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4화 43장. 갑질의 미학
7.
이상수가 아는 박천우는 야심만만하고, 웬만한 어려움에 굴복하지 않는 인물이다. 때로는 돌파구를 찾기 위해 교활한 짓도 서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 박천우가 모든 걸 포기한 듯한 자세를 보이고 있다. 대학 입학 이후 30년간 꾸준히 봐 왔지만, 이렇게 위축된 모습을 본 적이 없다.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라……. 딱 내 처지군.”
“엉? 무슨 일이야? 너 교통사고라도 저질렀냐?”
“교통사고라면 다행이지, 건들지 말아야 할 괴물에게 찍히게 됐어.”
“괴물? 누구를 말하는 거야? 자세히 말해 봐.”
“오백세건강 김창수 대표 알지?”
“한국 최고 갑부라는 사람 말하는 거야?”
“아마 세계 최고 거부일 거야. 그 사람이 작년 초에 로켓택배에 입사하려고 면접을 본 일이 있어.”
“면접? 그런 부자가 입사 면접을 봐? 재벌 3세가 경영 수업 받으려고 한 거야?”
작은 점포를 운영하는 평범한 시민 이상수는 창수가 면접을 봤다는 걸 의아하게 생각했다.
한국에서 창수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는 사람은 많지 않다. 언론에 노출이 안 됐고, 대외 활동이 적기 때문이다.
창수는 일 년의 절반을 해외에서 활동한다. 그리고 한국에 귀국해도 대부분 시간을 평행우주 너머 세상에서 보낸다.
그나마 경제 관련 방송과 너튜브 영상에서 오백세건강의 사업을 설명하면서, 창수를 언급했기에 이름이 알려진 거다.
“아니. 김창수 대표는 완전히 흙수저야. 본래 태국에서 여행사를 운영했는데, 코로나 사태가 터지면서 파산하고 한국에 귀국한 뒤에 우리 회사에 입사 지원했던 거야.”
“그러면 2년도 안 되는 시간에 빈털터리에서 세계적인 갑부가 된 거네. 네 말대로 정말 괴물이구나. 그런데 어쩌다가 괴물에게 찍히게 된 거야? 혹시……. 네가 면접관이었냐?”
“그래……. 저주받은 운명인 거지.”
“헐…….”
박천우는 친구에게 자신이 면접에 참여한 이유를 시작으로, 면접 과정 전반과 창수를 탈락시키는 과정을 자세히 설명했다.
그 말을 듣고 있던 이상수의 얼굴이 점점 심각해졌다.
“김창수 대표가 뒤끝이 있다고 오백세건강에서 소문이 자자해. 앞으로 어떻게 될지 걱정이야.”
“과민 반응이야. 설마, 돈 벌기 바쁜 대부호가 다른 회사 일개 부장을 상대로 쫓아다니면서 보복하겠냐?”
“나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오백세건강이 하드뱅크를 낙찰받으면서 얘기가 달라진 거야.”
“하드뱅크!? 거기서 로켓택배 주식 가지고 있지 않아!?”
“맞아. 무려 35%나 가지고 있는 최대 주주야.”
“맙소사! 제대로 걸렸구나!”
로켓택배는 공식적으로 하드뱅크의 자회사가 아니다. 또한, 의결권이 10% 수준에 머물러 회사 경영에 직접 개입해 좌지우지하기 어렵다.
그러나 1/3이 넘는 지분을 가졌다는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 오백세건강이 작정하고 흔들기에 나서면, 회사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수 있다.
오백세건강이 로켓택배 경영진에게 박천우의 경질을 요구하면, 거절하기 어려울 거다.
“회사에서 잘리면, 이 나이에 재취업하기 힘들 것 같아 고민이야.”
“어떻게 해서든지 회사에서 버텨. 너 노동법 잘 알잖아?”
“내가 홀몸이면 악착같이 버틸 거야. 하지만 가족들이 해코지당할 걸 생각하니, 엄두가 안 나.”
“설마? 법치국가에서 그런 일이 벌어질라고?”
“멀리 있는 법보다 가까이 있는 주먹이 무서운 거야. 그리고 돈은 법과 주먹을 둘 다 움직일 수 있는 거고.”
도둑이 제 발 저린다. 창수가 박천우에게 보복한다고 위협한 적이 없고, 보복할 생각이 있는지도 알 수 없다. 그런데도 박천우는 가족까지 걱정하고 있다.
이건 재벌 회장급 거물을 대하는 박천우의 자세가 어떤 것인지 보여 주는 것이리라.
