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8화 47장. 조선에 드리운 암운
4.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근정문을 넘어 근정전과 강녕전을 점령해야 한다. 그러나 너무 두렵다. 반란군 지휘관 강성진은 30년간 수많은 전투를 치렀으나, 지금처럼 압도적으로 강한 적을 만난 적이 없다.
어떤 대응을 해도 결과는 죽음이라는 생각이 머릿속에 가득하다.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베테랑의 본능이 말해 주고 있다, 도망치라고.
강성진은 이러지도 못하고 저러지도 못하는 진퇴양난에 빠졌다.
그리고 바로 그때, 부관이 PKM 기관총을 막을 방안을 발견했다고 보고했다.
“오! 그래! 무슨 방법인가!?”
“금군의 총알이 천잠사를 뚫지 못합니다.”
“무슨 소리야!? 천잠사 전투복을 착용한 정 초관이 쓰러진 걸 못 본 거야!?”
어영청 병력으로 가장해 광화문에 진입했던 초관 정민식. 근정전 점령에도 앞장서다가 PKM 기관총에서 발사된 철갑탄에 직격당하고 꼬꾸라졌다. 정민식은 천잠사 전투복을 갑옷 안에 입고 있었다.
강성진은 바닥에 널브러진 정민식을 구조하라고 지시한 장본인이다. 그런데 천잠사가 총탄을 막는다는 것이 무슨 소리인가?
희망이 절망으로 바뀌면서, 부관에 대한 신뢰가 바닥을 향해 곤두박질쳤다.
- 척!
“정 초관은 총탄 충격으로 쓰러진 겁니다! 보십시오! 뚫리지 않았습니다! 다른 천잠사도 확인했습니다! 뚫린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부관은 선봉에 섰던 정민식의 부상 상태를 살피다가, 피가 많이 흐르지 않는 것을 발견한 뒤, 총탄이 천잠사 전투복을 뚫지 못한다는 걸 알아차렸다.
그리고 천잠사를 입고 총탄에 피격당한 병력 5명을 추가로 확인하고, 강성진에게 보고한 것이다.
“정말 천잠사가 멀쩡하군! 그렇다면 갑옷 위에 천잠사를 입으면 되는 것 아닌가!?”
“맞습니다! 천잠사로 총탄을 막고, 갑옷이 충격을 잡아 주면, 금군의 공격을 막을 수 있습니다!”
“좋아! 천잠사 20벌은 갑옷 위에 입히고, 나머지는 모두 방패 위에 씌워! 그러면 우리 병력이 전진할 수 있어!”
“묘안입니다! 장군!”
물리방어력이 뛰어난 천잠사는 갑옷 안에 착용할 때 가장 효율이 좋다. 그렇지만 신축성이 좋아 갑옷 위에 입어도 전투에 큰 지장이 있는 건 아니다. 총탄 위력을 막아 낼 수 있다면, 전투 효율이 조금 떨어지더라도 무방하다.
이에 더해 강성진은 방패에 천잠사를 입히라고 지시했다. 병력 앞에 방패를 세워 진군하겠다는 것.
이렇게 되면, 안전하게 대규모 병력을 투입할 수 있다. 부관은 자신이 생각하지 못한 묘수를 강성진이 짚어 내자, 탄복하며 승리를 확신했다.
- 척! 척! 척!
준비를 마친 훈련도감 역도들이 천잠사 방패를 앞세우고 근정문을 넘어 진군을 시작했다.
방패 80개를 틈 없이 붙이고 줄을 맞춰 전진하기에 이동속도가 대폭 저하됐으나, 진군하는 기세가 사뭇 매서웠다.
총탄을 막아 낼 수 있다는 자신감이 넘쳐 보였다. 은근히 총탄을 쏴 볼 테면 쏴 보라는 배짱도 나타나는 상황.
“뭐지? 왜 공격을 안 하는 거야?”
“우리가 천잠사를 사용한 것을 보고 금군이 강녕전 쪽으로 후퇴한 것 같습니다.”
“불길해……. 혹시 마법을 사용하려는 것 아닐까?”
훈련도감 병력이 근정전 마당을 지나 월대 인근에 도달했음에도 아무런 공격이 없었다.
전투 경험이 많은 강성진은 직감적으로 싸한 느낌이 들면서, 금군의 대응을 고심하게 됐다.
가장 위협적인 공격은 체인라이트닝과 같은 범위마법이다. 밀집한 상태에서 마법이 한 번만 터져도 치명적인 피해를 입을 수 있기 때문이다.
“장군, 우리에게는 6서클 마법사가 제작한 마법 보호막이 있습니다. 금군이 5서클 마법스크롤로 공격해도 막을 수 있습니다. 왕실 마법사가 공격해 오면, 위험할 수 있지만 말입니다.”
“그건 걱정하지 마라. 왕실 마법사는 강녕전에서 나오지 못하니까.”
“그렇다면 안심입니다. 신속하게 이동해 근정전을 접수해야 합니다.”
