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3화 43장. 갑질의 미학
5.
스피어펀드가 4위로 밀렸다는 발표는 듣보잡 엑세스캐피탈이 5위에 랭크 됐다는 발표보다 훨씬 큰 소란을 만들었다.
입찰장 안에 있던 사람 대부분이 스피어펀드가 세계 금융계의 고인물 빅벤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낙찰이 유력하던 빅벤이 3위 안에도 들지 못했다는 건 예상하지 못한 이변이다. 그리고 동시에 고인물들이 패배했다는 걸 의미한다.
이제 관심은 ‘오백세건강과 용상은행 중 누가 1위에 올라 하드뱅크를 손안에 넣는가?’였다.
“3위. 총점 290, 용상은행.”
- 뭐가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용상은행도 떨어졌어!?
- 와! 300점 만점에 290점이 3위야!?
- 잠깐만! 어반뱅크가 살아남았어!
- 헉! 이거 노림수인가!?
점입가경. 갈수록 예측 불허의 결과가 나오고 있다. 어반뱅크가 3위일 거라 생각했으나, 중국 정부를 대변하는 용상은행의 이름이 3위로 호명된 것이다.
일반적으로 300점 만점이면, 280점대 중반에서 낙찰자가 나온다. 290점이면 안정권이다. 그런데도 용상은행은 3위에 머물렀다.
이건 용상은행이 준비를 소홀히 한 것이 아니라, 오백세건강과 어반뱅크가 상식을 뛰어넘는 높은 점수를 받은 거다.
오백세건강과 어반뱅크가 어떻게 정보를 모았기에, 290점을 넘은 것일까?
자연스럽게 의문이 생길 수밖에 없다.
그리고 간과할 수 없는 사실이 있다. 어반뱅크와 빅벤이 밀접한 관계에 있다는 점.
고인물이 탈락한 것이 아니라 위장 전술을 사용한 것일 수 있다.
“이제 단 2개 투자 그룹만 남았습니다. 사전에 고지한 규칙에 따라, 1위 먼저 발표하겠습니다. 오백세건강 291점, 1위. 12개 투자 그룹 중 최고 성적으로, 하드뱅크를 인수할 권리가 주어집니다. 다만, 1개월 안에 인수 절차가 마무리되지 않는다면, 위약금과 함께 2위 어반뱅크에게 권리가 이전됩니다. 이 점 유의하시기 바랍니다.”
- 엉? 1위가 291점이야? 그러면 2위는 몇 점이지?
- 설마! 오백세건강과 어반뱅크가 동점인가?
- 이거 클레임 날 수도 있겠네.
오백세건강이 1위로 하드뱅크를 인수하게 됐다는 것은 놀랍지 않다. 입찰을 시작하기 전부터 유력한 낙찰 후보였으니까.
하지만 놀라운 건 3위 용상은행과 1위 오백세건강의 점수 차이가 1점이라는 것. 만약, 어반뱅크의 점수가 오백세건강과 같은 291점이라면, 한바탕 소동이 일어날 거다.
동점인 상태에서 오백세건강이 1위인 이유가 무엇인지 따져 물을 것이 분명하니까.
“어반뱅크는 290점으로 2위입니다.”
“우리 용상은행과 동점인데 어째서 어반뱅크가 2위인 거요?”
어반뱅크의 점수가 발표되자, 용상은행에서 즉각 반발했다. 가능성은 높지 않지만, 오백세건강이 하드뱅크 인수에 실패했을 때, 2위와 3위가 가지는 권리의 차이가 크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대로 맥없이 3위로 물러나면, 용상은행이 중국 정부로부터 문책받을 수 있다. 어떻게 해서든 꼬투리를 잡아 변명거리를 만들어야 한다.
“동점이 나오면, 내부 규칙에 따라 순위가 결정됩니다. 어반뱅크가 가중치가 높기에 2위가 됐습니다.”
“너무 두루뭉술한 설명입니다. 납득할 만한 근거가 있어야 합니다.”
“내부 규칙은 일본 정부와 중국 정부 그리고 주관사의 합으로 만들어진 겁니다. 그리고 12개 투자 그룹의 입찰 내용과 평가 결과는 하드뱅크 홈페이지를 통해 투명하게 공개될 예정입니다. 이의가 있다면, 그 내용을 보고 하시기 바랍니다.”
로건 레드실드의 반응이 매우 까칠하다. 마치 네가 벌인 일을 왜 나에게 묻는가? 하고 따지는 듯하다. 그도 그럴 것이 중국 정부의 개입으로 일이 틀어졌기 때문이다.
