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5화 49장. 송연희의 정체
3.
“드루피스 오빠를 말하는 거군요, 물론 알고 있죠.”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해 줄래?”
창수가 짐작한 대로 으슥쾰 미궁을 만든 마법사는 송연희와 관련이 있었다. 스스럼없이 이름을 말하는 것으로 보아, 비밀을 지켜야 하는 관계는 아닌 듯하다.
창수에게 풀지 못한 난제 1순위가 송연희의 소재를 파악하는 것이었다면, 알고 싶은 1순위는 드루피스라 불리는 인물의 내력이었다.
오늘 송연희를 만나 난제를 풀고, 이어서 궁금증을 풀 기회까지 찾아왔다. 창수는 주저하지 않고 기회를 잡으려 했다.
“이야기가 좀 길어요. 나중에 해 드릴게요. 지금은 거실로 가야 해요. 전하와 대비마마께서 기다리고 계시니까요.”
“알았다. 먼저 그분들을 만나야겠지.”
송연희와 함께 창수를 만나고자 한 인물들은 조선 국왕과 대비였다. 이건 예상한 시나리오의 하나였기에 크게 놀라지 않았다.
일에는 순서가 있는 법. 궁금증을 해소하는 것보다 조선을 통치하는 권력자들을 만나는 것이 우선이다.
창수는 군말 없이 송연희를 따라 거실로 이동했다.
* * *
“국왕 전하와 대비마마를 뵈옵니다.”
“만나서 반갑소. 그런데 궁금한 것이 있소. 이름이 김의방이요? 아니면 김창수요?”
어린이 놀이방처럼 꾸며진 거실에 아담한 탁자가 놓여 있었고, 그곳에 국왕과 대비가 앉아 있었다.
14세 국왕은 짐짓 어른스러운 모습을 하며, 창수에게 빈자리에 앉으라고 권했다. 그리고 처음 물은 것이 창수의 진짜 이름이었다.
“제 이름은 김창수입니다.”
“어째서 김의방이라는 가명을 쓴 거요?”
“제가 조선인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그대는 정녕 다른 세상의 조선에서 온 것이오?”
“다른 세상에서는 대한민국이라 부릅니다.”
“그곳은 어떤 나라요?”
“조선과 다르게 마법이 없는 세상입니다. 그 대신 과학기술이 발달해 있습니다. 또한, 왕실이 존재하지 않고 국민 투표로 지도자를 뽑는 공화국입니다.”
국왕은 창수가 평행우주 너머 세상에서 왔다는 걸 짐작하고 있었다. 창수는 굳이 감추지 않고 사실을 말했다.
그리고 한국의 정치, 경제, 문화에 대해 대략 설명했다.
“우리 조선과 비교해 강역이 1/8에 불과한데, 세계 10위 경제 대국이고, 군사력 6위 강대국이라는 말이오? 믿기지가 않소.”
“국토 면적이 넓은 것은 분명히 강점입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국력이 결정되는 것은 아닙니다. 야쿠트 왕국은 조선보다 면적이 5배 이상 넓지만, 인구가 고작 100만 명입니다. 대한민국은 작은 면적이지만, 인구가 5,100만 명에 달합니다.”
“조선보다 100만 명이 많구려. 좁은 강역에서 나오는 산물로 그만한 인구를 부양하다니, 어떻게 그런 일이 가능하오?”
“이문이 많이 남는 산업이 고루 발달해 있기에 가능합니다. 자동차, 초대형 선박, 첨단산업 제품, 석유화학 제품을 생산해서 연간 6,000억 환을 세계에 판매합니다. 그리고 그 돈으로 필요한 식량과 원자재를 수입하고 있습니다.”
“허……. 6,000억 환, 도저히 믿기지 않는 금액이오.”
“수출만 6,000억 환입니다. 전체 경제 규모는 2조 환이 넘습니다.”
“놀랍구려, 놀라워.”
조선의 영토는 80만㎢에 달한다. 조선 국왕 이현은 한국 면적이 10만㎢에 불과하다는 말을 듣고, 깔보는 자세를 보였다.
하지만 경제와 군사력 그리고 구체적인 산업 지표를 듣고 생각을 바꿔야 했다.
그도 그럴 것이 조선의 연간 수출액은 200억 환에 불과하고, 연간 경제 규모가 2,000억 환에 머물기 때문이다.
한국보다 수출은 1/30, 연간 총생산량이 1/10에 머무는 것이다. 국왕으로서 창피함과 부러움이 동시에 느껴지는 상황.
