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7화 44장. 돈으로 무공을 사다
3.
“선재로다, 선재로다. 색에 굶주린 승냥이들을 위해 꽃다운 능천곡 여인들을 바치니, 석존께서도 그대들의 자비에 탄복할 것이오.”
“뭐… 뭐라는 거요!? 지금!?”
“이치가 그렇지 않소? 무공을 남기고 떠난 선인들은 그대들의 존재도 모를뿐더러, 그대들의 선배라는 생각도 못 했을 거요. 그런데 후일 능천곡에 들어온 그대들이, 허락 없이 선인들의 무공을 챙기고, 자기 거라고 우기니 우스운 일 아니겠소?”
“커험……. 그것참…….”
무공 전수를 반대하는 장로들의 모순을 지적한 인물은 무공에 미쳐 파계승이 된 가오쉐빙이었다.
초절정을 넘어 화경에 근접했다는 평가를 받는 그는, 무공만큼이나 날카로운 혀로 장로들을 질타했다.
가오쉐빙의 말에 틀린 것이 없다. 무공을 남기고 죽은 사람들이 능천곡에 소속감이 있었는지, 아닌지의 여부를 지금은 알 수 없다.
그들의 무공을 먼저 발견했다 하여, 능천곡 무공으로 규정하는 건 억지일 수 있다.
하지만 장로들은 자기 것이라 확신할 수 없는 무공을 지키려고, 15명에 달하는 능천곡 여인들에게 닥친 위기를 나 몰라라 하고 있다.
“본인도 대사와 같은 생각이오. 그리고 우리가 활용하지 못하는 무공을 마냥 움켜쥐는 것이 올바른 일인지도 생각해 봐야 하오.”
“린즈웨이 당주님, 거친 야인에게 무공이 넘어가서는 안 된다는 걸 생각하셔야 합니다.”
“허우펑 장로, 김창수는 야인이 아니고 조선인이오. 그리고 츠네라는 수하도 야인이 아니오.”
“야인이 아니더라도 야인들과 어울리고 있습니다. 중화의 무공이 야인에게 흘러가는 걸 막아야 합니다.”
린즈웨이는 능천곡에서 가장 핵심적인 역할을 하는 내당의 수장이다. 장로 중에서도 발언권이 가장 강하다.
그가 가오쉐빙의 손을 들어 주자 무공 전수 허용이 급물살을 타는 듯 보였다. 그러나 장로 허우펑이 야인을 들먹이며 제동을 걸었다.
명나라 사람은 호전적인 금나라 사람을 증오하면서 두려워한다. 법률로 정해진 것은 아니지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하는 무공을 금나라 사람에게 전하는 건 무림에서 금기다.
허우펑의 지적에 장로회 분위기가 다시 무공 전수 불가로 기울어졌다.
“김창수 대인과 동료가 무공을 야인에게 전수하지 못하도록 제약을 걸면 되지 않겠습니까?”
“제약을 어떻게 건다는 건가?”
“김창수 대인은 지금까지 약속을 어긴 적이 없습니다. 공식 문건으로 무공 전수 불가 조항을 남기면, 반드시 지킬 겁니다.”
“너무 안이한 추측 아닌가? 일성대를 그런 식으로 이끄니 능천곡 살림이 이 모양이지!”
관시엔은 능천곡 외당에서 대외 활동을 주도하는 일성대를 이끌고 있다. 외부 정보에 대해 장로들보다 앞서 있다.
창수에 대한 정보를 모은 관시엔은 계약을 통해, 금나라로 무공이 전수되는 걸 막을 수 있다고 판단했다.
그러나 허우펑은 대놓고 면박을 주며, 관시엔의 말을 일축했다.
“말씀이 과하시군요.”
“뭐가 과하다는 겐가?”
“일성대가 지난 1년간 마련한 금액이 80만 냥입니다. 반면, 허우펑 장로님이 주도한 약초 판매에서 벌어들인 자금은 5만 냥에 불과합니다. 더구나 외부에서 250만 냥이 넘어가는 막대한 빚을 들여온 장본인도 장로님이죠.”
“뭐라고!? 지금 나 때문에 능천곡이 빚을 졌다고 말하는 거야!?”
“용연향이 역병에 필요한 약재인지는 아직도 의문입니다.”
능천곡이 막대한 빚을 진 배경에 역병이 있다. 역병에 걸린 사람들을 치료하기 위해 고가의 약재를 구매하면서 과도하게 지출한 것.
관시엔은 약재를 담당하는 허우펑이 역병 치료제로 용연향을 사용하는 것을 처음부터 말렸다. 약효가 불분명하면서 너무 고가이기에.
