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9화 48장. 대청소
1.
“하야시는 현역 일본군 준장입니다. 그리고 검도 8단의 고수이기도 합니다.”
“8단이면, 검도에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등급 아닌가?”
“맞습니다. 9단은 검도에 공헌한 인사에게 명예직으로 주고 있습니다. 승단 시험으로 올라갈 수 있는 최고 등급이 8단입니다.”
“실력이 만만치 않겠어. 일류 무사와 겨룰 만할까?”
“이류 무사에게도 안 될 겁니다. 내공이 없으니까요.”
검도는 단계별 수련을 중요시한다. 8단에 오르려면, 최소 30년의 수련 기간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현실적으로 8단이 올라갈 수 있는 한계다.
창수는 하야시 개스케가 끈기와 열정을 가지고 무공을 연마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검도에는 내공이 없다는 치명적인 단점이 있다.
초식이 아무리 화려해도 내공이 이를 뒷받침하지 않으면 소용없듯이, 내공이 없는 검도 8단은 내공을 사용하는 이류 무사를 당해 낼 수 없다.
“흠……. 그러면 내공에 관심을 두겠군. 하지만 기연을 얻지 않고서 내공을 배우기 어려울 거야.”
“그렇습니다. 주군과 제가 늦은 나이에 내공을 배울 수 있었던 건 미궁에서 블링크와 헤이스트를 배웠기 때문입니다. 하야시도 자신이 내공을 배우기 어렵다는 걸 압니다. 그래서 약점을 보충해 줄 마법검을 모으고 있습니다.”
“그자를 마법검으로 꾀어내자는 거야?”
“하야시는 마법검과 마나석을 사용해 내공에 대항하려 합니다. 중급 마법검을 매각한다고 하면, 외면하지 못할 겁니다.”
“좋은 작전이야. 미끼를 던져.”
일본 군부의 움직임을 놓쳤던 츠네는 심기일전해 정보망을 정비하고, 군부 주요 인사에 대한 세세한 정보를 모았다. 조선 주재 일본 공사이며 현역 일본군 장군은 열 손가락 안에 드는 중요 인물.
츠네는 하야시 개스케가 중급 마법검을 간절히 원한다는 걸 파악하고, 대사관 밖으로 끌어낼 수단으로 삼았다.
창수에게 마법검이 여러 자루 있으니, 준비물은 이미 갖춰진 거다. 츠네는 하야시 개스케에게 은밀히 중급 마법검의 존재를 알렸다.
* * *
11월 1일 오후 3시, 하야시 개스케의 지시로 마법검의 진위를 살핀 비서관이 공사 집무실로 돌아왔다.
“후지나가, 물건이 정말 중급 마법검이야?”
“화염 속성을 가진 중급 마법검이 맞습니다.”
“마나 효율은 어떻던가?”
“상급에 가까웠습니다. 중급 마나석을 사용하면, 공사님께서 일류 무사와 충분히 겨룰 수 있을 겁니다.”
중급 마법검도 종류와 상태가 다양하다. 비서관이 보고 온 마법검은 쓰임새가 가장 많은 화염 속성을 가졌고, 상태도 매우 좋았다.
특히 마나 효율이 뛰어나서, 하야시 개스케에게 안성맞춤이다. 중급 마법검을 손에 넣으면, 이류 무사를 넘어 일류 무사 수준으로 실력이 급상승할 가능성이 크다.
“일류 무사라……. 만약 상급 마나석을 사용하면 어떻게 될 것 같아?”
“일류 무사는 확실히 제압하고, 절정 무사와 100초는 겨룰 수 있을 거라 봅니다.”
“내가 아니고 네가 사용하면 어떨 것 같아? 야규노리 검술의 실력자로서 솔직히 말해 보게.”
“절정 무사와 겨뤄 500초 이상 버틸 수 있습니다.”
“절정 무사급이라는 말이군.”
“절정 무사에 비해 손색이 있습니다. 다만, 정면 대결 한다면, 지지 않을 자신은 있습니다.”
야규노리는 일본 전국시대부터 유명한 검술 유파로, 일본 역사에서 가장 많은 검술 고수를 배출한 곳이다.
하야시 개스케는 야규노리의 검술을 배웠고, 승단 시험으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높은 8단에 도달했다.
하지만 비서관 후지나가 토쿠켄과 비교하면 최소 두 단계 차이가 나는 하수다. 이건 하야시 개스케가 돈과 지위로 8단을 땄다는 것이 아니라, 후지나가 토쿠켄의 검술 실력이 그만큼 뛰어나다는 걸 의미한다.