1~2점 차이 미세한 차이라면, 로건 레드실드의 재량으로 입찰 승자를 바꿀 여지가 있었다. 그러나 중국 정부가 투명성과 합리성을 강조하는 바람에 개입할 여지가 없어졌다.
“홈페이지에 평가 결과가 언제 올라옵니까?”
“내일 오전 9시에 올라갑니다.”
“너무 늦는 것 아닙니까?”
“입력 과정과 검수를 생각하면, 빠른 겁니다. 그리고 이 절차도 합의에 의해서 만들어졌다는 걸 알려 드립니다.”
용상은행에서 집요하게 시비를 걸었으나, 로건 레드실드는 중국 정부를 거론하며, 가볍게 받아넘겼다. 따지고 싶으면 중국 정부에 직접 하라는 의미.
- 척!
- 저벅! 저벅!
실랑이를 잠시 지켜보던 오백세건강 관계자들이 더 이상 머물 이유가 없다고 판단한 듯 입찰장을 빠져나갔다.
* * *
하드뱅크 본사에서 나온 입찰 팀은 오백세건강 일본 지사 건물로 이동했다.
입찰에서 승리했으나, 파티를 벌일 여유가 없다. 인수 절차 마무리까지 처리해야 할 일이 많기에, 긴장의 끈을 늦추지 않고 후속 조치에 돌입했다.
하지만 입찰 서류를 제출했던 60대 남자는 후속 작업에 참여하지 않고, 따로 움직였다.
[선배님, 하드뱅크 입찰에서 이겼습니다.]
60대 남자의 정체는 창수였다. 일본 지사 건물 내에서 가장 보안이 강력한 기밀실로 이동한 뒤, 태국에 있는 김근홍에게 메시지를 보냈다.
[소식 들었다. 수고했다, 창수야. 그 어려운 일을 해내다니, 정말 대단하다는 말밖에 나오지 않는구나.]
[저 혼자 한 일은 아닙니다. 선배님이 주신 정보가 큰 역할을 했고, 입찰 팀 모두가 제 역할을 다했기에 이긴 겁니다.]
[하하하. 그래, 우리 모두의 승리지. 그런데 막판에 고인물 놈들의 전략을 어떻게 간파한 거야? 어반뱅크가 주포로 나설지 생각도 못 했어.]
[저도 막판까지 몰랐습니다. 그리고 빅벤이 마지막에 전략을 바꾼 겁니다. 295점이 나오는 입찰 서류를 제치고, 281점으로 방향을 튼 거죠.]
창수는 투시 마법을 사용해, 경쟁자들의 입찰 서류 내용을 파악하고 있었다. 빅벤은 애초 어반뱅크가 290점으로 바람을 잡고, 스피어펀드가 295점으로 낙찰받는 작전을 계획했었다. 그러다가 막판 30초에 생각을 바꾼 거다.
창수도 빅벤의 변심에 맞춰 296점이 나오는 입찰 서류를 제출하려던 계획을 버리고, 291점 서류를 제출했다.
스피어펀드가 지정석에서 서류를 교체한 반면, 마법자루를 가지고 있는 창수는 응찰 바로 직전에 서류를 교체했기에 가능한 일.
‘손은 눈보다 빠르다’라는 영화 대사를 입찰장에서 실현한 것이다.
이건 창수의 능력이지만, 복잡한 배점 방식을 알아낸 것은 김근홍의 공이고, 10개에 달하는 입찰 서류를 단시간에 준비한 것은 입찰 팀의 공이다.
[빅벤이 막판에 돈 아끼려고 머릴 굴리다가 고꾸라진 거구만.]
[그렇죠. 덕분에 우리도 450억 달러를 절약하게 됐습니다.]
하드뱅크 입찰의 특징은 점수가 입찰 금액에 정비례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291점을 만드는 데 필요한 금액이 350억 달러인데, 296점을 만들려면, 800억 달러가 필요하다.
이건 로건 레드실드가 돈으로 후려치는 용상은행의 폭주를 막기 위해 만든 안전장치.
창수는 막판에 빅벤이 계획을 변경한 덕분에 불필요한 지출을 줄일 수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빅벤의 작전을 간파한 거야?]
[당장은 밝히기 곤란합니다. 당분간은 모른 척해 주십시오.]
[알았다, 알았어.]
아는 것이 적을수록 김근홍이 안전하다. 김근홍도 어렴풋이 눈치채고 있겠지만, 확실히 아는 것과 짐작은 다르다.
창수는 서로를 위해 자신이 가진 능력을 최대한 숨기려 했다. 언젠가 이야기할 때가 올지도 모르지만.
6.