그리고 허우펑이 빚 청산 기회를 석연치 않은 이유로 가로막자, 의구심이 깊어지게 됐다.
“이런 방자한 것!”
- 슈욱!
돌발 상황이 벌어졌다. 허우펑이 발작하며 관시엔의 정수리를 향해 일장을 날렸다.
허우펑의 경지는 초정절으로 절정 무사가 받아 내기 어렵다. 자칫 관시엔이 목숨을 잃을 수도 있는 상황.
- 팍!
“허우펑! 지금 무슨 짓을 하는 건가!?”
관시엔을 위기에서 구한 건 가오쉐빙이었다. 같은 초정절의 경지지만, 가오쉐빙의 공력이 허우펑보다 월등히 앞서기에 손쉽게 공격을 저지했다.
“말리지 마시오! 나를 배신자로 몰아가는 저놈에게 가르침을 줘야 하오!”
“개소리하고 자빠졌네! 가르침을 받을 건 너야! 나도 일성대주의 생각과 같아! 네가 일부러 빚을 만들어 능천곡을 궁지로 몬 거야!”
“가오쉐빙! 증거 없이 능천곡의 장로를 모함하지 마시오!”
“내가 약선에게 알아봤어! 역병과 용연향은 전혀 상관이 없다더군! 이래도 발뺌하려는 건가!?”
허우펑을 의심한 건 관시엔뿐만이 아니었다. 가오쉐빙은 명나라에서 3대 신의로 알려진 약선으로부터 용연향이 잘못 사용됐다는 말을 들었다.
“약선은 외부인이오!”
“외부인이지만, 능천곡에 많은 은혜를 베풀었지! 250만 냥을 털어먹은 너와 결이 다른 의인이야!”
“이… 익……. 정말! 노부를 음해하려고 작정한 거요!?”
“오냐! 작정했다! 오늘 내가 살계를 열어, 능천곡의 우환을 없앨 거다!”
허우펑이 발악하듯 대들었으나, 가오쉐빙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다. 오히려 허우펑을 배신자로 단정하고 처단하려 했다.
허우펑이 대단한 실력자지만, 무공광 가오쉐빙과 정면 대결 하면, 10초도 버티기 어렵다. 조금 전 관시엔을 죽음으로 몰던 허우펑이 거꾸로 살해당할 위기에 몰렸다.
“대사, 잠시 손에 사정을 두시죠. 허우펑 장로의 행적이 미심쩍은 면이 있으나, 능천곡 장로를 불문곡직하고 처단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 입니다.”
“내당주께서는 저자를 믿으십니까?”
“믿으려고 했는데 오늘 행동을 보니, 더 이상 믿을 수 없다는 생각이 드는군요.”
“그러면, 어쩌실 요량입니까?”
“집법당에 구금한 뒤, 정밀 조사를 해야 할 듯합니다. 번거롭겠지만, 조사 책임자로 대사께서 나서 주시기를 바랍니다.”
“껄껄껄. 수고랄 게 있습니까? 당연히 제가 할 일이죠. 맡겨 주십시오. 석존의 계율을 잠시 어기는 번뇌도, 모두 감내할 수 있습니다.”
내당주 린즈웨이도 용연향 사용에 의구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동안 잠자코 있었던 건, 허우펑이 배신했다는 확실한 증거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허우펑이 관시엔을 급습하자, 확실히 알게 됐다. 죽여서 입을 봉하려는 자가 범인이다.
린즈웨이는 허우펑을 가두고 조사를 지시했다.
4.
“대인, 도움을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제 능천곡이 평온을 되찾을 겁니다.”
“도움이랄 게 있소? 약속을 이행한 것뿐이오.”
“그래도 감사합니다. 보증 없이 선뜻 150만 냥을 내줄 분은 많지 않습니다.”
허우펑을 축출한 뒤 능천곡 장로 회의는 창수의 제안을 받아들였다. 여인들을 희생시킬 수 없기에 내린 결단.
그러나 그들은 창수를 전적으로 믿지 않았다. 무공을 전수하기 전에 먼저 빚 변제를 요구한 것.
창수에게 은자 150만 냥은 큰돈이 아니다. 계약금 준다는 셈 치고 선지급 했고, 능천곡은 단번에 빚의 족쇄를 풀 수 있었다.
관시엔은 창수의 너그러운 조치에 깊은 호감을 가지게 됐다.
“그렇다고 칩시다. 무공은 언제 배울 수 있는 거요?”
