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화 49장. 송연희의 정체
1.
“당신은 누구요?”
“화염문에 몸담고 있는 양카이라고 합니다.”
“화염산에 있는 문파를 말하는 거요?”
“그렇습니다. 투루판 인근에 있습니다.”
내공에 화기가 섞인 것에 이유가 있었다. 화염산은 서유기 손오공이 파초선을 사용해 불타는 산을 껐다는 전설이 있는 곳이다.
길이 98km, 폭 9km, 높이 500m를 가진 붉은 사암으로, 한여름 최고 온도가 70℃까지 올라간다.
화염문은 화염산에서 가장 화기가 강한 곳에 자리 잡고, 극양 계열의 무공을 연마하고 있다. 양카이의 내공에 화기가 담긴 건 자연스러운 일.
양카이의 사문을 알게 된 창수의 입가에 살짝 미소가 그려졌다.
“화염문은 명문 정파로 알려졌는데, 무슨 이유로 범죄 집단에 합류한 거요?”
“사사키 재단 상행의 호위를 맡아 달라는 것이 첫 의뢰였습니다. 빚이 있던 상단에서 주선한 거라 외면할 수 없었습니다. 그 뒤로 호위를 몇 번 하고, 으슥쾰 호수 인근으로 가는 수송대를 호위하다가 큰 전투에 휘말리게 됐습니다.”
“그 전투에서 실력을 발휘한 거요?”
“습격한 자들을 모두 물리치니, 사사키 재단에서 2년 계약을 제안했습니다. 금액이 워낙 크고, 이왕 검을 뽑은 후라 거절하지 못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사사키 재단의 실체를 알지 못한 면도 있습니다.”
사사키 재단은 표면적으로 정상적인 상행위를 한다. 돈이 궁한 고수들을 점찍은 뒤, 어렵지 않은 임무를 맡기고 유대감을 쌓는 것이 전형적인 접근 수법.
평범한 일에 후한 사례를 받은 고수들이 사사키 재단에 호의를 가지게 되는 건 자연스러운 수순이리라.
그리고 결정적인 순간에 거절하지 못할 제안을 한다. 양카이도 이런 방식으로 사사키 재단에 합류한 거다.
사사키 재단에 고용된 뒤 수차례 전투를 치르고, 다양한 작전에 투입된 이후 사악한 실체를 알게 됐지만, 계약으로 묶여 있어 어쩔 수 없이 조선까지 오게 됐다.
“사사키 재단에서 받은 돈으로 빚은 다 정리한 거요?”
“그것이…….”
“혼자 사용한 건 아닐 테고, 부양할 식구들이 많은가 보군.”
“그건 말씀드리기 곤란합니다.”
“알겠소. 그러면 돌리지 않고 말하리다. 나와 거래합시다.”
“예? 거래요? 저를 고용한다는 말씀이면 불가합니다. 계약 기간이 7개월이나 남았습니다.”
“고용은 나중에 생각해 봅시다. 내가 원하는 건 화기를 품은 영약이요.”
빙탑이 북반구에서 가장 추운 지역에 세워졌다면, 전 세계에서 가장 더운 지역에 자리한 것이 화염문이다.
화염문이 위치한 화염산에 천년설삼에 버금가는 화염 계열 영약이 존재할 가능성이 매우 크다.
창수는 양카이의 내공에 화기가 섞여 있다는 것을 발견한 이후, 은근히 이런 가능성을 염두에 뒀다.
화염문은 아니더라도 화기가 강한 지역에서 무공을 익힌 고수를 통해 화기를 품은 영약을 구하려 한 것.
그리고 창수의 예상은 120% 맞아 들었다.
“영약 가격이 만만치 않습니다. 저를 통해 거래한다고 해도, 싸게 구입할 수 없을 겁니다.”
“내가 돈은 좀 있소. 셈은 제대로 치를 거니 걱정하지 마시오.”
“그러면, 굳이 저를 통할 필요가 있을까요?”
“내가 찾는 건 천년화리급 이상의 영약이오. 초절정 고수가 거들어야 구매할 수 있지 않겠소?”
액체헬륨이 없었다면, 빙탑에서 천년설삼과 진설삼은 구하기 어려웠을 거다. 창수는 돈만으로 천년화리 이상 영약을 구매하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창수가 양카이에게 원하는 것은 영약값을 깎아 주는 것이 아니라, 외부에 판매하지 않는 귀물을 구입하는 징검다리 역할이다.
“제 목숨과 영약을 바꾸자는 건가요?”