훈련도감은 조선 중앙군의 하나로, 보급과 장비 면에서 다른 조선군 부대보다 우월하다.
조선군 전체에서 10개에 불과한 마법 보호막이 대표적인 예. 이것으로 마법 발현 자체를 막지는 못하지만, 공격 마법 위력을 대폭 낮춰 피해를 경감할 수 있다.
6서클 마법사가 마법스크롤을 만든다 하여도, 5서클 이상의 마법을 각인할 수 없다. 그것으로 공격해도 마법 보호막을 뚫고 병력에 타격을 주기 어렵다.
6서클 마법사가 직접 나서서 공격마법을 사용한다면, 이야기가 달라질 거다. 그러나 지금 왕실 마법사는 강녕전에서 국왕의 신변을 지키고 있다.
강녕전을 점령하기 전까지 왕실 마법사를 걱정할 필요가 없다. 그리고 근정전을 발판 삼아 강녕전을 공략하는 전술을 이미 마련했다.
근정전만 점령하면, 모든 것이 시나리오대로 진행된다. 강성진은 무언가 불길함을 느끼면서도 전진을 계속했다.
- 퉁! 퉁! 퉁!
- 팍! 파팍! 팍!
- 지잉! 쩌저적!
- 얼어붙는다! 몸이 얼어붙어!
- 발이 떨어지지 않아!
- 뭐야!? 무슨 마법을 쓴 거야!?
훈련도감 병력 선두가 월대에 막 도착했을 때, 하늘에서 무언가 떨어지더니, 역도들의 몸을 순식간에 얼려 버렸다.
마치 프로스트 마법이 펼쳐진 것 같은 상황.
“모두 후퇴하라! 함정이다!”
금군이 어떤 방법을 사용했는지 알 수 없다. 그러나 병사들의 몸이 얼어붙기 시작했다.
강성진 자신도 무언가를 뒤집어쓴 듯한 느낌이 들면서 몸속 깊숙이 오한이 파고들고 있다.
무조건 이 자리를 떠나야 한다. 그렇지 못하면 몰살이다. 위험을 알아차린 강성진이 커다란 목소리로 후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너무 늦었다.
- 투투투투! 투투투투!
- 챙! 팍! 챙!
- 팍! 팍! 팍!
“컥!”
“큭!”
마치 때를 기다리기라도 한 듯, PKM 기관총이 7.62mm 철갑탄을 비 오듯 쏟아 냈다.
마하 2.5 속도로 날아간 철갑탄이 딱딱하게 얼어 버린 천잠사 방패를 유리창 부수듯 깨 버리고 훈련도감 역도들의 몸통을 타격했다.
방패를 부수면서 위력이 조금 약해졌으나, 인명을 살상하기 충분하다. 철갑탄이 역도들의 몸을 파고들었고, 입까지 얼어붙은 자들이 비명도 제대로 지르지 못하고 속절없이 죽어 갔다.
- 뿌드득!
굳어 버린 몸을 간신히 뒤틀어 도주하는 훈련도감 병력. 그러나 근정문 밖으로 탈출한 인원은 고작 200여 명에 불과하다. 나머지는 근정전 마당에서 몸이 얼어붙은 채 시체가 됐다.
“젊음 손님, 정말 대단하구려. 어떤 마법을 사용한 거요? 역적들이 마법 보호막을 사용해 위력을 내기가 쉽지 않았을 건데 말이오.”
“저온 물질에 흡착마법을 사용한 겁니다.”
“얼마나 온도가 낮기에 저런 위력이 나오는 거요?”
“-196℃입니다.”
“허허……. 상상이 안 가는 온도구려.”
창수가 사용한 얼음 폭탄은 액체질소를 기본으로 하고 있다. 액체질소는 리터당 500원에 구할 수 있고, 용기도 비교적 저렴하다.
무기로 사용하기 적합하지만, 라이덴프로스트 효과 때문에 인체에 큰 타격을 주기 어렵다. 액체질소가 사람 피부에 닿으면 빠르게 기화되면서 절연층을 만들어 냉각 피해를 막아 버린다.
창수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마법사 고사누에게 연구를 의뢰했다. 고사누는 라이덴프로스트 효과를 없애는 방안을 고심하다가, 가장 효과적인 것이 흡착마법이라는 걸 알아냈다.
라이덴프로스트 효과는 짧은 시간 노출될 때에만 발생한다. 액체질소가 장시간 신체에 닿으면 냉각 효과가 온전하게 발생한다.
게다가 흡착마법은 공격마법을 방어하는 마법 보호막의 영향을 적게 받는다. 인체에 위협적이지 못한 액체질소와 흡착마법이 하나로 결합해 가공할 무기가 된 것이다.
“그건 얼마에 공급할 수 있소?”
“이건 비매품입니다.”
“커험. 그것참, 아쉽구려.”
장두호가 직업병처럼 액체질소 폭탄에 욕심을 드러냈으나, 창수는 단칼에 판매를 거절했다. 창수만 가질 수 있는 히든카드를 돈으로 교환할 수는 없으니까.
