적합한 직책이라 할 수 있다.
창수는 이현의 제안을 받아들이고, 조선에서 식량난이 발생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5.
“연희야, 덕분에 팔자에 없는 벼슬을 하게 됐구나. 그래도 정1품은 과한 것 아닐까?”
“아저씨는 마음만 먹으면 나라도 만들 수 있는데, 도제조가 별거예요?”
“크흠……. 무언가 함정에 말려든 느낌인걸?”
“호호호. 그냥 느낌일 거예요?”
국왕와 대비가 강녕전으로 이동한 뒤, 거실 탁자에 창수와 송연희만 남았다.
창수는 뜬금없이 조선 정치에 한 발 걸치게 된 것을 툴툴거렸으나, 송연희는 노련하게 받아넘겼다. 어린아이의 몸과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만, 400년 이상 살며 연륜이 쌓인 것.
“이제 둘만 있으니, 말 돌리지 않고 물을게. 너도 다른 세상에서 온 거지?”
송연희의 시나리오대로 따라 줬으니, 이제 창수의 궁금증을 해소할 시간이다. 창수는 송연희가 평행우주를 넘어왔다는 걸 알아차리고 직설적으로 물었다.
창수가 평행우주를 넘어온 사실을 국왕과 대비가 알고 있던 건 송연희 때문일 터. 그렇다면, 송연희도 평행우주를 넘어온 것이 분명하다.
“예, 맞아요. 테라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에요.”
“테라는 어떤 세상이야?”
“마법과 정령 그리고 마나가 넘치는 곳이에요. 대신 여기 혼원구와 다르게 과학기술이 거의 발전하지 못했어요.”
“내가 온 지구와 정반대로구나.”
“지구에는 정말 마법이 없나요? 과학기술은 얼마나 발전했어요?”
“혼원구에 처음 건너와서 마법이 실제로 있다는 걸 알았어. 지구에서 마법은 사기로 취급받으니까. 그리고 과학기술은 지구가 여기보다 150년 이상 앞선 것 같아.”
지구, 혼원구, 테라 모두 같은 행성을 가리키면서도 큰 차이가 있다.
지구는 과학기술이 발전한 곳이고, 테라는 마법이 발전한 곳이다. 조선이라는 국가가 건재한 혼원구는 지구와 테라를 섞어 놓은 곳이다.
“150년이요? 엄청난 차이네요. 만약 세피아 언니가 남아 있었다면, 정말 좋아했을 거예요.”
“세피아? 누구지, 처음 듣는 이름인걸.”
“천재 마도공학자에요. 혼원구에서 사용하는 마법물품 절반은 세피아 언니가 만든 거예요.”
“대단한 사람이구나. 한번 만나 볼 수 있을까?”
생각지도 못한 인물을 알게 됐다. 과학기술의 수준이 떨어지는 혼원구 사람들이 지구인 못지않게 편리한 생활을 사는 배경에, 뛰어난 성능을 가진 마법물품이 있다.
세피아라는 인물이 혼원구에서 사용하는 마법물품의 절반을 발명한 마도공학자라면, 지구의 과학기술을 접목해, 월등히 뛰어난 마법물품을 만들 수 있다.
창수의 뇌리에서 미궁 마스터 드루피스에 대한 관심이 뒤로 밀리고, 세피아라는 새로운 인물이 전면에 등장했다.
“세피아 언니는 테라로 돌아갔어요.”
“언제 혼원구로 오지?”
“아마… 다시는 오지 못할 거예요.”
“응? 혼원구와 테라를 연결하는 통로가 막힌 거야?”
의외의 말을 들었다. 창수는 북한산 바위를 통해 자유롭게 지구와 혼원구를 오갈 수 있다.
그런데 혼원구에서 테라로 이동한 세피아가 다시 혼원구로 돌아올 수 없다고 한다. 이건 지구와 다른 시스템이 적용된다는 의미일까?
“통로가 막힌 건 아니에요.”
“그러면 왜 혼원구로 올 수 없는 거지?”
“그건 우리가 테라에서 도망쳤기 때문이에요. 테라를 지배하는 황제가 우리를 잡으려 하고 있어요.”
“우리라면, 너하고 드루피스, 세피아 세 명을 말하는 거야?”
“테라에서 혼원구로 탈출한 사람은 모두 12명이었어요. 이제 드루피스 오빠와 저만 남았지만요.”
“황제는 어떤 사람이지? 그리고 왜 너를 쫓는 거야?”
“황제는 본래 테라에 세워진 공화국연합 의장이었어요. 왕국연맹과의 전쟁에서 승리가 확정되자, 흑심을 드러내고 공화국연합을 제국으로 만들었어요. 저와 언니 오빠들은 공화국연합에서 세운 아카데미 학생들이었고요.”