“그건 아니요. 내 제안을 받아들이지 않아도 당신을 풀어 줄 거니까. 하지만 선의와 영약을 바꾸는 모양새는 될 거요.”
“음……. 제가 여기서 확답할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 척!
“알고 있소. 계약금을 줄 테니, 화염문으로 돌아가 상의해 보시오.”
사사키 재단에 고용돼 전투를 벌인 양카이를 창수가 살려 주는 건 적에게 은혜를 베푸는 거다.
한 문파에서 초절정 고수는 무엇보다 귀중한 보물. 양카이를 고이 돌려보내 주면, 화염문에 목숨 빚을 남기는 것일 터.
세상에 공짜는 없다. 어떤 방식으로든 빚을 갚아야 한다. 목숨이 위태로운 일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고, 정당한 대금을 지불하고 영약을 구매하겠다는 걸 화염문이 거절하기 어려울 거다.
창수는 영약 거래가 성사될 거라 확신하면서, 은자 100만 냥을 계약금으로 건네줬다.
* * *
양카이를 풀어 준 뒤 창수 일행은 흑룡회 2차 병력 45명을 20분 만에 몰살하고, 필동정미소로 위장한 흑룡회 조선 지부를 급습했다.
알짜 병력이 빠진 흑룡회 거점이 창수 일행을 막아 내는 건 불가능에 가까운 일. 50분도 안 되는 시간에 흑룡회 조선 지부 병력을 모두 제거해 버렸다.
살아남은 흑룡회 잔당은 대항을 포기하고 필사적으로 도주한 소수에 불과했다.
창수 일행은 흑룡회 비밀금고를 찾아내 모든 것을 챙긴 뒤, 사사키 재단 거점으로 이동했다.
무력이 약한 사사키 재단을 파괴하는 건 흑룡회 거점을 공략하는 것보다 수월했다. 더구나 백호대 거점을 공격하려고 출동한 주력 30명이 완파당한 이후이기에, 30분 만에 공략을 마칠 수 있었다.
“주군! 이제 일본이 조선에서 암약할 거점이 없어졌습니다!”
“수고 많았다, 츠네. 네가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이렇게 빨리 정리하지 못했을 거야.”
“제가 바라는 일이기도 하니까요! 어머니를 평생 이용해 먹고, 저를 노예처럼 부린 흑룡회에 복수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합니다!”
일본의 조선 침략에 첨병 역할을 하던 양대 조직을 일소했다. 조선에서 활동하는 모든 일본 세력을 정리한 것은 아니지만, 이전처럼 활발하게 준동하기 어렵게 됐다.
츠네는 조선인 아버지와 일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모친과 자신을 철저하게 이용한 흑룡회에 깊은 원한을 가지고 있다.
일본 세력의 몰락을 창수보다 더 열망하는 상황이기에, 사력을 다해 정보를 모으고 취약점을 파고들었다.
지금 이 순간 츠네가 느끼는 기쁨과 성취감은 창수가 느끼는 것보다 훨씬 크다.
“이제 시작이야. 일본의 침략 야욕을 분쇄하고, 더 나아가 응징에 나서는 날이 오도록 준비를 철저히 해야 해.”
“맡겨 주십시오, 주군. 일본 세력이 조선에서 날뛰지 못하게 만들겠습니다.”
오늘은 조선에 깊숙이 박힌 가시를 빼낸 날이다. 그러나 창수와 츠네는 마냥 들뜨지 않았다. 앞으로 해야 할 일이 더 많이 남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창수와 츠네는 뜨거운 심장과 차가운 머리를 가지고 미래를 준비했다.
2.
조선에서 암약하던 흑룡회와 사사키 재단을 일소한 창수는 선양으로 이동해 사탕수수 수확과 농작물 연구 성과를 점검하려 했다.
그래서 인사차 백호대 단주 장두호를 만났다.
“아니? 벌써 선양으로 간다는 거요?”
“예. 밀린 일이 많아서요.”
“허어. 그래도 며칠은 있다가 갈 거라고 생각했는데…….”
“제가 한양에 있어야 하는 일이 있나요?”
“급박한 일이 있는 건 아니오. 하지만 젊은 손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분이 있는데 오늘 밤 시간 좀 내줄 수 있겠소?”
“그러시죠. 딱히 약속이 없으니까요.”
일본 세력을 정리하면서, 창수와 장두호의 관계가 한 단계 더 친밀해졌다.
창수는 조선에서 벌여야 할 사업에 대해 믿고 논의할 인물을 장두호라 여기고 있다. 장두호 역시, 조선의 핵심적인 사안에 대해서 많은 정보를 넘겨 주고 있다.
