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나 혼자 평행우주 독식-155화 (155/200)

155화 44장. 돈으로 무공을 사다

1.

<헉! 대표님께서 어떻게 저에게…….>

평소 박천우는 등록되지 않은 낯선 번호로 온 전화를 받지 않는다. 보이스 피싱과 넘쳐 나는 홍보 전화를 피하기 위해서.

하지만 오늘은 허허로운 마음에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싶어 전화를 받았다. 그리고 상대방이 뜻밖에도 오백세건강 대표 창수였다.

<저와 통화를 원한다고 보고받았는데, 아닌가 보죠?>

<아닙니다! 아닙니다! 지난번 면접에서 무례한 질문을 드렸던 것 사과드리려고 합니다!>

창수와 통화를 바랐지만, 갑자기 전화를 받으니 엉뚱한 말이 나오고 말았다. 그래도 창수가 기회를 줘서, 하고픈 말을 꺼낼 수 있는 게 다행이다.

어차피 로켓택배에서 밀려나는 상황에서 굳이 창수에게 고개를 숙일 필요가 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으나, 세계 최고 갑부와 불편한 관계를 청산할 기회를 놓칠 수 없었다.

<서로 할 말 했는데 사과할 필요 있을까요?>

<제가 안목이 낮아 대표님의 능력을 알아보지 못했습니다! 사과를 받아 주십시오!>

<그렇게 생각한다면, 좋습니다. 받아들이죠.>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무언가 허무하다. 창수가 호통칠 거라 예상했는데, 선선하게 사과를 받아들였다.

얼떨떨한 느낌이 든 박천우는 빨리 통화를 끊으려 했다. 더 길게 이야기해 봐야 좋을 게 없다고 여긴 것.

<잠시만요. 아셔야 할 일이 있습니다.>

<예? 제가요?>

<로켓택배에서 박천우 부장님을 현장으로 보낼 계획이더군요.>

<짐작은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면 그렇지, 그냥 넘어갈 리가 있나?

박천우는 물류 센터로 좌천됐다는 소식을 담담히 받아들였다. 이미 각오한 일이기에.

<로켓택배에 오버액션 하지 말라고 말렸는데, 고집이 심하더군요. 제가 알지 못하는 스토리가 있는 겁니까?>

<제가 보직을 옮기는 것이 대표님의 뜻이 아닙니까?>

<그렇습니다. 면접 탈락은 지난 일입니다. 솔직히 말하면 당시에 기분이 나빴던 건 사실이지만, 부장님에게 해코지할 만큼 악감정을 가진 건 아닙니다. 그리고 면접에서 떨어진 이후, 일이 술술 잘 풀려 그 일을 생각하지도 않고 지냈습니다.>

창수의 말은 사실이다. 돈벌이가 절실할 때 잠시 박천우를 원망했으나, 평행우주를 넘나든 이후 보복을 생각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면접에 떨어지고 로또를 구매한 것을 행운이라 여기고 있었다.

그런데 박천우가 통화를 원한다고 해서 무슨 일이 벌어진 건지 알아보니, 보직 이동이 결정된 것이다.

<송수진 이사님이 저에게 악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다른 이사님들도 저를 탐탁지 않게 여기고 있습니다. 제가 김창수 대표님 입사를 막아, 로켓택배의 발전을 가로막았다는 것이 죄목입니다.>

<흠……. 설득이 쉽지 않겠군요.>

암브로시아가 메가 히트 상품이 된 뒤, 송수진이 창수에게 전화를 걸어온 일이 있다. 당시 송수진은 창수의 성공을 축하하면서도, 로켓택배로 영입하지 못한 것을 매우 아쉬워했다.

창수는 박천우가 송수진을 언급할 때, 로켓택배 경영진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 알게 됐다.

<제 안목이 부족해서 발생한 일이니, 감수할 수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일단, 연말까지 버티세요. 12월 말 정기 인사에 복귀하도록 만들겠습니다.>

<정말이십니까!? 그렇게 되면, 더 바랄 게 없습니다!>

<그렇습니다. 현장 경험 5개월 한다고 여기면 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하지만 대표님께서 저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이…….>

<호의가 아닙니다. 박천우 부장님이 인사상 불이익을 받으면, 제가 옹졸한 사람이 될 가능성이 커집니다.>

창수가 진정으로 박천우에게 보복할 생각이라면, 좌천 정도로 끝내지 않았을 거다. 여론의 비난을 감수하고, 더 강하게 응징을 했을 터.