이현이 할 말을 잃자, 대비가 나섰다.
“그대는 다른 세상에서 어떤 지위를 가지고 있지?”
“공적인 지위는 없습니다.”
“그러면 영지는 가지고 있는가?”
“영지는 아니지만, 한양보다 큰 섬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주도를 말하는 것인가?”
“아닙니다. 무굴과 태국 사이에 있는 섬입니다.”
“흐흠. 경제력은 어떤가? 대한민국에서 몇 번째 부자지?”
“제가 첫 번째입니다.”
“세계적으로는 어떤가?”
“저보다 부자가 없습니다.”
왕과 대비의 관심사가 달랐다. 이현은 한국의 국력에 집중한 반면, 대비 김의정은 창수 개인 재산에 관심을 보였다.
‘큼……. 뭐지? 느낌이 싸한데…….’
데자뷔가 발생했다. 대비와 처음 대화하는 거지만, 어디서 많이 겪었던 상황과 유사한 느낌 같은 느낌이 든다.
“아직 미혼으로 알고 있는데, 우리 화영 공주 어떤가? 올해 19살일세.”
“예!? 공주님이요?”
“부마로 삼겠다는 걸세. 보아하니 다른 세상에도 혼인한 여자가 없을 것 같은데. 화영 공주는 왕실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겨룰 상대가 없는 미인이지. 그대에게 손해 보는 일은 아닐 거야.”
중년 여자가 미혼 남자에게 부동산과 재산을 물어보면, 높은 확률로 사위 삼겠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다.
창수도 본능적으로 그런 느낌이 들었는데, 아니나 다를까 혼인 이야기를 꺼냈다.
게다가 대비는 창수의 뒷조사를 한 것처럼 미혼이라는 걸 간파했다. 아마도 여자의 직감이리라.
이현은 모친이 자신의 면전에서 친누나의 혼담을 논하는 것에 놀랐으나, 차마 입을 떼지 못했다. 아직 14살에 불과한 미성년자가 혼사에 끼어드는 것이 격에 맞지 않는다고 생각한 것.
“대비마마, 과분한 평가 감사합니다. 하지만 불가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이유가 뭔가? 여색을 멀리하는 걸 보면, 축첩을 원해서 부마가 되는 걸 피하는 건 아닐 테고? 그대의 명성을 높이는 데 화영 공주 같은 상대가 없을 건데?”
왕의 자식에도 등급이 있다. 공주는 왕과 왕비 사이에 태어난 적녀로 무품이다. 공주의 남편은 정1품으로 3정승과 동격이다.
매우 존귀한 자리지만, 그에 따른 제약도 만만치 않다. 부마가 되면, 첩을 들일 수 없고, 공주가 요절해도 재혼하기 어렵다.
대비는 부마가 되기를 거절하는 창수에게 이유를 따져 물었다. 바람피우려고 작정한 것이 아니라면, 19세 미인 공주와 혼인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여긴 것.
“공주님과 혼인하는 것은 저에게 영광입니다. 그러나 주상 전하께 정치적 부담을 줄 수 있습니다.”
“흐흠……. 권력에 대한 욕심이 전혀 없군. 여색을 멀리하고 권력을 탐하지 않으면, 도대체 무슨 이유로 재물을 모으는 건가?”
“세상을 주유하면서 사업하는 것이 제 목표입니다. 재물을 모으는 건 부차적인 것입니다.”
“흥! 돈 많은 풍류가로군.”
대비 김의정은 지난 10년간 수렴청정하며, 조선을 실질적으로 통치한 권력자다. 창수가 말하는 정치적 부담의 의미를 정확히 알아들었다.
금력과 무력을 갖춘 창수가 선왕의 적녀와 혼인해 자식을 낳으면, 이현의 지위를 위협하는 인물로 성장할 수 있다.
김의정은 금단의 열매를 단호하게 거부하는 창수가 다루기 어려운 별종이라는 걸 알게 됐다.
“김 대표는 얼마나 많은 나라를 돌며 견식을 쌓았소?”
“100개국은 되는 것 같습니다.”
“그 나라들과 비교해 우리 조선은 어떻소?”
대비가 창수와의 대화에 흥미를 잃자, 국왕이 다시 나섰다. 여러 나라를 견문한 창수의 시각으로 조선을 평가받고 싶어 했다.
“다른 세상의 국가들이라 정확한 비교는 어렵습니다. 대략 살펴보면 중상은 된다고 생각합니다.”
“중상이면 갈 길이 멀구려. 조선이 대한민국처럼 발전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오?”