“아주 쓸 만한 무기가 나타났군. 가격은 얼마라고 하던가?”
“2억 7,000만 환(한화 2,700억 원)을 요구했습니다.”
“만만치 않은 가격이구만. 할인 가능성은 보이던가?”
“흥정을 잘하면, 2억 2천만 환까지 깎을 수 있을 거라 봅니다. 급전을 만들기 위해 파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좋아. 아카에를 데리고 가면 되겠군,”
중급 마법물품은 최소 1억 환(한화 1,000억 원)의 가치가 있다. 공무원 월급으로 마련하는 건 불가능한 일.
그런대도 하야시 개스케가 마법검 구매에 나서는 건 다른 수입원이 있기에 가능한 일이다. 정상적인 사업부터 권력을 이용한 이권 사업 그리고 불법적인 사업까지 다양한 수입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수입원을 관리하는 자가 보좌관 아카에 호나미다.
“탁월한 선택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공사님, 거래 장소를 어디로 잡아야 할까요?”
“그쪽에서는 뭐라고 해?”
“어디든 상관없다고 합니다.”
“마포에 있는 안가로 하지.”
“하지만 그곳은 대사관과 거리가 멉니다. 시국이 좋지 않습니다. 이동 중에 습격받을 수 있습니다.”
창수 일행의 활약에 힘입어 역모를 제압한 조선 왕실은 수렴청정 중인 대비가 직접 나서, 가담 세력을 색출하고 있다.
좌의정과 관련된 인사들이 대거 체포됐고, 종사관 박시우를 비롯해 좌포도청 관원도 다수가 포박된 상태.
그리고 역모에 가담한 자 대부분이 친일파라는 것이 속속 드러나고 있기에, 일본을 의심하는 눈초리가 강해지고 있다.
후지나가 토쿠켄은 일본 대사관에서 마포로 가는 길이 매우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아니야. 대사관 인근에서 거래하면, 보는 눈이 너무 많아. 마포가 한적하고 좋아. 경호는 자네가 있는데 무슨 걱정인가?”
“저 혼자는 무리입니다. 정 마포로 가시겠다면, 빈객을 대동하십시오. 모두 배움이 높은 분들입니다. 그리고 절정 무사를 능히 상대할 수 있는 분들이기도 합니다.”
“빈객이라……. 그 노괴들 다루기가 여간 어려운 것이 아니야. 육군본부 직속이라고 얼마나 거들먹거리는데. 경복궁 공략에서 아무것도 못 하고 구경만 하다가 온 것들이 너무 뻣뻣해.”
훈련도감 역도들이 근정전으로 전진할 때, 후방에서 투명망토를 가동한 채 지켜봤던 괴한들은 일본 육군본부가 파견한 자들이다.
강녕전에서 조선 국왕을 지키는 6서클 마법사를 상대하기 위해 투입된 만큼, 무력이 남다르다.
그들이 경호하면 하야시 개스케가 안심하고 마포까지 갈 수 있다. 그러나 문제는 움직이기 쉽지 않다는 것.
작전에 실패하고 위장 가옥에서 머물고 있지만, 육군 수뇌부와 직접 연결이 가능하기에, 콧대가 이만저만 높은 것이 아니다.
“제가 설득하면 도움을 받을 수 있을 겁니다. 밖으로 나가지 못해 울적하다는 분도 있으니까요.”
“흠……. 밥이나 축내는 식충이들을 호위로라도 써먹어야겠군. 좋아. 자네가 한번 나서 봐.”
하야시 개스케가 현역 준장이고 검도 8단이기는 하지만, 온전한 무인이라고 보기 어렵다.
반면, 후지나가 토쿠켄은 무인의 시각으로 파견된 자들을 바라봤다. 훈련도감 역도들이 실패해 칼 한 번 빼 보지 못하고 어쩔 수 없이 후퇴했으나, 작전에 실패한 것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모두 일본에서 내로라하는 검호들인 만큼, 자존심이 많이 상했다. 그리고 답답함을 느끼는 상황.
마포까지 가는 하야시 개스케를 경호하면서 기분 전환 하는 것도 나쁘지 않은 선택일 거다.
* * *
11월 2일 오후 4시, 창수와 츠네가 마포에 위치한 하야시 개스케의 안가에 도착했다.
안가의 외형은 전형적인 조선 양반가의 저택으로, 주변 건물과 완벽하게 동화돼 있었다. 만약, 안내를 받지 않았다면, 이곳이 안가라는 생각을 못 했을 거다. 반면, 내실은 일본식 구조로 되어 있었다.
“단 두 명이서 온 것이오?”
“그렇습니다. 믿을 만한 거래에 과도하게 많은 인원을 동원할 이유가 없지요.”