하지만 원하지 않은 인사이동으로 불필요한 구설수에 오르는 건 사양이다.

창수는 적당한 시기에 박천우를 인사 팀으로 복귀시킬 계획이다.

<무슨 말씀인지 알겠습니다. 대표님, 그런데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습니다. 여쭤봐도 될까요?>

<말씀하세요.>

<로또 번호 외운 뒤에 회귀하신 겁니까?>

로켓택배에서 밀려날 위기를 넘긴 것에 안도감을 과하게 느낀 것일까?

박천우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하지만 진지한 어조로 봐서는 장난치려는 것 같지는 않아 보였다.

<커험. 그럴 리가 있습니까?>

<그럴 리가 없죠. 그런데 몇 회차 로또 번호가 잘 외워지나요?>

<로또 번호를 안 외워 봐서 답하기 어렵군요. 그러나 대안은 생각한 것이 있습니다.>

<대안 말입니까?>

<박천우 부장님께서 만약 회귀한다면, 비트코인에 투자하세요. 힘들게 로또 번호 외울 필요 없습니다.>

<그… 그렇군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그러면 이만 물러가겠습니다.>

‘회귀는 아니고, 평행우주를 넘어갔다.’라는 대답을 할 수는 없다. 그렇다고 황당한 질문 했다며, 무안 줄 수도 없는 일.

창수는 암호 화폐를 언급하며 주의를 환기했고, 정신이 든 박천우는 황급히 전화를 끊었다.

* * *

“껄껄껄. 거기서 비트코인이 왜 나와?”

창수가 박천우에게 전화를 건 곳은 태국 방센비치에 있는 김근홍의 저택 트레이딩 룸이었다.

곁에서 창수의 통화를 듣고 있던 김근홍은 암호 화폐가 불쑥 튀어나오자 어처구니없다는 듯 웃음을 터트렸다.

“설명이 쉬우니까요.”

“로또 대용품이라……. 중앙은행의 전횡을 견제하려고 만들 걸 요상하게 써먹는군. 범죄에 악용하는 것보다는 낫다만.”

“그러고 보니 선배님이 비트코인 만든 원조 멤버였죠?”

“직접 만든 건 아니고, 초기에 논의가 있을 때부터 지켜보면서, 후원을 좀 한 거지.”

“후원이요?”

“사실 비트코인을 만든 팀은 서로 얼굴도 잘 몰랐어. 인터넷을 매개로 생각을 공유한 거지. 그래도 먹고 살아야 하니까 자금이 필요해서, 나 같은 구경꾼들이 비트코인을 후원금 명목으로 사 준 거야.”

“초기에 비트코인을 얼마나 구매했나요?”

“많지는 않아. 1만 달러 정도 될 거야?”

“와! 떼돈 벌었겠네요!”

“2,000만 달러 정도 벌었어. 그리고 깨달을 게 있지. 선의 씨앗을 심으면 선의 열매가 열린다는 거 말이야.”

김근홍은 2008년 세계 금융 위기 이후, 제 역할을 못하는 중앙은행을 비판하는 과정에서 만들어진 비트코인을 초반에 구매한 행운아(?) 중의 한 명이다.

돈 벌려는 투자가 아니라, 곤궁한 개발자들에게 후원하는 목적으로 구매한 것이지만, 결과적으로 2,000배에 달하는 수익을 올렸다.

그리고 대박 성공은 김근홍에게 깊은 감명을 줬다. 창수가 도움을 청할 때, 좌고우면하지 않고 도와준 것도, 연장선상의 일이다.

“클립토유니버스를 세우는 것이 그 영향인가요?”

“맞아. 클버스는 리틀 안다만의 기축통화고, 오백세건강의 결제통화로 사용될 거야. 세력을 넓혀 가면, 주기적으로 발생하는 세계 금융 위기를 막을 수 있을 거고.”

김근홍은 블록체인을 기반으로 디지털 화폐를 만들고 있다. 흔한 암호 화폐의 하나라고 여길 수 있으나,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그건 기초 자산이 0인 다른 암호화폐와 다르게, 무려 1조 달러를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 김근홍과 창수가 각각 5,000억 달러씩 투자했다.

김근홍은 클버스(클립토유니버스)라 명명한 디지털 화폐를 암브로시아와 버닝스톤 결제 통화 그리고 이번에 일본에서 인수한 65개 기업의 결제통화로 사용할 예정이다.