“그러면 어떻게 할 거야? 이민 갈 거야?”
“이민은 절대로 못 가. 외국에서 김창수 대표의 힘이 훨씬 더 강해. 한국에 남아서 창업이라도 하려고 너를 찾아온 거야. 자영업 경험 좀 들어 보려고.”
“아서라. 창업이 쉬운 줄 아냐? 5년 안에 90%가 망하는 게 자영업이야.”
“쉽지 않다는 걸 아니까, 대비하려는 거지.”
“너처럼 남의 눈치 안 보는 사람이 창업하면, 가진 재산만 날려 먹고 끝나. 30년 친구로서 충고하는데, 절대로 창업하지 마. 알거지 되는 거 금방이니까.”
“무슨 소리야? 내가 눈치 하나는 정말 빠르다는 것 모르냐?”
“직장 상사에게는 눈치가 빠르겠지. 하지만 네가 인사 팀에서 근무하면서, 직급 낮은 직원들 심기 살핀 적 있어?”
“그게 무슨 상관인데?”
“자영업 하려면 손님뿐만 아니라 직원과 거래처도 세심하게 관리를 해야 해. 네가 점포 주인이니, 토 달지 말라는 방식으로 운영하면, 몇 년을 넘기기 어려워. 그리고 모아 놓은 돈이 바닥나고, 빚까지 진 현실을 보게 될 거야.”
“크흠…….”
자영업으로 성공하는 것은 쉽지 않다. 더구나 대기업에서 부장이나 이사직을 지낸 뒤 퇴직한 사람이라면, 성공 확률이 더 떨어진다.
힘 있는 자리에 있다가 퇴사하면, 체면과 위신 때문에 3D 일을 하지 못한다. 돌파구로 찾는 것이 ‘사장님’ 소리 들을 수 있는 자영업.
하지만 자영업에 합당한 기술이 없는 사람이 대부분이고, 창업을 준비하는 시간도 턱없이 부족하다. 특히 문제가 되는 건, 아직도 자신이 힘 있는 자리에 있다고 착각하는 것.
박천우를 오랜 기간 지켜보고, 박천우의 현재 심리 상태를 파악한 이상수는 직설적으로 창업이 패가망신의 지름길이라고 말했다.
“차라리 김창수 대표에게 사과하는 게 어때?”
“사과? 솔직히 말해 내가 면접에서 조금 과했다는 건 인정해. 하지만 압박 면접에서 구직자가 로또를 말하는 것이 제정신이냐? 잘못한 건 김창수 대표야.”
“김창수 대표의 참신한 답변을 구태의연한 자세로 받아들였다는 생각은 안 하냐?”
“그건 무슨 의미지?”
“면접관이 압박 질문할 때, 면접자가 알아서 기는 것이 온당한 거냐? 면접자도 압박에 맞받아치는 대답을 할 권리가 있는 거다. 면접관은 회사를 소유한 사람이 아니라 월급 받는 고용인이야. 면접자보다 우월한 존재가 아니라고. 너는 그걸 착각한 거야.”
“마… 말도 안 되는…….”
“지금 내 말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너는 갑질이 몸에 밴 거야. 그런 자세로 창업하면, 90%가 아니라 100% 망해.”
“…….”
월수입 100만 원 이하를 버는 자영업자의 비율이 44.7%에 달한다. 300만 원 이상 버는 자영업자는 고작 17.9%.
이상수는 월 평균 600만 원을 버는 제법 성공한 자영업자다. 그의 눈에 30년 지기 친구의 문제점이 들어왔다. 쓴소리를 안 해 주면 친구로서 실격이리라.
박천우가 울컥한 마음에 반발하려 했으나, 달리 대꾸할 말이 없었다. 그저 두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길 뿐.
* * *
“박 부장, 무슨 일로 나를 보자고 한 거죠?”
“김창수 대표님께 사과하고 싶은데, 연락할 수 없습니다. 도와주십시오, 이사님.”
박천우는 이상수의 조언을 받아들여 창수에게 사과하려 했다. 하지만 창수에게 직접 연락할 방법이 마땅치 않았다.
오백세건강 한국 지사에 연락처를 문의했으나, 이상한 놈 취급 받았다. 장관급 고위 인사도 창수와 통화하기 어려운데, 손자 회사와 다를 바 없는 로켓택배 부장이 개인 연락처를 알려 달라는 것이 가당치 않기 때문이다.