“식량 생산과 연료 생산에 집중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응? 수출할 수 있는 제품을 만드는 것이 우선 아니겠소?”
이현은 조선을 강국으로 만드는 길이 무역에 있다고 생각하며, 창수가 가진 대책을 우회적으로 물었다.
그러나 창수는 뜬금없이(?) 농업과 에너지산업을 해답으로 내놨다. 살짝 당황하는 조선의 국왕.
“대한민국과 조선은 가진 기반이 다릅니다. 대한민국은 영토가 협소하고 인구가 많아 식량 자급과 연료 자급을 이루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대외무역에 집중해야 합니다. 하지만 조선은 식량을 자급하는 것을 넘어 초과 생산해 수출할 수 있는 여건을 가지고 있습니다. 또한 황탄을 생산하기에 연료 자립도 할 수 있습니다.”
“농업이 천하의 근본이라는 건 알고 있소. 그러나 식량을 많이 생산한다고 해서, 사 갈 나라가 있을 것 같소?”
조선의 1인당 소득은 4,000환(한화 400만 원)에 불과하다. 낮은 국민소득에 기술력이 약한 국가가 단시간에 수출 주도 성장을 하는 건 매우 어려운 일.
반면, 조선의 경작면적은 국토 면적의 22.5%인 180,000㎢로 한국보다 9배 넓다. 녹색마탑과 공동으로 진행하는 농작물 증산 연구가 완료되면, 식량 대량 생산이 가능해진다.
하지만 이현은 식량 수출에 회의적이었다. 수요가 없을 거라 생각한 것.
“전 세계적으로 인구 증가 추세가 가파릅니다. 최근 식량 사정이 좋은 것은 풍년이 계속해서 이어졌기 때문입니다. 행운이 계속되지 않는다면, 5년 안에 대규모 식량난이 올 거라는 분석이 있습니다.”
“그 분석은 누가 한 거요?”
“녹색마탑에서 나온 것입니다.”
녹색마탑은 농업에 특화된 메이저 마탑답게 방대한 양의 농업 관련 정보를 보유하고 있다. 조만간 식량난이 닥칠 거라는 예측도 그중의 하다. 식량이 모자라서 문제지, 판로가 막히는 일은 없을 거다.
창수는 고사누를 통해 이 정보를 접한 뒤, 농작물 증산 연구에 대규모 투자를 해 오고 있다.
“어마마마, 김 대표의 말을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새겨들을 만합니다. 우리 조선도 인구가 가파르게 증가하고 있어요. 지난 5년간 이전보다 많은 수확을 거둔 것도 사실입니다. 이대로 인구가 증가하고 흉년이 든다면, 식량이 부족해질 겁니다.”
“위험한 일이로군요. 중신들은 어찌하여 이 문제를 등한시한 것일까요?”
“2년 전 위험을 고한 상소가 있었습니다. 의정부에 대책을 마련하라고 지시했는데, 예산 부족을 내세우며, 명나라에서 식량을 수입하는 것이 좋다는 결론을 내리더군요.”
“정말 무능한 자들이로군요.”
“모화사상이 골수에 박힌 자들이 적지 않습니다. 주상께서 친정에 나설 때, 꼭 기억해야 할 일입니다.”
김의정이 어린 아들을 대신해 수렴청정하며 최선을 다했으나, 관료 사회를 완벽하게 장악하지 못했다.
왕이 아니라는 권력 정통성의 한계와 여성의 정치 참여를 탐탁지 않게 여기는 성리학의 풍조 그리고 명나라의 문물과 사상을 맹종하는 사대주의가 김의정을 견제했다.
식량문제도 마찬가지, 일부 선각자들이 농업 생산성 향상보다 월등히 앞서는 인구 증가율을 걱정했으나, 명나라에 의지하면 만사가 해결된다는 사고방식을 가진 관료들이 대책 마련을 방해했다.
김의정은 내년에 친정을 시작하는 이현이 그녀가 못 한 일을 바로잡아주기를 바랐다.
“모화사상을 견제한 것이 개화파였습니다. 그런데 그자들이 방자하게도 반역을 일으켰으니, 참으로 난감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주상, 백호대와 충신들을 믿어야 합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조선 사회에 만연한 모화사상이 역으로 조정 내 친일파 준동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창수에 의해 친일파가 몰락한 지금, 사대주의자들이 활개 칠 가능성이 그 어느 때보다 높아졌다.
“주상 전하, 대비마마, 오백세건강 김창수 대표를 귀하게 쓰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