클버스의 장점은 추가 발행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현재 기축통화로 사용되는 달러는 지난 10년간 통화량이 150% 증가했다. 반면 같은 기간 미국 GDP 증가율은 50%에 그친다. 필연적으로 물가가 상승하고, 국제 금융시장을 출렁이게 만들 터.

반면, 클버스는 매년 추가로 발행하지 않는다. 5년마다 세계 GDP 상승률과 물가 상승률을 평가한 뒤, 추가 발행 또는 회수를 단행해, 일정한 가격이 유지되도록 설계돼 있다.

김근홍은 클버스로 1929년 대공황,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그리고 2008년 세계 금융 위기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지 않도록 사전에 막으려 한다.

“클립토유니버스를 페트로 달러처럼 만드는 건 쉽지 않은 일입니다.”

“당연히 쉽지 않지. 하지만 암브로시아를 바탕으로 농업-식량 분야를 장악하고, 버닝스톤으로 에너지 분야를 장악하면, 충분히 할 수 있어.”

“곡물 회사를 인수하는 것도 클립토유니버스를 위한 거군요.”

“반반이야. 왜곡된 곡물 유통시장을 바로잡는 것도 있고, 클버스의 생태계를 넓히는 의미도 있어.”

페트로 달러는 석유 대금을 달러로 결제하게 만들어, 미국이 기축통화 패권을 장악한 시스템을 말한다.

김근홍은 에너지 분야뿐만 아니라, 농업 분야에도 지배권을 강화해, 클버스를 국제 기축통화로 만들 요량이다.

“알겠습니다. 선배님의 계획대로 밀고 가세요. 저는 당분간 잠행해야 할 것 같습니다.”

“언제쯤 돌아올 거야?”

“12월이나 돼야 할 겁니다.”

“그때가 되면, 많은 것이 달라져 있을 거다.”

“기대하겠습니다. 그리고 제가 여기서 계속 머무는 것으로 해 주십시오.”

“왜? 한국으로 귀국 안 하는 거야?”

“당분간 안 갈 겁니다. 이번에 일본에서 인수한 기업들 구조 조정 하면서 언론의 타깃이 돼, 여간 성가신 게 아닙니다.”

“하하하. 친일파하고 골수 우익 놈들 모두 쳐 내고, 그 자리에 부라쿠민 대거 기용하니, 친일 언론 놈들이 게거품을 물긴 할 거야.”

창수와 김근홍은 인수 대상 일본 71개 기업 중 91.5%에 달하는 65개 기업을 쓸어 담았다. 예상 57개보다 8개 많은 수자.

그리고 대대적인 구조 조정을 실시하고 있다. 지위 고하를 막론하고 일본 우익과 손잡은 인사를 모두 제거하고, 한국인과 재일 동포 중에서 친일파를 숙청했다.

그리고 그 빈자리에 반일 성향이 강한 인물들을 대거 등용했다. 상당수 한국인이 약진했지만, 가장 큰 수혜를 본 대상은 일본에서 불가촉천민 대우 받는 부라쿠민.

이 사실이 알려지자, 현재 일본은 발칵 뒤집힌 상태다. 또한, 아직도 친일 성향을 버리지 못하는 한국 언론이 창수와 오백세건강에 불만을 표시하고 있다.

창수는 영양가 없는 충돌을 피하기 위해, 당분간 한국으로 돌아가지 않을 계획이다. 공식적으로는 말이다.

“그러면 부탁드립니다.”

“걱정하지만, 내가 알아서 처리할게.”

김근홍이 있어 든든하다.

창수는 숨 가쁘게 이어 온 활동을 정리하고, 평행우주 너머 세상으로 갈 준비를 시작했다.

* * *

2023년 7월 28일, 창수는 용모와 신분을 바꾸고 한국에 조용히 돌아왔다. 그리고 평행우주 너머 조선으로 이동해, 그동안 밀렸던 일들을 처리했다.

“주군! 오셨습니까!?”

8월 7일, 조선을 떠나 금나라 선양에 도착한 창수를 츠네가 반갑게 맞이했다.

“츠네, 잘 있었어? 회사에 별일은 없고?”

“저는 잘 지냈습니다. 그리고 5개월 동안 회사에 큰 성과가 있었습니다.”

“그래? 뭔지 얘기해 봐.”

츠네는 진중한 성격으로 허풍을 좋아하지 않는다. 빼어난 성취를 거둬도, 덤덤하게 보고하는 것이 일상이다.

그런데 ‘큰 성과’라고 말한다. 이건 회사에 괄목할 만한 성공이 있었다는 걸 나타낸다.

궁금해진 창수는 서둘러 그 내용을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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