12개 공화국으로 구성된 공화국연합과 17개 왕국으로 구성된 왕국연맹이 테라에서 500년에 걸쳐 치열한 전쟁을 벌였다.
405년 전, 공화국연합 의장 사이퍼스는 교착 상태에 빠진 전쟁을 끝내기 위해, 전권을 위임받고 강력한 특수부대 울하임을 만들었다.
그리고 약속대로 3년 만에 왕국연맹을 물리치고 항복문서를 받아 냈다.
테라에 살고 있는 많은 사람이 지긋지긋한 전쟁이 드디어 끝났다고 생각하며, 환호했다.
그러나 즐거움도 잠시, 사이퍼스는 울하임을 사용해 정적을 제거하고, 제국을 선포한 뒤 황제가 됐다.
송연희를 포함해 12명은 테라의 마법 지식을 집대성한 아카데미에서 가장 뛰어난 학생들이었다.
아카데미 수뇌부는 테라에서 사이퍼스의 마수를 피할 수 없다 여겼다. 그리고 공화국연합의 명맥을 이을 생각으로, 장래가 촉망되는 12명을 혼원구로 대피시킨 것이다.
“10명이 테라로 돌아간 뒤, 한 명도 다시 오지 못한 거야?”
“예 . 혼원구로 온 지 50년이 지나서, 은신을 잘하는 줄루 오빠가 테라로 돌아갔어요. 하지만 아무런 소식이 없었죠. 그 뒤로 준비를 잘해서 갔는데도 혼원구로 다시 온 사람은 없었어요.”
“통로를 지키는 제국 병력에게 잡혔거나, 통로로 복귀하지 못한 거군.”
평행우주를 넘어가면, 대기시간인 한 시간 동안 통로를 이용할 수 없다. 테라로 돌아갔다가 소식이 끊어진 10명은, 한 시간을 버티지 못한 거다.
“정확히는 모르겠지만, 아주 강력한 힘이 통로 입구를 지키는 게 분명해요. 7서클 마스터, 상급 정령사, 소드 마스터 언니 오빠들이 팀을 만들어 갔는데도 소식이 없어요.”
“헐……. 제국의 힘이 상상 이상이구나.”
상대할 엄두가 나지 않는 가공할 힘이다. 7서클 마스터는 현자로 불리며, 6서클 마스터와 비교해 10배 이상 강하다.
소드 마스터는 화경 고수와 유사한 경지. 그리고 상급 정령의 전투력은 소드 마스터와 견줄 수 있다.
혼원구로 도피한 사람들은 무대책으로 테라에 진입한 것이 아니다. 충분히 대비하고 이동했음에도 평행우주 통로에 배치된 제국의 전력을 당해 내지 못한 거다.
창수가 절정의 경지에 오르고 현대 무기로 무장했으나, 소드 마스터 한 명을 상대할 수 없다. 범접할 수 없는 제국의 힘에 강한 정신적 압박을 느껴야 했다.
“저와 드루피스 오빠, 세피아 언니는 힘을 기르기 전에 테라로 돌아가지 않겠다고 약속했어요. 그러다가 언니가 10년 전에 강력한 골렘을 만든 뒤 테라로 갔어요. 그렇지만 결국, 돌아오지 못한 거죠.”
“골렘? 혹시, 으슥쾰 호수 미궁에 배치된 골렘을 그 사람이 만든 거야?”
“예, 맞아요. 아저씨가 가지고 있는 골렘도 세피아 언니가 만든 거예요.”
“그 사람 연구실이 남아 있니?”
“당연히 있죠.”
“내가 갈 수 있을까?”
“아저씨는 연구실에 들어가지 못해요. 언니가 떠나면서 드루피스 오빠하고 저만 들어갈 수 있도록 보안장치를 만들었거든요.”
“그러면 네가 연구실로 가서 골렘 관련 제작 기술과 재료를 가지고 와. 그것으로 지구 과학기술을 접목할 방법이 있는지 알아볼게.”
“어머! 정말 좋은 방법이에요!”
송연희는 세피아가 창수를 만나지 못한 것을 아쉬워했다. 창수도 세피아를 만나지 못한 것이 애석했다. 하지만 송연희와 달리 애석함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대안을 생각해 냈다.
세피아의 골렘 제작 기술과 지구의 과학기술을 합하면, 보다 강력한 골렘을 만들 수 있을 터.
창수의 계획을 들은 송연희는 그 가능성을 알아차리고, 뛸 듯이 기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