장두호가 청하는 만남을 거부할 이유가 없다.
“젊은 손님, 이곳은 왕실 마법사님의 처소이자 집무실이요. 조선에서 가장 비밀스러운 장소라고 할 수 있소.”
2023년 11월 6일 오후 8시, 창수가 비밀 통로를 통해 경복궁에 입궐했다. 장두호가 안내한 곳은 강녕전 옆에 세워진 부속 건물.
외부에서 볼 때 경비가 전혀 보이지 않았으나, 북명신공을 익힌 창수는 강녕전 못지않게 삼엄한 경비가 펼쳐져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아니나 다를까? 이곳은 6서클 마법사가 머무는 곳이다.
“마법사님이 저를 찾는 겁니까?”
“그렇소. 하지만 다른 분들도 기다리고 있소.”
“그분들이 누구입니까?”
“들어가면 알게 될 거요. 고귀한 분들 앞이니, 예의를 지킬 거라 믿겠소.”
고귀한 분들이라면 누구를 말하는 것일까?
백호대 단주가 예의를 신신당부하는 것으로 보아 보통 신분은 아닐 거다. 창수는 몇 가지 시나리오를 생각하며, 왕실 마법사의 처소로 들어갔다.
‘헉! 뭐야? 내가 키즈 카페에 온 건가?’
전각 안으로 들어간 창수는 알록달록한 파스텔 톤 채색과 물품으로 가득한 내부를 보고 당황했다.
창수가 서적을 통해 알게 된 내용에 따르면, 6서클 마스터 마법사는 최소 400살 먹은 노인이다.
1623년 능양군이 일으킨 반란을 진압하고 광종(광해군)이 궁으로 복귀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당사자이기도 하다.
혼인은 물론이고, 양자를 들였다는 기록도 없는 6서클 마법사의 처소가 어린아이 취향이라니?
창수는 순간 뇌가 정지하는 듯한 느낌을 가지게 됐다.
하지만 이건 시작에 불과했다.
“어!? 연희야? 네가 왜 여기에 있어?”
키즈 카페처럼 꾸며진 전각 내실에 청계천에서 창수를 도와줬던 송연희가 있었다.
일 년 반이 넘는 시간을 찾으려고 애쓰던 아이를 드디어 만나게 된 창수. 예상치 못한 재회가 반가우면서도, 송연희가 왕실 마법사의 내실에 있는 것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여기가 우리 집이에요.”
“네가 왕실 마법사님의 후손이니?”
“아니요. 제가 왕실 마법사예요.”
“헐…….”
창수는 송연희가 왕실 마법사의 알려지지 않은 후손이라 생각했다. 그러나 송연희의 대답은 놀라움 그 자체였다. 그녀가 6서클 마스터 마법사였다.
마법의 힘을 얕봤다. 도저히 불가능할 것 같은 일들을 척척 해내는 것이 마법이다. 6서클 마스터라면 외모 정도는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창수 자신도 마법스크롤을 사용해 용모를 바꾼 것이 여러 번인데, 다른 사람이 사용할 가능성을 생각하지 못한 거다.
“죄송합니다, 마법사님. 고인(高人)을 몰라보고 무례했습니다.”
“엉? 왜 그러세요? 아저씨? 저는 그냥 연희예요. 무섭게 그러지 마세요.”
“그냥 친하게 대하는 것이 편한 겁니까?”
“말투 바꾸세요! 빨리요! 아까처럼 말하라구욧!”
“크흠……. 네가 원한다니까 그렇게 하지, 뭐.”
일종의 코스프레일까?
10살로 보이는 송연희의 정확한 나이를 알지 못한다. 심지어 여자인지 남자인지도 알 수 없다. 그래도 정색을 하고 어린아이처럼 대해 달라니 그렇게 해 줄 수밖에 없다.
창수는 존댓말을 거두고 처음 만났던 때와 같은 말투로 돌아갔다.
“그런데 연희야, 으슥쾰 호수 인근에 있는 미궁에 대해서 알고 있니?”
“지금 전쟁이 한창인 곳 말하는 거예요?”
“맞아. 그곳을 만든 마법사의 용모가 매우 어려 보였어. 혹시 너와 아는 사람이니?”
“그건…….”
송연희가 6서클 마스터 경지에 오른 마법사라는 걸 알게 된 창수는 전설급 미궁을 만든 미궁 마스터를 떠올렸다.
소년과 청년 중간의 외모를 가진 미궁 마스터와 송연희가 어떤 관계가 있을 거라 생각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