박천우는 대안을 찾으려 애쓰다가, 창수와 친분이 있는 송수진 이사를 찾아 도움을 청했다.
“이제 와서 사과? 너무 늦은 것 아닌가요?”
“늦은 것 압니다. 그래도 사과드리고 싶습니다.”
“흠……. 이사회에서 박부장의 거취에 대해 논의가 있었다는 건 알고 온 건가요?”
“짐작은 하고 있었지만, 알고 온 건 아닙니다.”
“그러면 감이 좋은 건데. 이렇게 감이 좋은 사람이 왜 쓸데없는 짓을 했을까?”
“…….”
“내가 작년에 김창수 대표를 천거한 이유를 자세히 설명했었죠. 기억하나요?”
“기억합니다. 어떤 상황이 닥쳐도 최상의 대안을 마련할 수 있는 능력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잘 아네. 당신이 주도해서 김창수 대표를 내친 뒤에, 2년도 안 돼서 세계적인 대부호가 됐어. 만약, 김창수 대표를 고용했다면, 우리 로켓택배가 얼마나 성장했을까? 내가 그걸 생각하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 그런데 도와 달라고!? 장난해, 지금!?”
송수진이 창수를 처음 만난 건, 3박 4일 일정으로 가족과 함께 태국 여행을 갔을 때였다.
로켓택배 고객 센터를 총괄하면서 수많은 사람을 상대해 본 송수진은, 까다로운 일이 발생해도 돌파구를 찾는 여행사 대표의 탁월한 문제 해결 능력을 높이 평가하고, 영입 대상으로 눈여겨봤다.
그리고 코로나 사태가 터져 창수가 경제적으로 곤경에 처하자, 뛰어난 인재를 손쉽게 영입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며 입사를 권유했다.
그런데 박천우의 훼방으로 좌절된 것이다. 어찌 보면, 창수보다 더 박찬우에게 이를 가는 인물이 송수진이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습니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기회를 주십시오.”
“헛소리하지 말고! 내 눈앞에서 꺼져! 당신 얼굴만 봐도 욕지거리가 나오니까!”
로켓택배에서 송수진은 인품이 있는 중역으로 알려졌다. 웬만한 일로 화를 내거나 언성을 높이는 일이 없어, 남녀를 가리지 않고 평판이 좋다.
이런 송수진이 불같이 화를 내는 건, 박찬우에게 가진 악감정이 어느 정도인지 나타내는 것이리라.
박찬우는 송수진에게 도움을 받기는커녕, 원수 취급 받으며 집무실에서 쫓겨나야 했다.
* * *
7월 23일 일요일 밤 10시, 박천우는 집 인근 편의점 앞에 놓인 테이블에서 홀로 소주잔을 기울이고 있었다.
오늘 대서를 맞이해, 낮 최고 기온이 39도를 기록하고, 지금도 30도에 육박한 더운 날씨지만, 박천우의 가슴은 얼음처럼 차가웠다. 내일 오전 9시, 인사이동이 있다는 문자를 받았기에.
인사부장인 자신과 사전에 상의 없이 인사이동이 있다는 건, 박천우의 신상에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질 거라는 걸 의미한다.
“그래도 해고는 면한 건가?”
로켓택배는 문자로 해고를 통지하지 않는다. 박천우가 예외일 수 있으나, 지금까지 관례로 보면, 보직을 바꾸는 것일 가능성이 크다.
약간은 안심이다. 당장 잘리는 건 아니니까.
“그래도 잘 버텨야 6개월일 거야. 12월에 완전히 자리를 뺄 수 있어.”
그렇다고 안심할 수 있는 건 아니다. 입사 후 줄곧 인사 팀에서만 근무한 박천우를 타 부서로 이동시키는 건, 알아서 나가도록 정리할 시간을 주는 것일 터.
정기 인사가 단행되는 12월이 되면, 임시로 만들어 준 자리도 비우고 퇴사해야 할 거다.
일종의 인과응보이리라. 박찬우 자신이 여러 사람에게 했던 짓거리를 그대로 돌려받게 된 것이다.
- 슥!
- 벌컥!
- 꼬드득!
박천우는 씁쓸하게 웃으며 소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생라면을 씹는 소리가 생경하다.
아직 돈에 여유가 있으나, 퇴사가 눈앞에 다가오니, 술안줏값도 아껴야 한다는 생각에 생라면을 부숴서 안주로 삼고 있다.
- 띠리링!
그때 스마트폰에서 울리는 전화벨 소리.
<여보세요?>
<박천우 부장님, 오백세건강 김창수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