“아무리 그래도 중급 마법검을 거래하는 자리요. 방비가 너무 허술한 것 아니오?”
“걱정하지 마십시오. 든든한 호법이 있으니까요.”
하야시 개스케의 심기가 뒤틀렸다. 자신이 동원한 수행원이 12명에 달한다. 반면, 상대방은 평범해 보이는 호위 무사 한 명만 대동했다. 게다가 저런 인물을 호법이라고 부르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다.
상대방이 2억 7,000만 환이라는 거액을 거래하는 자리에 너무 허술한 대비를 한 거다. 어찌 보면 대담해 보이는지라 은근히 신경을 긁었다.
“커험. 뭐. 그쪽 안전은 그쪽이 책임지겠지. 아무튼, 좋소. 마법검을 봅시다.”
“여기 있습니다. 천천히 보십시오.”
- 꿀꺽!
창수가 건네준 마법검은 화염 속성이라는 걸 증명하듯 붉은색 빛을 띠고 있었다. 전체적으로 날렵한 몸에 날카로운 예기가 보통 물건이 아님을 알려 주고 있다.
지금까지 접해 본 마법검 중에서 단연 최고라 할 수 있는 명품. 하야시 개스케는 탐욕스러운 눈으로 마법검 전체를 20분간 꼼꼼히 살폈다.
“어떠십니까? 마법검이 마음에 드십니까?”
“흠. 흠. 나쁘지는 않구려. 그런데 가격이 얼마라고 했소?”
“2억 7,000만 환입니다.”
“가격이 너무 세군.”
“아닙니다. 이건 중급 마법검 중에서도 상품에 속합니다. 제대로 가격을 치르면, 3억 5,000만 환은 받을 수 있는 겁니다.”
“돈이 급할 때, 제값을 받지 못하는 것이 세상 이치 아니오? 1억 환으로 합시다.”
계획과 다르게 흥정이 진행됐다. 본래 계획은 보좌관 아카에 호나미가 나서서 가격 협상을 하는 것인데, 하야시 개스케가 직접 나섰다.
게다가 가격도 예상과 다르게 너무 후려치고 있다. 이건 무엇을 의미하는 것일까?
“아무리 돈이 급해도, 그 가격에는 팔지 못합니다.”
“1억 환이면, 후하게 받는 거요. 이 정도로 만족하는 것이 좋을 거요?”
“아닙니다. 2억 5,000만 환에 사겠다는 사람이 2명이 있습니다. 1억 환은 말도 안 되는 금액입니다. 마법검 돌려주십시오.”
“말귀를 못 알아먹는군. 1억 환 받고, 목숨을 건지라는 거야.”
“무슨 말입니까? 마법검을 강탈하겠다는 겁니까?”
“강탈이 아니라, 마법검에 걸맞은 주인이 적당한 값을 치르겠다는 거지. 잔말 말고 1억 환 받고 꺼져. 안 그러면 너는 죽은 목숨이야.”
- 스릉!
하야시 개스케가 가격을 후려친 이유가 있었다. 정당한 거래가 아니라, 무력을 동원해 형편없는 가격에 마법검을 강탈하려는 것이다.
이건 창수가 수행원으로 츠네 한 명을 대동했기에 발생한 일이다.
내실에 있던 비서관 후지나가 토쿠켄이 칼날을 슬쩍 뽑으며, 하야시 개스케의 협박에 합류했다. 무사라고 하지만, 정의감이 없는 시정잡배의 모습.
“쯔쯔쯔. ‘왜는 간사스럽기 짝이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다’라는 이순신 장군의 말이 이번에도 딱 맞아떨어지는군.”
“뭐… 뭐야!?”
“야, 이 쓰레기 같은 놈아! 아무리 마법검이 탐나도 그렇지! 한 국가의 공사라는 놈이 최소한의 상도의도 모르는 거냐!?”
“칙쇼! 후지나가! 조센징 놈을 베어 버려!?”
협박을 참고 있을 창수가 아니다. 창수는 하야시 개스케의 뻔뻔한 행동을 직설적으로 비판했다.
예상치 않은 반격을 당한 일본 공사는 당황했다. 평범해 보이는 상대방이 이처럼 날카롭게 대응하리라 생각하지 못한 것. 게다가 창수의 말에 반박할 여지도 없다.
결국, 하야시 개스케는 죽여서 입을 봉하는 방안을 선택했다. 손에 든 마법검으로 창수를 겨누면서, 비서관 후지나가 토쿠켄에게 츠네를 공격하라고 지시했다.
- 슉!
- 써걱!
“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