<도대체 어떻게 된 거요!? 하드뱅크를 놓치다니!?>
<소리 지르지 마시오.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으니까.>
입찰에 실패하자 베르너 레드실드가 곧바로 이언 매코이에게 전화를 걸어 심하게 다그쳤다. 알짜 기업 하드뱅크를 손에 넣을 기회를 어이없이 날려 버렸으니, 당연한 일.
하지만 이언 메코이는 자신의 잘못을 순순히 인정하지 않았다.
<뭐가 어쩔 수 없다는 거요!? 애초 계획한 대로 입찰 서류를 제출했으면, 우리가 하드뱅크를 인수했을 거요!>
<그랬겠지. 하지만 최대 가치 1,000억 달러에 불과한 기업을 750억 달러나 주고 샀을 거요.>
<하드뱅크는 3,500억 달러에 달하는 투자자산을 가지고 있소!>
<그거 다 허수요. 중국 정부 손아귀에서 놀아나는 유리바바를 제외하면, 별거 없는 거요. 안 그렇소?>
<그… 그거야…….>
입찰에 실패했지만, 타당한 이유가 있다. 이언 매코이는 하드뱅크는 750억 달러 가치가 없는 기업이라고 평가했다.
베르너 레드실드가 하드뱅크의 자산을 언급하며 반론을 폈으나, 공산당 리스트가 존재한다는 걸 부정할 수 없었다.
<게다가 750억 달러로 일본 기업을 계속해서 인수하면, 1조 5,000억 달러 가치를 확보할 수 있소. 어떤 것이 남는 장사요?>
<그건 일본에 쓸 만한 기업이 남아 있을 때 통하는 말이오. 알짜 기업을 오백세건강 놈들이 쓸어 가 버렸는데, 당신 말이 먹힐 것 같소?>
빅벤과 레드실드는 정상 가격의 1/20을 치르고 일본 기업을 인수했다. 하드뱅크를 750억 달러에 인수하는 건 비효율적인 투자가 분명하다.
그러나 이익이 될 만한 기업이 고갈된 지금, 750억 달러로 이전과 같은 효과를 내는 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일이다.
레드실드 가주는 빅벤의 수장이 실패를 인정하지 않기 위해 궤변을 펼친다고 생각했다.
<그렇지가 않소. 아직 일본에 쓸 만한 기업이 많이 남아 있소.>
<무엇을 말하는 것이오. 뜬구름 잡는 소리 하지 말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시오.>
<이제 일본은 선진국이 아니라 개도국 수준으로 국격이 추락할 거요. 국민소득이 떨어지고, 서민들이 만성적인 고물가에 시달릴 거요.>
<그거야, 당연한 것 아니오?>
<우리가 유통시장과 사금융시장을 장악하면, 두고두고 이익을 뽑아 먹을 수 있소. 다른 국가라면 국민이 들고일어나 반발하겠지만, 강자에게 약한 일본 국민성을 생각하면, 꿀통도 이런 꿀통이 없는 거요.>
<흠……. 듣고 보니 그럴듯하구려. 하지만 야쿠자가 걸림돌이 되지 않겠소? 조직원만 3만 명이오.>
<그깟 오합지졸 3만 명, 우리 힘으로 반년이면 모두 제거할 수 있소. 당신네 레드실드가 힘을 보탠다면 3달이면, 정리할 수 있을 거요.>
<하긴, 동네 양아치가 우리 앞길을 막을 수 없지. 좋소. 확실하게 일본을 장악합시다.>
빅벤과 레드실드는 무능하지 않다. 상대가 창수이기에 번번이 당하는 것일 뿐, 다른 세력과 비교해 압도적인 실력을 갖추고 있다.
이언 매코이의 주장대로 일본 서민을 쥐어짜려 작정하면, 일본에서 고인물들을 막을 세력이 없다.
이익을 침해당한 야쿠자가 반발할 가능성이 크지만, 무력에서 어른과 초등학생 정도의 격차가 있다.
베르너 레드실드는 하드뱅크 인수를 능가하는 돈벌이 기회를 담은 이언 매코이의 제안을 전격적으로 받아들였다.
* * *
“야, 박천우. 물류업계를 호령하는 대기업 인사부장이 왜 이리 힘이 없어?”
“그렇게 보이냐?”
“당연하지. 어째 도살장에 끌려가는 소처럼 풀이 죽었냐? 너 이런 놈 아니잖아?”
한국 시간 오후 7시, 하드뱅크 공개 입찰이 끝난 뒤 5시간 후, 로켓택배 인사부장 박천우가 신촌에서 통닭집을 운영하는 대학 동기 이상수를 찾았다.
이상수는 오랜만에 찾아온 친구가 반가우면서도, 평소와 다르게 의기소침한 모습해 의아하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다.