- 타다닥!
- 우르르!
“병력이 전진하는군요. 우리도 합세할까요?
“아니요. 근정문 밖에 있는 역적 놈들은 어영청 병력과 백호대 병력이 처리할 거요. 우리는 근정전을 지키면서 돌발 상황에 대비해야 하오.”
창수 일행이 훈련도감 주력을 격파한 뒤, 5분이 지났을 때, 강녕전을 지키고 있던 병력이 근정문으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왕을 지키던 수세적인 자세에서 공세로 전환한 거다. 창수는 병력과 합세에 역도들을 끝장낼 생각이었으나, 장두호의 생각은 달랐다.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르니, 근정전에서 대기하자는 것.
“어영청 병력은 믿을 만한가요?”
“좌의정과 거리가 있는 병력이오. 그리고 충직한 병조판서가 관리하니, 역적 놈들과 한패는 아닐 거요.”
“어르신, 역모가 이번 한 번으로 끝나지 않을 것 같습니다. 후속 조치를 철저히 해야 합니다.”
“어영청에도 역모 가담자가 있을 거라고 보오?”
“오늘 금위영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을 받았지만, 어영청의 피해는 미미합니다. 왜 금위영 단독으로 훈련도감 병력을 막아야 했는지, 조사할 필요가 있습니다.”
“음……. 일리 있는 말이오.”
“그리고 광화문이 쉽게 뚫린 이유를 면밀히 조사해야 합니다. 또한, 역적들이 한양 시내를 활보할 동안 좌우포도청에서 보고가 없었다는 것도 문제입니다.”
“나도 그렇게 생각하오. 좌우포도청에 역적 일당이 없다면, 수천 명이 야밤에 이동하는 걸 우리가 모를 리 없소.”
창수가 준비한 PKM 기관총과 액체질소 폭탄으로 위험한 고비를 넘겼다. 하지만 근정전 마당까지 2,500명에 달하는 병력이 밀어닥쳤다는 것이 문제다.
훈련도감 관련자는 물론, 반란군의 이동 경로를 파악하지 못하고, 궁궐 침입을 방조한 세력을 일망타진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오늘과 같은 불상사가 재발할 수 있다.
창수는 어영청과 좌우포도청을 포함해 국가 기관 전반에 대대적인 수사가 있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국왕 직속 비선 조직 백호대의 간부 장두호도 창수의 생각에 동의했다.
* * *
경복궁에 난입한 훈련도감 반란군은 침입 2시간 30분 만에 완전히 정리됐다. 병력 2,500명 중 2,387명이 죽었고, 나머지는 크고 작은 부상을 당한 후 포박됐다.
비교적 짧은 시간에 역모를 제압한 거다. 하지만 경복궁에 무단 침입한 자들이 모두 처리된 건 아니다.
“주군, 역모는 일본의 공작이 분명합니다.”
“추적 결과가 나온 거야?”
“그렇습니다. 그놈들이 일본 공사 하야시 개스케와 만났습니다.”
강성진이 훈련도감 병력 2,500명을 이끌고 근정전을 공략할 때, 투명망토를 가동하고 후방에서 대기하던 10명이 있었다.
창수는 정찰 드론에 장착한 적외선 탐지기를 통해, 그들의 위치와 숫자를 파악한 뒤, 짐짓 모른 척 방관했다. 근정전 인근으로 유인한 후, 마법화살과 초절정 고수 관시엔을 동원해 제거할 계획.
그러나 괴한들은 훈련도감 역도들이 액화 질소 폭탄과 PKM 기관총에 의해 괴멸하자, 몸을 돌려 경복궁 밖으로 도주했다.
창수는 정찰 드론으로 괴한들을 추적했고, 그자들의 거점을 파악할 수 있었다.
이후 츠네와 교대로 정찰 드론을 운용해 괴한들의 움직임을 감시하다가 꼬리를 잡은 거다.
“만난 장소가 어디지?”
“일본 대사관에서 멀지 않은 곳입니다.”
“하야시가 비밀 통로로 이동한 거야?”
“그렇습니다. 대사관 지하와 연결된 위장 가옥에서 그놈들과 만났습니다.”
“여우굴에 숨어 있는 하야시를 끌어내기가 쉽지 않겠군.”
츠네의 말대로 경복궁에 잠입한 침입자가 일본 공사를 만난다는 건 역모에 일본이 깊숙이 개입했다는 증거가 된다.
창수는 괴한들과 하야시 개스케를 동시에 제압해 확실한 물증으로 삼으려 했으나, 장소가 껄끄럽다. 위장 가옥을 급습할 때, 일본 대사관으로 도주할 가능성이 크기 때문이다.
평행우주 너머 이곳에서 대사관은 치외법권 지역이며, 해당국 영토로 간주한다. 일본 대사관 영역으로 들어가 공사를 제압하면, 국제적으로 문제가 될 가능성이 크다.
“주군, 하야시를 꾀어낼 방법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