“지금 배우실 수 있습니다. 다만, 금나라인에게 무공을 전해 주지 않는다는 약속을 문서로 남겨 주셔야 합니다.”
“그건 어렵지 않은 일이오. 그런데 왜 그렇게 금나라를 견제하는 거요? 무공에서 명나라가 까마득하게 앞서는 것 아니오?”
“금나라인은 호전적이고 전투력이 강합니다. 그들이 무공을 배우면, 1:1은 말할 것도 없고 3~4명이 힘을 합해도 이길 수 없다는 이야기가 무림에서 나돌고 있습니다.”
‘여진 1만이면 천하에 당할 자가 없다’는 말이 있다. 요나라에서 시작된 인식이지만, 송나라부터 명나라까지 대대로 여진에 대한 두려움이 각인된 말이다.
이런 인식은 일반 백성뿐만 아니라, 무공을 익힌 무림인도 공유한다.
그나마 무공으로 호전적인 여진인을 상대할 수 있는데, 여진인이 무공을 배우면, 상대할 방법이 없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는 거다.
“알겠소. 문서로 남기겠소. 그러면 어떤 무공을 배울 수 있는 거요?”
“현음신공, 북명신공, 단철심법, 구상심법, 혼원심법 중에 하나를 고르실 수 있습니다.”
“나와 츠네가 같은 무공을 익혀야 하는 거요?”
“아닙니다. 선택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어떤 무공들인지 설명해 주시오.”
“현음신공은…….”
능천곡이 제시한 내공심법은 5가지였다. 모두 이름 모를 기인이 남기고 간 것으로, 능천곡에서 주력으로 익히는 사람이 없는 무공이다.
그렇다고 위력이 낮은 형편없는 무공은 아니다. 제대로 익히면, 강호에서 충분히 실력자로 행세할 수 있는 잠재력을 가졌다.
“나는 북명신공으로 하겠소.”
“북명신공은 한계를 알 수 없는 위력을 가지고 있지만, 성취를 보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립니다.”
“하지만 꾸준히 심력을 기울여야 하는 제약이 없지 않소?”
“맞습니다. 1갑자 이상의 내공을 가지면, 자면서도 내공이 쌓입니다. 그러나 1갑자의 내공을 쌓으려면 다른 무공에 비해 족히 4~5배는 어려운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북명신공은 체내에 마나의 바다를 만들어 외부의 마나를 끌어들이는 내공심법이다.
경지에 오르면, 저절로 마나가 축적되는 빼어난 특성을 갖추고 있으나, 마나의 바다를 만드는 것이 매우 어렵다.
북명신공이 능천곡에 알려진 것이 700년이 넘고, 적지 않은 사람이 익히려 도전했으나, 대성한 인물이 없었다. 다른 내공에 비해 발전이 너무 느린 것이 원인.
관시엔은 북명신공이 창수에게 어울리지 않는다고 판단했다.
“1갑자는 문제가 아니오. 단약을 먹으면 되니까.”
“그것도 내공을 쌓는 방법의 하나이기는 합니다. 하지만 북명신공은 섭취 형식으로 받은 마나를 1할도 축적하지 못합니다. 효율성이 많이 떨어집니다.”
“10배 이상 먹으면 되는 것 아니오?”
“아……. 그렇군요.”
내공을 높여 주는 단약은 귀하고 고가이기에 사용할 수 있는 양이 제한돼 있다.
북명신공의 문제점은 이런 귀물을 복용해도 다른 내공심법과 비교해 효과가 10% 수준에 머문다는 것이다.
가뜩이나 내공이 쌓이는 속도도 느린 데다가, 단약의 효율성이 떨어지기에 제대로 익힌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창수는 다르다. 낮은 효율을 씹어 먹고도 남을 재력이 있기 때문이다.
* * *
창수가 처음 복용한 단약은 청성파에서 제조한 양생단이다. 1개에 은화 400냥(한화 1억 500만 원)에 거래되는 양생단은 효율이 높고 구매가 쉬운 장점을 가지고 있다.
창수는 1차분 50개를 구매해 츠네와 나눠서 복용했다. 단철심법을 선택한 츠네는 양생단 4개로 기초를 마쳤으나, 창수는 46개를 먹어야 했다.
“대인, 단전에 쌓인 마나를 회음혈로 보낸 뒤, 미려혈로 움직여야 합니다.”
- 끙!
“쉽지가 않구려. 양생단을 더 먹고 운기 하는 것이 좋지 않겠소?”
“지금보다 더 내공을 쌓은 뒤에 운기조식을 하게 되면, 주화입마에 빠질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렵더라도 지금 하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